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고산자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 / 2009년 6월 / 360쪽 / 11,000원 일찍이 제 나라 강토를 깊이깊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의 시작과 끝, 그것의 지난날과 앞날, 그것의 형상과 효용, 그것의 요긴한 곳과 위태로운 곳을 그리는 데 오로지 생애를 바쳐 마침내 그 모든 걸 품어안은 이가 있었던바, 그가 바로 고산자라 했다. 어떤 이는 그가 계해년(1803년) 황해도 토산현에서 태어나 병인년(1866년)에 한양골 약현에서 죽었다고 했고, 어떤 이는 그가 갑자년(1804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난 정묘년(1867년) 이후 한양골 만리재에서 죽었다고 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도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평생 그 시대로부터 따돌림당했으니 그는 고산자(孤山子)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그 뜻이 드높았으니 그는 고산자(高山子)요, 사람으로서 그의 염원이 최종적으로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산을 닮고, 그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어했으니, 그는 고산자(古山子)라고도 했다. 그의 이름이 김정호다.
지원대가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 건 4월 끝물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그들의 시신은 곡산 방면 고달산 상봉 능선 아래 비탈에서 발견됐다. 추위를 면하려 했는지 두세 사람이 꼭 안고 죽어 있었고, 돌틈에서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미 시신의 일부가 짐승에게 뜯겨 수습하기조차 어려운 처참한 시신도 여러 구였다. 그의 아버지는 앞서 길을 뚫어보려 했던 것인지 상봉 턱밑의 비탈길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앞장섰다가 눈에 미끄러져서 추락해 부상을 입은 뒤 일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정황으로 보아 모두 길을 잃고 헤매다가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아사하거나 동사한 것이 분명했다.
눈이 많이 쌓여 있던 한겨울이었다.
섣달 그믐께, 목사가 평양성 턱밑의 봉산에 집결하라고 한 최종 시한이 이듬해 임신년 정월 초사흗날 신시申時까지였으니, 주먹밥 몇 개씩 품에 지녔을 뿐인 가짜 군졸들을 선도해야 하는 아버지로선 마음이 아주 조급했을 터였다. 아버지의 품속에선 관아에 있는 군현도를 급히 베낀 필사본 지도 한 장이 나왔다.
그러나 그 지도는 한마디로 말해 엉터리 지도였다.
한참 먼 학봉산과 고달산이 앞뒤로 붙어 있었고, 물길도 따로 없었으며, 물길처럼 이어져 있어야 할 산이 뚝딱뚝딱, 흐름없이 각놀고 있었다. 지도가 그렇다보니, 아버지는 산과 산 사이가 떨어져서 그 사이에 뚫고 나갈 평탄한 길이 있으리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과도 싸워야 하고, 산골짜기에 들면 무릎까지 빠지는 눈과도 싸워야 하고, 한정된 식량과도 싸워야 하는 위급한 도정이었다. 비스듬하게 벌어져 있는 학봉산과 고달산의 거리만 지도에서 어상반했거나 지도에 없을지라도 산과 산 사이에 여전히 한몸으로 덩어리진 산맥이 흐르고 있다는 것만 알았어도 그들은 최소한 떼죽음을 면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니 지도가 차라리 없었다면, 오히려 그렇게 무모하게 죽음의 산속으로 들어가 박혔을 리 만무했다.
지도가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믿었다.
지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양면성으로 작용한다. 지도가 없으면 사람의 오감이 부풀어오를 대로 올라 스스로 지도가 되지만,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믿기 때문에 오감은 만삭의 돼지처럼 그 운행이 느려진다. 엉터리 지도가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
그는 어렸을 적부터 땅의 형상과 물의 굽이굽이에 관심이 많았다. 누가 시켜서 그리 된 것이 아니었다. 물길과 산의 흐름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 이상할 정도로 언제나 궁금했다. 저 굽이에서 물이 시작되는가 하고 달려가보면 어떤 땐 더 큰 물줄기를 만나고, 저 꼭대기에서 산이 시작됐는가 하고 기를 써 오르고 나면 또한 더 큰 산이 그의 눈앞을 가로막는 게 신묘했다. 길이 길로 이어져 끝이 없는 것처럼, 물은 물대로 산은 산대로 제 몫몫 이어져 끝이 없었다. 사람은 물과 산을 따라서 그것에 기대고 사는바, 길이 있기 전에 이미 물길과 산맥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움은 끝간 데가 없이 깊었다.
그의 소원은 그것들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까지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무들하고 잘 놀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몰랐다. 어린 마음에도 집이나 서당에 있으면 허기진 것처럼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동무들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는 것만 봐도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는 별로 속정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새 여자를 들이지 않고 형제를 키우며 산 것은 아마도 아버지하고 살겠다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우악스러운데다가 살짝 얽은 얽빼기였고 입에서 나는 냄새가 자심했다. 봉록 대신 관아에서 내준 밭뙈기 농사도 아버지 손으로 온전히 지은 적은 거의 없었다.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그래도 두 형제를 가르치는 데 인색하지 않아 서당에 꼭 다니도록 한 것 정도였다.
그는 어디든 가고 싶었다.
바람은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불었다.
처음에 그는 길을 따라다녔고, 다음엔 물을 따라다녔고, 일고여덟 살이 넘어서는 주로 산을 따라다녔다. 따라갈 수 있다면 새가 되어 바람조차 따라가고 싶었다.목숨이 와서 목숨이 가는 길도 따로 있을까.
***
그는 아버지 산소를 먼저 찾아갔다.
도성에서 갖고 내려온 것은 대동여지도에서 토산과 곡산이 나타나 있는 두 장의 목판본 지도였다. 곡산이 들어 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22첩 중에서 열번째 첩의 네번째 판이고, 토산이 자리잡은 것은 열한번째 첩의 세번째 판이었다. 전 국토를 남북으로 백이십 리 간격 22첩이 되게 분할하고 동서는 팔십 리 간격에 따라 여러 절로 쪼갠 것은, 이처럼 온 백성이 필요한 판만 분리해 가볍게 소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도성에서 강릉을 가려면 제13첩의 네 절만 지니면 될 테니까. 구태여 번거롭게 전도를 품고 다닐 필요가 없는 셈이다. 여지껏 모든 지도가 이렇게 고안되지 않은 것은, 지도는 오로지 나라의 것일 뿐이라는 관리와 사대부들의 유아독존적인 생각 때문이었다.어찌하여 지도가 나라의 것이어야 한단 말인가.
온 백성이 무릇 서로 통하고 뜻을 나누면서, 내가 가진 걸 네게 팔고 네가 가진 걸 내가 얻어 더불어 잘살고, 땅과 물의 근원을 알면, 밖으로 방비를 든든히 할 뿐 아니라 안으로 실용을 통한 유익함이 많을 것은 정한 이치였다. 무릇 지도란, 나라에서 감춰둘 것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나눠, 쓰임을 널리 구해야 한다고 그는 늘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전에 가져온 지도를 바쳤다.
그 두 장의 지도만 있었으면 아버지는 목숨을 건지고도 남았을 터였다. 다른 스물세 명의 억울한 목숨도 물론 그랬다.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가 불과 열 살에 고향을 등지고 떠나 전국을 떠돌면서, 굶지 않고 먹고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돌을 만지고 쇠를 만지고 나무를 만지는 일 덕분이었다. 그 어느 것도 끝까지 밀고 나가 장인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나, 떠도는 삶의 나날이 워낙 매웠던지라, 무슨 일이든 맡겨주면 밥값은 할 만한 정도가 됐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는 대장장이 밑에도 있었고, 배를 건조하는 조선장이 밑에도 있었고, 채석장에도 있었고, 철광소에도 있었고, 벌목장에도 있었고, 석각장이 밑에도 있었다. 그가 깊이 손대보지 않은 일이 있다면 농사일뿐이었다. 남의 머슴살이로 들어가면 농사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새경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는 밥을 굶어도 농사일을 주로 해야 하는 머슴살이는 하지 않았다. 농사일 머슴으로 들어가면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선 만물이 다 변화하고 흘렀다.
머무른 것 같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산도 흘렀고, 천년을 거기 있다고 말하지만 강물도 어제의 그 물이 아니었다. 나무들도 철을 바꿔 제 시간의 길을 좇아 변했고, 새는 새의 길로 돌아오고 떠났으며, 별조차 시간 따라 바람 따라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
오며 가며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먼 길을 떠다니는 사람들은 떠다니는 게 보통 생업인지라, 이곳에서 만날 때도 있고, 또 저곳에서 만날 때도 있다. 벌써 몇 번째 와봤던 길이니까 더욱 그렇다. 몇 차례나 신세를 졌던 방앗간 주인은 아직도 방앗간 주인으로 늙어가고 있고, 전라도 충청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는 보부상이나 상단 접주들은 여전히 제 길로 활기차게 흘러다닌다. 이쪽 편에서 혹시 못 알아보면 저쪽 편에서 먼저 알아보고 반색하여 달려든다. 말하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보부상까지 베껴가지고 다니는 새로운 필사본 지도를 대지팡이 속에 넌지시 말아넣어주는 사람들도 많다. 길에서 만난 연분은 길에서 다시 만날 때에 제일 반갑다. 길동무끼리는 인심도 후해서 먹고 자는 일에도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다.주막에 들러 막걸리라도 한 잔씩 나누다보면 골골마다 다르게 지난 사람들의 꿈도 환히 짚이고, 여한도 짚이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밟고 지나온 땅의 형승은 물론 잡초에 묻힌 고읍과 고성, 봉수대, 역참, 누정, 토산, 사원 등이 한달음에 짚여나온다. 먹고살기 위해 길을 따라 흐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간직된 지도는 그 길흉과 고저, 완급은 기본이고, 역사, 풍속, 산물에 이르기까지 관아가 갖고 있을 군현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섬세하고 정확하다.그들에겐 지도가 곧 목숨줄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도를 비변사 비밀곳간에 한사코 감춰두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지도를 그려 동행자와 기꺼이 나눠 갖는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고 방대한 지지를 편찬하는 데 있어 제일의 조력자는 그러므로 그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일찍이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비옥한 땅을 찾아내기도 하고, 잡초에 묻혀 유실된 의미 깊은 성지나 진보를 드러내어 끊어질 뻔한 역사를 올곧게 되살리기도 하며, 그곳으로 가는 길과 다리를 만들어 기꺼이 국토를 시간과 공간 사이로 넓혀놓기도 한다. 상단의 유명한 접주나, 패랭이 쓰고 물미장 짚고 다니는 늙은 행상들 사이에서, 그가 지도에 미친 사람으로 소문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게다가 관아에서 돈을 주고 그에 따라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백성의 안위나 생업을 위해 지도에 미쳤다고 알려진바, 골수 보부상이나 상단 행수들과 그가 호형호제할 수 있는 것은, 떠도는 그로선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
위당 신헌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은 걸 축수하고자 통영에 내려와 있던 혜강 최한기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아이구, 혜강!”
“이 사람, 어디를 떠돌다가 오나?”
두 사람은 정인을 만난 듯 손을 부여잡는다.
혜강 뒤에 서 있는 이들은 오주 이규경과 난고 김병연이 아닌가. 오주거사로 더 알려진 이규경은 충청도에 살고 있어 오다가다 들러 신세를 여러 번 졌던 참이라 낯설지 않고, 김병연은 청구도를 완성했을 때, 혜강이 한양의 다방동 어느 기생집에 몇몇 실학자들과 함께 불러 생일잔치를 해주던 날 만나고 처음이다.
모두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다.
오주거사는 다섯 살 위로서, 사석에선 형님이라 부르는 처지라 맞잡는 손이 정답기 그지없다. 평생 벼슬도 마다하고 향리에 묻혀 살아온 오주거사는 천문, 역수, 역사, 지리, 서화에 두루 밝아 고금사물을 꿰뚫는 반듯한 사람으로서, 방대한 저작물 『오주연문장전산고』로 실학자들 사이에 이미 문명이 높았는데, 여러 해 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얼굴은 유순하고 눈빛은 청정하다. 그이에 비해 난고 김삿갓은 늘 그렇듯, 찌그러진 삿갓에 철 지난 도포를 걸치고 있으나, 예전의 기백과 총기 서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바싹 마르고 주름살투성이인 게, 속병이라도 깊이 든 것 같은 얼굴이다. 행색이 애련해, 어찌어찌 통영에 흘러들어온 난고를 위당 신헌이 수소문해 불러다가 방 한 칸을 내주고, 벌써 열흘째 몸조섭을 시키고 있다 한다. 아래위 사람들을 두루 잘 챙기는 신헌의 인품은 예전처럼 여전히 넉넉하고 정답다.
***
대마도나 간도 문제는 슬쩍 비켜가는 대신, 위당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문제를 툭 끄집어낸다. “우산도(독도)는 어떤가?”
“우산도라 하시면……”
“그 대동여지도 말일세. 우산도는 표기가 되어 있는가.”
“우산도는 울릉도에서 동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워낙 작은 무인도라서 뺐습니다만.”“작은 섬이라고 빼다니, 정치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땅이던가, 그 우산도가?”
“아닙니다!”
그는 명료하게 고개를 젓는다.
우산도라 하면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 이상 떨어진 두 개의 돌섬이다. 많은 지도들이 울릉도 바로 옆에 그리거나 울릉도와 경상도 사이에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울릉도 옆의 죽도를 잘못 그린 것일 터이다. 죽도까진 그 자신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다. 위당이 금위대장으로 있을 때였으니까 벌써 십오 년여 전의 일이다.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울릉도에 갔을 때는 이른 봄이었고, 우산도를 직접 보고자 배를 띄운 것은 늦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두 달 넘게 울릉도에 머물면서 세 번이나 배를 띄웠지만 풍랑 때문에 끝내 우산도를 못 보고 번번이 되돌아와야 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눈에 선하다.
“그럼 직접 못 봐서 뺐다?”
설명을 막 시작하려는데 위당이 다그친다.
“풍랑 때문에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천륜을 어길 셈이네그려. 안 그렇소. 고산자? 자고로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자관계요. 우산도를 일러 자산도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어머니가 있으면 그 자식이 딸리는 게 천륜이거늘, 어찌하여 모자를 떼어놓는단 말인가. 우산국이라 하는 것도 울릉도와 우산도를 묶어 말하는 것은 고산자도 잘 알 터이니.”“알다마다요. 신라 때부터 우리 국토였지요.”
“정상기 선생의 동국지도엔 우산도 자산도가 정확히 표기된 걸로 아오만?”
“표기는 됐으나 지도의 생명이라 할 거리축척이 정확하다곤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가 눈을 들어 위당의 시선을 똑바로 받는다.
구차한 설명까지 일일이 해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었으나, 논의가 이 지점에 이르고 보면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산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돌섬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가 필사본 채색지도인 것과 달리 대동여지도는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목판본이다. 엄연히 내 국토요 눈으로 확인한 땅이라 할지라도 수천 개에 이르는 모든 섬을 어찌 모두 새겨넣겠는가. 눈으로 확인을 했든 안 했든지 간에 울릉도 이백여 리 밖 바다 한가운데, 두 개의 돌섬이 이마를 맞댄 우산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우리의 영토라는 걸 의심한 적은 없다. 그가 우산도의 존재 유무는 물론 그것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고 비방한다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는 우산도에 대한 모든 역사적 사료들을 확인했으며, 그만큼 확신하고 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지도의 생명은 축척의 정확성입니다.”
그의 어조는 고요하면서도 팽팽하다.
“백리척을 이용한 정상기 선생의 팔도도나 동국지도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도서지방의 분율이나 축척에 있어 동국지도가 정확하다는 건 좀 어폐가 있다고 봅니다. 동국지도도 여러 필사본이 있겠습니다만, 가령 제가 본 어떤 필사본의 경우, 울릉도 옆에 우산도가 바짝 붙어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축척을 잘못 표기했다고 봅니다. 울릉도에 머물며 우산도를 오고간 사람들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우산도는 울릉도에서 이백여 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섬인 게 확실합니다. 그런데 많은 지도가 그 거리를 무시하고 그리고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우산도를 대동여지도에서 뺀 것은, 제일 큰 현실적인 이유가 바로 판각 때문이에요. 대동여지도가 목판본 지도라는 걸 염두에 두고 제 설명을 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