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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군대

유광수 지음 | 휴먼앤북스
왕의 군대

유광수 지음

휴먼앤북스 / 2011년 2월 / 450쪽 / 12,000원



1872년(고종 9년)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했지만 입시하는 스물두 살 젊은 신임 관료의 가슴은 푸른 꿈으로 한껏 부풀었다. 장원급제였다. 천안 집을 떠나 북촌 김씨 집안의 김병기의 양자로 한양에 온 6살 때부터 귀 따갑게 듣던 신동이란 칭찬이 무겁게 짓누르던 어깨의 짐을 훨훨 벗어버린 것만 같아 더 기뻤다. 현 주상께서 어린 나이에 등극하시면서 권세가 흥선대원군의 수중으로 떨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양부 김병기에 대해서는 흥선대원군도 짐짓 꺼려하는 듯했다. 활짝 열린 그의 앞길에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희대의 풍운아 김옥균의 앞길이 꼭 그의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1881년(고종 17년)

왕후는 자식 복이 없었다. 첫째로 태어난 아들이 항문이 막혀 5일 만에 죽었는데, 이어 태어난 딸도 8개월 만에 죽어버렸다. 훗날 순종이 되는 셋째가 태어나자 왕후는 조선의 모든 명산에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무당의 말에 따라 돈을 무궁무진하게 써댔다. 거기에 궁중 연회를 하루가 멀다 하고 열었다. 그러다 보니 내수사의 경비만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고, 결국 공공연히 호조와 선혜청의 경비를 끌어다 쓰고 있었다. 그것도 채 1년이 되지 않아 바닥을 보였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10년 동안 비축해둔 것이 모두 탕진되자, 왕후는 측근들을 통해 벼슬자리를 팔기 시작했다. 부정부패는 하늘을 찔러댔다.

1882년(고종 18년)

결국 쌓이고 쌓인 원한이 한데 모여 터지고 말았다. 문제는 옛 5군영 출신 구식군인들의 급료를 열세 달이나 지급하지 않고 미룬 선혜청에 있었다. 이때 전라도에서 세금으로 쌀이 올라왔다. 군인들은 선혜청에 모여 급한 대로 우선 한 달치 급료라도 받았다. 그런데 급료로 받은 쌀에 모래와 겨가 반 이상 섞여 있었다. 그동안 맺히고 맺힌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돈화문을 깨고 들어온 군인들이 왕후를 잡아 죽이겠다며 궁궐로 밀어닥쳤다. 사대당인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는 동안 빚어진 수많은 비리와 병폐의 중심에 왕후가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인들의 폭동이 정당화되기 위해 사대당의 비리와 학정이 부각되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다시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배가 시모노세키를 지날 때였다. 조선에서 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김옥균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김옥균은 일본의 선진문물을 둘러보고 귀국하는 중이었다. 김옥균이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며 제물포로 향하고 있을 때, 가까스로 도망친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도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본 정부는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비슷한 시기에 왕후의 밀지를 받은 영선사 김윤식은 청나라의 실질적 군권을 쥐고 있는 북양대신 이홍장을 만나고 있었다. "조선의 혼란은 중국의 어지러움입니다. 급히 도와주셔야 합니다. 일본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이홍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홍장의 조처는 신속했다. 오장경 휘하 해군 군함 5척을 급파했다. 남양만에서 청나라 정예병 4,500명이 육지에 상륙했다. 한양에 진주한 오장경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천진으로 보냈고 대원군은 그곳에서 이홍장의 포로로 억류되어 버렸다. 이렇게 대원군의 집권은 3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조정은 다시 청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으로 짜였고 민씨 일파의 손아귀에 모든 것이 떨어졌다.

귀국한 김옥균은 폐허가 되어버린 한양을 보며 피눈물을 삼켰다. 자신이 보고 온 일본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조선의 현실에 통곡할 지경이었다. 그는 동지들을 불렀다. 그들에게 그동안 자신이 바깥세상에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것을 들려주었다. 썩은 자리, 더러운 판에서 썩은 것을 도려내고 깨끗하게 씻는다고 해서 새 살이 나지 않는다고,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판을 차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곧 우리의 세상이 올 거라고…….

1884년(고종 20년)

북악 별장에 개화당의 핵심 네 명이 모였다. 박영효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친군전영에 소속된 광주군대를 신복모를 중심으로 다시 접촉했습니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박영효가 광주유수 때 양성했던 광주군대의 훈련대장이 신복모였다. 그가 친군전영에서도 훈련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럼 친군전영 500명 모두를 동원할 수 있단 말이오?" 서광범의 물음에 박영효가 자신 있게 끄덕였다. 그러자 홍영식이 김옥균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형님께서 일본 사관학교에 보낸 서재필과 청년들도 불러들이셔야지요." 김옥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충의계원들과 보부상들도 동원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김옥균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지금 한양과 궁궐을 지키는 친군이 전후좌우 모두 합해 2,000명 정도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친군전영의 500명뿐이다. 후영 500명 중 동조할 자들은 70명 남짓이다. 유학한 사관생도들과 충의계원, 보부상들을 합해도 숫자가 너무 적다.""그래도 청나라 군사가 1,500명밖에 없으니 원세개(위안스카이)와 맞붙어도 승산이 없다 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김옥균이 고민의 속내를 털어놨다. "우리 거사를 다른 외국들이 연합해서 트집 잡아대면 끝장이다." 서광범이 물었다. "그럼 형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은 무엇입니까?"김옥균이 속삭이듯 말했다. "일본을 끌어들여 직접적인 대립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것으로 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힘은 우리가 쓰더라도 상징적으로라도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야 외교 분쟁이 났을 때, 우리가 도망칠 구멍이 생긴다."

고종은 김옥균을 불러들였다. 촛불이 흔들리는 내전에서 독대했다.

"과연 일본이 도와줄 거라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전하. 지금 우리 조선의 명운은 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구 열강들과 대등하게 외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일본을 보시면 잘 아실 수 있습니다. 우리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던 저들도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저렇게 발전했습니다. 우리 조선이 개화만 한다면 일본을 앞지름은 물론이고, 청 역시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고종 역시 그의 말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자신의 꿈이었다. 하지만 개화·개혁하려는 움직임을 청이 그대로 좌시할 리 없었다. 거기에 조정 내 사대당들이 앞다투어 개혁을 반대하고 나설 것이 눈에 선했다. 고종의 고뇌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전하, 용단이 필요하옵니다."

이윽고 고종이 결단을 내렸다. "경이 알아서 하시오. 국가의 명운이 경에게 달렸소. 모든 조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소."

며칠 후 김옥균은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다시 만났다. 김옥균의 말은 짧고 간명했다. "거사는 우리가 앞장서겠소. 전하를 설득하여 거사를 승인받아 명분을 세우는 것도 우리가 맡겠소. 귀 군대는 청군의 간섭과 방해를 막아주시오." 다케조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공사관을 나서는 김옥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다케조에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도 군사도 없이 도대체 어쩔 셈이지……?' 자신이 부추기긴 했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청의 군사는 줄었다고 해도 무려 1,500명의 정예군이었다. 친군좌영과 우영의 군사까지 청에 가담하면 절대 만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 첫째 날

오전 07:00

'오늘이구나.' 잔잔한 흥분이 몸에 퍼졌다. '성공할 수 있을까? 너무 일본을 믿는 것은 아닐까?' 일본군 150명이 청군 1,500명을 당할 거라고는 자신은 물론 동지들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일본군 150명은 조율을 위한 상징일 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일본군이 가담하지 않는다면?' 거사는 순식간에 청군과 사대당에 의해 짓밟힐 것이 분명했다. 홍영식은 눈앞이 아찔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너무 적극적으로 일본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다케조에 일본공사의 언행은 직접적이다 못해 노골적이었다. 이렇게 드러내고 도발하는 일본의 저의가 수상했다. 끝까지 맘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두 번째 것에 비하면 이것은 문제라 하기도 어려웠다. '거사 이후에 어떻게 나라를……?' 바로 이것이 홍영식의 가슴을 짓누르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어떻게든 거사는 성공할 수 있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거사 이후 나라를 유지할 실질적 힘이 없다는 거였다. 일본군 때문에 청이 직접 도발하지는 못해도, 주상을 모시고 있는 정통성 때문에 청이 대놓고 들이닥치지는 못한다 해도, 그것은…….

'길어야 고작 며칠뿐이다.' 궁극적으로는 청을 압도할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의 군대가 필요하다. 군대가…….' 홍영식의 눈빛이 저도 모르게 흐려졌다. 그때 방문이 휙 열렸다. 깜짝 놀란 홍영식이 고개를 들어 보았다. 김옥균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몇 번을 불러도 대답도 않고.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이럴 줄 알고 찾아왔네. 어디 고민을 말해 보시게." 홍영식의 이야기를 다 들은 김옥균이 입을 열었다. "아우님 말대로 우리의 군대가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하네. 내 어찌 그걸 모르겠나. 걱정하지 말게. 우리에게도 군대가 있네. 지금 한양을 향해 진군채비를 하고 있다네."

저녁 06:00

저녁 6시가 되었다. 내외빈들이 하나둘씩 정동 우정국으로 모여들었다.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베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 자리였다. 웃으며 인사하는 외교관들에게 홍영식은 미소로 답하며 때때로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다들 자리에 앉았다. 낙성식 축하연이 벌어졌다. 화기애애한 축하의 말과 덕담이 이어졌다. 주연은 시간이 늦어질수록 차츰 질퍽해졌다. 김옥균은 흥겨운 웃음과 질퍽한 농담 사이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스라한 서글픔이 피어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이젠 누구도…… 되돌릴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자신의 손에서 이 나라가 결단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 '주령구(酒令具)가 던져졌다…….' 자신도 어떤 패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오는 패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며 다시 또렷한 목표를 마음에 되새겼다.

밤 09:00

갑자기 우정국 밖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이야! 불이야!" 연회장 안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김옥균이 급히 일어나 북쪽 창문을 열어보았다. 우정국 가까운 골목에서 불빛이 일어나 하늘로 뻗쳤다. "내 상황을 보고 오리다."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박영효의 손을 뿌리치고 민영익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는 우정국 안에 있었어야만 했다. 연회장을 뛰쳐나와 우정국 밖으로 나선 민영익은 서재필이 이끄는 사관생도들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해 쓰러졌다. 연회장 문이 벌컥 열리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이 쓰러지듯 넘어지며 들어오자 연회장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김옥균이 소리를 내질렀다. "모두 조용하시오! 내 나가 상황을 알아보리다." 하며 뛰어나갔다. 그 뒤로 박영효와 서광범이 따라 나갔다. 홍영식은 어떻게든 좌중을 안돈시키는 척하며 모든 공사들을 연회장 안에 묶어두려 노력했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이때, 우정국 밖 멀리서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같이 몸을 낮추고 그들을 진정시키는 홍영식의 미간은 걱정으로 일그러졌지만, 속마음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혁명의 불길이 완전히 타오른 것이었다.

밤 10:30

편전에 들어선 김옥균은 고종과 왕후에게 우정국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있는데 근처에서 불이 나며 난리가 난 것과 한양 곳곳에서 방화와 살인이 일어나고 있음을 세세히 아뢰었다. 고종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한 듯 말이 없었다."잠시 정전(正殿)에서 피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급히 가셔야 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편전을 울려왔다. 사색이 된 왕후가 고종을 돌아보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머리를 조아렸던 김옥균이 재빨리 말했다. "전하, 이곳은 위험하옵니다. 즉시 경우궁으로 이거하심이 옳은 듯하옵니다. 적들이 달려오고 있사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폭음이 들렸다. 콰앙-!

고종과 왕후를 모신 일군의 무리가 드디어 경우궁에 도착했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다. 경우궁 뜰에는 정전에서부터 호위하듯 따라온 윤계완과 병사들이 흩어져 수비했다. 경우궁 밖은 고종과 왕후가 들어가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서재필과 사관생도들이 봉쇄하듯 둘러싸며 지켰다. 잠시 후,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군 150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비로소 김옥균이 마음을 조금 놓았다. 일본군을 경우궁 안으로 들이고는, 안에서 대문을 지키게 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5일 / 둘째 날

새벽 00:20

경우궁 외곽에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서재필의 보고를 듣고 달려나온 김옥균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청나라 정찰병들이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김옥균 뒤로 박영효와 서광범, 서재필이 다가와 섰다. "이제 어쩌지요?" 서재필의 말에 김옥균은 걱정 말라며 안심시켰다. "아우님들, 너무 걱정 마시게. 원세개가 제 아무리 무모해도 경우궁에 대포를 쏠 정도로 아둔한 자는 아니네." 창덕궁처럼 넓은 곳은 수비가 곤란했다. 김옥균이 창덕궁을 버리고 훨씬 작은 경우궁을 정변의 중심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우님은 어떻게든 주상 전하를 여기에서 한 걸음도 나서시지 못하게 해야 하네. 알겠는가?" 서재필이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철통같이 봉쇄하겠습니다."

새벽 02:25

홍영식의 전갈에 비로소 고종의 파천 소식을 알게 된 사대당의 영수들이 급히 모였다. 심경만큼 황급한 말들이 난무했다. "경우궁으로 파천했다는 것은 음모입니다."

"개화당 어린 것들이 전하를 옹위하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그러니 더욱 지금 가야 합니다. 철부지들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주상을 뵙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결국 대신들은 한밤중에 대례복을 입고 경우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날 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를 위시한 11명의 대신들이 모두 두개골이 터져 죽고 말았다. 경우궁 뜰 안은 진동하는 피비린내로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고종은 개화당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개혁이라면 찬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안 있어 고종은 박영효가 요구하는 대로 새로 조각한 개혁내각 명단에 옥새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새 내각은 혁신적이었다. 기존 사대당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군사권과 경찰권 역시 개화당의 두 수뇌 박영효와 서광범이 맡게 되자, 조정은 입을 꼭 다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개혁 내각이 발표되자, 혁명이 본궤도에 올랐다. 동쪽 산 멀리서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오후 03:30

"주상 전하를 계속 이런 곳에 계시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예법에 어긋납니다. 창덕궁으로 환궁해야겠습니다." 왕후는 홍영식을 불러 다그치듯 말했다. "하지만 창덕궁은 너무 넓어 방비에 어려움이 있사옵니다." 왕후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청나라 폭도들 정도는 용맹한 일본 군사들이 충분히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후의 입에서 용맹한 일본 군사란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홍영식은 당황했다. 어떻게든 일본을 배제하려는 것이 그동안 왕후가 보인 정치 행보였던 것이다. "다케조에 공사에게 환궁 여부를 물어보겠습니다. 그를 들라 이르세요."

다케조에가 내전으로 들어간 뒤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홍영식은 같이 정변을 일으킨 일본이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홍영식의 생각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고종과 왕후의 알현을 마치고 나온 다케조에가 이렇게 말했다. "창덕궁으로 환궁하시는 것이 옳을 듯하오. 걱정 마시오. 수비는 한결같을 것이니 염려 없소." 홍영식에게 그 말은 꼭 유언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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