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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다리

천동암 지음 | 동행
오른다리천동암 지음동행 / 2012년 12월 / 118쪽 / 10,000원



1. 가로 신의 세로 본능



낙엽이 나무에게



당신을 위해숨이 헉헉 막히는뜨거운 열기 무섭게 내리치는칼 비바람 눈보라도짙은 푸름으로 감내하였지만생의 끝자락에서 앙상한 속살을 드러내고해지며 울긋불긋한 뼈 마디마디마지막 남은 붉은 피를 내뿜는다

상처나서오그라진 내 몸뚱이마지막 힘을 다해두 눈을 질끈 감고 낙하한다



너 밑에 떨어져썩어 문드러져다시 부활하는 예수의 붉은 피처럼



나무가 낙엽에게



버리고 잘라내고모진 이별에 폐병 환자 피를 쏟아낸다긴긴밤 폭우에 부서져가라앉고 있는 난파선되어이대로 바다에 누워험한 세상을 떠나깊은 바닷물 속에속절없이 빠져버리고 싶지만내 속살에 붙어 있는여린 탯줄에 매달려 있는어린 태아들

한없이 쳐다보며 수없이 되뇐다.‘살아야지’두 눈 부릅뜨고 입술을 깨물며 선홍빛 수족을 잘라낸다버리고 버려야 또다시새끼들을 해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2. 아빠 아버지



아빠 아버지



아이들이내 키보다 크기 시작할 때교육비가 월급에서 많이 빠져나가친구와 소주 한잔 마시고 싶지만딸아이 학원비 생각나전화로만 안부를 전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두 놈이 한꺼번에 ‘아~빠’소리 지르며달려들어 내 팔에 매달리며볼에 볼을 문지르고노란 유채꽃 향기달콤했던 아득한 추억들

지금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아이들은 이제는 재잘거리지 않고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가슴만 쓸어내리며아이들 방 앞에서 서성이면서매번 헛기침만 한다추수하고 남은 쭉정이처럼아빠는 가고아버지만 남는다

딸아이 졸업식장에서



졸업식에서 아이는 울고 있었다감수성이 예민하여 눈물이 많은 딸아이 눈물에는 삼년 세월책갈피 속에 숨겨진 사진들동영상되어 휘젓는 듯하다

학교 앞 가로등만 아는청춘 가슴앓이수학문제 끙끙거리며풀다가 마침내 답을 찾아내손뼉 치며 기뻐했던 순간들스냅사진처럼 비치고비밀 일기장에 밤새워 써내려간국어 선생님과의 애틋한 감정도눈물되어 흐르고 있었다

딸에게도가슴 아픈 사연이타는 목마름처럼있었다는 것을울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이 청춘도 아프다는 걸 망각한 채아버지 존재감만 내세워닦달했던 부끄러운 기억들아가야! 미안하다

아내 손



잠을 자다살포시 아내 손잡아내 얼굴에 바싹 갖다 댔더니호박잎처럼 까칠한손마디 마디에 살뜰하게 챙겨준끼니 흔적 묻어 있네

어미새가 새끼 둥지에 날아들면배고프다고 입을 벌리는 새끼들배불리 먹여주는 고마운 손배고프면 못 참아밥 달라고 소리치는 내 입을 잠재우는위대한 손

아내 손마디 마디에새끼들 얼굴, 내 얼굴밥풀되어 암각화처럼 새겨화사하게 웃고 있네



오른다리



잠을 자다 뒤척이면서무심결에 야윈 오른다리아내 배 위에 얹혔더니솜이불마냥 가벼운 탓인지여린 체온이 전해 주는 따스함인지아내는 엄마 품에 안긴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잠을 잔다

세 살에 소아마비 앓은 다리때로는 불평을 하고 살아 왔는데이 불편한 다리라도 없었더라면내 가슴에 평생 얼룩진 멍울이 되었을 것을

너 비록 내 밑동에 말없이 박혀앙상한 뼈마디에 붙은 실핏줄 세워가며떠받치고 있지만야윈 다리로일을 할 수 있고사랑할 수 있으며무릎 꿇어 기도할 수 있으니너는 감사, 나의 뜨거운 눈물이다

3. 부장으로 산다는 것



다면평가



한 사람을 세워 놓고수술실 환자처럼여러 사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하나하나 해부해 보며관찰한다



주관적인 평가점수 매겨져객관화되는 순간사람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말한다진리가 평균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평균값에 얼마나 눈물 흘리는지도 모르는 채

감정 창고



나는 감정을 보관하는 창고지기이다기쁨 제품이 들어오면입구 쪽에 가까이 대기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가족 밥상을 준비하는어린 소녀가장 집에기쁨에 희망 햇살 쌀을 더해 바로 출고

슬픔 제품이 들어오면 실연의아픔을 꿰매고 나온 여인절망으로 전염되지 않도록가슴 조이며 재포장 꼭꼭 보관

행복 제품이 들어오면창고 보관 않고 바로 내려미리 준비한 작은 차량으로소아암 앓는머리카락 하나 없는눈만 횅한 그 아이에게행복 쾌속 배달

불행 원재료가 들어오면마지막 구원의 손길희망 거름망으로 품질검사희망씨앗은 정상 제품으로 재출고불행씨앗은 불구덩이에 멸각처리

분노 제품이 들어오면새색시 해맑은 눈망울로아이 까르르 웃음으로기쁨 제품으로 재출고남 얘기 아니다내가 희로애락 창고이네

못과 망치



뚝, 딱, 쾅부딪힘에 정신이 혼미하다



둥근 쇳물 뱃속 같이 태어나내리쳐야만 하는 운명맞아야만 하는 숙명



같은 핏줄이지만따스한 호흡을 나누지 못하고동전의 양면처럼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날카로운 발톱을 가졌지만위로는 치켜들지 못하고아래로만 뻗어야 하는 슬픈 운명

내리치는 간격과 간격 사이 시간이 길어아래로 고객 떨어뜨리어 살펴보는데



무작정 내리치는 쇳소리바위틈에 발톱 다 해지고다시 사정없이 내려치는 성난 번개 소리다리가 문드러져서 제대로 박혔다

너는 상사나는 부하 직원



4.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낙성대의 해송처럼넉넉한 바다를 가슴에 담아 놓는 것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성난 파도에 굴하지 않고잔잔한 파도에 미풍으로 화답하고변덕스러운 날씨에도하얀 뭉게구름 미소를 보내는 것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경포대 모래알처럼 자기를 부수어사랑하는 사람 발 아래섬김과 겸손으로 뿌려지는 것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활활 타오르는 연탄처럼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뿌려지는 것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축복을 받으며기쁨으로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통영항에서



마음이 급해통통거리며찾아온 통영항에갈매기가 두 손 벌리며반갑게 맞는다



술 먹은 사람 고함 소리여인의 깔깔거리는 소리회색빛 이불을 덮고 있는 항구



정적을 깨고식당 아줌마 억센 경상도 사투리무뚝뚝한 표정



장어탕 한 그릇 비우며빙그레 미소 지우고말 거는 사내에게피식 웃는 얼굴잔잔한 미소먹구름 사이 비추는햇살이 정겹다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고옹고집 쓴 뿌리가 주위를 힘들게 한다울타리 밑동에 박혀서말없이 떠받치고 있는 벽돌그 자리에 침묵으로 있어도꽃 냄새 향기 나는 사람으로나이 들어가고 싶다

자라나는 머리 스님이 면도날로손질하듯 사랑하는 사람아프게 했던 쓴 뿌리털들매번 밀어내며 윤기나는 청명한 하늘이고 싶다

정겨운 사람에게 몽니를 부리며고치라고 강요했던 가슴 아픈 갈등도동이 트는 여명에는보잘 것 없는 찰나이거늘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한 아픔이 다른 아픔에게화해의 볼을 비비며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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