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서정윤 지음 | 북오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서정윤 편저북오션 / 2012년 2월 / 248쪽 / 12,000원
1장 그대의 입술은 꽃으로 말하리
성탄제(聖誕祭)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생의 한가운데서휠덜린
누런 배 가지 휠 듯 달렸고들장미는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며기슭은 호수 향해 기울어져 있는데아름다운 두 마리 백조 입맞춤에 취해 넋을 잃고그 머리해맑고 차가운 물 속에 담근다.
아아, 그러나 나는 이 겨울날어디서 내 꽃을 꺾으랴.어디서 햇빛을 참으며어디서 땅 그림자 구하랴.벽은 소리없이 싸늘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바람 속 풍향계는 돌고 있다.
2장 그대의 눈이 노래를 좇으리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信義州柳洞朴時逢方)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달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어느 먼 산 뒤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그러나 지금 우리는불로 만나려 한다.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저 불 지난 뒤에흐르는 물로 만나자.푸시시 푸시시 블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지란지교를 꿈꾸며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 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聖賢)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 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니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도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위 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이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3장 그대의 귀에 바다가 들어오리
바다와 나비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동천(冬天)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매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빛나는 별이여키츠
빛나는 별이여, 나 너처럼 변함없는 존재이길 바라노라.너처럼 홀로 빛나면서 밤하늘에 높이 걸려자연계의 잠 잊고 정진하는 은둔자 되어인간 세계 기슭 정결히 씻어 주는 출렁이는 저 바다 물결을사제(司祭)다운 근면함을 영원히 뜬 눈으로 지켜보고자 함이 아니고또한 쓸쓸한 벌판에 사뿐히 내린백설의 새 단장을 지켜보고자 함도 아니다.아니다. 그건 아니다- 다만 나는보다 더 한결같이, 보다 더 변함없이내 아름다운 님의 무르익은 젖가슴 베개 삼아그 보드라운 오르내림을 영원히 느끼면서감미로운 설레임 속에 영원히 잠깨어내 님의 고운 숨결 들으며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살고자 함이니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나 여기에아련히 숨을 거두고 말리라.
4장 그대의 가슴에 하늘이 싹트리
엄마 걱정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지금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문의(文義)마을에 가서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거기까지 닿은 길이몇 갈래의 길과가까스로 만나는 것을.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문득 팔장 끼어서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한 죽음을 받는 것을.끝까지 사절하다가죽음은 인기척을 듣고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모든 것은 낮아서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마지않는다.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