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동안의 침묵
박정선 지음 | 푸른사상
백 년 동안의 침묵
박정선 지음
푸른사상 / 2011년 9월 / 448쪽 / 15,000원
명례방(명동) 아이들
도성 정중앙 남쪽에 불끈 솟아오른 종현산 마루를 따라 명례방이 펼쳐져 있다. 종현산 마루 아래 다시 작은 산 종현고개(명동성당 자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6천 평 저택 후원에 새봄이 깃들었다. 아침부터 대문이 활짝 열리고 종친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다. 이조판서 이유승 대감이 네 번째 아들을 얻어 첫돌(1868. 3. 17.)을 맞은 것이다. 화려한 돌 복을 차려입은 아이를 이유승 대감이 안고 경주 이씨 백사공파 종친 원로들과 함께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에 올라 백사(白沙) 이항복부터 차례대로 조상들 위패가 놓여 있는 제단 앞에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상 사람들이 삼한갑족(三韓甲族, 마한ㆍ진한ㆍ변한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명문거족)이라 부르는 자랑스러운 조상들이었다. 원로 중 가장 연장자가 ‘회영(會榮)’이란 아이 이름을 개봉하여 조상께 고하고 장차 백사 이항복 할아버지를 잇는 큰 인물로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이유승 대감은 모두 10남매를 두었는데 차례대로 건영, 석영, 서영(딸), 소영(딸), 철영, 순영(딸), 회영, 시영, 화영(딸), 호영 순이었다. 그해(1868) 가을, 바다 저편 일본에서는 천황즉위식을 거행하고 명치로 개원하여 세계의 열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계가 요동치고 있을 때 조선은 짙은 안개 속에 잠긴 채 평화롭고 안락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십 년(1874) 만에 드디어 친정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조선은 일본의 정한설에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해 윤달에 전국적으로 폭우가 내려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일대에 물난리가 나 7천 호가 유실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회영은 겨우 여덟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집 곳간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우리 집 양식을 풀어 먹이자는 말이더냐?”
“예, 아버님. 우리 가문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백성들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녹을 먹는 가문마다 곳간을 풀면 백성들이 모두 따라 할 것이니 그것이 방도가 될 것입니다.”이유승은 경이로운 눈으로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설사 스승이 그렇게 가르쳤다 하더라도 아이가 말뜻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천성이 의(義)에 밝고 앞장서서 무엇을 끌고 가려는 성향을 타고났음이 확실했다. 그런 성향은 저잣거리 아이들을 대하는 것에서도 나타났다. 회영은 종종 상동(남대문 일대)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물건을 팔고 가도록 만들곤 했다. 부모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영은 그와는 신분이 다른 아이들을 늘 가까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옆집인 동부승지 이용우 대감 집에 한 아이가 양자로 들어왔다. 촌티가 가득하면서도 기품이 엿보이는 아이를 보고 회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이름이 무엇이며 올해 몇 살이냐?”
“나는 이상설이고, 일곱 살이다.”
회영은 세 살 아래인 이상설이 마음에 쏙 들었고 그 후 이상설과 함께 더 열심히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회영은 어느 날 정동에서 시(施)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서양인 의사 스크랜튼과 열두 살 전덕기가 저자 사람들에게 습격당한 것을 구해주게 되었다. 부모를 잃은 전덕기는 스크랜튼을 도우며 시병원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회영과 이상설은 전덕기가 성경, 영어, 불어, 수학 등을 배우는 것을 보고 가슴이 설렜다.
좁은 길
솔바람 소리가 좋았다. 가을날, 회영과 이상설이 남산에 올랐다. 태양이 하루 일생을 마치고 산봉우리에서 마지막 빛살을 쏘고 있었다.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므로 두 사람은 딴 이름을 가졌다. 회영은 우당이라 지었고 이상설은 부재라고 지었다. 회영은 25세에, 이상설은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영의 동생 시영(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17세에 급제해 벌써 형조좌랑에 앉아 있었다. 회영은 처음부터 관계진출에 뜻을 두지 않았던 탓이었고 이상설은 죽은 양부의 3년 시묘살이를 한 탓이었다. 회영은 과감하게 관계진출을 접기로 결심했다. 위로 건영 철영 석영 세 분 형님들이 의정부 고위직에 있거나 역임했고, 동생 시영 또한 관계에 나갔으므로 삼한갑족 가문의 내력을 잇는 것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럼 형이 할 일이란 무엇이오?”
회영의 결단에 이상설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교육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힘이란 걸 일본이 구구절절 보여주지 않았소. 일본은 싫지만 왜 우리에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인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오.”“우당 형, 이 사람도 관계로 진출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신학문을 배우러 일본으로 가야겠소. 우당 형도 함께 일본으로 갑시다.”“부재는 남달리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치니 열 사람 몫을 배워 올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부재가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올 동안 상동청년회 동지들과 함께 민족자본을 만들겠소. 그리고 부재가 돌아오면 이 땅에 신학문을 전파할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오.”
스크랜튼은 상동 저잣거리 한복판에 상동교회를 세우고 교회 안에 공옥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가르쳤다. 신지식과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청년들이 상동교회로 몰려들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상동청년회는 민족자본을 만드는 문제를 놓고 난상 토론을 벌인 끝에 개성 일대에 있는 왕실 소유의 땅을 빌려 인삼을 재배하기로 결정했다. 회영이 인삼을 재배한다는 소식을 들은 경무청 고문 후쿠다 요시모토는 고위층 일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조선의 귀족 청년 중에도 이런 인물이 있다니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계책을 써서라도 그자의 인삼 재배 사업을 반드시 제지해야만 합니다.”인삼은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인삼이 성년이 되어갈 즈음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놀란 조정은 임오군란(1882) 때처럼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다. 일본도 자국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불러들였다. 일 년도 못 가 일본은 청나라 군대를 쓸어내 버리고 말았다. 청군을 쓸어버린 일본 군인들은 조선 땅을 마음껏 휘젓기 시작했다. 백주에 부녀자를 겁탈하고 살육을 자행했다. 그리고 궁에서는 민비가 일본 군인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문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조선 천지에 울분이 충천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상설은 유학을 마치고 성균관 관장으로 부임해 있었다. 상동청년회는 더 큰 조직으로 확장되어가고 있었고 인삼은 목표대로 6년을 꽉 채우고 11월 초닷새로 잡힌 수확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초하룻날 일꾼들이 달려와 울부짖었다.“인삼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인삼을 수확하여 학교를 세울 꿈에 부풀어 있던 회영은 통곡했다. 열흘 만에 경무청 고문 후쿠다 요시모토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경무청을 고발한 회영에게 경무청은 도리어 인삼재배가 무허가라며 엄포를 놓았다. 격분한 회영은 후쿠다 고문의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후쿠다에게 의자를 집어 던졌다. 회영은 곧 구금되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고종이 회영의 방면을 명하자 경무청도 회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쿠다가 이를 갈았다.“가소로운 애송이 녀석, 언젠가는 후쿠다의 이름으로 너를 응징하고야 말 것이다. 내가 못 하면 내 아들, 내 손자 대에 가서라도 기필코…….”
상동청년회
일본이 러시아를 치기 시작했다. 총칼을 착용한 일본군 2개 사단이 서울 장안을 행진했다. 상동청년회는 날마다 러시아가 이기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온 세계가 놀랍게도 일본군이 이틀 만에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파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러일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입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을 통제하는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체결(1905. 11. 17.)되고 말았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전국이 통곡소리로 뒤덮인 가운데 충신들의 자결이 줄을 이었고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이유승 대감은 결국 임종을 맞이했다.“너희 6형제는 어려서부터 화목하여 하나로 뭉쳤느니라. 앞으로는 나라를 위해 뭉쳐야 한다.”6형제의 어머니까지 곧 뒤를 따랐다.
충신들의 자결도 의병 활동도 일본을 저지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회영은 전덕기와 상동청년학원을 확장시켜 교육 사업에 매진하면서 장차 계획을 세워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스크랜튼이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자 전덕기가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전덕기가 담임목사로서 원장이 되면서 상동학원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회영은 학감을 맡고 교육자금을 조달했다. 상동학원의 신교육이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안 일 년이 가고 봄을 맞았다. 회영과 이상설은 다시 남산에 올랐다. “지금 통감부에서 학제 개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올가을부터 전국 학교의 학감을 일본인들에게 맡긴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국내에서 우리가 교육하는 일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해외에 있는 우리 한인자녀들을 교육하여 독립군으로 길러야 합니다.”“역시 부재다운 생각이오. 그럼 상동청년회 동지들과 함께 논의해봅시다.”
상동청년회 중심인물들이 교회에 모여 앉았다.
“우리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고 교통의 중심지인 만주 용정촌이 적격이오.”
“그럼 누가 용정촌으로 나가 학교를 설립할지 말씀해보시지요.”
“내가 갈 것이오.”
이상설은 선포하듯 말했다. 이어서 이동녕이 이상설과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이 모임의 이름을 운동방향에 걸맞게 새로운 이름으로 짓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의미로 ‘신민회’라고 정했다. 신민회의 첫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상설과 이동녕이 조국광복이라는 신민회의 목적을 안고 만주 용정촌으로 떠났다.
해가 바뀌고 을사늑약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려갔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억울한 사정을 해외 열강들에게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마침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1907)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밀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그들은 회의장에 발도 들이지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고 이준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로 일본이 궐석재판을 통해 이상설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이상설은 용정에 설립한 서전서숙(민족교육기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그곳을 새로운 독립기지로 삼기로 했다. 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상설을 찾아갔다. 회영을 만난 이상설은 결의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그동안 세계를 돌아다녀 보니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머지않아 온 세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소이다.”“미국이 일본을 제지하는 날이 온다면 우리로서는 천운이겠지요.”
“우당 형,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서둘러 해외에 광복군을 기를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군사기지를 세우자면 자금이 만만치 않으니 어찌합니까.”“내가 하리다. 우리 6형제 힘을 모두 합하면 못 할 것도 없소이다.”
이상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우리 신민회가 구체적인 조직을 갖추고 비밀 항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형은 속히 돌아가셔서 양기탁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십시오. 이 사람은 이곳에서 운동 방법을 찾겠소이다.”이상설과 의논하고 돌아온 회영은 신민회 결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도 회의에 참석했다. 단일 지도체제는 위험했기에, 도별로 나누어 총감을 두기로 했다. 황해 총감에 김구, 평남 총감에 안창호, 만주를 포함한 이북은 이동휘가 맡았다. 재무는 전덕기가 맡았고 회영은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다. 그리고 조직은 철저하게 비밀로 운영되도록 했다. 일제는 눈에 불을 켜고 의병들을 색출했다. 그때 느닷없이 한 애국자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했다는 소문이 조선 땅을 흔들었다. 곧이어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하늘을 진동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열두 대 삼두마차
“조선 사람은 일본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선언이었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저동 이유승 대감 집이 침묵에 잠겼다. 방 안엔 서열대로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등 6형제가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회영이 입을 열었다.“나라가 한일병합의 괴변을 당하여 반도 산하가 왜적에 속하고 말았는데 우리 형제들이 당당 명족으로서 왜적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하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요. 그러므로 우리 형제들은 생사를 막론하고 처자노유를 인솔하고 중국 땅으로 망명하여 나라를 구하는 것이 옳은가 하오이다. 바라건대 형제분들께서는 이와 같은 내 뜻에 따라주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6형제 모두 회영의 뜻에 적극 동참했다.
“우리 6형제는 오직 나라를 찾기 위해 나라를 버린 것이니 이제부터는 가문도 명예도 길거리의 돌멩이로 여기시고 예전 것을 생각하시면 아니 됩니다.”형제들에게 당부하는 회영의 눈이 붉어 있었다.
“나라가 없는데 가문이 무엇이며 명예란 무엇이란 말이오. 생각지 않을 테니 우당 아우님은 염려 마시오.”석영이 회영을 위로하며 형제들을 둘러봤다.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가을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고 들녘은 황금물결이 파도쳤다. 추석이 돌아오고 형제들은 후원 사당에 들어 햇곡식으로 부모님과 선조들에게 마지막 추석제사를 올렸다. 추석제사를 끝내자 형제들은 서둘러 재산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감시의 눈은 벽에도 있고 공기 중에도 있으므로 재산 정리는 은밀히 진행해야 했다. 값을 따질 수가 없어 땅은 헐값에 대충 팔아 넘겼다. 땅을 판 돈은 그때마다 금으로 바꾸어 나갔다. 재산을 정리하는 데 3개월이 걸렸고 6형제가 전답을 팔아 마련한 돈은 40만 원(약 600억 원)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에 3전이었다. 형제들이 한 가정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내 호영을 제외하고 모두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집안의 장자인 건영은 58세였고, 둘째 석영은 55세였다. 셋째 철영은 48세였으며, 다섯째 시영은 41세, 여섯째인 막내 호영은 36세였다. 모두 가족들과 함께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가고 나자 12월 30일이었다. 때마침 송구영신을 위한 종현성당(명동성당)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회영이 마지막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태어나 부모형제와 함께 살아온 집을 둘러보았다. 정들었던 집을 버리고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회영은 다음 날 오후에야 신의주 나루터 주막에서 기다리는 가족들과 합류했다. 새벽 3시에 잠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깨웠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 추위를 동반한 채 짐승처럼 덮쳤다. 썰매 10여 대에 60여 명의 가족들이 나누어 탔다. 말이 끄는 썰매는 날듯이 강을 질주하고 휘몰아치는 바람이 썰매를 집어삼킬 듯 흔들었다. 혹독한 첫 시련이었다. 두어 시간을 달린 끝에 무사히 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에서 하루를 지낸 뒤 다음 날 또다시 이른 새벽부터 출발을 서둘렀다. 어둠 속에서 열두 대 삼두마차가 전열을 가다듬고 일렬종대로 줄지어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열한 대는 중국인 마부들이 말고삐를 잡았다. 한 대는 회영이 직접 고삐를 잡고 앉았다. 중국 마부들이 먼저 허! 하고 출발 신호를 넣자 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마부들이 채찍으로 엉덩이를 후려치자 말들이 땅을 박차며 험난한 형극을 향해 만주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36마리 144개 말발굽소리가 기관총 소리처럼 황량한 만주 벌판을 비장하게 흔들었다. 어둠 속을 헤치는 말들은 적을 향해 돌진하는 통렬한 광복군이었다.
안동을 떠나 벌판을 횡단한 지 열흘 만에 중간지점으로 정해놓은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서 추가마을까지는 장장 6백 리나 되었다. 열두 대의 마차가 다시 이동을 시작했고 드디어 추가마을에서 행렬이 멈췄다. 원시의 산촌마을에 조선의 명문집단이 대거 들이닥친 것이었다. 모여든 원주민들이 입을 딱 벌린 채 의구심으로 가득 찬 눈을 굴렸다. 종종 조선의 이주민들이 주변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봤지만 모두 보따리 몇 개를 이고 진 것이 전부인 것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차에서 60여 명의 일행들이 내렸다. 실어온 짐도 놀라웠지만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내리자 놀라웠고, 모두 기품 있게 잘생긴 사람들이라 또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