뼈아픈 소리
양동식 지음 | 시와
뼈아픈 소리양동식 지음시와 / 2013년 12월 / 100쪽 / 10,000원
뼈아픈 소리
시골에 산다지만농부가 아닌데땅을 알겠는가하늘을 알겠는가
한양 시인들에게시詩를 보이면 고개만 끄덕끄덕소주나 마시다가
아내를 향하여ㅡ김치 맛이 일품이라잘 먹고 간다는그런 소리뿐이다
천석고황
강물을 보고 돌아오면귓속으로 강물이 흐르고
눈 내리는 밤이면가슴으로 눈이 쌓이고
풍경風磬
스님은 왜고기를 안 잡수냐고아희가 여쭈니
붕어를 맹글어추녀에다 매달아서마음 놓고 바라본다는지허指墟 스님ㅡ
그 말씀을 나는 다시
하늘에다 걸어 두고구름 헤치는 지느러미물끄러미 쳐다본다
목어木魚
누가 그리 하였는지마구 잘린 나뭇가지
집으로 데불고 온 뒤에도아직 살아 물이 흐른다
마음을 가다듬어물고기 한 마리 만들었다
눈, 입 그려 넣고비늘 새겼더니
손가락 마디에서비린내가 난다
봄날
우리 사는 세상에이런 날도 있구나
누가 훈풍을 보내는지아무도 모르지만
이 날을 위해 나는할 일이 없다
종이 비행기
또 한 해마지막 달력을 뜯어비행기를 접었다아이가 창문을 열고힘껏 던진다바람을 타고멀리 날아간다아이들은 손뼉을 쳤지만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시詩를 밴다
바람 타고 온민들레 씨앗 하나가내 몸에 떨어진다그것은 상처를 내며몸 깊이 뿌리 내린다나는 입덧을 시작한다때로는 아파하다가살포시 이름도 지어보다가달이 차면 이를 악물고몰래 시詩를 낳는다
시간
유리창에 빗방울이 흘러내린다그것은 시간의 흐름이다두 눈으로 지켜봐도시간은 흘러가 버린다
시계 바늘은 언제나제 자리로 돌아와서우리들을 속였을 뿐시간은 메아리도 없다
산사의 밤
달빛은 하염없이부서져 내리는데
눈은 하얗게섬돌을 덮고
등불은 고요히창호지를 물들이고
우리는 다만눈길 마주치던……
놓친 풍선
빨간 풍선이떠오른다 하염없이하늘로 날아간다
검은 점으로가물가물 사라지는……사라지는 게 아니다
하늘 어딘가에어린 가슴 속에떠돌고 있다
귀뚜라미의 고향
저 달귀뚜라미 고향인가
멀고 먼 가을 하늘
밤새도록다리 부비며
날아오를채비한다
바람 불면
바람 불면나무들이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뭇잎들을죄다 떨구어마당으로 불러낸다
돌담 모롱이로나를 데려다가나뭇잎과 섞어 놓는다
내일은 어디로 가나그런 이야기로우리는 바스락거린다
아내의 생일
내가 중매를 선우리 아버지의 큰 며느리
창호지로 밀실 꾸며댓잎 따다 꽃무늬 놓고한 아름 들국화 말려가을 향기 베고 누워삭풍에 기절하던 북향방北向房
밥 한 끼 겸상에 못 먹어 본우리는 자정에 만나닭이 울면 헤어지면서아이를 넷씩이나 낳았다
명주 올 같던 손가락풀 먹인 삼베로 터져어린것들 등짝 쓸기에 제격이라다이아 반지도 못 끼게 되었다
누가 나를 미리 알아저 딸을 키웠을 것인가돌멩이도 오래 마주대면한 몸 되는 줄 알 뿐
생일에나 나이대로붉은 장미 가슴에 안겨놀라는 모습사진을 찍어준다
어머니의 유품
장롱 깊숙이울음 참던낡은 손가방
안경 묵주 처방전 계약서치맛말 매듯 감싸 둔옥수수 알갱이만 한 금붙이
두고 간저승 짐한 방울 아침 이슬
구둣방 김씨
난로에다 장작 지피며마름질 하던구둣방 김씨
남자 구두 여자 구두마음대로 만들면서딸만 내리내리열이나 낳고막내둥이 이름 서운이라 짓고
어느 눈 내리던 날서운이가 손가락 불며도시락 들고 오던 날
손수 만든조가비 같은 구두난로에다 구워서운이 발에 신겨주고
점심이나 먹을까앞치마 털고 일어서는샛별 양화점 김씨두 발은 꿰맨 고무신이었다
장마
지붕에,나뭇잎에,수런대는 근심
가슴 적신작은 짐승은잠을 잃고
또 누가빗방울 끝없이 헤이는가?
눈 감고곰곰 재어보는밤의 길이
겨울 이야기
나는 알고 있었다속이 상할 때면어머니 숨으시던 곳아버지와 장짓문 하나 사이의껌껌한 부엌을
뒤틀린 판자 틈으로스며든 저녁 햇살아롱거리는 눈물 닦으며찾지도 마라아무도 몰래 혼자 갈 테니그리 알라고종잇장 같은 가슴 찢던그 곳을 알고 있었다
그런 날은일찍이도 저물고밤 이슥하도록생쥐와 함께천정 속을 맴돌았다
나무
종이에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무도 그만큼 자라는지 궁금하다 종이에다 글을 쓰다 잘못 해서 버려도 나무가 그만큼 더 빨리 자랄는지 걱정이 된다 내가 종이에다 쓰는 쓰잘데 없는 글 때문에 나무들이 자꾸 스러지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