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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국

김종록 지음 | 글로세움
달의 제국

김종록 지음

글로세움 / 2010년 4월 / 560쪽 / 13,800원



우당은 화이트보드에 유려한 필치로 휘갈겼다. 전사지불망 후사지사(前事之不忘 後事之師)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말씀으로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이 된다는 뜻이지요.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에 즈음해서 부끄러운 우리 근대사를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본과 중국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비난하곤 하지요. 실상은 우리도 그들 못지않게 역사를 왜곡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느닷없는 명성황후 영웅 만들기고 고종 감싸기입니다. 잘못은 어디까지나 파렴치한 일본 제국주의에 있으니까 우리는 매국노 이완용 정도만 제물로 바치면 그것으로 역사의 부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참 편하군요. 그런데 왜 저는 이렇게 불편한 것이지요? 역사의 진실을 덮어놓고 외면한다는 자괴감이 왜 드는 것이지요?"



우당은 생생한 상황묘사로 사랑방 사람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100여 년 전 그날로 데려갔다. 사랑방 방장 우당은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놀라울 만큼 단단한 내공이 쌓여 있었다. 그는 현란한 지성과 화려한 언변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1878년 9월, 박세익이 문제의 인간 이완용과 사제의 인연을 맺고 {주역}을 가르친 건 분명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완용이 훗날 자신의 변절 논리를 이때 배운 주역철학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은 천지만물이 모두 음(陰)과 양(陽), 두 기운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끊임없는 변화만 있는데 그것은 음양의 기운이 서로 갈마들며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의 철학을 모르면 세상을 경영할 수 없다. 하지만 끝내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땅한 도리다.



21살의 이완용을 처음 본 박세익은 그야말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즐거움을 비로소 맛보았다. 이완용은 신중하고 과묵했다. 일찍이 충청도에서 독선생을 초빙해 {대학}과 {논어}를 익혔고 16살부터는 당대의 명필 이용희에게 서법을 익혔다. 이제 우주 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는 철학서 {주역}의 온오(蘊奧)를 깨우친다면 용이 구름을 만나고 여의주를 문 격이 되리라.



변화의 원리에 대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박세익은 청년 이완용과 마주 앉아 강습하는 도중 문득문득 돌덩이를 보았다. 그것은 빙벽처럼 차가웠지만 내면에 불덩이를 머금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잠자는 불덩이가 밖으로 용출되면 그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용(龍)이 될 터였다. 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신하는 영물이고 음과 양이 갈마들며 변화하는 세상이치를 그 용에 비유한 것이 주역철학이다. 깊은 연못에 잠긴 용은 때를 만나면 하늘을 나는 용이 되리라.



"선생님! 결국 이 세상에는 선도 악도 없는 거로군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를 잘 구사하여 중심자리에 서라. 그것이 {주역} 이만 사천 이백일곱 자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천재다.

"이만 사천 이백일곱 자라니? 네가 {주역} 경전의 글자 수를 세어 보았더냐?"

"세 번을 세었습니다. 천하경영의 이치가 담겼다는데 몇 글자인가 정도는 알고 공부해야겠지요." 그렇다. 듣고 보니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어느 누가 공부할 책의 글자부터 세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겠는가. 설령 했다고 쳐도 웬만한 집중력이 아니면 세기도 힘들다.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그 가치 판단 기준으로 선악만큼 분명한 건 없습니다. 음기와 양기, 두 기운이 뒤섞여 천변만화를 연출하는 게 세상이치라면 선악의 기준이 있을 수 없겠군요. 대자연은 인간들의 도덕적인 기준 안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생존을 선이라 하고 멸망을 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다고 봅니다." 예리한 논조다. 과연 천재답다. 박세익은 뭐라고 보충설명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은데 적당한 언설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탄복하다가 말았다.



그 어렵다는 {주역}을 강습하는 데 아홉 달이 걸렸다. 책거리를 하는 자리에 이완용의 아버지 이호준 대감이 동석했다. "허허허, 그새 미꾸라지가 용이 되었구나. 과연 박 사백(詞伯)께오서는 당대의 고수시외다. 고맙구려." 이 대감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거늑한 웃음을 날렸다. "선생이 모자라도 제자가 빼어나면 속성하는 법이지요. 자제분의 총기가 조선 으뜸이오." 이 대감은 아들이 너무 대견스럽다. "우리 우봉 이가들은 줄곧 양자로 대를 이어왔소. 내 일찍이 저 아이를 경기도 광주고을 가난한 문중에서 얻어 양자로 들인 건 신동이면서도 자품이 겸손했기 때문이오. 가문은 물론 나라 안팎에 크게 이름을 떨칠 것 같소만 박 사백의 생각은 어떠하오?"



"볼록 나불거진 이마에 관을 뚜렷이 썼고 눈에 해와 달이 밝게 비추니 정승 판서 재상 가릴 것 없을 듯하오." 박세익의 과장 없는 인물평이었다.



1882년 10월 24일, 마침내 이완용은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25세 때의 일이다. 그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완용이 규장각 대교로 임명장을 받고 관직에 나간 것은 4년 뒤인 1886년 3월 24일이다. 그만큼 인사 적체현상이 심했던 것이다. 관직에 나온 이완용은 규장각 대교에서 달포 만에 홍문관 수찬이 되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887년 4월 28일, 홍문관 응교가 된다. 1년 만에 정4품이 되었으니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그 직후 곧바로 시강원 겸사서가 된다.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이완용이 가르친 왕세자가 훗날 등극한 순종이다. 이완용은 천성이 워낙 호학(好學)하는 군자여서 주색잡기를 몰랐다. 늘 책을 가까이하고 한가로울 때면 서예를 즐겼다. 관직에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는 신학문과 영어의 필요성을 깨닫고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효성 또한 극진하여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는 정통파 사대부였다.



우당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여담입니다만 이완용은 우리 역사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한 첫 번째 관리랍니다. 갑오경장을 거치고 일제 때가 돼서야 관리들이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답니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게 되니 새삼 점심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었지요. 지금처럼 구내식당도 없었고 아문 근처에 사먹을 식당도 마땅치 않았던가 봅니다. 별도리 없이 대신들은 집에서 점심을 날라다 먹었지요. 그런데 그 점심 행차가 가관이었대요. 하인들 대여섯 명이 교자상을 들고 앞서 걷는 무인이 '대감 밥상!'하고 외칩니다. 행인들이 길을 비키게끔 말씀이죠. 교자상 행렬 뒤에는 술병과 물 주전자를 든 여종이 뒤를 따랐고요. 소동도 그런 소동이 없었지요.



미국 물을 먹은 합리주의자 이완용은 달걀이나 빵 등으로 도시락을 싸와 점심때가 되면 꺼내 먹었어요. 그때가 학부대신을 지내던 때였지요. 매일 점심때마다 요란을 떨며 교자상을 날라다 먹던 다른 대신들이 대감 체통이 안 선다고 비방을 했지만 이완용은 도시락을 고집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락을 들고 등청하는 이완용의 방식을 따르는 관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거창한 '대감 밥상' 행렬도 육조거리에서 점차 볼 수 없게 되었지요. 또한 그는 데리고 있던 노비 30명도 남들보다 빨리 해방시켰답니다.이완용은 38세에 학부대신이 됩니다. 그전에 1890년까지 2년간 주미 대리공사를 지내지요. 조선정부에서 드물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친미파 관료였습니다. 아무튼 이완용은 다른 관료들과 분명히 달랐습니다. 나중에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인들의 인물평에서도 이완용은 조선 관료 가운데서 가장 똑똑하고 상대할 만한 인물로 꼽히고 있었으니까요. 이완용은 일본의 실력자들 앞에 줄을 서는 친일파들과 달리 일본인 관료들이 포섭해야 할 조선인 영순위였던 겁니다.



이완용은 또한 효자였습니다. 1893년 8월, 생모가 사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납니다. 3년상을 치르기 위해서죠. 상중이던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그해에 일본 주재 전권공사로 부임하라는 교지를 받지만 모친상을 이유로 거절합니다. 이때까지도 이완용은 친미파였습니다. 이완용은 일본말을 잘 못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친일파 영수라니 이해가 잘 안 되시죠? 고종과 순종의 총애를 받은 이완용은 조선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자기 나름의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결과는 을사5적이요, 매국노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을까요? 나라라는 게 힘이 없어 강대국에게 빼앗기는 것이지 누군가가 팔아먹는 것인가요? 설령 그런 거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가 나라를 팔아먹을 때 황제와 다른 대신들, 백성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1896년 이완용은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 2대 회장을 지냅니다. 운영기금도 가장 많이 내놓지요. 당시 그는 반청, 반일, 친러파였습니다.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은 이완용을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송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등교육 의무화 초석을 다진 사람이 바로 이완용입니다. 이완용은 1895년 7월 19일, 국왕의 재가를 받아 소학교령을 공포함으로써 최초로 근대적인 초등교육을 의무화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공적치고는 너무 크고 중대한 사건이죠. 자, 이랬던 이완용이 왜 친일파가 되고 매국노가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합시다."



시민들에게 공개한 우당의 <서울야화>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3층 강당 200석 강의실에 수백 명의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오늘은 이완용이 친일파가 된 까닭과 그의 스승 박세익과의 결별 이야기입니다. 이완용은 자신의 변화무쌍한 행동철학의 논리적 근거를 다름 아닌 바로 {주역}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완용의 자서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보면 그는 필요에 따라 친미파가 되었다가 친러파도 되고 친일파도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실리를 얻기 위해서는 변화무쌍할 필요가 있는데 그 근거를 {주역}의 변역 논리에서 찾고 있지요. 이것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였다가 끝내 친일파가 되는 그의 변절 논리이기도 합니다."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던 이완용은 양아버지 이호준 대감의 상을 당하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사이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상을 마친 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다시 입각한다. 학부대신에서 물러난 이래 8년 만의 재입각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치밀한 사전 정지작업을 한다. 1905년 일본은 미국과 밀약하여 미국이 일제의 조선 강점을 묵인하는 대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해 가을 일본 천황의 특사가 조선에 파견된다. 그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앞에 보호조약 문안을 내놓고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라고 강압한다. 고종은 더 버티지 못하고 시브저기 발을 뺀다. "그럼 내각회의에서 결정토록 하겠소." 고종은 한 나라의 외교권을 다른 나라에 넘기는 이 중요한 문제를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고 내각에 공을 넘긴다. 이토의 얼굴 가득 회심의 미소가 번진다. 다음 날, 이토는 조선의 각료와 원로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로 부른다. 이토는 이 자리에서 조선이 보호조약을 거부하면 일본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 눈앞이 캄캄해진 조선 대신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허둥댔다. 결국 이완용이 나섰다. "오늘의 동아시아 형세로 볼 때, 이토 특사의 제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대국 청나라와 러시아도 격파해버린 일본이 조선에 무엇인들 못하겠소.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오."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가 없다는 처세술이 빛나는 대목이다. 이토는 깜짝 반가워했고 이완용의 탁견과 용기를 인정한다. 두 사람은 첫 대면의 신선한 충격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우정을 보인다. 이토는 이완용을 아꼈고 이완용은 그런 이토를 스승으로 모셨다.



1905년 11월 17일 오후 3시,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한 8명의 대신이 궁궐을 찾아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완용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으로 고종의 칭찬을 받으며 어전회의를 주도한다."일본 특사 이토 공의 조약 요구를 폐하께옵서 어쩔 수 없이 너그러운 도량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겠습니까? 조약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대책을 세워둡시다." 그러면서 내치(內治)는 보장받고 외교권에만 국한할 것, 기간의 모호함을 확실히 하자는 의견을 낸다. 대신들 가운데 누구도 지적하지 않은 중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도 자신의 주관을 분명하게 피력한다. 이토는 그런 이완용이 군계일학이라고 대견해한다. 다른 대신들이 일본에 무조건 추종하거나 얼버무린 것과 확연히 구별된다. 문안 수정이 끝나고 고종의 재가를 받은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정식으로 조약이 체결된다. 18일 새벽 1시의 일이었다. 조약체결 후 고종은 이토에게 말한다. "양국을 위해 축하할 일이오. 이토 후작, 밤늦도록 수고했소."



늑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 장안이 뒤집혔다. 상소가 쇄도했고 군중들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에 방화했다. 전말을 알 수 없었던 관민들은 박제순·이완용·이지용·권중현·이근택을 을사5적으로 지목하고 그들의 처단을 요구했다. 언론 또한 사실을 왜곡했다.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여타 신문들이 한목소리를 냈다. 고종황제는 끝까지 반대했는데 5적이 멋대로 보호조약을 체결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종이 반대한 조약을 을사5적이 자행한 걸로 역사가 왜곡되었다. 늑약을 체결한 대신들은 분명 역사의 죄인이다. 하지만 굳이 5적에 국한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대신들에게 떠넘긴 고종이 최종 책임자이며 그 밖의 대신들도 책임을 면치 못한다.



늑약 직후, 평안도 태천고을 박세익도 서울에 올라와 이완용을 방문한다. 환갑이 넘은 노구의 겨울 나들이는 비장했다. 이완용의 집에는 일본군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토록 반일감정이 컸던 그대가 오늘날 친일파가 되다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돼버렸네."무안해진 이완용은 콧수염을 훔쳐낸 다음,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던 내막을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언제나 그랬듯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합리적이었다."그렇다면 그대는 하등의 죄가 없다는 주장 아니신가?"

"물론입니다, 선생님."

"정면 돌파할 수는 없었는가?"

"어떻게요?"

"황제와 대신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거부하는 한편 만백성이 봉기해서…."

"희생만 치를 뿐 대세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저도 많이 고민하다가 가장 현실적인 결정을 내린 겁니다. 자세한 속사정을 아시면 절 욕하지 못합니다.""그럼 그런 내막을 온 천하에 상세히 밝히시게." 박세익은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있으려니 생각했다."그렇잖아도 조만간 조약 체결 과정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입니다. 저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직상소도 곧 올릴 참입니다." 이완용은 당당했다."그게 좋겠으이. 이후 나라는 어찌 된다고 보시는고?"

"당분간 독립국을 유지할 것이나 수년 안에 일본에 병합될 것이 불 보듯 확실합니다. 저는 개벽한 문명국 미국과 일본의 발전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미국은 조선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조선은 정치적으로 너무 낙후했고 선진한 일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조선은 망해버리고 마는 것인가?"

"당장은 그렇습니다."

"조선이 정치적으로 낙후했다면 그대의 책임도 있을 것!" 박세익이 바투 조여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조선은 열강들이나 일본처럼 체제를 변모시킬 기회를 잃어버렸어요.""아, 하늘이 무너지는구나." 박세익은 물기 어린 노안을 지그리며 장탄식을 발한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경무청에 갇혔고, 민영환은 의연히 칼을 뽑아 자결했네. 반면 그대는 을사5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네. 어느 쪽이 역사를 위한 정도라고 보시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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