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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허준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구암 허준

이재운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3년 3월 / 320쪽 / 13,000원





혼례

명종 임금이 즉위한 지 20년째인 1565년이 되었다. 허준은 이제 씩씩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허준의 얼굴에는 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양반의 소실 몸에서 태어난 몸, 서얼인 허준은 양반처럼 벼슬에 나아갈 수도 없고 상민이나 천민처럼 살 수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하늘을 나는 용도 못 되고 땅을 기어 다니는 뱀도 아닌 이무기 같은 처지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허준의 가슴은 무거운 바윗덩이에 짓눌린 듯, 혹은 답답하고 넓은 바다에 홀로 떠가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허준은 자신의 미래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반쪽짜리 양반인 서출, 이런 신분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방 관아의 아전이나 통역을 하는 역관, 또는 병을 고치는 의원밖에 없다. 물론 어느 하나 관심이 가지 않았다. 허준은 읽고 있던 책을 덮어놓고 봉긋하게 잎을 내미는 버들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하인 하나가 허준에게 달려와 아뢰었다.“도련님, 작은 마님이 찾으십니다.”

허준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별당으로 갔다.

“어머님, 찾으셨습니까?”

허준의 어머니 김 씨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너도 혼인을 해야 할 나이가 아니더냐? 지금 장가를 든다 하여도 늦은 나이다. 다행히 너와 어울릴 만한 짝을 찾았는데 어디 한번 들어보겠느냐?”혼인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에 허준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웃 고을인 하동 최 대감의 따님이다. 비록 우리처럼 소실의 딸이기는 하지만 매우 음전하고 손끝도 맵다고 하더라. 어떠냐, 나는 그 처녀가 마음에 든다마는….”그때 허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다솜…. 언젠가 지리산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져준 약초꾼의 딸. 친구 창돌이와 함께 몰래 찾아가 먼발치에서나마 보았던 그 자태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허준은 어머니에게 다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을 뛰쳐나가 산에서 헤매다 지쳐 쓰러진 자신을 구해 준 일부터 그 후 다솜이 보고 싶어 그 마을까지 찾아가 몰래 지켜보았던 일까지 자세히 말했다. 김 씨는 아들 허준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한참 후에 입술을 물며 말했다. “혼인은 당사자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문제이기도 하다. 네 마음도 충분히 알겠다만 먼저 부사 어른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구나.”마침내 허준의 집에서 다솜의 집으로 매파를 보내자 그쪽에서도 청혼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혼례식을 올린 허준과 다솜은 부부가 되었다. 부부가 된 다솜과 허준은 분가해서 신혼살림을 차렸다.허준과 다솜 부부는 말 그대로 깨가 쏟아지는 듯 즐겁고 정답게 신혼 생활을 해 나갔다. 무거운 짐마냥 지고 있던 근심 걱정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그 지긋지긋한 신분마저 잊은 듯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 운명이 그들을 결코 가만 둘 리가 없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되었다.

허준이 마루에 앉아 글을 보고 있는데 빨래터에 나갔던 아내가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로 돌아왔다.“무슨 일이오?”

아내 다솜은 남편 허준을 보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머님께서 편찮으시다고 하십니다. 빨리 본댁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허준은 미친 듯이 본가를 향해 달렸다.





명의 유의태

안마당에는 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허준은 집에 도착하자 서둘러 내당 마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곧바로 어머니 김 씨가 머무는 별당으로 달려갔다.“어머님….”

김 씨는 머리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고, 볼은 야위어 홀쭉했다.

“언제부터 이리 편찮으셨어요?”

허준은 옆에서 김 씨의 시중을 들던 곱단 어미에게 물었다.

“벌써 보름이 다 되었습니다. 아무리 의원들이 지어온 약을 먹고 침을 맞아도 작은 마님의 병에 별 차도가 없으십니다.”허준은 곁에 있던 곱단 어미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의태라는 의원이 용하다는데, 그 의원한테 어머니를 보여 봤어요?”

“웬걸요. 벌써 몇 번이나 유 의원 댁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번번이 퇴짜만 맞았는걸요. 유 의원에게는 워낙 병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순서가 얼른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옵니다.”허준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유의태 의원의 집으로 달렸다. 허준이 유 의원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기울어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유의태의 집은 의원의 집답게 이런저런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들이 구세원(救世院)이라고 부를 뿐 딱히 의원(醫院)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마당 한 귀퉁이에 마련된 병실에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허준은 과연 유 의원을 어머니에게 모셔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유의태의 진료가 끝이 난 듯했다. 허준은 잔뜩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키면서 유의태가 진료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그때였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방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켜더니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몇 번 하고는 다시 이리저리 목을 돌리며 체조를 했다. 허준은 직감적으로 그가 유의태라는 것을 알았다. 허준은 용기를 내어 유의태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저, 유 의원님이시지요?”

허준이 다가서자 유의태가 고개를 돌려 허준을 바라보았다. 별빛에 드러난 유의태의 눈에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채가 났다.“저는 저 건넛마을에 사는 허준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저희 어머니가 매우 편찮으십니다. 벌써 보름째 자리에 누워 꼼짝 못 하고 계십니다. 의원님께서 한번 봐주십사 하고….”허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의태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날 찾아올 필요가 없네. 구세원 말고도 의원은 많으니 다른 의원을 찾아보게.”“다른 의원들은 벌써 여러 명 다녀갔습니다.”

“제 어미를 염려하는 것은 동물들도 하는 일이네. 자네 혼자만 효자가 아니란 말일세. 그리고 나는 환자를 여럿 봐서 지금 몹시 피곤하네.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하지만 의원님!”

허준이 막무가내로 매달리려 하자 몸집 좋은 유의태의 제자가 나서서 앞을 가로막았다. 허준은 자신을 가로막는 그 제자를 힘껏 밀친 뒤 소리쳤다.“의원의 소임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까?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위중해 자리에 누워 있는 병자가 있는데, 피곤하다고 보지 않으면 그것을 어찌 의원의 바른 자세라 하겠습니까?”유의태는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허준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누구라 했지?”

유의태가 물었다.

“허준이라 합니다. 편찮으신 우리 어머니는 용천 부사를 지내신 허륜 대감의 소실이오.”

허준의 대답을 들은 뒤, 유의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의원님, 의원님!”

허준이 재차 큰 소리로 불렀지만 유의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덩치가 큰 유의태의 제자가 허준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허준은 늦은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허준과 아내 다솜은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며 어머니를 간호했다.

허준이 까무룩 잠이 든 새벽녘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아내 다솜이 놀란 토끼눈으로 허준을 깨우고 있었다.

“서방님, 유의태 의원님이 오셨습니다.”

“뭐라고?”

허준은 밖으로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유의태가 별당 마당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허준은 황급히 마당으로 내려섰다.“병자는 이 방에 있는가?”

허준은 유의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유의태는 잠자코 김 씨 곁에 앉아 맥을 짚었다. 허준과 아내 다솜은 유의태에게 어머니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되는 것 같아 한숨 놓이는 기분이었다. 허준은 유의태가 하는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몇 년 전 지리산에서 우연히 보았던 유의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바위처럼 앉아 병자에게 침을 놓던 그림자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유의태가 다녀간 뒤 김 씨는 별스런 약을 먹는 것도 아닌데 하루가 다르게 차도를 보였다. 먹은 거라곤 유의태가 처방해준 우엉 뿌리로 만든 즙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유의태를 두고 대단한 의원이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김 씨의 병이 나아가는 것과 반대로 이번에는 허준의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허준은 하던 공부도 치워 놓고 친구들과 만나지도 않고 차츰 말을 잃어갔다. 유의태 때문이었다. 허준은 의술을 베푸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유의태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허준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그런 유의태를 닮고 싶었다. 유의태처럼 꿋꿋하게 자기 길을 지켜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처럼 사람들에게 무언가 베풀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분으로 가능한 직업 아닌가. 남을 위하는 길, 의원의 길은 바로 그것이다. 병든 사람의 아픔을 고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 이만큼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며칠 동안 밤낮으로 고민하면서 허준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허준은 드디어 의원이 되겠다고 결심했다.날이 밝자 허준은 유의태의 구세원으로 찾아갔다.





의원의 길

1567년이었다. 허준이 유의태의 제자로 들어간 지 어느덧 두 해가 흘렀다. 그동안 허준은 의생으로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다. 그가 주로 익힌 것은 약초의 약리작용, 법제에 관한 것 등이었다. 허준은 두 해를 거의 산짐승마냥 지리산에서 보냈다.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며 각종 약초가 자라는 걸 관찰하면서 그 생태를 배우고, 그 약초를 캐다 말리거나 쪄 보관하면서 그 성능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또 약초 상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할 때도 건성으로 사지 않고 약초 하나하나의 주요 산지와 특성, 그리고 효능 등을 물어 살폈다. 허준은 이제 구세원으로 찾아오는 병자 중 상태가 가벼운 감기 환자나 체증이 있는 사람들의 맥을 짚고, 약을 처방하기도 했다.

봄이 왔다. 실낱같이 가느다랗게 휘늘어진 버드나무가지에는 연초록빛 이파리들이 피어나고, 들판에는 쑥이며 냉이, 달래가 다투어 향기를 뿜어냈다. 곧이어 담장에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나고 야산에는 연분홍 진달래꽃이 흐드러졌다. 아들 겸이가 태어난 후 다솜의 일손은 더욱 바빠졌다. 아이를 돌보는 일 말고도 밭일도 해야 하고, 삯바느질도 해야 했다. 하지만 다솜은 남편에게는 절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허준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잠들어 있는 아들의 뺨에 볼을 비비며 즐거워했다.

“형님 계십니까?”

밖에서 누군가 허준을 불렀다.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지효였다. 지효는 유의태의 문하로 들어온 지 이제 겨우 석 달이 지난 청년으로 아직 의생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다.“웬일인가? 이 늦은 시각에?”

“스승님께서 부르십니다.”

허준은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지효를 따라나섰다. 허준이 구세원에 도착했을 때는 달도 없는 깜깜한 밤이었다.“스승님.”

“들어오너라.”

방에는 병자로 보이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 사람의 맥을 짚어 보아라.”

허준은 심호흡을 했다. 유의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생들을 따로 불러 병자를 보게 한 일이 없다. 구세원에서 가장 오래된 의생 정주를 따로 몇 번 불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진맥을 맡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허준은 호흡을 가다듬고 깡마른 병자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은 가늘지만 매우 빨랐다. 병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호흡이 가쁜지 숨 쉴 때마다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폐가 나쁜 것이 분명하다. 허준이 손을 거두자 유의태가 물었다.“무엇이냐?”

“폐부가 좋지 않사옵니다.”

“잘 보았다.”

유의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폐에 병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이냐?”

“찬 옷과 찬 음식이옵니다.”

“폐에 병이 든 사람은 보통 겨울에 낫느니라. 겨울에 낫지 않으면 여름에 심해지고, 여름에 죽지 않으면 한여름까지 지속되다가 가을이면 일어난다.”허준은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난겨울에 일어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올여름에 죽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여름 동안 치료를 잘해 가을을 맞는다면, 이 사람은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네가 처방을 해라.”

유의태가 무슨 선고를 내리듯 묵직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허준은 깜짝 놀라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명의 유의태가 의생에 불과한 허준에게 병자를 맡긴다는 것이다.“제가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지?”

유의태는 다시 한 번 다그쳤다. 허준은 병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는 가끔씩 잔기침을 하면서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현듯 그 병자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허준은 심호흡을 한 다음, 유의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해보겠습니다.”



허준이 폐병에 걸린 사람을 도맡아 치료한다는 소식은 날이 밝자마자 의생들 사이에 퍼졌다. 이 소식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주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스승 유의태가 허준을 그토록 믿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의태는 자신 이외에는 치료를 맡긴 적이 없다. 또한 자신이 따로 불려갔을 때에도 처방을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허준을 불러 병자를 아예 맡겼다지 않는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유의태는 의생들에게 두루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자신이 신임하는 의생 한 사람에게만 기회를 준다. 그렇다면 이제 스승은 허준을 자신보다 더 신임한다는 뜻이다. 정주는 이 현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정주는 얼음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허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허준은 유의태로부터 병자를 맡은 다음부터는 일절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환자만 돌보았다. 그는 유 씨 성을 가진 환자였는데 지리산에서 벌을 치기도 하고 소작을 나가기도 하는 양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폐에 병이 들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무엇보다 남겨진 가족들이 걱정이었다. 유 씨는 허준의 말을 잘 들었다. 여름이 오면서부터는 머리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허준의 지극한 치료로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들 말했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사람들은 허준이 그 병자를 틀림없이 낫게 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정도로 병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그러는 동안에도 유의태는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 허준에게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럴수록 허준은 자신이 생겼다. 자신이 처방한 약을 먹고, 자신이 시술하는 침을 맞으며 차차 기운을 차리는 병자를 보자, 반드시 낫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유 씨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어느덧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름이 기울고 가을바람이 밀려오면서 유 씨는 거의 다 나았다. 허준은 자신의 힘으로 병든 사람이 건강을 되찾아 가자 뛸 듯이 기뻤다. 차츰 핏기가 돌아오는 병자의 얼굴을 보면서 허준은 의술 수업을 받고 있는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삽상한 가을바람이 부는 어느 날 아침 유 씨가 피를 토하며 마당에 쓰러졌다. 뜻밖의 증세였다. 허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맥을 짚어 봐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허준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사이, 의생들이 급히 환자를 들쳐 메고 유의태의 방으로 데려갔다. 허준도 넋이 나간 상태로 그 뒤를 따랐다. 유의태는 자리에 누운 병자의 맥을 짚어본 다음 허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온몸을 얼어붙게 할 만큼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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