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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구두를 고쳐 신을 시간

김진향 지음 | 라이스메이커
스물여덟, 구두를 고쳐 신을 시간

김진향 지음

라이스메이커 / 2013년 10월 / 208쪽 / 13,500원





누구에게나 ‘첫’은 두렵고 벅차다

“곧 조카를 출산할 누나한테 구두 선물을 하려고 해요. 대표님이 직접 디자인해줄 수 있으세요?” 어느 날, 한 남자 고객이 나의 구두 브랜드인 브이너스로 연락을 주었다. 사실 이 구두를 의뢰받기 전까지 나는 도매 업체의 샘플을 받아 고객들이 주문하면 다시 공장에 수주를 넣는 방식으로 구두를 판매해왔다. 그러니까 브이너스의 라벨을 단 첫 구두는 있지만, 사실상 이 남자 고객이 주문한 구두가 바로 내가 자체 디자인해서 만든 첫 구두인 셈이다.

긴 고민 끝에 전에 몇 번의 도움을 받았던 장인 선생님과 일을 함께하기로 했다. 본인 스스로 ‘구두장이’라고 불러달라고 할 만큼 구두에 대한 애정이 많은 분으로, 실제로 일평생 구두만 알고 살았다고 한다. 나는 고객으로부터 구두 주인이 될 누나 분의 취향(평소 옷차림, 성격 등)을 파악하면서 ‘레오파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장인 선생님을 따라 간 성수동의 가죽 원단 가게에서 내가 딱 원했던 레오파드 무늬의 원단을 찾았다.

세부 시안을 조정하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맞춰가면서 디자인을 완료한 후, 장인 선생님이 화룡정점을 찍어주실 일만 남았다. 마치 첫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나 아빠의 마음이 이럴까? 구두가 장인 선생님의 손을 거쳐 제작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2주 내내 나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드디어 장인 선생님으로부터 첫 구두가 완성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추운 겨울, 나는 첫 구두를 만나보기 위해 뛰고 뛰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벅찬 기분이었다. 장인 선생님은 까만 연료가 묻은 손으로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분의 두 손은 고목같이 거칠고 투박했지만 오는 내내 얼어 있던 내 손을 사르르 녹일 만큼 따스했다. 나의 첫 구두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고객도, 누나 분도 이 구두를 마음에 쏙 들어 하시길 바라면서 내 생애 처음 만든 구두를 보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첫’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20대가 되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다양한 ‘첫’을 경험했다. 모델, 바리스타, 음악방송 CJ, 보험 FP, 강사 등 누구보다 다양한 이력으로 20대를 불태웠고 이 모든 것에는 ‘첫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왜 떨리지 않았겠으며,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순간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희열이 찾아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앞에 새로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겁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에겐 예쁘게 제작될 첫 구두가 엄청나게 멋지게 ‘반짝’ 하고 나타날 테니까!



바이탈 커뮤니케이터가 뭐예요?

난 참 많은 일을 해왔다. 아빠는 늘 누워 계셨고, 엄마 혼자서 가족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분식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소한 용돈 정도는 스스로 해결했다. 나중에는 횟집에서 3킬로그램 가까이 하는 회접시들을 양손에 들고 척척 서빙하는 등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모두 다 섭렵할 정도였다. 스무 살이 넘어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는 일에 대한 관점이 다소 달라졌다. 예전에는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만, 이제부터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재미있는 일들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 온 지 8년이 지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늘어놓으면 정말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모델 활동, 방송, 봉사활동, 파티플래닝, 그림 그리고 가장 소중한 브이너스 구두 디자인과 패션 편집숍과 나눔을 함께하고 있는 러브앤쉐어 대표 활동 등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이다. 어느 하나를 내 직업이라고 한정해버리기에는 모두 다 내게 소중하고 열렬한 삶의 일부이다.

‘바이탈 커뮤니케이터’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로 묶어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이 명칭은 SNS로 알게 된 한아타 작가님이 지어주신 명칭이다. 한 작가님은 나눔과 봉사활동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다. 내가 한 작가님에게 ‘내가 좋아서 다양한 일을 하는데, 가끔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는 말을 들으면 속상하다’라는 평소 고민을 털어놓자,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진향 씨가 하는 일들은, 하나로 부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일들이에요. 그래서 굳이 하나의 보편적인 일로 묶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게 진향 씨와 진향 씨가 하는 일의 특성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한 작가님은 내게 자신만의 ‘휴먼 브랜드’를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프랑스에서 브랜드에 관해 공부하고 브랜드 관리 작업을 해온 한 작가님께 쉽지 않은 요청을 드렸다. 나의 휴먼 브랜드를 담은 명함을 제작해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한 작가님이 보내주신 명함이 왔다. ‘바이탈 커뮤니케이터, 김진향.’ 한 작가님은 내가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것들이고, 그 활력으로 소통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그와 같이 지었다고 전했다. 더불어 이 명칭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다가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일들까지 포함한, 가능성을 넓히는 이름이라고도 덧붙였다. 나는 새로 선물 받은 명함을 보고 한 손을 왼쪽 가슴에 대보았다.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무게감이 더 커져가는 느낌이었다. 내 행동이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활력을 준다면 이 이름이 아깝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배움에 정해진 때가 있는 건 아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책으로, 일본의 한 할아버지의 끝없는 향학열에 관해 쓰인 것이다. 할아버지는 57세의 나이에 일본의 명문으로 꼽히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경영학을 공부하고, 60세에는 MBA를 취득했으며, 뒤늦게 사진을 배워 70세에는 개인사진전을 열였던, 배움을 멈추지 않은 열혈 학생이었다.

나는 최종학력이 고졸이다. 나와 반대의 삶을 산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내게 크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배움에는 끝도 없고, 정해진 시기도 없다’라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간혹 강의에 나가거나 주변의 동생들을 만나면 “난 공부를 못해서 큰일이야.”라든가 “대학도 못 나온 내가 사람대접이나 받을 수 있을까?”라는 얘기를 듣곤 한다. 나 역시 강의 의뢰가 들어온 후 아는 오빠가 “대학도 못 나온 네가 무시나 당하겠지, 무슨 강의냐?”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나는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빨리 사회에 뛰어들었다. 사회에 뛰어든다는 것은 보호막 없이 내던져져 무엇이든 일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다른 일을 할 때마다 나는 새로운 것들을 다시 배워야 했다. 내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한 ‘대학’, 구두 공장이 있었다. 당시 나는 동교동에서 카페를 하면서 구두 일을 병행했다. 오후 5시 정도가 되면 카페에서 나와 저녁을 거르고 얼른 성수동의 구두 공장으로 달려갔다. 구두 디자인 세계에도 대학을 나오고, 심지어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 같은 사람이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은 이 세계에서, 그래도 나는 나만의 경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구두 공부는 공장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홍대 반디앤루니스 서점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 가면 서점 구석으로 가 구두 관련 책들을 뒤적거렸다. 이렇게 내가 공부한 전공은 구두다. 대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그 어떤 대학생이 학교에서 공부한 것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누구나 열아홉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에는 대학에 가고, 스물네 살엔 대학원에 가거나 취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2년이라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늦거나 다른 길을 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하지만 아직 나도 어린 나이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반드시 그러란 법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삶에서 배움의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을 배울지 배우지 말지 선택하는 건 본인의 몫이다. 열정만 있다면 내게 필요한 공부는 그때 돌진해서 하게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말길.



세찬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

구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의 일이다. 초보자들이 그렇듯 나도 뭘 잘 모르고 고객이 아직 주문하지도 않은 구두를 여러 켤레 주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200만 원 정도 공장에 지불해야 할 금액이 생겼다. 당시 나는 그런 금액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장님의 눈치만 보던 중, 같은 업계에 종사하시던 분이 내게 한마디 하셨다. “사업하는 애 마인드가 이게 뭐니? 결제 부분은 확실하게 해야 할 거 아니야?” 밝게 웃으며 오시길래 나도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갑작스런 그분의 돌직구에 놀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잘 모른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분은 마지막 한마디 비수를 꽂았다. “고작 네 신발장에 넣어두려고 그렇게 구두를 열심히 만들어준 줄 아니?”

그때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왜 나는 이제까지 혼자서만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했을까? 열정적으로 고객을 대하고, 그 사람들의 취향을 고려해서 디자인을 하는 것은 나이지만, 내가 디자인한 것을 실제 신을 수 있는 구두로 만들어주는 선생님들도 하나의 공정마다 정성 들여 제작한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아무리 내가 열심히 만들었다고 한들, 새 구두가 주인을 만나지 못해 어두컴컴한 신발장에만 있다면, 그것 역시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더 빨리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내가 구두를 만드는 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난데없는 꾸중을 듣고 공장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울다가, 어서 달려가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장님에게 구두 대금을 바로 못 드려서 너무 죄송하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인사를 드렸다. 마음을 다잡고 갔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장님도 하염없이 우는 나를 보고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괜찮다고 하시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게 가차 없이 쓴소리를 해주었던 그 관계자분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 앞으로 잘할 거야.”라며 응원을 잊지 않았다. 이날 나는 쓰라린 상처와 폭풍 같은 눈물 끝에 구두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너무나 소중한 원칙들을 발견했다. 깨달음의 순간은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는가 보다.



살피고 돌아보다, 나눔 그 따스함의 의미

‘1킬로미터’라는 이름의 어플이 있다.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연결해주는 친목 도모용 어플리케이션이다. 이 1킬로미터 어플리케이션 안에서 나는 ‘탑팸’이라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이 소모임의 콘셉트는 재능나눔을 통해 이를 사회에 기부, 환원하자는 것이다. 탑팸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랩퍼로 활동하고 있는 분, 영어 트레이닝 교사, 연기학원 선생님, 댄스스포츠 강사, 유치원 선생님, 바리스타, 디제이, 연기자 등 멋지고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어느 날 다른 봉사활동 모임을 하고 있던 친구 한 명이 민들레 국수집이라는 곳을 소개해주었다. 천주교와 관련한 기관으로, 갈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노숙인들에게 작은 정성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이후에 그 친구의 봉사모임으로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리 소모임은 아침 일찍 동인천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식자재를 정리하고, 노숙인들의 말벗이 되어드리기도 하고,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한 그릇 소담스러운 국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탑팸에서 주최한 봉사활동 가운데 삼송 유기견 센터에서의 기억 역시도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경험이다. 이곳의 소장님은 화가이신데, 버려진 강아지들이 불쌍해서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하셨다. 강아지 창고에 들어갔더니 20미터가량의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강아지들이 가득했다. 운동화를 신고 목장갑을 끼고 삽과 비닐봉지를 든 우리는 양옆의 개장에 들어가 강아지들의 똥과 여기저기 엎질러진 사료들을 치웠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마저 없다면 이 힘들고 많은 일을 어떻게 소장님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는 SNS를 통해 유기견에 대한 이야기들과 사진, 그리고 이 아이들의 입양을 호소하는 글들을 올렸다. 그리고 나의 재능을 이곳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림이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한때 미대 입학을 꿈꾸었던 내가 아닌가? 곧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요즘 재능기부가 새로운 기부 문화로 떠오르고 있지요? 저는 여러분의 사진을 받아 캐리커처를 그려드리는 재능을 기부할까 합니다. 한 건당 100원 이상의 금액을 재량껏 보내주세요. 그러면 이 후원금을 모아 삼송 유기견 센터의 강아지들이 추운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연탄 기부를 하겠습니다.” 나는 SNS를 통해 이런 계획을 밝혔다. 곧 사람들의 신청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좋은 추억을 주면서 그 대가로 강아지들을 위한 후원금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그림을 그리면서 힘이 절로 나고, 잠도 줄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이 그림으로 전시회도 하면서 그 뜻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내가 더 커지고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이렇게 살아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는 20대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가진 걸 한번 나눠 보라고.

사실 처음 SNS를 접할 때는 그냥 나를 보이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점차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하면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져주고,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이 느껴질 때 묘한 성취감과 설렘이 느껴지는 게 좋았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시작했던 첫 나눔, ‘김진향의 그림나눔’은 그 어떤 대단한 타이틀보다 나를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나눔이 끝난 뒤 나는 그때 느꼈던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가진 게 없더라도 나누면 행복해지는 걸 알았습니다.”라고 말이다.



혼자 떠나보지 않았다면 어른이 아니다

카페 일을 하면서 금전적으로 힘들었다. 카페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여자도 아니고 뭣도 아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동업자 한 분이 더 생겨 내 자본금 중 일부를 떼어내 주었다. 겨우 흑자로 돌아서긴 했지만, 아직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카페 문을 열어 사람들과 계속 마주하면서, 나는 마치 광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친구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갈 때는 같이 갔으나, 중간에 나 혼자 제주도에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내가 혼자서 제주도를 여행한 첫날. 나는 섬 외곽의 해안도로를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 무인 카페도 찾아가봤다. 혼자 간 무인카페는 무척 색다른 느낌이었다.

혼자 여행을 할 때 아무래도 가장 불편한 건 식사였다. 한 식당에 혼자 들어가서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그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한참 동안 나를 그냥 세워두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분명 내 다음에 온 네 명의 손님을 먼저 받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이 확 상했다. 그 집에서 나온 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맸다. 낯설고 두렵고, 배도 고팠다. 그렇게 쭉 길을 따라 가다 보니 한 한정식집이 보였다. 간판은 제법 컸지만 식사 때가 지나서인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나는 한 번 거절당한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들어가면서 조심스레 여쭤봤다. “저기, 지금 식사 가능한가요?”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나는 정식 1인분을 시켰다. 혼자 왔냐는 아주머니의 물음에 대뜸 사과가 나왔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들러주셔서 감사드릴 일이죠.”라고 웃으며 나가셨고, 곧 정갈한 한정식이 내 앞에 차려졌다. 밥을 한 숟갈 떠먹으면서 눈물이 떨어졌다. 너무 창피해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었다. 그렇게 울음을 반찬 삼아 밥을 다 먹어치운 후 식당을 나왔다. 아주머니는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라며, 한결같이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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