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
최계식 지음 | 글로세움
사랑한다는 말
최계식 지음
글로세움 / 2012년 11월 / 176쪽 / 10,000원
꽃에 관한 명상 또는 사유
꽃, 그 진실 이야기 일부러 심어서 피는 꽃들보다는
심지 않고 저절로 자라서 피는 꽃이
이 세상에는 더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절로 자라 피는 꽃이 훨씬 오래 아름다운 법이지요.
내로라 이름이 있는 꽃들보다는
명색 갖추고도 불리우지 않는 꽃이
이 세상에는 더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작
얼른 눈에 들지 않는 꽃이 더 눈부실 때가 있읍니다.
그럴싸 꽃말을 지닌 꽃들보다는
잡풀 한 다발에도 속마음 피울 수 있는 꽃이
이 세상에는 더 많습니다.
서부해당화아름다운 것 또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함부로 꽃에 견주어 말하지 말라고
단 한 번의 몸짓 보인
그 해 봄날이 언제였던가!
흔하거나 통속한 사랑 또는 미움에 대하여
진면목 열어 보이고는
또 몰래 닫아 버린 그 수많 덧가지들의
잊혀진 성좌를
오직 저마다의 유년의 기억으로만 되살려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귀하거나 고상한 사랑 또는 미움을
해당 나무여, 해 떠오르는 언덕 마주한
수만 겁 흩날리는 세월처럼으로
지는 꽃잎 가운데서
단 한 번의 그 몸짓 가려낼 수 있어야만
그 아름다운 것 또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바르게 견주어 말할 수 있다고
밤마다 열풍에 시달려 흐드러지던 꽃이여!
생활 그리고 사랑의 백서
초목원에 내리는 눈떠나간 것과 새로 돌아와야 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하늘하늘 춤추며 내린다.
풀과 나무들의 나라에 눈이 되어 내린다.
그래서 빈 가지에 꽃으로 피는가?
피는가 보다.
영춘화에서부터 구절초에 이르는
그 수많은 꽃 가운데, 그러고 보니
사람꽃도 있었던 것 같다.
풀과 나무들의 나라에 꽃이 첫째이므로
꽃말을 모두모두 합쳐 놓으면
사랑이 되나 보다.
하늘하늘 춤추며 내리다가
그래서 빈 가지에 꽃으로 피는가 보다.
꽃으로 피기 때문에
헤어짐과 만남 사이 빈 자리마다
하얀 그리움 사철로 꽃처럼 피는 사람아.
사랑한다는 말
- 서호에 비는 내리고 -사랑한다는 말
쉽게 함부로 말고
생각한다는 말로 완곡히 아껴 쓰자시던
목월 스승 말씀인 양
바람 한 점 없는데도 호면 가득
는갯발 어려 미늘지는 물무늬가 너무 곱다.
마흔 해 다 되어서야 다시 찾은
진흙 묻어나는 이 방죽 길 어디쯤이었던가?
그때는 햇빛 물결 너무 눈부셔
에둘러서는 하지 못했던 말
지금은 이렇게
쉽게 함부로 말고,
호심 위에 떠 있는 푸르른 섬
그 둘러리 돌고 또 돌며 옛 생각에 젖는다.
기억에 전혀 없는 노송 댓 그루
하나같이 뒤틀린 가지들로
고품스런 자태 한 세월 가꾸어 온 이치를
왜 진작에는 몰랐던가?
철 잃은 듯 홀로
는갯발 가려 보이지 않는 건너편 짝을 향해
휘늘어진 능수버들 위 외로 선 물새
무넘이 물 소리 요란한데도
뒷나절 다 기울도록
미동 없이 이냥 생각에 잠겼다.
삶의 극본 지문들
청계천을 건너며유년 시절 그 현란하던 물비늘
고향 강줄기.
때로는 길을 가다 건물들 바깥으로 솟은
산들을 두리번 바라보고 가다가
행인에 부딪혀, 자동차 경적에 놀라
산꼭대기 더 높은 곳을 치어다보고
그러고 가다가는
구름 있는 데까지 올라가 허둥대다가
내려다 보니까
이건 영 파먹힌 숲이
야금야금 이제는 상처 투성이로 널부러져
사람과 짐승이 분간없는
길을 가다가
산과 산 그 바깥으로 더 높이 솟는
건물들을 두리번 바라보고 가다가
문득 멈추어 선 도심
길바닥 산지사방으로 범람하는, 포락지는
흙빛 강줄기
다들 풀잎배 하나씩 띄워
유유한 몸짓으로 잘도 잠겨 가고 있다.
반 코페르니쿠스밤에 별빛이 반짝반짝 아름다운 것은
사실인즉 하늘을 치어다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칸델라는 아니다)
해와 달이 그 자리를 지키어
밤과 낮을 바꾸어 운행하기 때문이다.
땅이 돌면서부터 사람도 돌고
확실히 세상도 자꾸 거꾸로 돌아가고
그래서 우리는 더 별바라기이고 싶은데
아폴로는 왜 달맞이를 갔나?
자주 눈길 가는 천체 망원경에는
우러러도 별빛이 없다.
있다고 해도 그저 허블스러울 뿐이다.
아무래도 누군가
뭐라고 한 말씀 꼭 했으면 좋겠다.
우주를 건너지르는 한 줄기 바람 같은.
불문불가지(不問不可知) 하나 생명이란 무엇이옵니까?
영혼을 지닌 존재입니다.
영혼이란 대체 무엇이옵니까?
생명 존재입니다.
그러면 존재인 육신은 무엇이옵기
생명이 어떻다 하시옵고
영혼이 대체 어떻다 하시니이까?
존재인 육신은 곧 생명
생명인 육신은 곧 영혼입니다?
그러면 그러며는
스러져 자취 없는 육신의 생명,
육신의 영혼은
대체 어떤 존재이옵니까?
세상사 배심 소견문
말 되는 말 사람이 짐승과 왜 다르냐 하며는요,
복잡한 설명 필요 없이
사람은 머리를 가지고 살고
짐승은 모두 대가리를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면은, 머리와 대가리는 어떻게 다르냐 하면은요,
머리는 위에 있고 대가리는 앞에 있는 만큼
다르다고 하는데요,
그런데요, 사람이 자꾸 대가리라고 해야 할 것을
머리라고 하면서, 머리를 자꾸 앞으로 두려고들 하니깐
사람 대가리가 되는데요,
짐승은 절대로 대가리를 위로 두지 않는다고,
그런데요, 오랑우탄 침팬지들은
노상 그러고 살지는 않는다고 누가 자꾸만 그러는데요,
이거 말 되는 말인가요?
과거 그 빛나는 유산독일로 끌려간 광부와 간호원들, 월남으로 끌려간 군인들.
오라고 오라고 사실은 가난이 거기서 오라고 했다.
아니 그보다 너네들이 가라고 가라고 했다.
특히 배고픔이 오라고 했다는 사실을
배부른 나는 잘 모르고 또 알 바 없다는 너네들.
그러면 너들은 지금 어디로 끌려 가고 있느냐?
천만에
전혀 상관없는 나는 어디까지나
오라고 오라는 것 없는 나이기 때문에
가라고 가라는 것도 없는데 끌려가긴 왜 끌려 가느냐?!
반문에 큰소리 칠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갈 길로 가는 게 가야만 하는 게 인생인데
상관없다 몰라라 한다면,
거기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너네들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여실히 가늠보고 있는
미래 건너 편의 과거
그 빛나는 유산 그 불변의 진리를 어찌 모른다 하느냐?
오라고 오라지 않는다 하여
가라고 가라지도 않는다면 언젠가는 똑같이 니네들도
오라고 했다 가라고 했다며 속절없이 끌려가리.
패담 초_ 30ㆍ 비너스를 위하여유인원의 털과 옷의 상대적 진화
옷이 털 노릇 대신하며 여체는 신비로워졌다.
그런데 왜 자꾸 까발기느냐?
레드카펫 위 행진하는 여자들의 가슴과 등판
블록로드 위 활보하는 아랫마기 여자들
반투팬, 그물팬, 끈티팬, 지스트링팬은
그래도 다리속곳이지만
골반바지, 초 미니, 스키니 탱크 탑, 배꼽티
그리고 젖티
다 보아 달라는 차림새라 예쁠 수도 있는데
진화에 역행하는 본능 회귀선을 넘으면
거기 신비는 사라지고 그냥 털 없는 동물들이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산행문답
산 빗소리바람 한 점 없이 비 내리는 날
산 속 길을 거닐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서
날비를 맞으며
산의 소리를 듣고 싶어 길을 나섰는데
침엽수 아래에서는 침엽수 소리뿐
소나무 가문비나무 잣나무 잎갈나무 전나무 소리는
서로 분간이 안 간다.
그러니까 산의 소리를 못 듣는가?
활엽수 아래에서는 활엽수 소리뿐
자작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장미나무 피나무 물푸레나무
가래나무 단풍나무 녹나무 콩나무 먹구슬나무 차나무
두릅나무 진달래나무 인동나무 소리는
서로 분간이 가기도 하다가 그나마 다른 종류와
겹쳐지면 또 분간이 안 간다.
그러니까 산의 소리를 못 듣는 것이다.
더욱이 숲을 벗어난 산길의 발 언저리와
돌 바위에 부서지는 빗소리는?
도시의 인도와 아스팔트에 부서지는 소리는 아니다.
오고 가는 수많은 우산들
두들기는 빗소리는 저마다 각다른 소리
다 같은 모양새인데 어찌하여 다르다 듣는가?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침엽수림의 많은 종자들 빗소리는 다 침엽수 소리
활엽수림 수많은 종자들 빗소리는 다 활엽수 소린데
똑같은 사람의 종자들은
따로 받쳐 들었지만 같은 우산 소리를
산의 빗소리로 듣지를 못하고 남다르다 한다.
심지어 직각 구조물 테두리 군락에 갇혀 지내며
낙수 소리마저 잃은 채
왜 바람 한 점 없이 비 내리는 날
산의 소리를 듣고 싶어야 하는지 모르고 산다.
겨울 산훈(山訓)지난해 가을
제대롯 낙엽 지운 나무 가운데
다시 봄 되어
잎 피우지 않는 나무는 없읍니다.
겨울 때문에
단풍 고운 산길이 있었읍니다.
그리고
녹음 짙은 산길도 있었읍니다.
겨울 때문에
산은 삶의 순환 이치
그 자체인 존재로
사철따라 사람들을 깨우칩니다.
꽃 아닌 꽃삼월 한 달을 다 보내고 나서야
제대롯 봄길 열어 보이는 산기슭에
쉽게는 서로를 마주하기 어려운 듯
한 낮 빛살 받아 진분홍 이글타는 진달래는
절대 첫사랑의 기억같은 것
아니다, 그 기억 밤새 태우며
대신 앓아 누어 버린 첫 여인의 신열같은 것.
제대롯 봄길 열어 보이는 산기슭에
그래서 진달래는 때로 꽃이 아니다.
동문 초대석 <절필(絶筆) - 이근배>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 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 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