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
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휴먼앤북스 / 2012년 12월 / 300쪽 / 12,500원
꿈에서 깨자마자 침대 옆을 더듬는다. 있다. 꿈속에서의 그녀, 민현이다. 나는 그녀의 살결을 살금살금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그 살결은 어린 처녀의 살결처럼 매끈하지도, 중년의 농익은 여체처럼 뭉클거리지도 않고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탄력이 있다. 그녀를 지각하는 내 손가락 끝이 감전이라도 된 듯 찌릿하다. 이어서 그 감각은 손으로, 팔로, 가슴으로, 심장으로 전해진다. 나는 입술을 그녀의 살결에 댄다. 입술은 손가락보다 훨씬 뛰어난 열과 전류의 전도체다.
내 기척에 민현이 깨어난다. 그녀의 흰 허벅지가 천천히 움직여 내 허리를 감는다. 나는 숨이 막혀 캑캑거리면서도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에 남아 있는 도장 같은 흉터를 확인한다. 그것은 시간의 낙인이고 어떤 고래잡이가 지상에 존재했었던 흔적이다. 그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습을 바꾸어 왔지만 몇 가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인장을 지워 없애지는 않았다. 허벅지의 흉터는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흥분한다. 내 상징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낀 그녀가 더 세게 나의 허리를 조인다.“늙을 줄을 몰라요. 시도 때도 없어.”
민현의 목소리는 울림이 풍부한 중저음이다. 합창단에 들어가면 메조소프라노에서 알토를 모두 담당할 수 있다. 나는 항변한다.“우리 나이의 신체 기능은 예전의 마흔이라고. 마흔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야. 청소년 시절 같지는 않더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불끈거리는 게 정상이란 말야.”내 말이 길어진다 싶은지 민현이 내 귀에 입김을 불어넣어 간지럽힌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그런데 넌 언제부턴지 누나한테 버릇이 없어졌구나.”
그녀의 다정한 손길,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냄새, 그녀의 입김에 온몸이 기화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난밤에 이어, 둘만의 24시간이 시작된 이후 세 번째로 얽혀든다.결정적인 반응은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쾌감이 충전된 전하의 폭풍 구름이 머릿속에서 피어오른다. 강력한 번개가 빛을 뿜는다. 노호한다. 온몸의 숨구멍이 따끔거린다. 나는 환호와 신음을 막으려 애쓴다. 살아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이 벅찬 기쁨, 광란의 즐거움. 민현은 언제나 내게 그걸 가져다준다.나는 깊은 동굴의 침묵 속에서 오매불망 그녀를 기다리던 쉰 살로 돌아간다. 그녀를 먼발치에서만 봐도 설레던 사십 대로 돌아간다. 그녀에게 전율하던 삼십 대로 돌아간다. 그녀 때문에 온몸을 떨며 서럽게 울던 이십 대로 돌아간다. 애틋한 십 대로, 그리운 소년 시절로 돌아간다. 벼락을 맞아 감전된 듯하던 때, 그녀를 처음 만나던 바로 그때 고향 구룡포의 여덟 살로 돌아간다. 나는 내 인생 모든 무대의 주연배우가 되어 그녀에게 돌입한다. 그녀는 내 존재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준다.
“당케 쉔. 이히 리베 디히!”
그녀는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듯 통화를 끝낸다. 통화 상대의 언어에 따라 ‘사랑해’로 통화를 끝내는 건 그녀의 습관이다. 그녀가 정말 그를 사랑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런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상관한다 한들 어쩌겠는가. 중요한 건 그녀가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육체의 소유자라는 것. 영혼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그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2010년대 초반에 인간의 수명과 난치병 정복과 관련된 중요한 의학적, 과학적 진전이 있었다. 유전자 이식, 세포간 유전형질 도입 등의 연구에 엄청난 자금이 비밀스럽게 투입됐고 대뇌피질과 기본적인 회백질 핵들을 연구하는 신경생리학, 이온채널·흥분성 아미노산·영양인자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신경과학, 혈액에 대한 연구, 단백질을 연구하는 구조생화학이나 물리학, 계산신경과학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그런 것 중에 공개된 것도 있고 상용화된 것도 있으나 전 세계 상위 0.001퍼센트 미만의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는 것도 적지 않다.그녀는 현존하는 인류 가운데 그런 혜택을 가장 많이 입을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녀가 그중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녀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인 십몇 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젊어 보인다. 하지만 영혼의 젊음은 가장할 수가 없다. 모험심과 열정은 어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을 수가 없다. 민현의 정신적, 육체적 나이가 얼마든 내게는 여덟 살 때 처음 만났을 때의 소녀가 남아 있다. 그건 그녀가 만나고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모를 나만의 영역이다. 나는 그 소녀를 사랑한다. 그 소녀부터 사랑했다. 내 생애 전부를 바쳐 오직 그녀만 사랑했다.온 세상에 소리쳐 자랑하고 싶다. 나의 사랑을. 누구든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라고 외치고 싶다. 죽을 때까지 벗어지지 않을 피 흐르는 사랑의 징표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민현, 넓고 넓은 바닷가 오막살이에 사는 소녀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와 살던 클레멘타인을.
내 어머니는 해녀였다. 어머니는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바다로 들어가 딴 미역과 다시마 같은 해초나 전복, 소라 같은 조개류며 성게, 멍게, 해삼과 물고기를 잡아냈다. 그걸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내가 초등학교 입학식에 입고 갈 옷을 샀다.입학식은 일제 때 세워져 삼십 년이 넘었다는 긴 목조 교사 앞의 넓은 운동장에서 열렸다. 3월 초순, 해송의 빗살 같은 잎 사이를 통과해 들어온 차가운 바닷바람이 아이들의 허술한 옷깃을 파고들었다. 아직 한기가 제법 느껴질 때여서 신입생을 맞는 재학생들은 ‘도빠’라고 부르는, 얇은 스펀지를 넣고 누벼 만든 외투를 입고 있었다.낯선 얼굴의 고만고만한 수백 명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외로웠다. 나는 동쪽 하늘이 어서 해를 중천으로 보내 주기를 빌었다. 교장의 환영사 겸 훈화는 무척이나 길었다. 차가운 바람은 볼과 목덜미를 꼬집듯 계속 불어 들었고 발바닥은 더욱더 시려 왔다. 수많은 사람이 운동장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은 너무 넓고 휑뎅그렁해 보였고 담장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포고하듯 드높았고 거대한 철대문은 신장(神將)처럼 무서워 보였다. 그때 내 눈에 누군가 보였다.처음 나는 그게 인형인 줄 알았다. 직접 본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본 듯한 느낌을 주는 일본 인형. 이국적이면서도 내가 아는 여자들과 어딘지 닮았고 고상하고 품위 있으며 세련된 인형.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복색과 생김새, 그러면서도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은 인형 말이다. 민현의 첫인상은 그랬다.민현은 보라색 블라우스와 분홍빛 치마를 입고 조끼처럼 짧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목에는 베이지색 머플러가 둘러져 있었으며 그 위의 머리는 두 갈래로 땋여져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흑백이 분명한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얼굴은 희었고 갸름했다. 얼핏 봐서는 예쁘다기보다는 고귀한 혈통의 공주처럼 도도해 보였다. 나는 순식간에 그 인형에, 아니 그녀에게 매료되고 말았다.민현은 내 시선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초등학교 신입생 가운데 한 아이였다. 주목을 끌 일이 없었다. 그런 민현의 무관심이 내가 더더욱 그녀에게 끌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임은 틀림이 없다.관심이나 좋아한다는 감정은 물이나 기압처럼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우주선에 구멍이 뚫렸을 때 우주선 속에 있던 승무원이나 부서진 부속이 진공과 다름없는 캄캄한 우주 공간 속으로 빨려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고능력이 없는 우주 공간이나 우주선과 달리 인간은 관심의 높낮이 정도를 직감적으로 인식한다.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느낀다. 관심이 높은 쪽에서는 억울하다 하더라도 관심이 낮거나 없는 상대에게 자신의 일부, 시간이 빨려 나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나는 초등학교라는 사회에서 조우하게 된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인 민현에게 내 존재가 빨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거머리한테 피를 빨리는 것처럼 달콤한 자멸감을 수반했다. 그 대가로 나는 처음에는 칼날처럼 차갑고 닿기 싫던 학교에 자발적으로 매일, 어서, 빨리 가고 싶다는 충동을 얻었다. 민현을 멀리서라도 훔쳐보고 나 자신이 조금씩 빨려 나가는 달콤한 상실감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엄청난 각오를 하고 학교에 와서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한들 그녀는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초등학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은, 집단을 이루기 시작한 야생 포유류들이 그렇듯 서열을 짓기 시작했다. 고사리 주먹을 휘두르고 먼지투성이인 교실 바닥에 뒤엉켜 뒹굴거나 심지어 옷을 찢고 코피를 터뜨리게 하는 일도 있었지만 지혜로운 영장류답게 팔다리가 부러지고 평생 흉터와 장애가 남을 치명적인 피해는 없이 싸움이 끝나고 대개는 서열이 정해졌다. 입학 초기의 몇 달이 지나자 나름대로 서열과 질서가 잡혔다. 동해안 어촌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어린 인간 수컷들이 그런 식으로 중요한 사회적 체험을 하는 동안 어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암컷들은 자신들끼리의 쟁투에 골몰했다. 그들이 서열을 정하는 방법은 남자의 방식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와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 중 두드러지는 것은 언어와 기세였다. 사내아이들조차 압도해 버릴 만큼의 강력한 기세를 보여 주는 것, 그건 일차적으로 사나운 표정과 욕설로 표현되었다.“이 간나이 년이 뒤질라고, 뒤질라고 환장했나, 이 개썅 간나 왜년 화냥년. 자빠져 지랄하다 굶어 뒤져라.”외모나 옷차림에서 민현보다 돋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 다른 남자아이들이 뒤늦게 지각한 민현 나름의 고고한 분위기와 신비로움을 가진 아이들은 없었다. 민현은 그것만으로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여왕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 그것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즉각적인 질시를 유발했다. 오월의 어느 날 오후, 막 하교하려던 사내아이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이흥순이라는 읍내에서 부자로 손꼽히는 선주의 딸을 주목했다. 흥순은 민현의 턱밑에서 손가락으로 목이라도 찔러 버릴 듯 치켜들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평소에 무표정하던 민현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상대를 미치게 만드는 방식으로, 상관없다는 듯 무시하며 서 있다가 ‘왜년 화냥년’에 반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 민현은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흥순의 논리,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보인 채 울음이라도 터뜨리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민현의 행동은 아직 밀림을 지배하는 암호랑이처럼 당당했다.“이 천하에 개호로쌍놈 고래잡이 딸년아. 니가 암만 도도하기 그캐도 니는 왜년의 호로자슥 똥기저귀나 빨아주던 종년 어미에 우리 아부지 배도 못 얻어 타는 천한 뱃놈 딸이다. 니 다시는 고개를 들고 못 댕기구로 할 기다. 한 분만 더 까불어 봐라.”흥순의 대사는 오래도록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 분명했다. 나름대로 확보한 정보를 상대가 충분히 모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번역했고 반격의 여지가 없이 인정하고 포기하도록 만들어진 폭발물이었다. 결과는 흥순의 계산대로 나온 것 같았다. 민현의 매력인 신비로움의 원천은 샅샅이 드러나고 흙탕물이 되도록 휘저어졌다.민현은 천한 고래잡이배 선원의 딸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해방 전 구룡포의 일본인 거리에 있는 일본인의 집에서 종처럼 살았다. 북방의 오랑캐와 마찬가지로 남방의 왜인 역시 오랑캐였으니 그들의 피가 섞인 아이라면 ‘호로자식’이 될 터였고 그 호로자식을 돌봐 주어야 했던 신세였다면 호로자식보다 못한 신분이었다.“아, 그래이 민현이 자가 왜놈들 호로자슥 기저귀 빨아주미 종 노릇하던 엄마한테 나가 저도 호로자슥 피가 섞인 기구마는. 우째 일본 기생들 맨쿠로 얼굴에 뭐가 허옇게 발린 거 겉애서 속을 모르겠다 했다.”선주의 아들로 흥순과 같은 일본인 거리 골목에 살아서 친하던 석규가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나는 석규가 무지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그런다고 해서 민현이 가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운명이 화인을 찍은 것처럼 이미 민현이 갖고 있는 후광에 내 눈이 멀어버렸던 것이었다.그 뒤로도 매일 교실 안팎에서 민현에게 집요한 공세가 취해졌다. 민현이 갖고 있는 사내아이들에 대한 영향력, 실은 사내아이들의 눈길을 누구보다도 자주, 강하게 흡인하는 능력이 스러지지 않는 한은 계속될 것 같았다.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민현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의 세계 사이에는 서로 넘어가지 않는 단애가 있었고 그것을 넘어 간섭을 하려 들면 세계를 유지하는 규칙에 정면으로 맞서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누가 가르치고 정의해서 아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도 알 건 다 알았다. 비록 말이나 법으로 명확하게 정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그렇게 민현에게 억지로 무관심한 척했던 것이 준 스트레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
아버지가 솔가해서 이사한 곳은 그로부터 몇 해 뒤에 대표적인 국가기간산업인 제철소 1기 고로가 들어선 장소가 강 건너에 빤히 바라다보이는 포항시의 남쪽이었다. 오로지 어업으로 번성했던 내 고향과는 달리, 포항은 동해안에서 가장 큰 어항과 가장 큰 군부대와 미군기지, 전국적으로도 가장 큰 시장이 있는 도시였다. 바로 그 포항에 국내 최초의 일관 제철소까지 들어서면서 뭔가 큰 변화가 생기고 무엇을 하든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을 것이다. 정보를 입수하고 고향을 떠날 때는 그토록 빠르고 과감했으나 아버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에 자리를 잡는 데는 서툴기 짝이 없었다. 결국 네 식구 생계에 관련된 일은 어머니가 떠맡았다.제철소 공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기술자, 노무자와 관리직 회사원들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에게 제공될 기본적인 생활기반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식당을 열었다.처음에는 집 안의 부엌 딸린 방에 손님을 받았다. 고만고만한 식당이야 이미 포화상태라고 할 만큼 많았기 때문에 단골을 늘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어머니는 해녀였다. 어떤 해산물이 싱싱하고 맛있는지, 싸면서도 구하기 쉬울지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포항의 항구에는 아침마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연안에서 잡은 가자미, 청어, 열기, 삼치, 쥐치, 도미, 오징어 등을 실은 어선들이 즐비하게 정박했다. 어부들은 조업을 나가면서 채소와 물, 초장 등을 배에 실어 가지고 바다로 갔다. 밤중부터 새벽까지 그물을 당기고 물고기를 끌어올리던 그들은 한껏 허기가 지는 새벽에 참을 먹기 위해 갑판에 앉았다. 잡아 올린 물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그릇에 넣고 시원한 오이며 채소를 푹푹 썰어서 더하고 고추장을 넣어서 쓱쓱 비빈 뒤에, 빨리 먹기 위해 물을 그득 부어서 나눠 먹는 것, 그게 어머니가 내놓은 물회의 원래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직접 물질로 잡은 해삼, 멍게, 소라, 성게 같은 해산물까지 물회로 만들어 내놓음으로써 해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유명해졌고 손님은 급증했다. 아버지는 아예 대놓고 술고래 노릇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은 평상으로 가득 채워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어머니가 음식을 팔아 떼돈을 번 건 아니었지만 남편과 자식들을 건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나는 계속 앓았다. 병의 근원은 굳이 명명하자면 향수병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사를 하고 나서부터 감기를 달고 살았고 디프테리아, 홍역, 볼거리 같은 전염병은 물론 천식, 종기, 부스럼, 버짐, 빈혈, 기생충 감염 등에 시달렸다. 시내에서도 제법 유명한 해녀물회식당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릴 일이라곤 없었지만 나는 마음의 영양이 부족했다.스위스의 의사 요하네스 호퍼가 정의한 대로라면 향수병은 적어도 나라를 떠날 정도로 고향에서 멀리 떠났어야 증세가 나타난다. 나는 고향 북쪽으로 오십 리쯤 되는 거리를 이동한 것뿐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걸어서도 얼마든지 고향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어처구니없는 격절감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거기에는 민현에 대한 상실감이 강하게 겹쳐졌다.딱지가 앉은 상처가 가려워지면 낫는 증좌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민현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아픈 것과 근지러운 것의 중간쯤 되는 오래된 상처가 있는 것처럼 가려웠다. 내 몸속의 일부분이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듯했다. 한번 생기면 영원히 내 존재를 불안하게 만들 불치의 상처였다. 그런데 그 상처를 어루만질 때마다 감미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정체가 뭔지 궁금했다. 덧나더라도 좋으니 딱지를 떼고 어떻게 됐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상처는 떼어낼 딱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