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로 읽는 명시 100편
박영만 지음 | 프리윌
패러디로 읽는 명시 100편
박영만 지음
프리윌 / 2012년 2월 / 351쪽 / 14,800원
제1장 누구의 깜찍한 사랑입니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_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나는 오늘 또 김밥이 그립다_ 패러디
떡볶이 속에는
떡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잡채 안에는
당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김밥 안에는
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밥 안에 있는 단무지여
김밥 안에서 맛을 더하는 햄이여
시금치와 게맛살과 함께 어우러져
은밀한 맛을 내는 김밥이여
어제 2인분을 먹었는데도
나는 오늘 또 김밥이 그립다
***
국화 옆에서_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도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내 집 앞에서_ 패러디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결혼생활 이후부터 샐러리맨은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샐러리맨의 아내는 절약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명품 대신 길거리표 골라 입던
지난 15년간의 서러움을 잊고
이제는 당당히 내 집 앞에 선
어여쁜 샐러리맨의 아내여!
방 세 개짜리 내 집 열쇠 쥐는 기쁨에
간밤엔 설레어 잠을 설치고
두 끼를 굶었어도 배가 불렀나 보다
***
청포도_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흠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로또복권_ 패러디
매주 토요일은
누군가의 인생이 뒤집어지는 날
번호 적힌 공들이 빙글빙글 섞이고
미지의 번호가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인생역전의 푸른 꿈이 부풀어 올라
펼쳐 든 복권의 번호가 차례차례 맞아 가면
가슴 뛰는 흥분이 온 몸을 휩싸고
마지막 여섯 번째 숫자까지 맞게 되는 순간
어둠의 세상엔 광명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와
내 그냥 까무러쳐서 한 열흘 동안 못 일어나도 좋으련
아이야, 수입차 판매 대리점에
3천cc급 벤츠 한 대를 예약해 두렴
***
산 너머 남촌에는_ 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 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를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담 너머 옆집에는_ 패러디
담 너머 옆집에는 누가 살길래
툭하면 싸우는 소리 들리어 오나
어떤 날엔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
어떤 날엔 오래오래 앙칼진 소리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옆집서 전쟁 날 때 나는 싫데나
담 너머 옆집에는 누가 살길래
저 창문 저 커튼이 아니 열릴까?
굳게 잠긴 창문위에 드리운 커튼
분홍빛 커튼 위엔 원앙이 한 쌍
어느 것 한 가진들 궁금 안 하리
옆집서 전쟁 날 때 나는 싫데나
담 너머 옆집에는 누군가 살고
오늘도 고래고래 싸우는 소리
궁금한 마음에 건너다보니
커튼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오늘도 담을 넘는 험한 소리는
노총각 결혼 꿈을 부수어 가네
제2장 송아지가 알을 낳았다고 계속 우기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_ 알렉산드르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하염없이 지나가리니
지나간 것은 마음에 소중히 남으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
모든 것은 덧없이 지나가리니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히 남으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라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지라도_ 패러디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지라도
화를 내거나 집을 뛰쳐나가지 말라
마음속 고난을 참고 견디면
크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리니
난세는 영웅을 낳고
악처는 철학자를 낳는 법
바가지 소리가 요란할수록
더욱 더 심오한 철학자가 되리니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지라도
화를 내거나 집을 뛰쳐나가지 말라
마음속 고난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크게 되는 날이 오리라
난세는 영웅을 낳고
악처는 철학자를 낳는 법
화를 내면 밴댕이가 되지만
참고 견디면 철학자가 되리라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지라도
화를 내거나 집을 뛰쳐나가지 말라
마음속 고난을 참고 견디라
크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니
바가지 긁는 소리는 짜증나지만
그것이 철학자를 만드는 법
잠잘 때만큼은 입을 다물리니
그리고 지나간 것은 애증이 되리니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지라도
화를 내거나 집을 뛰쳐나가지 말라
듣기 싫은 잔소리를 참고 견디면
심오한 철학자가 되고야 말리니
아내는 그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느끼고
남편은 저도 모르게 철학자가 되는 것
바가지 긁는 소리가 요란하면 할수록
더욱 더 심오한 철학자가 되리라
제3장 통닭집 가던 닭도 웃는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_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호수공원 볕 좋은 날에_ 패러디
호수공원 볕 좋은 날에
벤치에 홀로 누워
하늘 바라보며
떠난 애인 생각 하던 차에
옆 벤치서 키스하는 아베크는
남의 화를 돋나니
***
이화에 월백하고_ 이조년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一枝春심心)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이화여대 졸업하고_ 패러디
이화여대 졸업하고
무직생활 3년인 제
일화청춘(一花靑春)을
백조야 알랴마는
고학력 미모도 병인 양하여
홀로 고민하노라
***
청산은 나를 보고_ 나옹 선사
청산을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남편은 아내 보고_ 패러디
남편은 아내보고 스포츠중계 보자하고
아내는 남편보고 연속극 보자하네
신문도 던져 놓고 밥상도 밀쳐두고
리모콘 다툼하며 서로서로 보려하네
아들은 아빠보고 코미디 보자하고
딸은 엄마보고 연예중계 보자하네
체면도 벗어놓고 양보도 벗어 놓고
서로서로 채널다툼 아옹다옹 싸움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