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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배상열 지음 | 비봉출판사
함흥차사배상열 지음비봉출판사 / 2012년 5월 / 440쪽 / 12,800원



공양왕 4년(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이 왕비를 대동하고 이성계의 자택으로 거둥했다. 왕대비까지 거둥하고 의장과 기치가 찬연한 것이 자못 범상치 않았다. 예전에 언급한 ‘이성계와의 동맹’을 실현하기 위해 왕이 직접 거둥한 것이었으며, 왕대비가 동행한 것은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서 재가를 위함이었다. 연회가 무르익자 공양왕이 정식으로 동맹을 언급하려는데 배극렴이 나서 왕대비에게 고하였다.“지금 왕이 혼암하여 임금의 도리를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니 폐하기를 청하옵니다.”한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공양왕의 폐위와 고려를 멸망시키겠다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차피 고려의 운명은 결정적이었으되 막상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자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성계의 자택을 나선 왕대비가 궁궐로 향하자 공양왕이 침통한 기색으로 따랐다. 환궁한 왕대비가 남은과 정희계가 대령한 교지를 받아 들고 폐위를 선포했다.“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꿇어 엎드린 채 왕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꺼내는 공양왕이 눈물을 줄줄 떨어뜨렸지만 신하들은 슬픈 기색이 없었다. 폐위당한 공양왕은 옥새를 물려주고 원주로 내려갔다.

7월 16일, 이성계의 자택 앞에 무수한 사람이 모였다. 이미 13일에 왕대비가 이성계를 임시로 나라를 보살피는 감록국사로 삼았을 때부터 인파가 물밀 듯하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대비에게 공양왕의 폐위를 청했던 배극렴과 조준, 정도전 등과 고위관리와 원로는 물론, 주요한 친척 등등 수십 명이 이성계의 자택으로 향했다.그들이 옥새를 받들고 나아가니 무수한 사람들이 골목을 메우는 바람에 지나가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모두가 기쁘고 흥분하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한편 이성계가 대문을 걸고 열어주지 않는 바람에 옥새를 전하는 행렬이 오래도록 지체되었다. 여름의 긴 나절이 지나가고 석양이 드리울 때에 이르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한 배극렴 등이 억지로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감록국사는 속히 전국새(옥새)를 받으시오!”배극렴이 크게 외치고 옥새를 대청에 놓았으나 이성계가 두려워하며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이성계가 이천우에게 의지하여 침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백관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성계가 자못 두려워하여 이렇게까지 된 것을 책망하자 배극렴 등의 모든 신료들이 한목소리로 왕위에 오르기를 청하였다.“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이성계가 절절하게 말했다. 이에 대소신료들과 원로와 동리의 유력자들이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했다. 이성계가 재삼재사 사양하는데 누군가가 왕위에 오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외쳤다. 모두가 크게 놀라 바라보자 바로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였다.“부친께서는 지금 말하신 것처럼 왕위를 받으면 절대 안 됩니다! 그동안의 배반도 견디기 어려웠거든 또다시 배반하려 하십니까?”“밀직부사는 입을 다무시오! 이렇게 복된 날에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이오!”배극렴이 쩌렁하게 외쳐도 이방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나의 조상이 고려를 배반하고 원나라로 건너간 이후 비록 조부가 돌아왔다고는 해도 다시 원나라를 배반한 것에 지나지 않소이다! 게다가 부친이 고려에 반역하여 멸망시키는 최악의 배반을 저지르려는데 어찌 아들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라옵건대 부친께서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사양하시고 고려의 용장으로 남으십시오!”이방우가 불을 뿜는 것처럼 외쳤다. 절망과 소주에 절어 지내던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또한 부친께서는 이 땅의 임금이 될 자격 자체가 없으십니다! 왜 그런지 밝히기 전에…!”절절하게 외치던 이방우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목 안쪽의 급소를 강하게 움켜잡아 기절시킨 이원계(이성계의 형)가 가벼운 자루를 옮기는 것처럼 이방우를 어깨에 둘러메고 후원으로 향했다. 모든 자들이 한바탕 악몽을 꾼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데 정도전이 나서서 만세를 외쳤다. 옆에 선 자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저마다 목청껏 만세를 외치자 악머구리가 들끓는 것처럼 소란하고 난잡했다.이방우의 기억을 빠르게 묻어버린 정도전이 재차 왕위를 권유하려는데 이성계가 귀를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정도전이 표정을 감추고 주변에 눈짓하여 이성계를 안으로 이끌었다.

***7월 17일, 궁궐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린 이성계가 묵묵히 걸었다. 뭇 백성이 주시하는 가운데 염천의 거리를 걸으려니 어색하고 민망했다.정문에 이르자 문무백관들이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다. 대전 저만치 어좌가 보였다. 임금이 앉는 자리를 피하고 기둥으로 구획된 내부에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다. 육조의 판서 이상의 모든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에 오르게 하였지만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다시 어좌를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외치는 것 같았다. 격노한 공민왕의 꾸짖음이 범종처럼 웅웅거리며 전내를 떠돌았고, 주정하는 것 같은 우왕의 음성과 아직 어린아이를 면하지 못한 창왕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다. 겨우 힘을 모은 이성계가 나직하게 말했다.“내가 수상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이성계는 중앙과 지방의 대소신료들에게 예전대로 정무를 보도록 명한 다음에야 비로소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드디어 왕이 되신 것입니까? 정말 장하십니다.”강씨가 웃으며 이성계의 버선과 겉옷을 벗겨주었다.

***8월 7일도 부산하게 돌아갔다. 이성계가 즉위한 지 이십여 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도총중외제군사부를 폐지하고 의흥친군위를 설치하여 주변을 강화한 것이 첫 번째였다. 또한 이미 유배한 이색을 위시하여 우현보와 설장수 등등의 반대파들을 머나먼 곳으로 유배하고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여 고려의 색채를 희석시켰다.물론 가문을 세탁하기 위한 작업도 병행되었다. 그 일련의 작업에 강씨도 포함되었다. 정식왕비인 현비의 칭호를 받고 중궁전에 거주할 수 있게 된 강씨의 기쁨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왕자로 격상된 이성계의 아들들과 역시 종친으로 격상된 친척들이 군호를 받게 되었다. 장남 이방우는 진안군이라 하고, 이방과는 영안군(永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절제사로 삼고, 이방의는 익안군이라 하고, 이방간은 회안군이라 하고, 이방원은 정안군이라 하고, 이방번은 무안군이라 하였다.

***- 내가 누군 줄 알겠느냐?곤룡포 차림의 훤칠하고 중후한 노인은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나와 그대는 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 후일에도 동일하게 호칭될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는가?- 아! 알겠습니다!이성계가 탄성을 질렀다. 그는 바로 왕건, 고려를 일으킨 태조였다.- 헌데 어인 일로 소인을 찾으셨습니까?- 그대는 나의 자손들을 어이 그렇게 핍박하는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보좌를 빼앗았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왕씨와 그에 딸린 자들을 그리도 많이 죽이는 것인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들의 힘이 만만치 않은 이상 반역이라도 저지르면….- 답답하구나! 저런 자가 어찌 태조가 되어 나라를 개창했다는 것인가!왕건이 크게 탄식했다.- 내가 후백제와 신라를 아우르고 고려를 개창할 수 있었던 것은 포용과 상생의 도리를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포용과 상생이야말로 제왕, 특히 태조가 가져야 할 덕목이거늘 어이하여 그대는 강제로 고려를 멸망시키고도 모자라 왕씨들의 씨를 말리려는 것인가!- 소, 소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부하들이 그리 하려는 것일 뿐….- 아래에게 휘둘리는 자체가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어쩌다가 그대 같은 사람이 태조가 되었으니 한탄할 따름이지만 아무튼 대가는 치러야겠지.갑자기 왕건의 표정이 변했다. 길게 찢어진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튀고 날카로운 이빨이 돋은 입에서 뱀의 혀 같은 것이 날름거렸다.- 너의 아들들은 서로 싸우다가 죽일 것이며 너 역시 아들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또한 너의 나라는 정신과 기백을 알지 못하고 오직 굴종과 핍박을 즐길 것이며 단 한 차례도 비좁은 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오오! 더러운 짐승들에게 저주 있으라!어느 틈에 뽑아 든 칼이 이성계의 목을 쳤다. 잘린 목에서 피가 뿜어지고 머리가 텅텅대며 구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오늘도 편히 잠이 들기는 틀린 것 같았다.

***“차제에 세자를 정하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이성계가 나직하게 말했다. 배석한 정도전과 조준, 배극렴, 김사형, 남은 등이 크게 긴장하는 가운데 정도전이 흘긋 이성계를 바라보았다. 거듭된 주청에 마지못해 따르는 기색이 완연한 데다 몹시 지쳐 보였다.“적장자로 세우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입니다.”먼저 배극렴이 말했다. 배극렴도 장자인 이방우가 안 된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했지만, 후환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칙을 내세우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예상대로 이성계의 표정이 마뜩치 않았다.“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원컨대 세 번 이상 생각하소서.”조준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적장자 이방우가 고려의 신하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자격을 상실시킨 지금에 ‘공 있는 이’는 이방원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순간 느닷없는 울음이 터졌다. 미리 옆방에서 대기하던 강씨의 발작적인 통곡에 이성계는 물론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던 정도전까지 깜짝 놀랐을 지경이었다. 이성계가 잠시 생각하더니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라고 명했다.“무안군의 이름을 적으라!”조준이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이 자리에서 이방번(강씨 소생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적으라는 것은 바로 세자로 삼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붓을 집은 조준의 손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한동안이나 망설이던 조준이 들고 있던 붓을 내렸다.“지금의 하교는 따르지 못하겠사옵니다.”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결연한 표정의 조준을 바라본 이성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성계가 잠시 밖으로 나간 다음 논의가 있었지만 이성계의 뜻이 확고한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차라리 의안군이 어떻겠습니까?”배극렴이 체념하듯 말했다. 아무리 이성계의 뜻이라고 해도 공양왕의 조카딸을 아내로 두고 있는 무안군 이방번을 세자로 삼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는 만큼 의안군(이방석, 강씨 소생의 둘째 아들)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논의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성계가 들어왔다. 신하들의 논의를 보고받은 이성계가 고개를 끄덕였다.“경들의 뜻에 따라 의안군을 세자로 세우도록 하겠소!”“성은이 마앙극하여이다!”

***“처음부터 의안군이 목표였습니다.”이방원의 책사 하륜이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누가 보아도 자격이 되지 않는 무안군을 민 것은 그를 양보하는 대신 의안군을 책봉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여론을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양보하는 것 같지만 애초부터 선택을 제한시킨 고단수의 술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이번 사태로 인해 정도전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정도전은 이성계 이후의 정치판까지 지금 이상으로 완벽히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너무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이 있는 분이 충분히 거론된 이상 정안군 나리께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이보시오! 이미 세자가 결정된 이상 무슨 기회가…”발끈하여 반박하던 민무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적장자가 세자가 되었다면 영영 기회가 없겠지만 이번의 사안은 충분히 명분을 얻을 수 있는 만큼 결코 실망하지 않소.”이방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성계가 의안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신의왕후로 추존된 한씨 소생의 왕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할 우려가 컸다. 아무렴 정도전이 이방원처럼 정통성을 더욱 갖춘 데다 야심만만한 왕자들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 이방석을 안전하게 즉위시키고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기 위해서는 이방원을 위시한 왕자들의 제거가 필수적이었다.앞으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의문사를 당하거나, 자신을 즉위시키려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장에 끌려갈 우려가 대단히 높았다. 그런 만큼 이방원이 대업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으며 여론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이번의 건저(태자나 세자를 세우는 일)로 인해 장군들과 종친들도 역시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것인 만큼 충분히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건저는 오히려 다행스런 일입니다.”“그렇소. 대업의 성사에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 호정(하륜)이 부지런히 움직여주시오.”이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정도전을 떠올린 이방원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성계 3년(1394년) 2월 29일, 정도전이 병권을 책임진 판의흥삼군부사 자격으로 군제의 개정에 관한 상서를 바쳤다. 군대를 개혁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와 주변 국가들의 현황 등에 이어 어떻게 나누고 지휘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주장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 과연 정도전이라는 찬사가 저절로 나왔다.정도전의 능력은 무한한 것 같았다. 필수적 교양인 문학과 시서 이외에도 법전과 행정에 군사와 음악과 농사 같은 분야는 물론,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역산서와 심지어 의술에 대한 분야까지 이르지 않는 영역이 없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평생에 한 권 저술하기도 어려운 내용을 미리 차려놓은 음식을 담아내듯 하는 데다, 아무리 어려운 업무라도 식은 밥 물 말아 먹듯 해치우는 정도전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자들까지 있었다. 정도전이 있는 한 조선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는 희망이 넘쳤다.

이성계 4년(1395), 새로운 도읍의 실체가 위용을 드러냈다. 그토록 다그쳤던 이성계도 불과 일 년 만에 완성에 가까운 실적을 올린 것을 보고는 감탄을 거듭할 정도였다.“지금까지의 경과를 간략하게 보고 드리겠습니다.”정도전이 지도를 펴자 이성계와 무학을 위시한 모든 자들이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주궁의 명칭은 경복궁(景福宮)이라 할 것인데, 이는 시경에 나오는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의 대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경복궁의 중심에 백관의 조회를 받고 집무와 위엄을 펼치는 전각이 있사온데 명칭은 근정전(勤政殿)이라 할 것입니다. 근정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은 어떻겠습니까?”경복궁과 근정전에 이어 집무하고 쉬는 모든 용도의 건물과 광화문을 위시한 궁궐의 대문들의 명칭과 용도까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정도전에게 우레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이성계와 무학은 물론, 정도전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방원과 하륜 같은 자들까지도 아낌없이 찬탄할 정도였다.

***“정안군께서 어인 일이십니까?”정도전이 몸을 일으키며 이방원을 맞았다.“이렇게 늦은 밤에 소인을 찾으시다니,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십니까?”“진즉에 삼봉과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미처 기회가 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소인도 그렇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기 전에 목이라도 축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잠시 후 술상이 들어왔다. 의례적인 태도로 두어 잔을 주고받은 이방원이 잔을 탁! 놓았다.“삼봉께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건국하고 여기까지 이끌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오히려 왕자의 한 사람으로서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과찬이십니다. 응당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그러나 최근 삼봉의 행보는 지극히 실망스럽소. 아니, 반역에 가깝소이다!”정도전을 바라보는 이방원의 눈빛은 더없이 날카로웠다.“보다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전하의 눈을 가리고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여 조선을 삼봉의 나라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첫째고, 왕실의 후계에 개입하여 나를 포함한 정비 소생의 왕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 둘째이며, 종주국인 명나라를 공격하여 제후국으로서 씻을 수 없는 불충을 저지르려 하는 것이 셋째이고, 그로 인해 나라를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려는 것이 넷째이며, 또한 가여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 다섯째요! 이것이 반역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반역이겠습니까? 입이 있으면 변명을 해보십시오!”“정안군 나리의 말씀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만….”“말씀하시오.”“전하께서 과연 태조가 되실 자질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이방원의 눈이 번뜻 치뜨이고 주먹에 불끈 힘줄이 돋았다.“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고 싶어 찾아온 사람은 소인이 아니라 정안군이십니다. 본인이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감정의 절제가 되지 않으신다면 더 이상 대화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할 밖에요.”날카롭게 바라보는 정도전의 눈빛에서는 위협이 넘실거렸다. “일단 방금 전의 질문에 답변을 부탁드리겠습니다.”“전하를 바라보는 시각은 삼봉이나 그리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태조의 자리에 적합한 분이셨다면 삼봉에게 휘둘리지도 않겠거니와, 후처 소생의 막내를 세자로 삼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그래도 전하께서는 그 자리에 오르시기 위해 갖은 역경을 이겨내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목숨을 걸고 보위를 쟁취하셨지만, 정안군 나리를 위시한 왕자님들은 가만히 있으면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습니까?”“…….”“만일 진안군께서 돌아가시지 않고 세자가 되어 보위를 물려받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이방우가 술을 가까이하지 않고 제정신인 상태에서 보위에 올랐더라도 명군은커녕 평범한 군왕 이상의 반열에 들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그럴 경우에도 정도전의 꼭두각시 이상은 어려웠을 터인데, 이성계보다 훨씬 못할 것은 불문가지였다.“나는 다르오! 삼봉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잘 해나갈 자신이 있단 말입니다!”“그 점은 소인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정안군 나리의 기량과 자질이라면 얼마든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만들 수 있으실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니까요.”이방원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스쳤다.“그러나 정안군 나리의 자제분들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정도전이 흘긋 이방원을 바라보았다.“제왕이 아무리 엄격하게 세자를 가르치고 싶어도 세자가 따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데다, 세자의 사부 역시 나중에 세자가 보위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엄격하게 가르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나마 세자가 게으르고 무능하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유능한 신료들이 잘 보필하면 그럭저럭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세자가 잔인하고 포악하기까지 하다면 어쩌시겠습니까?”이방원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성계의 아들들은 자신을 제외하면 장삼이사처럼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던 것도 이성계가 공을 세운 덕택이지 결코 자신이 뛰어나거나 집안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설령 이방원이 보위에 오른다고 해도 게으르고 무능하거나, 포악한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 판에 조선의 왕실에서 대대로 뛰어난 장남이 태어나고 그로 하여금 보위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도전의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하지만 관료들은 다릅니다. 소인을 포함한 관료들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경쟁을 뚫고 입신한 만큼 최소한 무식하거나 무능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를 이끌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과거는커녕 공부를 하기 위해 날밤조차 새워보지도 않은 왕자님들만 못하겠습니까? 그것은 대과에 급제하신 정안군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소인은 학식과 능력이 검증된 관료들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삼봉의 주장이 일견 합당한 것 같으나 왕도와는 절대 부합하지 않습니다! 왕은 멀거니 선장의 자리에 앉아 관료들이 노를 젓고 키를 잡는 대로 갈 수밖에 없으며, 수레로 쳐도 내부의 안락한 자리에 앉아 마부가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창밖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 이상이 허용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삼봉의 사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멍청한 선장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가 난파당하는 것보다는 똑똑한 선원들에 의해 무사히 항해하는 것이 백번 옳고, 고삐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는 주인에게 마차를 맡겼다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보다는 유능한 마부가 마차를 몰아 안전하게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 백번 낫지 않겠습니까?”“다시 말하지만 삼봉의 말대로 된다면 왕은 그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고 왕실 또한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 본인은 왕자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소이다!”“그것이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신료들이 애써 이룩한 모든 성과는 왕에게 바쳐질 것이며 가만히 있어도 왕실의 위엄과 품위가 넘치도록 지켜질 것인즉, 소인 같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입니다.”“닥치시오! 감히 전하와 왕실을 모독한 죄는 대역으로 다스릴 것이외다!”이방원이 크게 노했지만 정도전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명 태조 주원장이 즉위한 초기부터 기반을 공고히 한다는 구실로 무고한 공신과 유능한 신료들을 무려 십만이나 넘게 죽이고도 나라가 어지럽기는 매한가지 아니더이까? 그러나 소인은 겨우 몇십 명을 죽이면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지금 협박하는 것이오?”“다시 말씀드리지만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신 분은 제가 아닙니다.”이방원을 날카롭게 바라본 정도전이 잔을 권하자 이방원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맞받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부디 잘 가십시오.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잘 가라는 정도전의 말이 유난히 섬뜩했다. 비틀거릴 뻔했던 것을 겨우 가눈 이방원이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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