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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

최보식 지음 | 휴먼앤북스
매혹

최보식 지음

휴먼앤북스 / 2010년 8월 / 356쪽 / 12,000원





인연(因緣) - 정약용



약전 형, 약종 형과는 두 살씩 터울이었다. 우리 정(丁)씨 삼형제는 십 대 소년 시절부터 이벽을 따랐다. 이벽의 두 살 위 누이가 내 맏형수였다. 이벽은 포천의 본가에서 마재로 맏형수를 만나러 오갔다. 그러면서 근처 앵자산 안에 있는 천진암을 자신의 공부 장소로 택했다.

경자년(1780) 초가을 어느 날이었다. 이벽이 두미로 이사를 오면서 우리 형제는 이벽과 왕래가 더 잦아졌다. 이제 나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때가 됐다. 원래 나는 내 재능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나의 이런 자존심은 이벽을 만나면서 많이 허물어졌다. 내 어린 눈에 그는 학식과 풍채, 도량에서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당시 나는 그를 추종하는 학생이고 열렬히 따르는 신도였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그와는 다른 내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다. 우리 사이에는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와 나는 타고난 기질이 달랐고 선택한 삶의 행로가 달랐다. 그에게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과거시험의 포기였다.

당초 그의 부친 이부만은 아들이 무과시험에 응시하길 원했다. 이벽 집안은 원래 무인 집안이 아니었다. 선조 때 대학자 이정형의 후손이며, 5대조 이경상은 인조 임금 시절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했다. 그 뒤 이경상은 귀국길에 한역본 서학 서적들을 사 들고 들어왔다. 이벽이 천주학 수괴가 된 연원을 집안에서 찾을 때 이경상의 피가 이어졌다고들 했다. 이벽의 조부가 무과에 급제해 호남병마절도사까지 오르면서 집안 분위기가 무과로 바뀌었다. 이벽의 부친은 세 아들을 모두 무과에 당당하게 진출시키려고 했다.

나는 이벽에게 말했다.

“형님 같은 인재가 왜 과거시험을 보지 않습니까? 벼슬길에 올라야 가문을 빛내고 임금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위해 일할 수 있지 않습니까?”“나는 천성이 모자라는 인간이라 벼슬길로 들어가면 결국 그물에 걸린 새나 솥 속에 든 물고기 신세가 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네.”“설령 벼슬자리가 그물에 걸린 새 신세인들 어떤가요?”

“그렇게 묶여 내가 품은 뜻을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뜻을 지키며 사는 것 또한 귀한 것이다.”“그렇다면 형님은 장차 무엇을 꾀하고자 하는 겁니까?”

이벽이 고개를 숙였다.

“반상(班常)의 차별이 대를 잇고 한 번 노비면 십 세, 백 세가 되도록 그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신분질서가 바뀔 수 있을까, 나서 죽을 때까지 굶주리고 억압받는 백성들은 과연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나는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했다. 이러니 벼슬길과 맞을 수 있겠나.”“고상한 뜻만으로 세상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그런 포부를 펼치려면 현실에서 힘을 가져야 합니다. 힘을 얻지 못한 포부는 불만과 불평으로 끝날 겁니다.”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벼슬길에 올라야 힘을 얻고 포부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지나면 그 힘은 아름다운 꿈을 이루기보다 대부분 탐욕으로 바뀐다. 백성들을 억압하는 지금의 계급질서를 지탱하는 데 쓰일 것이다. 소수의 권세가들만 행복하고 나머지 전부는 불행하다. 권력에 빠져들면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그런 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데 힘쓸 것이다.”“위로 성군(聖君)이 계시고 현신들이 등용되면 세상의 고루한 인습과 부패를 왜 척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정조 임금님께서는 낡은 체제를 쇄신하려고 하지 않습니까?”“그 체제 안으로 들어가면 결국 그 체제를 위해 충성하게 되어 있다. 체제 속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보기 싫게 길어진 손톱을 자르는 정도에 불과하다. 손톱은 또 자라지. 몸통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나. 그러면 임금도 위험해진다. 불충하게 들릴지 몰라도, 임금도 지금 체제의 부속품일 뿐이다.”

듣는 나는 섬뜩했다. 그건 내 신분과 내 사고의 한계였다. (이벽이 젊은 날 죽지 않았다면 그 뒤 어떻게 됐을까, 그를 비판하는 주자학 선비들의 말처럼, 황건적이나 백련교도처럼 세상을 뒤집어엎으려는 반란의 수괴가 됐을까. 이들 수괴도 처음에는 고상한 인간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반동적 이념과 인간적 매력, 선동적 재능만 따지면 그럴 소지가 있겠다 싶다가도, 내 문제와 결부해 ‘그럴 경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로 생각이 미치면 감당이 안 됐다.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벼슬길이 아니라면 형님의 그런 꿈을 어디서 이룰 것입니까?”

“평생 이루지 못하면 어떤가. 하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살지 않으면 그 삶이 아무리 긴들 무슨 보람이 있겠나. 사람이 하늘에서 귀한 목숨을 받아서 사는 것이니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하늘에 다시 올라갈 때도 할 말이 있겠지.”

내게는 벼슬길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벼슬에 올라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발휘하고 싶었다. 내 나이 21세(1783) 때 소과시험에 붙었다. 성균관 시절 대학생들끼리 보는 시험에서 나는 늘 1등이었다. 하지만 막상 관직에 등용되는 대과시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다. 한 번은 정조가 나를 따로 불러 “대체 시험을 몇 번이나 보았느냐. 그렇게 해서야 끝내 급제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내 실력이 그럴 리는 없었다. 그때 나는 천주학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천주학의 예식인 영세를 받았다.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자형 이승훈에게 이벽이 요구했다. “그대가 북경에서 경험한 예식을 그대로 본떠 행했으면 좋겠소. 이 예식을 거쳐야 우리가 진정 천주의 아들이 될 수가 있다고 들었소.” 이승훈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우리의 이마에 물을 찍어 발랐다. 어색했지만 분위기가 너무 진지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임의 핵심 회원들은 모두 영세를 받았다. 우리는 각자 서양식 호(號)를 갖게 됐다. 내 호는 ‘요한’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내 입으로 발설한 적은 없었다. 천주학에 빠져들 경우 따르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위태롭게 체제의 공부와 반체제의 공부를 왔다 갔다 했다. 정조의 칭찬과 이벽의 인정 사이에서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나 자신에 대해 나는 변명할 수 있었다. ‘세상에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욕심이 무슨 잘못인가. 배우는 자가 지적 호기심으로 새로운 학문에 빠져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학문은 모두 이단이고 주자학만 절대 진리일 수는 없다.’

성균관에 입학해 3년이 됐을 때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터졌다. 조선천주교사에서 첫 옥사로 기록된 이 시국사건은 간단하게 끝났다. 이벽을 비롯해 핵심 간부는 체포됐지만 곧 훈방 조치됐다. 우리는 석방된 뒤 조정의 은전을 당연시했다. 우리는 겉으로는 개전의 정을 표시했다. 반성문을 썼고 불온서적들을 불태웠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언약했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불온분자의 낙인이 찍혀 있다는 걸 몰랐다.

마침내 나는 대과시험에서 2등으로 급제했다. 내 나이 27살이었다. 종7품 벼슬로 시작해 예문관 검열, 사헌부 지평 등으로 옮겨갔다. 직급은 낮았지만 늘 요직이었다. 권력 속에 깊이 들어가면서 나의 길이 이벽의 길과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체제를 부정하려는 혁명가가 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었다. 내 삶의 한계는 늘 체제 경계선 안쪽에 있었다. 임금을 설득하고 움직여, 좀 나은 쪽으로 개량해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벽은 임금을 체제의 부속품이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는 무엄했다. 임금은 체제였다. 임금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난 정조를 만나서 이벽의 그림자를 지워갔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굴복(屈伏) - 이벽



인편으로 부친의 전갈이 왔다. ‘急歸(급귀)’ 단 두 자(字)였다. 그 전갈을 보는 순간 내 몸은 얼어붙었다. 을사추조적발이 있고서 넉 달쯤 지났을 때였다.

전날 부친 이부만은 경주 이씨 문중회의에 불려갔다. 문중회의에서 문중 원로가 잔기침을 뱉은 뒤 입을 열었다. “오늘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야흐로 사학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고 온 나라가 시끄럽소. 내 듣기로 조정 안에서도 그 논의가 분분하고 성상께서는 골머리를 앓는다고 합디다.”말의 화살은 모두 이부만에게로 날아왔다.

“우리 경주 이씨 문중에서 어찌 이런 망종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걔가 자랄 때는 아주 영민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찌 그런 사도(邪道)로 빠졌을꼬, 쯧쯧.”한쪽에서 말했다.

“자네 아들 벽이가 이날부로 천주학에서 손을 떼고 참회하지 않으면 자네 집안은 경주 이씨 족보에서 빼버릴 걸세. 열흘 말미를 줄 테니 그 아이에게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짓게 하고 문중회의에 나와 부복하도록 하게.”

***



내가 바깥채에 들어갔을 때 부친은 아랫목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분안인사를 올리자, 부친이 입을 열었다. “네가 저지른 소행이 있는데 어찌 아비 된 내가 평안할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이온지…….”

“나는 너와 마주 보며 말을 나누고 싶지 않다. 마당에서 엎드려 대기하라.”

나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본가 마당에 꿇어 엎드렸다. 대청마루에 선 부친 이부만 공의 목청이 쩌렁쩌렁 울렸다. “자, 지금부터 네 눈깔로 똑똑히 봐라.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 아비가 어떻게 죽는지. 네놈이 빤히 보는 앞에서 내가 죽어주마. 네가 믿는 사교는 낳고 길러준 아비어미는 없고 천주만 아비라고 하니, 이 아비가 죽는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아버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버님이라…… 네놈의 뒤집힌 눈깔에 내가 아비로 보이느냐? 네놈은 아비를 길 가는 행인처럼 본다는 천주학의 도를 닦지 않았느냐. 어찌 내가 네 아비로 보이겠느냐.”나는 고개를 들고 외쳤다.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오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비가 아비로 보인다는 말이냐? 나는 네 혓바닥을 믿지 않는다.”

부친은 집안 마루 위 대들보에 묶은 광목천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었다.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아버님…….”

“이 아비가 죽고 나거든 천주를 아비처럼 받들든 천주할아비를 받들든 네놈 마음대로 하라. 고얀 놈.”마루 아래 섬돌로 뛰어내릴 기세였다. 모친과 내 형제들, 형수와 제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자, 말하라. 아비냐, 천주냐. 양단간에 답하라. 아비가 생목숨을 끊은들 눈도 깜박하지 않겠지만, 분명코 말하라. 왜 머뭇거리느냐. 아비 뜻을 거역하는 자식과 어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겠는가.”부친은 다시 광목천 올가미를 붙잡았다. 마루에서 전개되는 상황에서 나는 무력했다. 나는 내 신념을 위해 충성해왔다. 목숨을 걸 수 있었다. 나는 스승 없이 서학 서적을 독학해 그 내용에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비밀 학습 모임을 만들었다. 천주학에 빠진 뒤로 내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 죽은 육신은 사흘 이내 어두운 땅속에서 썩을 것이고 이를 땅강아지들이 갉아먹고 구더기가 빨아먹을 것이다. 이게 장차 죽어서 맞게 될 종말이었다. 한계적 삶을 한 번 살다가 간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가.

이런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숱하게 궁리했지만, 천주의 존재만큼 내게 위안이 된 적이 없었다. 하늘에 우리를 창조한 주인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은 황홀했다. 죽은 뒤 자기 행실의 결과로 천당과 지옥을 가게 된다는 학설도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동료 유학자들은 나를 허황하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한 번뿐인 현세의 삶이라면 도척(중국의 전설적인 도적)처럼 살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굶어 죽을 수 없다. 도척은 악행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이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다. 백이와 숙제는 의로움을 좇아 굶어 죽었다. 이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 없다면, 왜 선행을 해야 하고 왜 악행을 해서는 안 되는지 과연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후에라도 처벌과 보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두렵고 안심하게 만들 것이다. 억압하는 지배층은 그 두려움으로 현세에서 좀 더 자신을 경계하고, 억눌린 백성들은 하늘에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로 현세를 살지 모른다. 천주학은 비록 서양의 것이지만 지금 조선 땅에서 참으로 이상적인 이념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만인은 평등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내 일상을 정결하게 해줬다. 속류 유학자들이 말하는 사특함이 어찌 있겠는가.

언젠가 내 신념을 위해 목숨과 바꾸는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죽는 것만 감수했을 뿐, 내 앞에서 부친이 보란 듯이 목을 매는 것은 예정에 없었다. 부친은 자신의 목숨으로 내가 목숨 걸었던 신념을 빼앗으려는 중이었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 몰릴 줄 몰랐다. 부친의 목숨을 살리면 내 정신의 생명이 죽는다. 그것은 내가 독학의 깨달음으로 맞아들인 이념을 부인하는 것이고 내가 이끌어온 비밀 모임과 회원들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정신이 죽은 나는 살아도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부친이 죽으려는 상황을 방관하면 나는 부모를 죽인 자식이라는 오명과 비난, 수모, 죄책감 속에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내 처지에 눈물을 뿌렸다. 부친은 기세등등했다.“더 이상 말리지 말라. 너는 아직도 입을 봉하고 있느냐. 이걸로 끝이다.”

나는 말을 뱉었다.

“천주학과 인연을 끊겠습니다. 아버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부친은 이 소동이 있은 뒤로 32년을 더 살았다.





변절(變節) - 정약용



탄탄대로의 벼슬길은 환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마침내 신해년(1791)에 진산 사건이 터졌다. 전라도 진산(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살던 윤지충과 이웃 동네의 권상연이 사학(邪學)에 물들어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것이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서학 무리의 과격성에 놀랐다. 고백건대 나는 벼슬길에 나선 후 서학에 발길을 끊었다고 했지만 마음속 미련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서학 이념에 환멸을 느껴 서학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출세의 길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무의식으로도 서학에 대한 관심이 혹 표출될까 봐 억눌러야만 했다.

그런데 조상의 신주를 태운 이 진산 사건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내게 잠재된 보수성이 나를 눌렀다. 이런 이념이었구나, 나는 그 숨은 정체를 보는 것 같았다. 조선 땅에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임금께 올리는 상소문에 ‘서학을 미워하기를 사사로운 원수같이 하고, 성토하기를 흉악한 역적같이 했다’며 내 결백함을 강조하고 이들 패악한 무리를 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은 참수됐다. 윤지충은 내 외사촌 형이었다. 서울에 올라왔다가 우리 형제를 통해 서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권상연은 윤지충의 고종 사촌이었다. 서로 혈연으로 얽혀 있었다. 나는 서학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운명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공격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나는 백방으로 나의 결백을 알렸고 그렇게 해서 나는 또 한 번 가까스로 피해갈 수 있었다. 뒤에는 늘 정조 임금의 방패가 있었다.

이듬해 내 나이 서른에 홍문관 수찬이 됐다. 그해 말 부친이 돌아가셔 상중인 내게 정조는 수원 화성 축조를 위한 설계와 공사 규정을 짓는 일을 맡겼다. 나는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기중소(起重小)를 만들었고, 그런 공로로 나는 종5품에서 정3품으로 특별 승진했다. 왕명 출납을 맡는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됐다. 하지만 곧이어 천주학 무리들이 중국의 주문모 신부를 밀입국시킨 사건이 터지자, 나는 또 그 도당(徒黨)으로 고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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