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
이성선 지음 | 시와
산시
이성선 지음
시와 / 2013년 8월 / 92쪽 / 10,000원
1부 저 산을 모른다
귀를 씻다
산이 지나가다가 잠깐
물가에 앉아 귀를 씻는다
그 아래 엎드려 물을 마시니
입에서 산(山) 향기가 난다
물 위에 산이
팔만대장경이
풀잎 안에 있다
뿌리 받들어
그 곁에
눈을 감으면
소식 없는 저 세계
적막에
귀를 기대면
물 위에 산이
달빛을 데리고 간다
뿔을 물어뜯다
진흙 묻은 소가
빗줄기 몇 가닥에 목을 씻고 지나간다
번개 짐승이
달려들어 소의 뿔을 물어뜯는다
깜깜한 지상
연꽃 피는 소리 들린다
2부 문을 닫다
문답법을 버리다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반달
반은 지상에 보이고 반은 천상에 보인다
반은 내가 보고 반은 네가 본다
둘이서 완성하는
하늘의
마음 꽃 한 송이
산달(山月)
당신을 껴안고 누운 밤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돌 하나 품어도
사리가 되었습니다
3부 장엄한 배경
노루귀꽃 숨소리
늦은 저녁 산에 귀 대고 자다
달빛 숨소리 부서지는
골짜기로
노루귀꽃 몸을 연다
작은
이 소리
천둥보다 더 크게
내 귀 속을
울려
아아
산이 깨지고
우주가 깨지고
숨은 산
땅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다가
그 밑에 작게
고인 물 속
산이 숨어 있는 모습
보았다
낙엽 속에
숨은 산
잎사귀 하나가
우주 전체를
가렸구나
꽃 한 송이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구나
4부 달이 자는 곳
시골 길
시골 길에
비 온 뒤 물이 고이고
물 속에
산이 들고
산 속에 꽃이
붉게 피고
꽃 속 절간에
동자승이
숨어서 웃고
눈동자
산(山) 속에서 만난 샘물
신(神)의
눈동자
그는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나는 몸으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돌아왔다
봄밤
나귀의 귀 속에 우물이 있네
우물 안에 배꽃이 눈을 뜨네
마을에 숨은
당신 찾아가는 길
나이 먹어도 나 아직 젊어라
5부 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
달빛 발자국
달빛이
산길을 쓸자
냇물처럼
길이 산 위에 떴다
너구리 까투리 고라니 산밤 찾는 들쥐들
발가락에 달빛 묻어
어떤 발자국 줄은 산 위에서 별 쪽으로 사라지고
다른 줄은 마을로 내려오고
또 한 줄은
내 잠 속으로 숨어들어
꿈의 세상에 발자국을 찍었다
내 뼈골 속에 흩어져 달빛으로 찍힌
작은 하늘 흔적들
저문 하늘빛에 기대다
설악산 해 지는 모습이 너무 깊어서
가만히 그 아래 서서 올려다보다가
저물어 아름다운 하늘빛에 몸을 기대다
고요의 산 그림자에 안기는 하루의 끝
작은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수척한 꽃대 하나 없는 바람에 떨며 곁에 있다
너의 이름을 산에 묻고
산이 그의 뒤뜰에
유성 가득 흐르는
광활한 우주 숲을 숨기고 있다
그 숲에서 이상한 짐승소리가 들린다
산은 늘 운다
산으로 가는 길이
영원에게 가는 길이다
아니다. 순간에 이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