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박미림, 안도현, 도종환, 김경란, 이창동, 유시민 외 지음 | 책이있는마을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박미림 외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3년 5월 / 204쪽 / 12,000원
1부 강물처럼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그곳은 어떤가요얼마나 적막하나요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오지 않던 약속도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다시 촛불이 켜질까요나는 기도합니다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대답하지 못한 질문 - 유시민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그런 시대가 와도 거기 노무현은 없을 것 같은데사람 사는 세상이 오기만 한다면야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2002년 뜨거웠던 여름마포경찰서 뒷골목퇴락한 6층 건물 옥탑방에서 그가 물었을 때난 대답했지노무현의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야 거기 노무현이 없다한들 어떻겠습니까솔직한 말이 아니었어저렴한 훈계와 눈먼 오해를 견뎌야 했던그 사람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싶었을 뿐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개인적으로 욕을 먹을지라도정치 자체가 성공할 수 있도록권력의 반을 버려서 선거제도를 바꿀 수만 있다면더 큰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요대연정 제안으로 사방 욕을 듣던 날청와대 천정 높은 방에서 그가 물었을 때난 대답했지국민이 원하고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시지요정직한 말이 아니었어진흙투성이 되어 역사의 수레를 끄는 위인이 아니라작아도 확실한 성취의 기쁨에 웃는 그 사람을 보고 싶다는소망이었을 뿐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물을 가르고 온 것만 같소정치의 목적이 뭐요보통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지켜주는 것 아니오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은 자기 가족의 삶조차 지켜주지 못하니도대체 정치를 위해서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이요수백 대 카메라가 마치 총구처럼 겨누고 있는 봉하마을 사저에서정치의 야수성과 정치인생의 비루함에 대해 그가 물었을 때난 대답했지물을 가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셨습니다확신 가득한 말이 아니었어그 분노와 회한을 함께 느꼈던 나의서글픈 독백이었을 뿐
그는 떠났고사람 사는 세상은 멀고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들은 거기 있는데마음의 거처를 빼앗긴 나는새들마저 떠나버린 들녘에 앉아저물어 가는 서산 너머무겁게 드리운 먹구름을 본다내일은 밝은 해가 뜨려나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나는아직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안고욕망과 욕망이분노와 맹신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흙먼지 날리는 세상의 문턱에 서성인다
자전거 - 손광락마흔을 건너 가면서 사랑을 잃었다고마흔을 넘어 가면서 사랑이 방전되었다고설레임도 간절함도 애틋함도제 길을 찾아 떠났다고 하길래걸어서 먼 길차가 갈 수 없는 길을 떠납니다
소소함 흐뭇함 싱그러움 호젓함이 다가왔다 지나가고만났다가 부딪혔고돌아와 누우니 사랑이 잔소리하고사랑이 밥을 하고사랑이 달려오고사랑이 보채고사랑이 움직이고사랑이 서투른 피아노를 치네요
마흔을 넘어 와 보니 사랑은 안에 있지 않고밖에 있었습니다
2부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얼굴 - 도종환까까머리 학생이던 때 그의 얼굴에는차돌처럼 반짝이는 단단한 은빛이 배어 있다상고를 졸업하고 군복을 입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읍내와 면소재지의 경계쯤에 자리 잡은투박한 냄새와 과수원 냄새 같은 게 스며 있다지방 변호사가 되어 최루탄 묻은 아스팔트 냄새를바지에 묻히고 다닐 때나역사를 야만으로 바꾼 자들에게 명패를 집어 던질 때그에게는 질주하는 야생의 냄새가 났다실패는 많았지만 패배주의에 젖지 않던 시절쉽게 타협하지 않아 하로동선夏爐冬扇처럼버려져 있던 날그런 날도 그에게선 참나무 냄새가 났다화로처럼 타던 그의 가슴 안쪽이 겨울과 만났을 때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고그의 얼굴에는 참나무 숯이 타면서 내는따뜻하고 붉은 온기가 오래 머물러 있었다한 나라의 대통령이면서도 비주류라서나무 끝에 앉은 새처럼 흔들리고 있던 시절다시 법정에 선 변호사 어투가 흘러나오던 시절억울해 하는 얼굴에 스며드는 그늘 같은 게 보였다그의 생애 중에 가장 좋은 얼굴을 만난 것은대통령 일을 그만 두고 낙향한 뒤부터였다밀짚모자를 쓰고 오리와 함께 돌아올 때나 자전거 뒤에 풀빛을 태우고 마을을 돌 때그의 얼굴에는 갓 캔 감자줄기에 따라온풋풋하고 건강한 흙냄새가 살아났다구멍가게의 나무의자 냄새가 났고낮은 신발로 갈아 신고 만나는 오솔길 냄새와잘 익은 사과의 얼굴 위에 내려앉은가을햇살의 표정 같은 게 있었다수많은 얼굴을 녹여 낸가장 편안한 얼굴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이다벼랑은 다시 예전의 벼랑으로 돌아가고허공도 다시 허공이 된 뒤밀물 같은 슬픔의 물살 출렁이다 빠져나가고 나면우리는 어디서 다시 그의 편안한 얼굴 만날 수 있을까풀밭에 앉아 푸른 세월을 건너다보던 얼굴놓쳐버린 우리의 얼굴을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 - 박미림거문고 별자리 그날 이후 보이지 않는다하루 치 분량 먼지가 무표정하게 앉은 날한 통의 편지 당신이 떠난 후 쓴다당신과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인연에 대해어쩜, 이 편지는 먼 훗날에나 읽을지도 모른다드문드문 소등을 준비하는 새벽 어스름삐걱거리던 낡은 의자에 앉아 저승과 이승오가는 길 없을까 생각한 적 있었다당신도 그날, 저승과 이승 수없이 오갔으리라처음 사랑할 때 뜨겁게 달궈진 심장쿵 내려앉아 터진 아침누구도 밥 한 수저목으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당신만은 얼어붙은 겨울 강 온전히 건너길 바랐다볕 드는 양달의 가슴을 모질게 쪼아대던무지한 사람과 사람 몸에 박힌 가시묵정밭의 몹쓸 돌을 골라내길 바라던 무수한 기원그 담장에 산수유 꽃 다시 핀 봄이다검은 리본 주둥이를 문질러버리고 싶은환장하게 좋은 날, 비.틀.거.리.는 봄이다
간이역을 지나며 - 권선희너무 많은 역을 지나왔다잠깐씩 머무는 시간마다 숙성되던목이 긴 저녁이목마른 삶 위에 서서눈썹달을 밀고 있다얼마나 많은 정답을 지났는가모두가 길이고 모두가 숲인 세상을 돌며쉽사리 열리지 않는 희망을 두드리며우리는 얼마나 외롭고 암울한 시대를밀며 왔는가그러나무릎 꿇고 잠들지 않았으니머지않아 달은 굵어지고굵어진 달은 만삭의 몸을 풀어간절한 가슴마다 하나씩 하나씩희망을 낳을 것이다나무와 바위가 간격을 좁히고 흰 눈까지 소복이 나리고 나면바다엔 비늘처럼 돋는 햇살다시 봄은 필 것이다
오랜 세월 후 - 김승환오랜 세월 후문득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옹돌벽 사이로 물이끼 성성하고 검은 하늘에 구름 동동 떠다녔다. 옛날이 냄새처럼 코끝을 문지를 때, 느닷없는 슬픔이 등을 밀었다
뽀로록
사랑하지 않을 때 증오하는 사랑과 사랑하지 않을 때 슬퍼지는 사랑이 있다. 바람이 쓸고 간 달, 앙상한 얼굴에 검버섯 몇 개. 달맞이 위로 달이 떠도 외면하는 얼굴이 있다
씀바귀 꽃
바람꽃 메꽃 해꽃 달꽃. 살지 않으면 죽는, 꽃이 좋아서 간다고 했다. 종종걸음으로 간다고 했다. 산그늘 저기 어디쯤에
3부 야, 기분 좋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 안도현나중에 다시 태어나면나 자전거가 되리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패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가위가 광목 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나 어느 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또 어느 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종아리는 딴딴해지리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스로 풀고페달을 헛돌게도 하리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바큇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언덕이 가팔라 삼십 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단풍나무위의 신사 - 이인행어떤 노신사가 단풍나무 위에 올라섰다그는 노오란 노을과 단풍잎을 바라보며당신의 살아온 기억을 추억한다
아름답고 잔인한 시간은 바닥에 떨어지고그는 당신의 삶을 기뻐하고 또 슬퍼하며떨어지는 단풍잎과 노을을 바라본다
노오란 단풍잎이 떨어진다.그 나무 옆에 신사가 이렇게 말한다.“자네에겐 보람이 있었나?”
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간다운명과도 같은 단풍잎이 떨어진다우수수 떨어진다
밤이 되었던 사내 - 김종제세상 뒤엎을 조선 못자리에시골 촌놈 같은 씨를 뿌려서한 뼘 올라온 어린 모를넓은 한양에 옮겨심고벌레 잡아먹을 동지도 사귀고외롭게 행진하는 연습처럼잡초는 혼자서 뽑아버리고쑥쑥 잘 자란 벼를 골라낫으로 사정없이 벤 뒤에탈곡기로 탈탈 털어 한 바가지 담아냇물에 씻어 솥에 안쳐놓고엊그제 도끼 가지고 패놓은
독재에 권력에 불을 붙여서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한 서너 시간 팔팔 끓인 후에뜸도 들인 후에 뚜껑을 열어보니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하얀 쌀밥이 잘도 익어서주걱으로 움푹 퍼서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놓으니찬도 없이뜨거운 밥이 된 저 사내를한 술 먼저 뜨겠다고못난 백성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사과꽃 - 류근비 맞는 꽃잎들 바라보면맨몸으로 비를 견디며 알 품고 있는어미 새 같다
안간힘도 고달픈 집념도아닌 것으로그저 살아서 거두어야 할 안팎이라는 듯아득하게 빗물에 머리를 묻고부리를 쉬는 흰 새
저 몸이 다 아파서 죽고 나야무덤처럼 둥근 열매가 허공에 집을 얻는다
그대 잘 계시는지 - 이위발햇살이 뿌린 온기를노을이 가슴으로 안으며서녘으로 스며들 때누이 젖꼭지 같은 작은 풀꽃에그대의 흔적이 숨어 있는솔직한 계절 앞에서 땀만 흘려보내고 있네
버릴 것 하나 없는 뭇볕이마당 위에 뿌려질 때흙이 부풀어 오르듯그대의 소박한 밥상에도축복 받은 달빛 한쪽모서리마저 이울지 않게옆에서 지켜봐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