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제국 2
윤상일 지음 | 지상사
보이지 않는 제국 2
윤상일 지음
지상사 / 2010년 8월 / 302쪽 / 12,000원공룡에게 싸움을 걸다요제프는 중국 산시 성 린퉁 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진시황릉 위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언뜻 보디가드처럼 보이는 떡 벌어진 어깨의 대머리 사내가 서 있었다. 요제프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볼트만이었다. 서안 시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요제프는 피곤한지 눈을 감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볼트만. 말해 보시오.” 한참 만에 요제프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프로페서. 프로페서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지만 장미은행 건으로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장미은행 건? 볼트만 군, 그건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아직도 문제가 남았소?” 요제프는 장미은행이라는 말이 거슬리는지 눈을 번쩍 뜨고 볼트만을 바라보았다. 순간 볼트만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프로페서. 언젠가 말씀드렸던 그 태극로펌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볼트만은 쉽게 핵심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미은행을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태극로펌이라면 최강이 다비드 앤 솔로몬과 합병할 때 떨어져 나간 강동현이라는 자가 새로 만든 로펌 말이오?” 볼트만은 요제프가 강동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데 다시 한 번 놀랐다.“그런데 태극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거지?” 요제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아, 예. 프로세서.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한데 태극에서 장미은행 인수 계약이 무효라면서 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볼트만도 이제는 머뭇거리지 않고 본론을 얘기했다.“장미은행 인수가 무효라는 자료? 허허. 그깟 변호사도 몇 안 되는 로펌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그래. 태극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보았소?”“예, 달리 자료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장미은행 인수 자금의 흐름을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인수 자금의 흐름이라면?”“예, 프로페서. 주식시장에서 해외로 송금된 자금을 추적하는 것 같습니다.” 볼트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가장 완곡하게 표현했다.“그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소? 설사 일부 자금이 한국 시장에서 조달되었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소? 볼트만 군, 그 정도는 무시해도 좋을 거요. 그 문제는 우리가 나서기 전에 한국 정부에서 알아서 정리해 줄 거요.”요제프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볼트만은 이 같은 요제프의 반응에 일단 안도의 숨을 쉬었다. “볼트만 군.”“예, 프로페서.” 요제프의 나직한 부름에 볼트만은 다시 긴장했다.“지난번 얘기했던 학회 조직은 어떻게 되었소? 이제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갈 때가 되지 않았소? 그리고 만약 태극이 장미은행 인수 자금을 추적한다면 그 방법이야 뻔하지 않겠소? 볼트만 군은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거든 조직을 본격적으로 가동해서 그 계보를 하루빨리 파악하시오. 한국에서 그 계보만 장악한다면 태극은 어떤 자료도 얻지 못할 것이오.”요제프가 볼트만에게 지시한 사항이란 한국에 컴퓨터보안학회를 조직하고 각종 경연 대회를 개최하여 소위 한국의 컴퓨터 천재들의 계보를 파악하고 관리하라는 것이었다.“예, 알겠습니다. 프로페서.”“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허드슨과 잭슨에게 얘기해서 한국 정부가 나서도록 하세요. 또 알렉스와 상의해서 태극을 묶을 수 있는 당근도 마련해 보시오. 무조건 못하게만 하면 반발이 크지 않겠소? 젊은 친구들에게는 적당한 보상을 주어 키우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언젠가 유용하게 쓸 데가 있을 거요.”요제프가 말한 허드슨은 주한 미국 대사이고 잭슨은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의장이었다. 볼트만은 요제프가 이미 다른 경로로 태극로펌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그 대응책도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진땀이 흘렀다.
독침을 쏘다테헤란로에 있는 트라이엄프 빌딩 13층에 자리 잡은 충무 파이낸스 사무실. 바로 얼마 전 장미은행 사건으로 재정부 재경국장을 사직한 서창민이 설립한 사모펀드 사무실이었다. 강동현은 재정부에 근무하는 선배를 통해 서창민을 소개 받았다. 회의실로 안내된 강동현이 기다린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서창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손 선배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태극로펌 대표이시지요?”강동현도 일어서서 인사하며 서창민과 악수를 했다. “장미은행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서창민은 바로 핵심을 짚고 나섰다. 아마도 오랜 관료 생활에서 쌓은 경험 때문일 것이었다.“네, 서 대표님. 대표님 말씀대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시켜 왔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이제는 제일 중요한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그래요? 장미은행을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요? 참 흥미 있는 얘기군요.”“물론 대표님은 장미은행을 되찾는다는 얘기가 황당하게 들릴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장미은행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은 저희 로펌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만 그 마무리 작업은 대표님과 같이했으면 하는 겁니다.”“마무리 작업이요? 마무리 작업은 뭐고 어떻게 공동으로 한다는 겁니까?” 서창민은 강동현을 흥미 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쩌면 황당한 얘기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저희 로펌에서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가동된다면 퍼시픽 파이낸스에서는 장미은행을 서둘러 재매각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대표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바로 대표님이 운영하는 충무펀드가 장미은행을 인수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퍼시픽 파이낸스에서 장미은행을 재매각해요?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또 재매각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조건이 여간 까다롭지 않을 텐데 우리 펀드가 인수한다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서창민은 다시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요. 정상적인 재매각이라면 당연히 그렇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퍼시픽 파이낸스가 무조건 장미은행을 재매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는 겁니다. 또 재매각 상대도 대표님의 펀드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서는 장미은행을 인수하는 데 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하자가 없도록 준비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강동현은 작지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서창민을 설득했다. “좋습니다. 강 변호사님 말씀대로 퍼시픽 파이낸스가 장미은행을 재매각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서창민은 결심한 듯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두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대표님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현행법으로는 은행을 인수하려면 인수자가 금융기관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표님께서 먼저 적당한 규모의 지방은행을 인수한 뒤 그 은행으로 하여금 장미은행을 인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흠, 지방은행을 인수해서 그 은행으로 하여금 장미은행을 인수하도록 한다? 그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셈이 되겠군요. 그리고 강 변호사님 말씀대로라면 장미은행 재매각 가격도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맞습니까?” “예, 바로 보셨습니다. 장미은행 재매각 시 가격은 원래 인수 가격에서 많아 봐야 20~30% 플러스되는 정도에 그칠 것입니다. 처음부터 헐값에 가져갔으니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재매각하게 할 수는 없지요.”“그래요?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우리 한번 해봅시다.”
결국, 공룡이 토했다3월 2일 오전11시. 세종로 프레스 센터 19층.태극로펌의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오늘 기자회견의 주인공 역할은 송판국 변호사가 맡기로 했다.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에게 보도 자료를 나누어 주자 갑자기 회견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퍼시픽 파이낸스의 장미은행 인수 계약은 무효’ 보도 자료의 제목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장미은행 인수 계약의 법적 하자와 그 대책’에 관한 태극로펌의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송판국 변호사는 기자들 앞에서 더욱 당당하고 여유가 있었다. “재작년 12월, 국내 굴지의 금융기관이 국제적인 사모펀드에 헐값에 넘어가는 수치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지요. 바로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장미은행이 퍼시픽 파이낸스에 인수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장미은행 인수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혹들이 많았던 점 기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설, 주가조작설, 정치적 뒷거래, 국제 사모펀드와 핫머니의 공격, 국제적인 거물급 인사들의 외압설 등등 온갖 소문이 돌았고 결국 장미은행은 시가의 절반도 안 되는 헐값에 금융기관인지 여부도 불확실한 퍼시픽 파이낸스에 넘어갔습니다. 그동안 태극로펌은 인수 계약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의혹들에 대한 자료 수집과 장미은행 인수 계약에 대한 면밀한 법적 검토 끝에 장미은행 인수는 국제 사모펀드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주가 조작에 의한 위법한 계약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장미은행 인수가 사기 행위에 의한 명백한 위법 행위임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이미 확보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부터 장미은행을 되찾기 위한 모든 법적 절차를 시작할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협조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송판국은 준비한 회견 내용을 시종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난상토론태극로펌에서 기자회견을 한 다음 날, 강동현은 최강 솔로몬의 박두현으로부터 뜻밖의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 장미은행을 인수한 사모펀드의 막후 실력자가 강동현과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막후 실력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의 비밀 회동 제의였다. 강동현은 장미은행 사건이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음을 직감했다. 막후 실력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최강 앤 솔로몬의 알렉스 변호사와는 다른 차원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혹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강동현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를 보면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일 뿐만 아니라 웬만한 국가원수는 우습게 볼 정도의 막강한 파워를 가진 인물임에 틀림없었다.비밀 회동 제의를 받은 지 3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 태극로펌 회의실에는 K2프로젝트에 참여한 태극로펌의 모든 변호사들이 모였다.“여러분, 이제 다들 모이셨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지난 1년여 동안 우리 태극로펌은 장미은행을 되찾기 위한 K2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 지난번 기자회견에 이어 이제 민ㆍ형사 등 모든 법적 절차를 개시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장미은행을 인수한 사모펀드의 막후 실력자로부터 비공개 회동 제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 회동 제의의 배경과 진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퍼시픽 파이낸스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우리 로펌의 최종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오늘 회의를 갖게 된 것입니다.”“자, 그럼 지금까지 진행된 K2프로젝트의 내용은 지난번 기자회견을 통해 정리된 것으로 보고 그 후의 법적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송 변호사가 설명해 주세요.” 예정된 대로 이진규 고문이 토론을 진행했다. “현재 확보한 증거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시오?” 이진규는 나지막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저희는 저쪽의 선물, 옵션과 주가조작을 통한 거액의 차익 실현, 해외 송금과 조세 피난처를 통한 자금 세탁과 그 자금의 국내 유입 과정 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메일도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정황 증거가 있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강동현은 변호사들을 둘러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저쪽의 실질적인 오너가 비밀 회동을 제의한 이유는 둘 중 하나겠지요. 장미은행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최후통첩이거나.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만약 선전포고를 위한 최후통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소?”“그건 말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까짓 최후통첩에 물러나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죽기 살기로 한판 붙어야지요.” 송판국이 전의를 불태우듯 주먹을 쥐며 말했다.“그렇다면 저쪽에서 어떤 형태로든 협상을 하자고 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소?”“어떤 협상 카드를 들고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그렇지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상대의 예상되는 협상안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을 미리 논의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제가 대충 상대방이 제시할 수 있는 몇 가지 카드를 정리해 봤습니다.” 평소 치밀한 성격의 배금호가 입을 열었다. “첫째, 태극로펌이 장미은행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지 않고 잘 마무리해 준다면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금전을 제시하거나 상당한 일거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하는 제안입니다. 둘째, 장미은행 구조 조정과 정상화 과정에 최강 솔로몬과 함께 태극로펌도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제안입니다. 이밖에 퍼시픽 파이낸스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국내외 정ㆍ재계 인사나 청와대와 재정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압력을 행사하게 할 수도 있고 또 한 가지는 퍼시픽 파이낸스 쪽에서 법적 다툼을 계속하기보다는 적당한 이익을 남기고 빨리 장미은행을 제3자에게 매각하고 손을 털어 버리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이 제가 정리한 경우의 수들입니다.”그때 뒷줄에 앉아 있던 표재호 변호사가 손을 들며 말했다. “협상에서는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협상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선배 변호사님들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저쪽이 먼저 협상 제의를 했기 때문에 저쪽에서 어떤 카드를 들고 나올지 그것만을 예상하고, 거기에 대한 방어 전략에만 중점을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협상 제의는 저쪽에서 했다고 하더라도 협상안을 우리가 만들고 협상 과정도 우리가 주도하는 방안을 강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우리가 확보한 증거 자료들을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우리가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다들 표재호 변호사의 신선한 제안에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이었다. “역시, 젊은 기예가 대단하군요. 바로 그겁니다. 협상에서는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승패의 관건입니다. 강 대표, 지금까지 나온 의견들도 잘 취합하고 지금 표 변호사가 얘기한 대로 태극로펌의 협상안도 만들어 협상을 주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세요.” 이진규 역시 표재호의 제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운명적 해후하얏트 호텔 스위트룸. 놀만 요제프가 묵고 있는 방으로 안내된 강동현은 손과 등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태극로펌의 변호사들이 오랫동안 명운을 걸고 준비한 K2프로젝트의 성패가 바로 오늘 이 순간에 달린 것이었다. 놀만 요제프! 그가 강동현과 이미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사람임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이 정말 인연일까. 놀만 요제프! 그는 강동현의 조부인 강준이 구해 준 미군 장교 다니엘 요제프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강동현은 안내된 응접실에 혼자 남게 되자 조용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요제프가 조용히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요제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요제프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했다.“반갑습니다. 프로페서 요제프. 강동현입니다.” 강동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악수했다.“역시 한국의 가을 날씨는 판타스틱합니다. 한국인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요제프는 강동현에게 앉을 것을 권하며 한국의 날씨를 추켜세웠다.강동현은 요제프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정말 의외였다.두 사람이 날씨와 한글에 대한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룸서비스로 음료가 준비되었다.“로이어 강.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는 내가 마련한 것이니 내가 먼저 얘기를 시작해야겠지요. 내가 로이어 강을 이렇게 초대한 것은 장미은행을 둘러싼 문제들을 원만하게 매듭짓고 싶어서입니다.” 요제프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동감입니다, 프로페서 요제프. 우리도 더 이상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또 장미은행 문제가 한ㆍ미 양국 관계에 해가 되거나 한국의 국제 신인도에 영향을 주어서도 안 되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로이어 강. 솔직하게 얘기해 봅시다. 로이어 강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자리는 프로페서께서 마련한 자리이니만큼 제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프로페서께서 가지고 계신 복안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강동현은 자신의 속내를 먼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말하리다. 우선 로이어 강은 장미은행에 관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시오. 민사든 형사든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로이어 강도 알다시피 장미은행은 퍼시픽 파이낸스가 적법하게 인수하여 모든 것이 정상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장미은행 인수 합병이 불법이라면서 형사사건화하고 인수 계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한국의 대외 신인도나 투자 환경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로이어 강도 잘 알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로이어 강이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강동현도 요제프의 눈을 바라보며 요제프의 진짜 의도를 읽으려 했다. “프로페서. 나는 로이어이지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장미은행 인수 계약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기에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정의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정의라!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지난 일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지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그렇다면 프로페서가 생각하는 또 다른 정의는 무엇입니까? 어차피 퍼시픽 파이낸스는 장미은행을 경영할 의도로 인수한 것은 아니겠지요.”“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퍼시픽 파이낸스는 우리가 운영하는 펀드의 극히 일부로 만든 컴퍼니일 뿐입니다. 장미은행의 경영이 정상화되면 언제든지 재매각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퍼시픽 파이낸스의 투자자들은 적당한 이윤이 보장된다면 장미은행의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지요.”“프로페서. 우리도 장미은행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장미은행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장미은행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강동현은 단전에 힘을 모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로이어 강. 한국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지요. 아마도 장미은행을 법적으로 되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충분한 증거 자료도 확보했다고 하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도 결코 로이어 강의 편이 아닐 것입니다. 장미은행은 이제 곧 정상화될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하게 되겠지요. 그러니 로이어 강, 현실적으로 가능한 차선의 정의를 찾도록 합시다.” “프로페서. 불법을 인정하고 차선의 정의를 찾자는 것은 정의를 포기하자는 것이겠지요. 불법을 용인하고 차선의 정의를 찾는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불의와의 타협일 뿐입니다.” “로이어 강. 불법, 불법 하는데 도대체 뭐가 불법이란 겁니까? 우리는 사실 장미은행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인수를 포기했다가 한국 정부의 간곡한 요청이 있어 인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린 파산하려는 은행을 인수하여 한국과 한국민을 도운 것이지 결코 공짜로 은행을 빼앗은 것은 아니다.” 요제프의 목소리에는 냉기와 노가가 배어 나와 듣는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프로페서. 프로페서께서 장미은행 인수가 불법이 아니라고 하시니 제 생각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선 한국의 현행법상 금융기관도 아닌 사모펀드가 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위법입니다.”“잠깐, 로이어 강. 한국의 현행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난 알지 못하고 또 사실 관심도 없소. 이미 말했다시피 우린 한국 정부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파산 직전의 은행을 인수한 것뿐이오. 퍼시픽 파이낸스에게 인수 자격이 없었다면 어떻게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인수 요청을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한국 정부에서도 면밀한 법적 검토를 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러니 우리에게 불법이니 뭐니 하며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에 따져야 하는 것 아니오?” 요제프는 한국 정부의 결정을 들고 나왔다. “프로페서. 정부의 결정이 항상 적법하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정부의 결정이 위법하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부의 결정 자체도 진실과는 거리가 먼 조작된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강동현은 이제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카드를 던진 셈이었다.“조작된 사실? 지금 우리가 뭔가를 조작했다고 말하는거요?” 요제프의 희끗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프로페서. 우리는 장미은행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M&A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미은행 인수를 전후해서 수십 개의 페이퍼 컴퍼니가 조세 회피 지역이니 버진 아일랜드, 케이맨제도, 라부안 등에 설립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 페이퍼 컴퍼니들은 한국 증권시장에서 선물, 옵션거래를 통해 막대한 차액을 챙겼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로이어 강. 당신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어요. 조세 회피 지역에서 회사를 설립하는 것은 적법한 일이요. 그런 것이 어떻게 반드시 장미은행 인수와 관련이 있다는 거요?”“하지만 이 페이퍼 컴퍼니들이 단기간에 한국 증권시장에서 선물, 옵션거래를 통해 올린 수익은 수천억 원에 달합니다. 이는 도저히 정상적인 거래에서 올릴 수 있는 수익이 아닙니다. 또 문제는 이 수익이 조세 회피 지역으로 송금되었다가 다시 고스란히 퍼시픽 파이낸스의 장미은행 인수 대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를 모두 확보하고 있습니다.”“로이어 강. 주식이나 선물, 옵션 시장에는 언제나 투기적인 거래자들이 넘쳐나기 마련이오. 거래에서 거액을 챙겼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이거나 조작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웃을 겁니다.”강동현은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프로페서. 우리는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그중 한 가지만 미리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것을 프로페서에게 보여 드리는 이유는 장미은행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강동현은 가지고 온 봉투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 요제프가 잘 볼 수 있게 앞으로 밀었다. 서류를 보는 요제프의 눈가에 가는 경련이 이는 것을 강동현은 놓치지 않았다. 서류를 본 요제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강동현이 요제프 앞으로 내민 서류는 바로 그 악보였다. 부친인 다니엘 요제프가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 착안하여 내밀한 서신을 보낼 때 쓰려고 개발한 암호 체계였다. 그런데 이 악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이 악보의 의미를 모두 해독했단 말인지 알 수 없는 요제프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강동현을 바라보았다.이윽고 요제프가 침묵을 깼다. “놀랐습니다. 로이어 강. 그래요. 우리가 로이어 강을 과소평가한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로이어 강도 인정했다시피 이런 악보는 법정에 제출할 증거는 못 됩니다. 어쨌든 로이어 강이 이런 악보를 나에게 보여 주는 이유는 법정에서 장미은행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아니란 뜻이겠지요? 좋습니다! 이제 로이어 강의 복안은 무엇인지 한번 들어봅시다.”“프로페서 말대로 장미은행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부담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마도 세계 언론, 학계, 금융계로부터 엄청나게 비난받고 국제적인 왕따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프로페서와 퍼시픽 파이낸스의 도덕성에도 상당한 타격이 있겠지요. 그래서 프로페서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장미은행을 다시 인수하고 퍼시픽 파이낸스는 우리가 추천하는 국내 금융기관에 장미은행을 재매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인수한 가격에 말입니다.”강동현은 조금 빠르다 싶었지만 일단 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장미은행을 재매각할 수는 있지만 처음 인수 가격에 재매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소.” 요제프는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강동현은 점점 더 냉정해지고 있었다. 요제프의 반응에서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프로페서가 생각하는 재매각 조건은 어떤 것입니까?”요제프는 잠시 신음 같은 소리를 내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미은행을 재매각하면서 대박을 기대하진 않겠소. 하지만 처음 인수 가격에 그동안 들인 비용과 플러스 50%의 수익을 보장한다면 재매각을 고려해 보겠소.”요제프도 드디어 재매각에 관한 카드를 내놓은 셈이었다. 처음 인수 가격이 워낙 헐값이었던 탓에 50%의 이윤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강동현은 이번 담판의 성공을 예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50% 수익이라니요? 어떤 펀드도 연 50%의 수익을 보장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미은행 인수에 들어간 비용은 우리가 보전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좋습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한계는 처음 인수 가격에 Libor금리를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번 장미은행 인수는 불법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더 이상의 수익을 챙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강동현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어 강. 로이어 강의 취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소.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시오. 세계적인 펀드가 인수한 은행을 재매각하면서 겨우 Libor금리 정도의 수익을 남긴다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소? 아마도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될 거요. 그러니 장미은행 문제를 재매각 쪽으로 매듭을 지으려면 우리뿐만 아니라 국내외 금융계도 수긍할 수 있는 매각 조건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또 하나, 장미은행 문제에 대해 내가 영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법적으로 거쳐야 하는 절차도 있잖소? 로이어 강이 나 혼자는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모두 설득할 수는 없을 거요.”강동현은 요제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제프가 막후 실력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프로페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다. 그렇다고 투자 금액 대비 50%의 수익은 우리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처음 인수 가격 대비 10% 정도의 수익을 보장하는 가격으로 하겠습니다. 10% 정도의 수익은 현재의 투자 환경으로 볼 때 그리 나쁘지 않은 실적일 것입니다. 그 대신 장미은행 인수에 들어간 최소한의 실비는 별도로 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로페서,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제 마지막 제안입니다.““10%의 수익과 실비 보상이라? 그 정도로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소? 어림없는 소리요.”마지막 제안이라고 하는데도 요제프는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투자 환경이라면 10%의 수익은 결코 만족스럽지 않겠지요. 하지만 인수한 장미은행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거액의 투자손실이 발생하고 장미은행의 불법 매각에 대해 시민 단체의 시위가 격화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강동현은 비장의 카드를 또 하나 내놓았다.“흠, 우리가 새로 장미은행 투자 손실을 만들면 로이어 강이 시민단체를 동원하겠다는 뜻이오?”역시 요제프는 강동현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어떻게 보면 장미은행 재매각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공모하자는 말인 셈이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10%의 수익을 보장 받는 선에서 장미은행을 재매각하더라도 투자자들이나 언론에서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동현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전력을 다해 요제프를 설득하려고 했다. 이런 강동현을 요제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동현은 문득 요제프의 시선에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요제프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로이어 강. 로이어 강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까? 내가 로이어 강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로이어 강도 나에 대해 알고 있소?” 요제프의 갑작스런 엉뚱한 질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강동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로페서 요제프. 프로페서가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페서와 난 이미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역시 그랬군.” 요제프가 갑자기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럼 로이어 강도 이미 내 부친이 오래전에 한국에서 근무했고 그때 로이어 강의 조부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군요?” 요제프는 이제 장미은행 건은 관심 없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사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그렇습니다, 프로페서. 저 역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고 정말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로이어 강. 정말 반갑소. 우리 악수 한 번 더 합시다.”“네, 반갑습니다.” 강동현은 요제프가 내민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