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사랑하는 법이 다르다
주병율 지음 | 더좋은책
마흔, 사랑하는 법이 다르다
주병율 엮음
더좋은책 / 2012년 12월 / 176쪽 / 9,800원
1. 지는 내 청춘, 피는 그리움
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 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으로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
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 이별을 예지하지 못한 사람에게 닥친 이별은 돌연하고 가차 없이 닥치는 고통이다. 그래서 그대 떠난 뒤 배경에서 석양이 질 때까지 맴돌며 유목민처럼 서성거린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수없는 사람을 만나고 수없이 이별을 한다. 그중 이별이 이별의 아픔으로 남는 일이란 특별한 관계의 일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별의 아픔을 얼마나 겪었던가. 우리가 이 시에 감정이 이입되는 것도 시인이 바라보는 이별의 아픔이 내 자신의 아픔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별이 배경에는 서성거림이 있고 마음은 아프다.
손톱달 - 유미애그믐달, 손톱을 깎는다
하모니카 불던 저녁엔 누군가 향낭을 빠져나가고
이른 아침 내 손가락은 붉게 피어 있었다
쇄골이 드러난 달은
내가 한쪽 허리에 품고 살던 당신의 옛 이름
당신이 흘리고 간 머리칼이 친친, 국화 베개를 감았을 때
빛을 쓸어 담듯 자루 가득 손톱 조각을 모았다
꽃의 몸 어디엔가 조용조용, 무언가 자라고 있어
작약 뿌리를 먹고 눈 먼 뱀이 달을 향해 울고
새들은 또 한 세계를 부수며 날아갔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물컹
꽃 냄새가 묻어나는, 새로 보름
푸른 뱀의 눈물자국이 사방으로 번져 갈 때
국화도 작약도 잠든 화단, 당신의 허물 위에 앉아
하모니카 분다
다시는 아프지 말자고, 톡톡
움푹 깎여 나간
달을 본다
*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머리칼과 화자의 붉게 피어나는 손가락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 의례를 통해 “꽃의 몸 어디엔가 조용조용, 무언가 자라고 있어” 당신이 내 안에 존재하는 일. 이러한 행위가 행해지는 그믐밤은 어둡고 이 어둠을 통해서 사랑은 완성된다.
2. 마흔이 우는 법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
름다운 유골 한 채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
었다.
* 달팽이의 삶. 명부전의 뜨락을 핥으며 업고 왔던 몸이 결국 “혓바닥뿐인 생”이었다면 그 생은 과연 무엇이었나. 세상에는 ‘정직’하다는 말과 ‘죽을힘을 다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 문득 나를 돌아보며 나는 이 두 말에 당당해질 수 있는가. 두려운 일이다.
물든 놈 - 최승호어느 해 여름 不二門이라는 아름다운 문을 보고, 비구니들
의 저녁공양도 받고, 절간 한 귀퉁이 방에 나그네로 잠든
밤에, 앝은 꿈속으로 동창생들이 몰려와 나를 끌어내며 나
무라듯 말하더군요.
-너같은 물든 놈이 왜 여기서 잠을 자냐고
* ‘물들다’라는 것은 대체로 빛깔이 스미거나 옮아서 번지는 것을 말한다. 청정의 도량인 승의 공간에 입정한 화자가 자신의 바탕을 물든 놈의 부정적 전형이라 고백하는 데에는 속된 세상의 삶들에 대한 반어적 질타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세상에 물든 놈인 나도 가만히 내 가슴에 손을 올려본다.
3. 불혹, 화해를 시작하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만남과 이별에도 세월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 다른가 보다. 젊은 사람의 사랑은 피가 끓는 사랑이겠고 이별은 곧 죽음으로 치부되는 사랑이겠다. 이에 반해 “이별이 아주 영이별이 아니고 다시 만나기로 한 이별같이” 하는 사랑은 연륜과 인식의 깊이를 더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이다. 노회한 관조의 여유로움이다. 세상에 몸을 두고 사는 연륜의 삶이란 이처럼 엊그제 만나고 갔던 바람도 언젠가는 다시 오는 바람이거니 그윽하게 쳐다봐도 좋을 나이다.
겨울산 - 황지우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이 시는 이리저리 탐욕의 궁리가 많아서 괴로움으로 들뜬 자들에게 화자가 주는 사자후 같은 일갈이다. 천천히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조선 후기, 어지러운 세상을 풍자한 정약용 선생님의 「해랑행海狼行」이란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솔피(범고래)나 도적이나 반인륜적인 무리임엔 매일반인데, 집단 난투극으로 서로 죽고 자빠지는 무리들의 모습을 질타한 선생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시의 화자를 통해서 다시 듣는 듯하다.
4. 겨울에도 피는 꽃, 마흔
인동忍冬잎 - 김춘수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잎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
더욱 슬프다
* 꿈을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 월동하는 인동잎에 대한 연민. 세상의 그 흔한 욕망의 드잡이를 비켜서서 혹독한 시련을 견뎌가고 있는 인동잎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아닐까.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세상의 일이란 꼭 지나고 나면 후회를 한다. 사는 모습에 따라 그 후회의 종류도 다양하리라. 후회하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세월은 가고 나이는 먹어간다. 지금 이 순간에 닥친 이 일이 내 인생에서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고 꽃봉오리라는 각오로 살아볼 일이다.
5. 행복이 어설픈 마흔에게
목계 장터 - 신경림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시인이 평생 추구했던 시의 가치가 민중의 삶과 유리되지 않고 함께 사는 일이었듯이 이 시에 나타난 화자의 떠돌이적 삶의 자세도 역시 하늘과 땅의 절대적 존재가 나에게 부여해준 삶의 의미로 굳어져 있다. 정체되어 썩지 않고 자신을 이타적인 삶의 반열로 들어서게 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화자가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하면서까지 삶의 가치를 굽히지 않는 것은 “산서리 맵찬” 세상에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의 온기 같은 사람이고자 함이 아닐는지.
막동리 소묘 54 - 나태주외진 숲길을 가다가 도회지 여자
엉뎅이 까뭉개고 급한 일 보는 거 숨어서 본다.
수세식 변소만 타고 있었을 저 허연 살덩이
싸리꽃 내음 스민 물소리에 씻기니 시원하겠다.
* 자연과 인간의 삶을 절묘하게 시로 버무려내는 시인이 나태주 말고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시는 서정적 세계를 노래함에 있어 탁월하다. 이 시는 연작으로 꾸며진 시다. 시인이 5년여의 시간을 공들여 완성한 시집으로 당시 문광부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과 자연의 순수가 이토록 조화로울 수 있는 풍경이 재미있다. 이것은 화자의 시선이 잡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6. 늙으신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돈암동 파 할머니 - 최동호
돈암동 시장 어귀
매일 아침 파를 다듬는
할머니가 길 모퉁이에 있었다 일 년 내내
고개를 들지도 않고
파를 다듬는 할머니는
오직 파를 다듬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매일 아침
채소 가게 어귀에 나와 앉아
머리가 하얀
파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한 번도 고개를 들어 행인을 보지 않고
언제나 구부린 자세로
파를 다듬기만 하던 할머니가
어느 날,
꽃샘바람 지나가는
시장 어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다듬은 파처럼 단정하게 머리칼을
흙 묻은 손으로 쓸어 올리는
파 할머니 얼굴에서 흘낏
돌보다 강인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 한 가지 일념이 하늘에 닿으면 백 가지 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돈암동 시장 어귀에서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같이 파를 다듬고 계시는 할머니의 일념은 우리가 매일 새벽 절이나 교회의 마룻바닥에서 엎드려 올리는 어떤 기도보다 더 간절한 통성의 기도일 것이다.
늙으신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이승하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 나는 요즘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 늙으신 부모님의 그 눈 속에 비록 허공이 들어 있다 해도 부모님 앞에서 재롱잔치를 하는 친구들이 부럽다. 힘들거나 외로울 때 언제나 돌아가서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던 부모님. 그 부모님을 잃는다는 것은 또 하나 내 하늘을 잃는 일이고 세상 속에서 내 근원이 무너지는 일이다.
어머니 1 - 이성복 가건물 신축 공사장 한편에 쌓인 각목더미에서 자기 상체
보다 긴 장도리로 각목에 붙은 못을 빼는 여인은 남성, 여
성 구분으로서의 여인이다 시커멓게 탄 광대뼈와 퍼질러
앉은 엉덩이는 언제 처녀였을까 싶으잖다 아직 바랜 핏자
국이 수국水菊꽃 더미로 피어오르는 오월, 나는 스무 해 전
고향 뒷산의 키 큰 소나무 너머, 구름 너머로 차올라가는
그녀를 다시 본다 내가 그네를 높이 차올려 그녀를 따라잡
으려 하면 그녀는 벌써 풀밭 위에 내려앉고 아직도 점심시
간이 멀어 힘겹게 힘겹게 장도리로 못을 빼는 여인,
어머니,
촛불과 안개꽃 사이로 올라오는 온갖 하소연을 한쪽 귀로
흘리시면서, 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의 손발에, 가
슴에 깊이 박힌 못을 뽑으시는 어머니……
* 추억건대 내가 살았던 고향 동네 앞으로는 미루나무가 자라는 넓은 신작로가 있었다. 여름이거나 가을 구분 없이 장날이 되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촌로들이 늦은 장보기를 끝내고 오르내렸다. 평소에는 곤궁함으로 쉬 한 잔의 막걸리도 마음 놓고 자시지 못하던 그 마음에 장날은 조금 술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취해서, 해가 지고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두운 길에서 흐느끼듯 부르던 그들의 슬픈 노래는 지금도 내 가슴속의 에레미아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