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의 사랑과 눈물
문무일 지음 | 행복에너지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의 사랑과 눈물
문무일 지음
행복에너지 / 2012년 10월 / 312쪽 / 15,000원
옥천, 푸르른 날에
교동집 작은 아씨: 육영수는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의 지역 유지인 아버지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 사이에서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육영수의 형제로는 오빠인 육인수와 언니 육인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다. 육영수의 고향은 조선시대 국립학교인 향교가 있어 교동리라고 불렸고, 육영수가 태어난 집은 향교의 바로 동쪽에 있어 ‘교동집’이라 불렸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대지주 육용필의 5남매 중 막내였다. 그는 형들이 출향하여 출세하자 고향에 남아 집안의 재산을 관리했는데, 농장 경영과 미곡 도매상, 금광 개발, 인삼 가공업을 하며 큰 부자가 되었다. 어머니 이경령은 고려 말 학자였던 이제현의 후손으로 많은 식솔을 거느리며 큰살림을 맡아왔다.
육영수는 어릴 적부터 ‘마음씨 고운 교동집 작은 아씨’로 불렸는데, 그만큼 따뜻하고 섬세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10살 전후부터 수판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아버지의 장부 정리를 도맡아 하곤 했으며, 바느질 솜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한편 육영수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옥천읍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했다. 차분한 성격의 그녀는 얌전한 학생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이 없이, 늘 남을 위하고 겸손한 자세와 검소한 생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배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마음을 접고,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옥천으로 내려왔다.
옥천여학교, 가사 선생님: 1942년 고향으로 내려온 육영수는 옥천 교동집에서 얌전한 규수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백기를 들자 전국 방방곡곡에 태극기 물결이 일었고, 옥천에도 해방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1945년 10월 어느 날, 옥천여학교 송재만 서무과장이 육영수에게 가사 선생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옥천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2학년 마지막 가사 시간에 카레라이스 만들기 실습을 하였는데, 실습 음식을 들던 남자 선생님들이 짓궂은 농담을 하자 그녀는 그 무례함을 받아들일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사표를 냈다.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이었지만, 단호한 면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6ㆍ25, 부산으로 피난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 그리고 7월 어느 날, 옥천에 머물고 있던 아버지 육종관은 북한군이 조치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고심 끝에 선발대를 부산으로 보내기로 하고 헌 트럭 한 대를 빌려와 육영수를 태워 부산으로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한 육영수는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사촌 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먼저 온 피난민들로 인해 빈방이 없어, 낯선 부산을 며칠이나 헤집고 다닌 뒤에야 간신히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며칠 뒤에 부산에 당도한 육종관은 딸이 구한 방에 가보고 주인과 협상을 벌여 이층 전체를 빌려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부산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외가 쪽 친척 오빠인 육군본부 정보국 소위 송재천이 육영수의 혼담을 의논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때 송재천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1년 후배로, 부산에서 박정희를 만나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송재천은 육영수의 부모님에게 박정희 소령을 신랑감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오후, 박정희는 송재천과 함께 육군본부를 나섰다. 박정희가 육영수의 부모님을 만나 뵙기로 한 곳은 육종관 일가가 묵고 있는 낡은 가옥이었다. 박정희가 방에 들어서고 잠시 뒤, 육영수는 찻상을 방에 두고 나왔다.
사랑의 서약
박정희 중령의 아내: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거든요. 그 후 몇 번 만나 뵈니까 그 직감이 틀림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미덥고 소박하고 아주 정겨운 분이세요.” 훗날 영부인이 된 육영수가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 말이다.
1950년 9월 15일, 박정희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 무렵, 부산에 주둔하던 육군본부는 대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전날 송재천은 영도의 양과자점으로 육영수를 안내해 둘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약혼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박정희가 군인이라는 점이 싫었으며, 나이가 많은 이혼남이라는 것 또한 싫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둘의 결혼을 지지했기에 결국 육영수의 혼인을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찰이 이어졌다.
그 뒤 부산 피난 생활을 마치고 옥천 교동집으로 돌아가는 날,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대구를 통과할 때, 육영수는 어머니와 함께 잠시 그곳에서 내려 동성로의 삼화 식당에서 박정희와 약혼식을 하였다. 그리고 그 뒤 12월 12일, 대구시 계산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의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은 쓸쓸한 결혼식이었다. 식장으로 입장하는 신부의 손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은사 김영익이 잡아 주었다.
신혼살림의 어려움: 결혼식은 올렸지만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신혼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결혼식도 동료의 도움으로 할 만큼, 박 중령은 가난한 군인이었다. 신혼집은 대구에 마련했는데, 부엌조차 없었다. 육영수는 현관을 개조해 부엌을 만들고,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마련하며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녀는 시장을 보고 난 뒤에는 공책에 일일이 그날의 지출을 적으며 알뜰하게 살림을 했다.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던 육영수는 남편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숫물을 준비했고, 언제나 머리를 곱게 빗고 엷은 화장을 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극진한 내조 덕에 박정희는 처음으로 안락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1951년 대구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박정희는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 육영수는 첫째 딸을 낳았다. 박정희는 삼 일 동안 옥편을 뒤적이며 마음에 드는 한자를 골랐다. 그리고 무궁화, 즉 나라의 국화이자 조국을 의미하는 ‘근(槿)’ 자와 은혜로움을 의미하는 ‘혜(惠)’ 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그 후 박정희가 서울의 부대로 발령받아 먼저 올라가고, 얼마 후 온 가족이 서울로 오라는 기별을 받았다. 박정희가 마련한 거처는 동숭동 산꼭대기의 작은 셋방이었다. 석 달을 동숭동 셋방에서 지낸 끝에 1953년 10월, 고사북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육영수는 둘째를 임신했고, 박정희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을 했다. 그 후 박정희는 미국 오클라호마 육군포병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남편이 유학을 떠나자 육영수는 자신도 남편의 직위에 맞는 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박정희는 1954년 6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육영수는 내조를 함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를 지키려 노력했다. 첫째, 가정의 근심을 덜어줌으로써 남편에게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주어야 한다. 둘째, 남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을 아내가 협조한다. 셋째, 남편의 건강을 살핀다.
이후 그녀는 둘째 딸 근영을 낳았고, 남편은 강원도 화천으로 발령받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없는 살림에서도 꼬박꼬박 해온 저축과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1955년 4월, 드디어 충현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 뒤 박정희가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자 다시 충현동 집을 팔고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다. 신당동으로 이사 온 뒤, 육영수는 셋째 아이를 출산했는데, 셋째 아이인 지만은 부부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그렇게 1950년대가 가고, 1960년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혁명은 시작되고: 1960년, 새날이 밝았다. 3월 15일 선거를 앞두고 시국은 흉흉했고, 결국 3ㆍ15 선거는 부정으로 끝났다. 그러자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육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전보되어 부산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고, 9월이 되면서 박정희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 무렵 그는 가족들에게 불고기를 종종 사주었는데, 그동안 가족들을 정성껏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다들 웃으며 밥을 먹었지만, 육영수는 남편에게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해 11월 9일, 신당동 박정희의 집에 젊은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평소 박정희가 가까이하던 장교들이었다. 이날의 회동은 박정희를 지도자로 추대하기 위한 역사적인 모임이었다.
이듬해인 1961년, 새해로 접어들자 3월 위기설, 4월 위기설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5월 12일 박정희 장군은 혁명 진행을 위해 상경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거사일을 5월 16일로 연기했다. 1961년 5월 15일은 월요일이었다. 장충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근혜와 1학년에 다니는 근영을 학교에 보낸 뒤 육영수는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2~3일 쉬다 오라고 일렀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박정희는 아내에게 담담한 표정으로 권총을 꺼내달라 말했다.
육영수에게서 권총을 받은 박정희가 곧장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육영수가 근혜의 숙제를 봐달라고 하여 다시 안방으로 들어섰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박정희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부대출동이 어렵게 됐다는 말에, 그는 제2안대로 하자는 말을 침착하게 전했다. 육영수가 묵묵히 남편을 바라보자, 박정희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다섯 시 정각에 라디오를 들어보시오.”
남편을 보낸 뒤 그녀는 간절한 기도를 했다. 자정이 지났다. 그녀는 안방에 앉아 바느질을 했고 곁에는 어머니와 세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응접실의 시계가 새벽 5시를 알려왔다.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아무리 돌려도 잡음만 들려올 뿐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다. 1초가 가고 1분이 가고……. 6분이 지나고 7분이 됐을 때였다. 마침내 라디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가 드디어 금일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혁명과 함께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육영수는 바빠졌다. 신당동 집에는 몇 명의 군인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빈번하게 방문객이 드나들었다. 혼자 식사 준비를 하기에 무리인 날들이 많아졌기에 종종 일손을 거들어줄 사람을 부르곤 했다. 7월 3일,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가족들은 신당동 집을 떠나 의장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1월이 되면서 박정희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국을 순방하였다.
1962년이 되었다. 군정 7개월 만인 12월 17일,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박정희는 이듬해 8월 30일 전역식을 거행한 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963년 10월 15일, 투표를 마치고 경주로 내려갔던 두 부부는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퍼스트레이디가 되다
청와대의 야당: 제3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육영수는 영부인으로서 국민들의 소리를 듣는 ‘청와대의 귀’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전했다. 박 대통령은 아내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며 농을 담아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게 바로 임자야. 난 청와대 야당이 제일 무서워.”
손수레와 미역국 그리고 국수: 영부인이 되고 그녀는 많은 활동을 했다.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사건이 바로 손수레와 관련된 이야기다. 이는 그녀가 해결한 첫 번째 민원이기도 하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많은 편지 가운데 이런 사연이 있었다. “여사님! 저는 절도죄로 형을 치르고 출소한 전과자입니다. 순간의 실수로 죄를 지었으나 깊이 반성하여 대전 교도소 복역 중에는 모범수로도 일을 했습니다. 사회에 나온 후,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를 시작하고 싶지만 밑천이 없어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사님께서 손수레 한 대만 사주시면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보렵니다.”
육 여사는 편지를 받고 남자의 신원을 확인한 뒤 답장을 보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얼마 후 찾아 온 남자는 손수레를 한 대 사주시면 포도장사를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다. 육 여사는 포도는 어디에서 공급받는지, 수입과 지출은 어느 정도가 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인지, 혹은 남의 도움을 무조건적으로 바라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찾아 온 남성은 전자였다. 그래서 육 여사는 미리 준비한 봉투를 건넸다. 봉투 속에는 남자가 원하는 손수레를 살 수 있는 돈이 들어 있었고 충분한 여비도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열심히 해보세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요.” 육 여사는 열심히 하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육 여사는 가난한 삶에 힘겨워하는 국민을 위해 여러모로 관심을 가졌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길을 터주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국민들 중에서는 육 여사의 애정 어린 관심과 노력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경제적 도움이 큰 힘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민을 돕는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즉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기로 한 것이다.
삼양동 판자촌을 찾았을 때 일이다. 판자촌에 넉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육 여사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 “국수 기계를 사드릴 테니 국수 공장을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정부에서도 분식을 장려하고 사람들도 한 끼 정도는 분식을 하고 있으니 수요가 있잖아요. 열 가구나 스무 가구가 조합을 만들어보세요. 우선 국수틀 두 대와 밀가루 20포를 밑천 삼아 시작해보세요.” 며칠 뒤 이십 대 청년 일곱 명이 모여 조합을 구성했다.
육 여사는 청년 일곱 명과 자세히 이야기를 나눈 뒤 확신이 서자, 약속대로 국수틀과 밀가루를 사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업을 잘할 수 있도록 꼬박꼬박 잊지 말고 영업일지를 쓰라고 했다. 한편 육 여사는 문화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형편이 어려운 문인들을 지원해 모두 50권의 시집을 발간해주기도 했다. 또한 문화재에 대한 애정도 대단해서 석탑의 사천왕상을 박물관에 보내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한 통의 편지: 청와대에서 생활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은 육 여사는 자신에게 오는 편지를 세 가지로 나눴다고 한다. 첫째, 답장만으로도 무방한 것. 둘째,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셋째,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 그렇게 나눈 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비서나 담당 행정기관에 연락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국민들이 궁금해 하지 않도록 자신이 해결하지 못할 일에 대해서는 일일이 서면을 통해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국가 공익을 위해서 꼭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을 때는 남편인 박 대통령에게 알려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루르의 눈물바다: 육 여사는 외국 순방을 할 때, 영부인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외국 귀빈들을 초대할 때도 여러 가지를 신경 썼는데, 그중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음식이었다. 1963년 겨울부터 음식 접대에 관심을 가지고, 요리 연구가들을 불러 식재료와 메뉴에 대해 상의했다. 또한 그녀는 외국에서 온 귀빈을 접대함에 구분을 두었다. 기본적인 식단은 총 세 가지로 두었는데, 이는 누구를 접대하느냐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다양성을 염두에 둔 식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