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7년전쟁
김성한 지음
산천재 / 2012년 7월 / 560쪽 / 15,000원
김응서의 극비 장계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니 1597년, 전쟁 6년째 되는 정유년(丁酉年)이었다. 정초에 조정에는 두 통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하나는 한산도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올린 것이고, 또 하나는 의령에 있는 경상우도병마사 김응서가 올린 것이었다. 이순신이 올린 것은 기쁜 소식이었다. 통신사 황신 일행을 태운 선단을 이끌고 일본에 갔던 거제현령 안위, 군관 김난서 등이 돌아와 부산에 머물고 있는 동안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김응서의 장계는 극비사항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 요시로를 자기에게 보내 조선군과 합심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계책을 제의하였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오는바 그 시기를 미리 내통할 터인즉, 조선 수군이 이를 바다에서 맞아 공격하면 가히 잡아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로 처음부터 이 전쟁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호전적인 가토 기요마사와 늘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임금의 명에 따라 이튿날인 1월 2일 대신들이 회의를 거듭한 결과 행여 유키나가에게 속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제기하는 축도 있었으나 유키나가를 잘 아는 통신사 황신의 의견을 듣고 결론을 내렸다. 기요마사와 유키나가는 원래 원수지간이니 유키나가의 말은 믿을 만하고 또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황신을 급히 부산으로 보내 유키나가를 만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부산 방면의 일본군을 먼발치로 감시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우의정으로 충청·전라·경상·강원 4도도체찰사를 겸한 이원익은 경상좌병사 권응수와 함께 경주에 주둔하고, 도원수 권율과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본영을 두고 있었다. 김응서는 같은 의령에 있는 원수부(元帥府)로 도원수 권율을 찾았다. 권율도 유키나가를 직접 만난 일은 없었으나 좋게 보고 있었다. 화평회담이 시작된 후 유키나가의 군대는 이쪽 지역을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전투가 벌어져도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중립을 지켰다. 권율은 유키나가가 속임수를 쓸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권율이 물었다."오늘이 며칠이오?"
"11일입니다."
"한산도에 다녀와야겠소."
권율은 이튿날 아침 길을 떠났다. 권율은 부산을 공격하여 적의 교두보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12일 부산의 적진에 큰불이 일어났을 때에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결정하고 보니 8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겨우 2만 3천 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전국에 흩어져 있어 당장 부산 방면에 투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식량도 무기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랜 전란에 온 나라가 기진한 탓도 있고, 지난 몇 해를 두고 화평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기강이 해이해진 탓도 있었다. 육군으로 안 되면 수군으로 어떻게 안 될까? 궁리 중인데 유키나가의 제의가 온 것이다. 수군은 막강하고 이순신은 유능하니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다. 그는 희망을 가지고 길을 재촉했다. 어두워서 한산도에 당도한 권율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순신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그는 유키나가의 계책을 설명했다. "요컨대 일간 기요마사가 다시 바다를 건너올 터이니 수군이 출동해서 이를 치고, 아울러 부산 앞바다를 봉쇄해서 적의 보급을 차단해 주시오." 생각을 정리한 이순신이 대답했다.
"대감,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것은 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권율은 정색을 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오?"
"적장이 시키는 대로 병을 움직인다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입니다." 이순신은 병법에 밝고, 병법의 원칙에 충실한 장수였다. 권율이 아무리 유키나가의 사람됨과 행적을 설명해도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유키나가가 충성하는 것은 일본이지 조선일 수 없습니다."
권율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기요마사를 치는 일은 그렇다 치고 부산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소? 부산을 그대로 두고는 대군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오."
부산을 치는 문제
부산항을 봉쇄해야 적의 숨통을 조이게 된다는 것은 이순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 주변은 물론, 거제도에서 부산에 이르는 해로(海路)의 연변은 모두 적의 점령하에 있어 어디 한 군데도 배를 댈 데가 없었다. 폭풍우를 만나도, 격군들이 지쳐 노를 저을 수 없어도, 육지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바다에 닻을 내리고 쉴 형편도 못 되었다. 육지에서 퍼붓는 적탄을 피해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것은 무모한 모험이었다."부산은 병법에서 말하는 사지(死地)올시다. 부산을 봉쇄하면 적의 목을 완전히 조이는 것이 됩니다만 그것은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한산도에 버티고 적의 남해 진출을 막는 것은 9분 정도 적의 목을 조이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수군의 힘의 한계올시다." 권율이 물었다.
"폐일언하고 부산을 치면 어떻게 되겠소?"
"우리 수군을 부산 앞바다에 수장(水葬)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9분 정도 잡았던 적의 목을 완전히 놓아주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조정에서 굳이 바다에 나가 기요마사를 치고 부산을 치라면 어떻게 할 것이오?"
"그야 정비되는 대로 나가야지요."
"정비라니?"
"아시다시피 겨울에는 격군이 없습니다. 시일을 주시면 불러 모으지요."
이순신은 겨울이 오면 한산도에서 배들을 수리하고, 무기를 정비하고, 사부(射夫:사격수)들의 사격 훈련을 독려하는 등 다음 전투에 대비하였다. 한편 10월 초에서 다음 해 1월 말까지 격군들은 식량도 절약할 겸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 가사를 돌보게 하였다. "불러 모으자면 며칠이나 걸리겠소?"
"대충 모아도 7, 8일은 걸릴 것입니다."
권율의 얼굴에는 실망과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
서울 조정에는 잇따라 장계가 올라왔다. 1월 21일, 제1착으로 도착한 것이 도체찰사 이원익이 경주에서 올린 장계였다. '기장현감 이정견이 급보한 바에 의하면 기요마사는 이달 13일 다대포에 도착한바 선발대로 온 배만도 2백여 척이라고 합니다. (……)'무지막지한 기요마사가 우리의 허를 찌르고 곧바로 달려와서 서울을 기습 공격할 수도 있다 하여 조정은 각처에 사람을 보내 경계를 엄히 하고 서울의 방비도 다시 점검했다. 다음 날인 22일에는 전라병사 원균(元均)의 장계가 올라왔다. '(……) 임진란 초기에 육상의 적은 멀리 치달려 짧은 기간 내에 평양까지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적은 해를 넘겨도 패전을 거듭하여 끝내 남해 이서(以西)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조정에서는 수군으로 바다에서 맞아 싸워 적으로 하여금 육지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시면 반드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전에 바다를 지킨 경험이 있어 이 일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감히 침묵을 지킬 수만 없어 우러러 조정에 아뢰는 것입니다.'
본시 원균과 이순신은 서울 남산 밑의 같은 동네에서 장성하여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원균은 금년에 58세로, 53세인 이순신보다 5년 연상이었고, 이순신이 겨우 종6품 정읍현감일 때 원균은 이미 정3품 전라좌수사였다. 품계로 8계단이나 높으니 10년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운 벼슬의 차였다. 원균이 전라좌수사를 물러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 2월이었다. 그의 후임으로 간 것이 유극량이었고, 유극량의 후임으로 간 것이 이순신이었다. 평화 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전쟁을 앞두고 당시의 좌의정 류성룡의 추천으로 여러 계단을 뛰어넘어 발탁한 특진 인사였다.
원균과 이순신은 생김새에서 성격에 이르기까지 서로 맞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이순신은 8척을 넘는 후리후리한 키에 훤칠한 몸매였고 원균은 중키에 뚱뚱한 편이었다. 이순신은 말수가 적고 신중, 침착하고, 특히 작전에 있어서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신중성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원균은 일종의 호걸형으로 거침없이 말하고 욕설도 퍼붓고 술주정도 하고, 장수로서는 신중히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적을 냅다 치고 보는 돌격형이었다. 좋은 면으로는 배포가 크고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는 데가 있었으나 반면에 법이고 사람이고 우습게 보고 안하무인으로 행세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런 성품이니 8계단이나 떨어졌던 아득한 후배 이순신이 1년 사이에 자기를 따라잡고, 더구나 연합함대의 주장(主將)으로 치솟으니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임진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수군은 잘 싸워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전국(戰局)에 중대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임금은 공이 제일 큰 이순신에게 일약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를 내리고, 얼마 안 가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렸다. 같은 정2품이라도 자헌대부는 하(下), 정헌대부는 상(上)이었다. 이때 원균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내렸는데 이것은 종2품 하였다. 더구나 전쟁 2년째인 다음 해 8월 이순신이 통제사로 임명되면서부터는 더욱 크게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대선배인 원균이 아득한 후배이던 이순신의 직접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원균은 부하들을 보기가 민망하고 지휘관으로서는 설 땅이 없어졌다. 그는 공공연히 이순신을 무시하고 명령에 불복했다. 이순신은 난감했고 군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문은 퍼져 서울의 조정에까지 들렸다. 곡절 끝에 재작년 2월, 원균은 충청병사로 임명되어 해미로 갔다가 작년 8월 전라병사로 전임되어 장흥으로 옮겼다. 원균이 장계를 올린 배경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이순신을 잡는 회의
25일에는 권율의 장계가 올라오고, 이튿날인 26일에는 또 다시 도체찰사 이원익의 장계가 올라왔다. '울산군수 김태허의 보고에 의하면 왜적은 앞서 정박하였던 서생포에 널리 퍼져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배들은 포구에 2마장에 걸쳐 빈틈없이 정박하고 있고 그 숫자는 대략 5백 척쯤 된다고 합니다.' 연일 올라오는 장계에 온 장안이 뒤숭숭하고 일찍이 현감을 지낸 박성(朴惺)은 흥분하여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이순신은 죽여야 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잊었던 허물을 들추는 축도 있었다. 정초에 올라온 이순신의 장계가 문제였다. 이 장계에서 그는 작년 12월 12일 부산의 적진을 태운 큰불은 자기의 휘하 군관 김난서 등이 주동한 것이라고 보고하였었다. 이것이 사실과 달랐다. 당시 경주에 내려가 있던 이조좌랑 김신국이 조정에 다음과 같이 보고함으로써 진상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요즘 부산에 있는 적의 소굴을 불태운 것에 대해서 통제사 이순신이 장계를 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적의 소굴을 불태운 것은 도체찰사 이원익 휘하의 군관 정희현의 심복 부산 수군 허수석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순신의 군관이 부산에 이르렀다가 그것을 보고 돌아가 순신에게 자기 공으로 보고한 것입니다. 순신은 처음에 그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조정에) 아뢴 것입니다. (……)' 전후 사정이 명백했고 문제를 삼는 사람도 없었으나 세상의 비난이 이순신에게 집중되자 이 일을 약간 비틀어 가지고 임금에게 속삭이는 축이 있었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이고 남의 공을 자기 공으로 둔갑시키는 사악한 인간이올시다."
1월 27일, 임금은 대신들과 관계자들을 궁중으로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순신을 잡는 회의였으나 막상 이야기해 보니 잡을 만한 죄목은 되지 못했다. 결국 좌의정 윤두수의 제안대로 수군을 양분하여 원균을 경상도통제사, 이순신을 전라·충청도통제사로 임명하기로 했다. 일은 이렇게 결말이 났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금이 여전히 이순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때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주목을 끌어 두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머리가 좋은 사헌부의 관원들이 글을 올렸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이고 명령에 불복했습니다. 이러고도 무사하다면 나라의 법도를 어찌 세울 것입니까? 마땅히 잡아다 그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임금은 이것을 비변사로 돌렸다. "의논해 보라." 비변사의 관원들도 머리가 좋기는 매일반이었다. "잡아들여야 합니다." 임금은 영을 내렸다.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고 이순신을 즉시 잡아 올리라."
매질 그리고 백의종군
3월 4일 이순신은 서울에 당도하여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 해평부원군 윤근수를 위관(委官:조사관)으로 연일 신문이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고문과 매질에 이순신은 피를 쏟고 반죽음이 되었다. 이대로 두면 이순신은 어김없이 그들의 손에 죽게 되었다. 그가 죽으면 바다는 누가 지킬 것인가? 뜻있는 사람들은 그의 구명을 위해서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판중추부사 정탁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구명을 호소하였다. 3월 30일 의금부에서는 사형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은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결정하였다. 모든 관작을 박탈당하고 일개 병사로,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원수 권율이 있는 원수부는 가토 기요마사가 상륙한 후 의령에서 초계로 옮겼다. 이순신은 초계에 가서 권율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권율과 원균의 불화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출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초계를 떠나 사천에 와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천은 한산도와 남원의 중간지점이었다. 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여 좋은 성과를 올리면 남원에 와있는 양원에게 명군의 출동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수륙으로 부산을 치면 능히 저들을 바다에 쓸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부산 앞바다는 고사하고 안골포와 가덕도 근해에서 잠시 접전하다가 한산도로 돌아와 버렸다는 것이다. 권율의 호령이 떨어졌다. "원균을 불러들이라!" 군관은 한산도로 말을 달렸다.
이때 수군의 편성을 보면 원균은 전에 이순신이 맡았던 직책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그 휘하에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배설, 충청수사 최호가 배치되어 있었다. 권율은 사천으로 떠나기에 앞서 만일의 경우 원균의 지휘권을 무시하고 3명의 수사, 즉 이억기, 배설, 최호를 직접 독려하여 부산 앞바다로 내보낼 생각도 하였다.사천 선창에서 배를 내린 원균은 그 길로 권율이 묵고 있는 객관으로 직행하였다.
"통제사 원균, 현신이오."
원균이 허리를 굽혀도 권율은 까딱하지 않았다. 권율 61세. 원균 68세. 반백의 두 사나이는 서로 상대를 쏘아보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통제사. 내가 처음 출격을 명령한 것은 지난 5월 초였소. 그 후 계속 독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달이 지난 오늘까지 부산으로 출격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오?""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골포와 가덕도는 물길로 부산에 이르는 관문이올시다. 수군만으로는 이 관문을 뚫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수륙 양면으로 이를 칠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설사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부산 앞바다로 나간다 하더라도 사면으로 적에게 포위를 당하고 퇴로가 없으니 수군은 독 안에 든 쥐로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원균은 섬돌 옆에 선 채 대청에 앉은 권율을 바라보고, 권율은 또 다시 물었다.
"그것은 전에 이순신이 주장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오? 그래 놓고 이순신이 못 나간다고 할 때 영감은 무슨 심사로 나갈 수 있다고 조정에 장계까지 올렸소?""……."
"나갈 수 있다기에 이순신을 감옥에 가두고 영감을 그 자리에 앉혔소. 그리하여 온 나라가 영감이 부산으로 출격하여 일본에서 건너오는 배들을 모조리 바다에 처넣기를 학수고대했소. 그런데 지금 와서 못 나간다니 이렇게 기막힌 일이 어디 또 있겠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좀 해보시오.""구구하게 변명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마는 그러시다면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소인이 경상우수사를 면하고 바다를 떠난 것은 을미년(乙未年:1595) 2월, 만으로 2년 4개월 전입니다. 그 당시 화평의 기운이 무르익어 일본군은 대거 철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도 소수 병력만 남기고 다 가버렸습니다. 지난 정월, 그 글을 올릴 당시 소인은 전라병사로 장흥에 있었습니다. 장흥은 한산도에서 6백 리 길이올시다. 그 위에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요. 자연히 바다의 사정에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인이 떠날 때의 상황을 생각하고 그 글을 올린 것입니다. 지난봄부터 적은 재차 출병을 시작했고, 특히 지금 가덕도에는 적군 1만 명이 있고, 안골포에는 4천5백 명의 적군이 버티고 있습니다. 일전에도 나가 접전해보았습니다마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