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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덮어둘 일이지

서정태 지음 | 시와
그냥 덮어둘 일이지서정태 지음 시와 / 2013년 2월 / 178쪽 / 11,000원



바람의 소식



동녘 바람이 불어와서창가에 매화가 피면그 향기에 난 그댈 생각하리



서해 바람이 준령 넘어해 뜨는 곳으로 가서태화강변감나무에 가을빛 알리거든그때엔 날 생각하게



너와 내가 사는 세상바람의 소식이면 그 뿐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거니세월이사 간들 어떠하리



마실



아침에는 꾀꼬리가저녁에는 소쩍새가울어주더니아무 소리도 안 들리니즈네만마실을 갔나적막 속에 날 놓아두고 있네

졸음



양지바른 봄빛 쬐이다가느린 느린 한나절 졸음이 온다



온갖 꽃들이 희한하게 피었고나비들은 쌍쌍이 날고 있으나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버리고외돌토리로 남겨두었지만그까짓 외로움쯤이야



조용히 서산에 기우는 해여그렇게 이승도 다 하고 있거니느린 느린 한나절 졸음이 온다



옹달샘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질마재 몰랭이 그 어디쯤 해서옹달샘이고 싶다



미친 바람이 불어싸도물결이 일지 않는그저 조용하기만



다만 한 자락 바람이 쉬어가고밤이면 몇 개 별이 적시는옹달샘이고 싶다



그거 뭐 외롭겠는가진종일 숲 속에서 지저귀다가 목이나 축이는 산새들



문명에 쫓기어 작은 짐승 몇 마리 머물다 가는 그런 옹달샘이고 싶다



내 임은



내 마음속에 그리던 임은 거울 속에도 아니 계시고둥근 달 속에도 아니 계시니



풀밭조용히 흐르는 은하수의 냇가염소라도 한 마리 기르실까



그가 홀로 부르는 노래바람결에도 아니 들리고풀벌레 소리에도 없으니



내 마음에 그리던 임은이 어둠이 걷히고 화안히 트이는 아침황금 빛살로 내려오실까



이른 봄1



거기 누가 있어 귓속말을 하나산수유꽃 혼자 피게 내버려두고계곡물은 그냥 흘러가거라



산중에 외로운 삼간초가봄이 한꺼번에 몰려오느니솔바람 스치듯 지나가거라



지난밤 온갖 시름에 시달리어늦게사 잠드신 임천릿길 고운 꿈 해여 깨실라



나의 피리1



이별의 온갖 슬픔을 한데 모아서내 피리에 담아 두었다가언젠가 세상이 고요해지고 잠들면그때에나 한 가닥 불어보리

누구 하나 듣는 이 없어도눈물 한 방울 흘리는 이 없어도그 가닥 그 소리허공으로 허공으로 사라질지라도그때에나 내 피리를 불어보리

소요산에 사는 부엉이



밤 아홉 시 뉴스가 끝나고 일기예보로는내일 전국적으로 비 아니면 눈이 내린다하였다



그것 참!예쁜 난초그것이나 한 촉 얻을까 해서 선운리 뒷산소요산에나 오를 생각이었지만 그나마 틀린 것으로 생각하였다

아침에 눈뜨고 늑장 부리고 들창 열고바깥세상 보았더니 하늘은 말짱하기만 하다



어제 밤 TV의 일기예보 시간에 소요산의 부엉이는 부웃부웃 울어쌓더니 그래오늘 하늘이 이렇게 맑나 보다

소문



그냥 덮어둘 일이지봄바람에 옷소매 스치듯지난 잠시의 눈맞춤그것도 허물이라고 흉을 보나



대숲이 사운거리고나뭇잎이 살랑거리며온갖새들이 재잘거리네



머슴둘레새



해는 서산에 지고어둠이 골목길 찾아들면머슴둘레새가 운다



모심기 위해서쟁기질 써래질 마치고소 몰고 고샅길 들어서는소리로 운다



쯧쯧쯧 끌끌아조 까마득한 옛날듣던 소리……



지금은 콤바인 이앙기 경운기기계소리 요란할 뿐머슴둘레새 울지 않는다



시골집1



기인 장마는 그쳤다비둘기가 공중을 맴돌다가풀밭에 앉는다



모처럼 새들이 지저귄다머언 데서 소울음도 들린다



술참 때나 되었을까화분에 물 주듯시골집에 햇빛이 내리고 있다



저승꽃



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 되어도덕암 근처 늙은 신선 찾아 나섰네



가을 하늘만 가지고는 아니 되어그도 어디론가 나가버리고빈집에 자물쇠만 채워 있었네



돌아서서 오는 길건너야 할 돌다리도 없는데어쩌자고 길섶엔 저승꽃만 피어 있네



하품



달은 산허리를 비추고갈물은 생각에 잠겨 있다



바람은 떠나버리고분간할 수 없는 고요 속



더는 견디지 못해화분의 난이 하품하고 있다



무색지대



들창문 열어놓았더니벌이 들어와서모란꽃은 지고작약이 이제 막 피었더라고 한다



그러나바깥세상 외면해버리고무색지대에 살고 있다



더 무엇을 들어야 하며더 무엇을 말하랴상념마저 그만두고 일월도 피하고 있다



그 까닭은 또 무엇이냐고이번에는 바람이 들어와서묻고는 그냥 나가버린다



사랑하는 마음



그대사랑하는 마음 아직도 남아 있거든그 어디 외딴 섬에라도 가 있게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가 가슴을 흔들지라도침묵하게! 침묵하게!



그대 사랑하는 마음 아직도 남아 있거든차라리 천 길 바위 속에나 묻어두게



세상이 나를 아조 못 쓸 것으로 버릴지라도청산이 고요한 건 그 품안에 옥을 지녀서라네



눈멀미



질마재에 연 사흘 눈이 퍼붓기만 해서방안에 갇혀 있다가 문 열고 바깥세상내다보았더니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웬일일꼬 어지럽기만하여라 새하얗기만 하여라지금까지 살아온 것 고까짓 것 다 접어두기로했는데 그래서일까 눈멀미가 심한 건 이제부터세상 보는 눈 바로 가져보라고 어지러웠나보다

남은 일



걸친 것 벗어버리고다 그만두고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알몸이어서 좋다



아직은 춘분이 멀어서바람 끝이 차가웁지만방안이 아늑해서 좋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바깥세상에 한바탕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



가을 석양에



들국화 향기 짙은데청산은 잠들어 있고묵은 나무 위에서는 백로가 제 새끼들에게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가을 해는 기울어져 가는데집에 갈 생각도 잊었나동네 앞 정자에서는노인들이 아직도 바둑을 두고 있다

무제1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눈이라도 뿌리려나빈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날아 와 앉는다



우중충한 때 묻은 옷 입고무언가 끼웃끼웃 찾는다먹이일까지난날의 꿈일까



저기, 내가 날아가고 있다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우중충한 회색의 하늘귀신도 없는 하늘로새 한 마리 푸르르 날아가고 있다

내리는 비는



웬 말이 그리도 많은지비가 내린다서로 육박질하고 흘기고 욕하고비가 내린다



외따로 내리는 비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느니땅속에 조용히 스며살고 싶다 한다



비가 내린다비에 젖은 비는 젖은 그대로 숲이 되어저만치 가 있고 싶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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