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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궁

박향 지음 | 나무옆의자
에메랄드 궁

박향 지음

나무옆의자 / 2013년 3월 / 292쪽 / 12,000원





새벽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숄을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어둠이 녹은 잿빛 공기가 싸아하게 몸속으로 빨려든다. 이 동네의 새벽기운은 썩 달갑지가 않다. 다른 동네라면 당연히 하루를 시작하는 활기찬 아침 어쩌구 하겠지만, 이곳의 아침은 다르다. 특히 해가 몰려오기 전의 새벽시간은 밤새 버려진 찌꺼기들이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어 마주하고 있으면 태연하기가 쉽지 않다. 신음하고 발악하고 기만하고 불태우고 난 뒤의 쓰레기들이다. 연희는 어깨를 타고 미끄러져 내린 숄을 잡아채며 주차장으로 향한다.번호판 가리개가 붙은 차들이 세 대 남아 있다. 잠을 잔 손님들은 대부분 이른 아침에 빠져나간다. 간혹 퇴실시간 직전에야 허겁지겁 모텔 뒷문으로 나가는 치들도 있다. 일회용 기저귀 같은 번호판 가리개를 꽁무늬에 붙이고 있는 차 몇 대. 아마도 그것은 격정적인 밤을 보낸 것도 모자라 아침나절까지 여자의 머리카락에 정액 냄새를 묻혀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들의 것일 게다. 그들은 사랑에 서툰 초보이거나 그 뜨거운 도가니가 언제까지라도 식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순정파임에 틀림없다. 뜨거울 때 그들의 식탐은 끝이 없다. 나무에 반질반질한 붉은 열매가 앞다투어 달려 있는데, 하나만 먹고 말겠는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다. 맛있고 달콤하고 향기롭지만 또 늘 부족하다. 그래서 조바심치고 안달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나무의 가장 진한 열매를 먹어보지도 못한 채 그들은 너무 일찍 질려버리고 만다.연희는 새삼 모텔을 둘러본다. 에메랄드MOTEL의 글자는 네온이 다 들어오지 않아 ‘에메랄드M’이라고만 되어 있다. 남편 상만이 일어나면 간판사에 전화 좀 걸어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희는 현관 앞 돌화분에 걸터앉는다. 맞은편에 군집한 아파트 옥상 위로 새벽 미명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다. 아파트 단지 외벽에 붙은 ‘주거환경 침해하는 러브호텔 사라져라’라는 현수막의 글자들이 또렷하게 밝아올 때쯤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두둑. 무릎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며 통증이 올라온다. 다리 아픈 것을 또 깜빡했다. 벌써 그런 나이가 된 것인지 작년부터 일어서거나 앉을 때 팽팽하게 늘어난 고무줄로 살을 퉁기는 듯한 아픔이 왔다. 병원에 가보자고 하면서도 전기찜질이나 하고, 그것도 안 들으면 약효가 며칠씩 지속된다는 파스나 붙이고 말았다. 몸 아픈 것까지 건망증이라니…… 정말 나이가 들기는 들었나 싶다. 연희는 다리를 움켜쥐고 통증이 가실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



아침

동쪽을 보고 있는 에메랄드는 해를 받는 아침나절에 가장 빛난다. 지붕 위에 아라비아 궁전을 본뜬 둥근 돔이 있는데, 아침 햇살이 닿으면 에메랄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부분이 보석같이 반짝거린다. 먼 곳에서 보면 그것은 뒤집어놓은 하트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고, 육감적인 여자의 엉덩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만은 보석이나 하트나 여자의 엉덩이나, 그게 모두 우리한테는 길조라고 낄낄거렸다.“저 황금 돔, 저것이 우릴 부자로 만들어줄 거야. 두고 봐.”

상만은 황금 돔을 봤을 때, 바로 저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연희 역시 낮이면 햇살에, 밤이면 노란 조명에 밝게 빛나는 돔이 마음에 꼭 들었다. 처음 모텔을 인수할 때 상만과 연희는 저 황금색 돔이 사랑에 몸살 난 연인들을 사정없이 유혹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곳이 곧 그들의 꿈의 궁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침 햇살에 눈이 익을 것 같아도 연희는 이 자리에 서서 찬란히 빛나는 황금 돔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황금 돔이 심장 속으로 들어와 핏줄을 타고 몸으로 서서히 번져갔다. 곧 자신과 돔이 일체가 되고, 연희는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은 오르가슴을 느끼곤 했다.연희는 빛을 피해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황금 돔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언제부턴가 황금 돔이 햇살에 빛날수록 초조해지는 버릇이 생겼다. 황금 돔이 황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황금 돔의 그 어처구니없는 무능함을 인정하고 난 뒤부터였을 것이다.아파트 외벽에 붙은 현수막이 을씨년스럽게 펄럭인다. 석 달 전쯤부터 내걸린 현수막은 그동안 비바람에 상해서 누렇게 찌들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현수막을 걷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걸 보고 있으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급기야 빌어먹을 욕설이 튀어나온다. 요즘 모텔 경기가 꼭 그 꼴인 것이다. 세상의 연놈들이 아랫도리가 근질거려도 오입질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는지 한창 경기가 좋아야 할 봄철에도 오뉴월 개불알처럼 축 늘어져 도저히 살아날 기미가 없는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러브호텔이라면 연놈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방방마다 좋아서 죽겠다고 앓고 난리를 쳐야 제대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실물경제가 어떻고 지수가 어떻고 떠들어대지만 그게 다 개소리다. 러브호텔이 얼마나 잘되느냐만 보면 안다. 온 나라 백성들이 돈이 많아 흥청망청해지면 그 돈이 제일 먼저 어디로 가겠는가? 등 따시고 배부르면 남의 살이 그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

몇 년 전에 성매매특별법이 만들어졌을 때는 이 동네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예 손을 놓고 빚을 진 채 이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모텔 사업은 안 되는구나 하고 죽을 준비만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희망의 풀씨를 심어준 것은 바로 인간들의 욕망이었다. 몸을 불태우고 싶어 안달을 하는 연인들은 어둠을 틈타 이곳을 찾았다. 무슨 중요임무라도 맡은 사람처럼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연인들이 모텔에 잠입을 하면 연희는 그 모습이 기특해서 표창장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이 당장 종말을 맞이하더라도 인간들이 하고 싶어 안달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남녀 간의 그 짓일 거였다.하지만, 그들이 온다고 좋다구나 손뼉만 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텔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방으로 직행하는 1실 1주차 무인시스템에, 수중안마기와 거품물결 월풀욕조 2인탕은 기본으로 구비해놓고 실내장식을 최신 아파트처럼 꾸며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모텔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컴퓨터로 다운받은 영화를 42인치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모텔은 욕실에까지 벽걸이 텔레비전을 설치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모텔 카페를 만들고, 사용 후기를 올리면 유효기간이 기재된 할인쿠폰을 주고, 카페 회원에게 할인제, 공동구매제, 거기다가 마일리지 카드까지 발급해준다니 에메랄드가 살아남으려면 발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뭔가 새로운 모색을 하지 않으면 사막 한가운데 모래 속에 파묻혀 흔적도 없어져버릴 지경이었다. 결국 리모델링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무서워서 그렇지 진작부터 리모델링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있는 모텔들을 잡아먹을 듯이 으리으리하게 광을 내며 새로운 모텔들이 주변에 생겼다. 분위기 찾는 사람들은 자꾸 그쪽으로 쏠려갔고, 그렇게 간 손님들은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빈 프런트를 지키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전 누전으로 화재가 났고, 겨우 방 한 칸 태웠을 뿐인데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나마 보험에 들어 있어서 보상이 그럭저럭 해결되기는 했지만 이쪽저쪽으로 무마시키는 데 나간 돈도 한두 푼이 아니었다. 손을 털자니 이미 진 빚을 까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어차피 불에 탄 방도 수리해야 했고, 주변 모텔들의 상황이 이런데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도 없었다. 건물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아 큰맘 먹고 재작년에 리모델링 공사를 감행한 것이다.외관이 깨끗해지니까 처음에는 확실히 손님이 늘었다. 상만은 그것 보라고, 서비스업은 그저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거라고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그 약발은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리모델링의 단물을 다 빨아먹은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즈음 들어서는 시집 보낸 딸년 기다리는 친정어미 같은 심정으로 갈색 코팅이 된 유리문만 목을 빼고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 빈손으로 돌아설 게 뻔했다.대출금을 갚아나가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대출금 상환 날짜를 어겨서 은행 직원이 다녀간 것이 벌써 대여섯 번은 된다. 상환이 안 되면 경매에 넘어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가는 은행 직원을 보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마치 상대도 안 되는 줄다리기의 맞은편 줄을 잡고 서 있는 기분이다. 팽팽해진 줄을 저쪽에서 일부러 놓든지, 아니면 힘으로 지든지 어쨌든 이쪽은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급기야 저번 달부터는 상만에게서 빌어먹을 이놈의 모텔, 팔아치워버리자는 소리가 솔솔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차마 그 말에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연희에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자식과, 자식 같은 이 건물이었다.

이 모텔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처음 식당 종업원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작은 라면가게 하나 차리는 게 목표였다. 식당의 게으른 주방장 덕분에 몇 번 음식을 만들어내다가 정식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장이 되니 욕심이 생겼다. 남의 식당 주방장 일을 일 년쯤 하고 나니 자기 식당이라도 하나 가졌으면 하는 꿈은 당연했다. 하지만 집세 주고 관리비니 뭐니 제하고 나면 빚만 덩그러니 남을 게 뻔했다. 엄두가 나지 않는 그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래도 붙임성 좋고 죽어라 열심히 일한 상만 덕분이었다. 상만이 몇 번 공사장 십장과 함께 연희가 일하는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왔다. 십장은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면서 기대하라더니 정말로 공사장 함바에 딸린 식당을 운영하게 해주었다. 함바 식당 할머니가 허리 디스크로 일을 더 이상 못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사장 규모가 제법 커서 밥을 먹으러 오는 인부들이 꽤 되었다. 공책에 공사장 인부들의 밥공기 수를 그은 작대기가 하나씩 늘어가면 가슴속에서 희망이 쌓였다. 공사가 끝나자 작은 여인숙을 하나 인수할 만큼 돈이 생겼다. 여관 장사라는 게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번다는 상만의 주장에 연희는 간단하게 식당을 접었다. 에메랄드 모텔을 인수한 것은 여인숙 장사 오 년 만이었다. 경매에 나온 물건이었으나 인수하기에는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때 우연찮게 손에 들어온 상만의 재산이 있었다. 무모한 시도였지만 안 되면 손 털고 처음 빈털터리였던 때로 돌아가면 된다는 배짱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초 빚을 껴안고 이것을 받아 안은 것 자체가 이미 망조였다.



사랑

웬일인지 새벽까지 앉아 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서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이 하기 싫은 것이 아니다. 말은 목구멍에서 맴도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냥 열쇠를 주고 돈을 받는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가끔 몽롱한 기분이 찾아온다. 한낮에 비몽사몽을 헤매는 것이다.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접수구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희는 막 꿈속을 비집고 나온다. 노인네 두 사람이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어제도 온 사람들이다. 어제도 오늘과 같은 오후 두 시쯤이었던 것 같다.“네, 방 드릴까요?”

쑥스러워하며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곱게 분을 바른 할머니는 얼굴에 주름은 졌지만 눈웃음치는 눈매며 오똑한 콧날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젊었을 때 사내들 잠깨나 설치게 만들었을 얼굴이다. 하지만 그 고운 태 군데군데 묻어 있는 신산한 흔적을 감추기는 어렵다. 평화로운 주름살이 아니라 고생스러운 주름살이다. 할아버지는 노인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사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부부라면 이곳까지 왔을 리 없을 테고, 이틀씩 연달아 찾아온 어떤 연유가 있을 것 같다. 두 노인네가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삼 층에 머물렀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온다. 할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이거 좀 드세요.”

할머니가 봉지에서 사과 세 개를 내어놓는다.

“영감이랑 나눠 먹으려고 사 가지고 온 건데, 둘이 먹기에는 좀 많아서…… 글쎄 삼천 원어치는 안 준다고 그러고, 오천 원어치는 너무 많고 말예요.”“아유, 괜찮아요. 들고 가서 드세요.”

“우린 좀 많다니까…….”

그냥 사과를 주기 위해서 내려온 것 같지는 않다. 사과를 내밀고 나서도 머뭇거리며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방에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할머니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이라도?”

연희가 안내실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온다. 방석을 권하자, 그냥 바닥에 앉으며 잠깐 이야기하겠다고 들릴 듯 말 듯 운을 뗀다.“저기,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다 늙은 노인네가 이런 델 자꾸 찾아와서 주책이라 생각하실 것도 같고…….”“아이,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걱정 마세요.”

“우리가요, 부부는 아니에요. 근데, 불륜도 아니구요.”

어렵게 말문을 연 할머니의 얼굴이 발갛게 홍조를 띤다. 예순 중반이나 될까.

“둘 다 사별하고…….”

“두 분 다 혼자시고 외로우신데, 합치지 않으시구요.”

할머니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게요. 젊었을 때는 남편도 없이 홀몸으로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자식들도 다행히 착하게 커서 다 출가하구요. 엄마 말년에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도 하고요. 근데, 막상 재혼 이야기가 나오니까……. 자식들이 그러네요. 우리만으로 안 되겠냐고, 손주들 재롱이나 보면서 그냥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면 안 되겠느냐고요. 창피하다고, 창피하게 이제 와서 무슨 결혼이냐고…….”“자식 다 소용없다니까요. 그래, 얼마나 서운하셨어요?”

“그러게요.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냐고, 우리 막내아들이 그럽디다. 그 말 듣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밤새도록 울었어요.”“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영감님은요? 영감님 댁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요, 뭐…… 그 집 아드님, 며느님이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었죠…….”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금세 어두워진다. 연희는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잘 오셨어요. 자식들 다 키워놓고 이제 걱정도 없으신데, 세상에 남아서 사시는 날까지는 사랑하면서 사셔야죠.”“우린 그냥 함께 있을 공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요즈음 새로 생긴 데는 너무 으리으리해서 우리가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좀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여기가 그래도 아담하고 편안해 보여요. 별일 없으면 매일 오려고요.”“그렇게 하세요. 그러면야 저흰 좋지요.”

“우린 이제 다 된 사람들이에요. 젊었을 때 흉내도 못 내지요. 그냥 하루에 두 시간이라도 부부처럼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심부름도 해드리고 같이 텔레비전도 보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죽는 날까지 우리가 얼마나 볼 수 있겠어? 자식들 눈치가 보여서 밖에서는 마음대로 만나지도 못해요. 아들 녀석이 요즈음은 안 하던 전화까지 매일 해대는 통에 말예요. 아예 감시를 한다니까요. 그래서…… 집에서 각자 점심을 먹고, 이곳 버스정류장에서 만나요. 매일요.”갑자기 울컥 목구멍으로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이다. 무엇이 연희를 이런 과잉감정 속으로 몰아넣었는지 알 수 없다. 한마디라도 말을 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연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말을 마친 할머니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안내실을 나간다. 갑자기 뭘 빠뜨린 사람처럼 연희는 얼른 할머니를 뒤쫓아 간다.“저기요, 편안하게 더 있다가 가세요. 시간 넘어도 눈감아드릴게요.”

뒤를 돌아다본 할머니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오른다.

그들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왔다. 두 분이 드시는 방은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실을 하지 않았다. 대실비도 오천 원을 할인해드렸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부모님을 보는 것 같은 애틋한 마음이 들어 오후 두 시만 되면 연희는 그들이 기다려졌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단잠이라도 들면 카운터로 내려와 연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대체로 할아버지 자랑으로 시작해서 할아버지 자랑으로 끝나지만 할머니의 가만가만한 말소리는 얄밉지 않고 정겹기만 해서 연희는 은근히 이야기를 더 부추기곤 했다. 할아버지가 상당한 재력가라는 것과 식물에 관한 전공을 하신 대학교수 출신이라는 것도 그렇게 알아낸 사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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