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김원수, 박필령 지음 | 행복에너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김원수, 박필령 지음

행복에너지 / 2013년 11월 / 316쪽 / 15,000원





Chapter 1. 부부 그리고 가족 ‘당신은 나의 운명’



남편 이야기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 나에게는 보고 있어도 그립고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바로 아내 박 안젤라이다. 나는 지금도 그녀를 만난 것을 신의 축복인 동시에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1979년 늦은 가을, 군 복무 때였다. 아내는 사단사령부 ‘위관의 날’ 행사에 초대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키가 훤칠한 글래머였고 무척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는 만남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키워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6ㆍ25 30주년을 맞이하여 열리는 장교 부부 결혼 이벤트를 염두에 두고 나는 청혼하였고, 우리는 6개월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사실 나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진 친구들 사이에서 ‘연애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여자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꼭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었다. 내게는 나름대로의 결혼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미 넘치는 여성, 지혜로운 여성, 결혼 후 내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여성, 성당에 다니는 여성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여성을 이전에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만나게 된 아내는 내가 바라던 여성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고, 그 행복한 결혼생활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아내는 유방암 발병 전까지는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했고, 우리 부모님이 별세하실 때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모셨다. 현모양처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최선을 다해 살았다. 또한 자신을 자랑하는 대신 주님만을 자랑하는 신앙심 깊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헌신적으로 아내를 사랑할 것이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며 서로의 곁을 지키는 부부로서, 멋진 여생을 지내리라 다짐해본다.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 좋은 부부로!

우리 부부의 터닝 포인트: 부산에서 거주하던 1991년, 우리를 아끼시는 장시몬 대부님 내외분 추천으로 부부 일치를 위한 프로그램인 ME주말을 경험하였다. 그때부터 나와 아내는 ME쉐링과 그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자식들과 주고받은 편지만 해도 벌써 수백 통에 이른다. 요즘 가족 카톡 방을 만들어 온 가족이 소통하는 것도 ME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ME주말은 성당기관에서 주관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종교단체는 아니기에 대상의 폭이 넓다. ME주말을 통하여 배우자 우선인 ME가치관을 배우고 부부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또 그 뒤 어느 날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연구소 주관 제3기 인생대학을 1기로 수료한 한 벗으로부터 “제3기 인생대학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퇴직을 앞두고 노년기를 잘 설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던 차여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기회 같았다. 게다가 우리 부부에게도 또 다른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줄 것 같아 그 길로 원서를 접수시켰다. 다행히 두 사람 다 합격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비로소 제3인생의 개념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고 노력하면서, 건강한 정신과 육신으로 자원봉사의 삶을 살다가 이 생의 소풍을 마감하는 것이다. 기회가 되는대로 피정과 여행을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면서 남은 생을 살 것이다. 앞으로 나는 30년 이상의 은행 생활을 정리하고 나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내는 기회가 된다면 내가 더 일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나는 경제 활동을 하며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 아내와 함께할 시간들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더욱더 근검한 생활로 소비지출을 줄여 나갈 생각이다. 다만 자원봉사자로서의 일만큼은 예외로 계속할 생각이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최선을 다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과로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모든 병의 가장 큰 원인은 과로와 스트레스이다. 내 아내의 유방암 발병도 나에게는 지혜로운 아내, 내 부모님께는 효부, 두 아들에게는 훌륭한 어머니, 거기다 직장 생활 중 10년 이상을 병원 간호과장의 소임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데서 온 과로와 스트레스 탓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나와 아내는 과로와 스트레스 받는 일은 뒤로 하고, 욕심을 내려놓고 심신이 편안한 상태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생각이다. 우리 부부의 새로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준 제3인생대학을 아내 손을 잡고 다닐 수 있게 해주신 주님의 은총에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아내 이야기

주님께서 내 삶에 초대해준 사람: 우리 엄마는 언제나 남을 참 잘 대접해주었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글라라’라는 세례명을 가진 엄마는 밥 한 숟가락 달라는 거지에게 반찬까지 얹어주셨고, 지나가는 스님에게 쌀 한 바가지에 물까지 내주시던 분이다. 어느 날 우리 동네로 보살을 오신 스님 한 분이 우리 집 툇마루에서 쉬었다 가셨다. 마침 수돗가에 앉아 있던 나를 보고 스님께서 “시집가면 남편 복과 자식 복이 많을 것이고, 관록을 먹고 살 것”이라고 중얼거리셨다. 스님의 말씀 덕분에 나는 그 후부터 스스로를 늘 남편 복 자식 복이 많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장교로 일할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시집갈 거냐며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대망의 80년대에 시집갈 거예요.”라고 밑도 끝도 없는 장담을 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아끼시던 군 장성께서 ‘위관의 날’ 파티에 초대해주셨고, 그곳에서 순진무구해 보이는 경상도 총각을 만나 박력 넘치는 추진력과 애정 공세, 운명적 끌림으로 결혼을 결정하였다. 대망의 1980년 6월 22일, 하짓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주님께서 이미 배우자로 내 삶에 초대해준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남편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어릴 적 스님의 덕담이 내 삶에서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남편 복 자식 복 많게 살게 해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시아버님과 연탄난로: 시아버님 생각을 하면 25년 전 경기도 포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겨울 날씨는 문고리만 잡아도 손이 문고리에 얼어붙을 만큼 매서웠다. 궁여지책으로 남편과 나는 침대 방에 연탄난로를 들여놓았다. 연탄을 갈 줄 모르는 철부지 신랑 각시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시아버님은 새벽녘이면 살며시 들어오셔서 연탄을 갈아 넣어주시곤 했다. 새벽이든 저녁이든 항상 잊지 않고 갈아 넣어주시던 시아버님의 연탄불! 그런 시아버님의 사랑을 요즘처럼 아파트에 사는 젊은 세대가 알 수 있을까. 이제는 겨울의 연탄난로를 쉽게 볼 수 없지만 내 가슴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남아 신혼의 행복함과 천국에 계시는 시아버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Chapter 2. 은인-지인-벗 ‘함께 있으면 가슴이 뛰는 사람들’



남편 이야기

신세 진 초등친구들: “친구야, 보고 싶네. 오랜만에 초친들 얼굴 한번 볼까? 오늘 저녁 6시 반~8시, 형편 되면 범어 네거리 ‘울진횟집’이나 ‘남원추어탕’ 중에서 친구가 좋아하는 메뉴로 석식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대접할게. 병윤, 현옥이, 윤예, 위채, 옥희, 덕훈이 모두 내가 대구에서 신세 많이 진 친구들이네. 나는 지난 3월 31일자로 완전히 퇴직했어. 30년여 무사히 만기 제대해서 자축 겸하여 밥 한번 사고자 한다. 오늘 밤은 어머니 제사라 8시 반경에는 영천으로 가야 해! 참석 가능 여부와 원하는 식당을 회신 주길! 초친들 어려우면 다른 친구들 만나고자 한다. 서울에서 원수가.”

앞에 나열된 사람들은 2001년 내가 대구로 지점장 승진 발령을 받고 나서부터 연락을 해 만나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들이다. 나는 1978년 2월 대구를 떠났는데, 당시 거의 23년 만에 금의환향을 할 수 있었다. 그전에도 문자나 전화로 가끔 연락했지만 거리가 멀어 만날 엄두는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승진하여 만촌동 지점장으로 갔으니 대구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 10년을 보냈던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이었다. 순수할 때 만났던 친구들인 만큼 마치 죽었던 친구를 다시 만난 듯 크게 환영해주었고, 형편 되는 대로 종종 만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곤 했다. 친구들 모두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발 벗고 나섰다. 그때의 고마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04년 3월, 대구에서의 3년간 보직을 끝내고 인천 가좌동 지점장으로 옮겼다. 그 후부터는 1년에 한두 번 동기회 정도만 참석했는데, 그래도 꾸준히 문자로 안부는 전했다. 지금은 경조사 등의 집안 일이 있을 때만 만나게 되는 바람에 모처럼 얼굴들도 볼 겸 위와 같이 석식 데이트를 제의한 것이다.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는 초친들, 오늘 저녁에 만나 밥이라도 한번 대접하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빌어본다.

아내 이야기

나의 성감대는 당신의 왼쪽 가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회복되어가는 나에게 새로운 두려움이 생겼다. 유방암 수술 후 젊은 부부들이 부부관계의 갈등으로 이혼을 하고 우울증으로 재발되는 일이 잦다는 이야기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남들보다 ‘남편이 수술한 내 젖가슴을 보면 얼마나 섬뜩하고 흉측해할까? 우리는 다시 부부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로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내가 깨어 있으면 자기 때문에 잠을 못 잔 줄 알고 걱정할까 봐 그냥 눈을 감고 자는 척하였다.

평소처럼 샤워를 하고 침대로 들어온 남편이 내 수술한 젖가슴을 아프지 않게 살살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안젤라, 고마워! 씩씩하게 잘 견뎌줬어! 당신이 이렇게 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감사해!” 아직도 막대기처럼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왼쪽 젖가슴을 만지는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내가 이 착하고 순수한 남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안겨주었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펑펑 울었다. 그제야 왼쪽 가슴이 없어도 우리 부부의 사랑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아픔을 껴안고 사랑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음을 온 마음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유방암 환자에서 사랑받는 아내로, 그렇게 당당한 여자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회피하던 목욕탕과 헬스장 사우나도, 골프 인도어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유방암 검사를 조기 검진할 것이라는 사명감까지 생기게 되었다. 누군가 이야기하였다. 장애는 불행이 아니라 불편할 따름이라고. 그리고 남편은 늘 이야기하곤 한다. “안젤라, 당신의 왼쪽 가슴은 나의 성감대야.”라고.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집안 대소사와 결혼식 등 챙길 것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신랑 혼자 대구로 내려보내고 아들 부부와 손자를 보면서 모처럼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운동도 등산도 뒤로하고 육체가 편안하고 입이 즐거운 휴식에 빠져 있었어요. 저를 배려해 점심 먹고 함께 나가자는 아들 부부의 마음은 알지만, 손자 지후도 힘들어할 것 같고 오랜만에 부부 둘만 오붓하게 쇼핑하게 해주고 싶어, 전 지후를 데리고 집에 남았습니다.

손자와 놀아주면서 TV 다큐멘터리 〈사랑〉을 시청했습니다. 애틋한 장면 중에 4년 전 첫딸을 낳고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위암 판정을 받은 안소봉 씨 이야기가 가장 마음 아팠습니다. 딸의 돌잔치만이라도 보고 죽고 싶다 하였지만, 결국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의 부름을 받고 만 젊은 엄마의 투병기를 보고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안소봉 씨와 남겨진 가족이 불쌍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와 비슷한 처지였던 저에게 지금 손자를 안고 있게 해주신 하느님 사랑에 복받치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누리는 이 행복은 거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 남편의 순애보적인 사랑, 자식들의 절절한 기도와 희생의 결과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죽는다면……. 수없이 반복하며 내려놓았던 욕심들이었는데, 방심하는 사이에 나를 다시 움켜쥐게 하였다. 부끄럽다.’

조금 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한 욕심 때문에 혼자 상처받고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주어도 못다 줄 사랑만 하기에도 바쁜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 사랑을 위한 최우선은 내 건강을 스스로 지켜 나로 인한 아픔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등산복을 주워 입고 유모차를 챙긴 후 지후와 함께 밖으로 탈출하였습니다.

삼성산 자락인 우리 동네는 아파트 단지만 돌아도 등산이 됩니다. 손자와 산책을 하다가 귀가 중인 아들 부부와 만나 지후를 넘겨주고, 저 혼자 산을 올랐습니다. 요즘은 건강한 사람들이 활기차게 산행하는 모습이 참 부럽습니다. 우리 두 아들 부부도 건강이 최우선임을 이 엄마를 통해 깨닫고, 지금부터 건강관리를 위해 등산도 하고 운동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수없이 지나가는 등산객들을 보면서 혼자 꿈을 꾸었습니다. 손자 다윗 지후와 날씬해진 아들과 예쁜 며느리와 신랑과 함께, 앞산을 자주 오르는 모습을!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차남 부부와 세상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예쁜 손주를 자주 볼 수 있기를! 제 앞에 펼쳐진 연둣빛 새싹들이 품어내는 희망의 메시지와 싱그러운 바람이 속삭이는 사랑의 언어와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다시 한 번 살아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Chapter 3. 퇴직단상 ‘몸은 떠났어도 마음만은’



남편 이야기

30년 다닌 외환은행을 퇴직하며: 내가 은행원이 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장래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고 물어보셨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장군, 과학자, 파일럿이라고 대답할 때, 나만 은행원이라고 대답했었다. 언젠가 이종사촌 형에게 들었던 “은행에만 취직하면 봉급도 많이 받고 잘살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초등 시절에 이어 청소년 시절까지도 은행원은 나의 꿈과 목표였다.

그러던 내가 고3 방학 기간 중에 은행원이라는 목표를 잠시 잊어버리고, 학교장의 추천으로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회사를 다닌 지 며칠 안 돼 같은 회사에서 정덕진 고교 10년 위 선배님을 만났는데, 그분의 회사생활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곧바로 첫 사표를 내던졌다. 그러고는 대학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위해 6개월여 동안, 도시락 2개를 싸가지고 시립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했다. 운이 좋게도 그해 지방대학인 대구의 계명대학에 합격했고, 27개월간 대구지방보훈지청에서 말단 공직 급여를 받으며 주경야독 생활을 2년째 하다가 두 번째 사표를 제출했다.

그 후 대학 3학년 진학과 동시에 ROTC 제도를 이용하여 국방부 장학금을 수혜하고 경리장교로 4년간 복무했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전역과 동시에 외환은행에 입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1982년 8월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외환은행으로부터 매달 21일에 꼬박꼬박 급여가 입금되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품어왔던 은행원의 꿈을 외환은행에서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아내와 아들 둘, 이렇게 여섯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이었던 외환은행에서의 직장생활은 내 인생의 큰 보람과 기쁨이었다. 그런데 오늘 출근하면서 일정표를 보았더니 이제 출퇴근할 수 있는 기간이 8일밖에 안 남아 있었다. 막상 퇴직하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 한쪽이 허전하고 시려온다. 그렇지만 다니는 날까지 나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근무할 생각이다. 다시 한 번 아무 탈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 회사와 동료들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