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한국을 선택했다
이우중 지음 | 책이있는마을
신은 한국을 선택했다
이우중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0년 10월 / 256쪽 / 10,000원
제1부 3천 년의 간극(BC1269~AD2045)
광복 100주년 기념식귀를 파고드는 음악 소리에 상민은 눈을 떴다. 그는 누운 채로 사지를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음악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다음 소절로 이어졌다. "일어났어, 일어났다구." 상민의 목소리에 음악이 뚝 그쳤다. 설정한 사람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알람이었다. 상민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협탁으로 손을 뻗어 안경을 찾아 쓰고 휴대폰을 터치했다. 휴대폰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일정 안내입니다. 오전 10시에 8 15광복 100주년 기념식이 광화문 광장에서 있습니다. 이어서 11시에는 다국적기업 CEO들과 연방정부청사 홍보관 가상현실 룸에서 미팅이 있습니다. 오후 1시에는…."
상민이 이어지려는 안내 멘트를 터치해서 꺼버렸다. 그는 시계를 보고 욕실로 들어가기 위해 돌아섰다. 설정된 시간에 맞춰 스스로 작동하는 로봇 청소기가 상민과 마주치자 아침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민은 청소 로봇을 비켜서 지나갔다. "쳇, 온통 기계들만 내게 말을 거네." 그는 가운을 벗어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30분 후, 상민은 옷장을 열어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는 정장을 차려입고, 평상시의 목소리로 빈집에 출타 인사를 했다. "다녀올게." 그의 인사를 받는 건 청소 로봇과 현관 센서였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두 전자음이 동시에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그는 집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그의 차가 출구를 향해 나와 있었다. 집에서 내려오기 전에 미리 출차명령을 해놓은 덕분이었다. 그는 차에 올라 서둘러 행사장으로 향했다.
행사장은 다국적 참석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광판에는 <2045년 8월 15일 신한국 연방 광복 100주년 기념식>이라는 글자에 불이 켜져 있었고 글자 아래로 행사 일정이 슬로모션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행사의 축은 중한국에서 이루어지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서한국, 북한국, 동한국, 남한국의 중심지에서도 화면을 통해 이 행사를 함께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광장의 시계가 10시를 가리켰다. 곧 식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광장을 메웠다. 기념식장의 앞줄에는 신한국 연방정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남한국 주지사 나가소네와 중한국 주지사 김수혁, 그리고 북한국 주지사 왕칭한과 동한국 주지사 이치노프, 서한국 주지사 징자이칸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안내에 따라 연방정부 대통령 이상혁이 단상에 올랐다.
환영의 박수소리가 한 차례 지나가자 만면에 웃음을 띤 이상혁이 축하 연설을 시작했다. "신한국 연방의 광복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주신 국내외 귀빈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지금 텔레비전과 각종 매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고 계신 국민 여러분께도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인류가 7000만 년 전에 태어난 영장류와 다른 방법으로 문화를 이룬 것은 단지 수십만 년에 지나지 않으며, 40만 년 전부터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방법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을 발견하고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목재와 석재 기술을 터득하고 흙과 철을 응용, 끝없는 창조적 개발을 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문명을 일으킬수록, 개발에 박차를 가할수록 지구는 더욱 심하게 몸살을 앓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 인류는 아픈 지구를 어루만지는 친환경 첨단과학 기술을 역동적으로 개발하고 확산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모든 기술은 지구 자연 생태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하며 인류 평화와 행복 추구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신한국 연방은 무궁한 평화와 인간의 무한한 행복추구를 목적으로 기술역량을 제고할 것이며 현재의 기술을 더욱 더 고도화시키는 데 전력을 다할 계획입니다……."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상민은 몸을 빼내 연방정부청사 홍보관으로 향했다. 그는 신한국 연방이 세계 최첨단 국가를 건설하기까지 기여한 국내 기업군 가운데 1위 기업인 K텔레콤 기술이사로 이 행사의 준비와 진행을 맡았다. 신한국 연방은 바야흐로 세계 경제의 축으로 성장했다. 2045년 현재 GDP(국내총생산)와 GNP(국민총생산) 세계 1위, 국민 1인당 신기술 특허보유량 세계 1위, 그리고 인구는 세계 3위를 차지했다. 골드만삭스와 무디스, S&P 등 세계적 신용평가 회사들은 한결같이 기술력, 경제력, 국방력에서 향후 수백 년 동안 초강대국의 지위를 지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념식이 끝나고 홍보관으로 모인 세계 다국적기업의 CEO들은 시뮬레이션으로 준비된 자료화면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세계 각국에서 기술 원조를 얻기 위해 파견된 최고위층 사절단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한국 연방은 IT정보통신, 신 생명공학 등 최첨단 기술 분야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외교역량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민은 그들에게 통신 기술력에 관련된 질문을 받거나 홍보를 하며 행사 진행에 참여했다. 어떤 사람은 상민이 신한국 연방 출범 공로자 100인에 들어 있는 박진혁 이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축하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행사를 마치고 오찬을 위해 이동하는 손님들 사이를 빠져나온 상민은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는 오찬장으로 가지 않고 차를 달려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줄곧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파주로 향했다. 서울을 벗어나 통일로를 달리자 늦여름의 푸르른 산과 들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상민은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내렸다. 그는 반갑게 느껴지는 고향의 바람결에 얼굴을 맡기고 달렸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벗어나 차는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부터 완만하게 누운 산자락이 보였다. 상민은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 술과 마른안주를 샀다. 거기서 산비탈을 조금 오르다가 빈터가 나오자 차를 세웠다. 그는 빈터에 차를 세워두고 술병이 담긴 봉투와 작은 가방 하나를 챙겨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비탈 중턱의 아늑하게 굴곡을 이룬 땅에 분묘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봉분 앞에 술을 따라서 올리고 안주거리를 차린 후에 절을 했다. 절이 끝나자 그는 희끗해진 머리를 민망한 듯 쓸어 올리며 오래 전에 고인이 된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오랜만이지요? 오늘 광복 100주년 행사를 치렀어요. 기념식에 갔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아버지가 신한국 연방 통합을 이룩하는 데 초석을 놓은 공로자 100인에 선정되셨어요. 오늘을 내다보고 열심히 뛰신 공로를 국가가 알아주니 고맙지 뭐예요. 아버지 덕에 저도 오늘 인사를 많이 받았어요.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며 여기 누워 계시니 편안하신가요?" 상민은 혼잣말을 하다가 고개를 꺾고 잠시 침묵했다. 봉분 옆으로는 기념비 하나가 서 있었다.
- 1998년 시작된 WTO 시장개방에 온몸으로 맞서며 K텔레콤을 위기에서 구한 그 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하여 삼가 이 비를 세웁니다. 2005년 10월 19일 K텔레콤 임직원 일동 -상민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던 40년 전의 하늘을 기억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하던 그날도 하늘은 이렇게 옅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그가 K텔레콤에 특채되어 신참내기로 소송에 투입되었을 때였다. 어머니는 소중하게 간직해 온 아버지의 일기장과 노트 몇 권을 상민에게 내주었다. 노트에는 K텔레콤에 재직할 당시 신입사원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꼼꼼하게 적어놓은 소송 관련 개인 기록이 들어 있었다. 상민은 회사 일이 힘에 부칠 때마다 그 노트를 뒤적이거나 아버지의 묘를 찾았었다. 아버지는 무덤 속에서 말이 없었지만, 상민은 아버지의 봉분을 베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평정심을 찾아 돌아가곤 했었다.
상민은 남은 술을 마저 잔에 따라 아버지께 올리고 절을 올렸다.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날아와 봉분을 휘감으며 지나갔다. 그 바람에 돌 제단 위에 놓인 노트 몇 장이 펄럭이며 넘어갔다. 상민은 노트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의 기록 첫 장이었다. 그 안에서 상민의 아버지 박진혁은 외롭고 힘겨운 인생과의 싸움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패권의 시작전화벨이 울렸다. 벌써 여러 번째 울리고 있지만 박진혁은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모두가 퇴근하고 난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몇 시간째 그렇게 있었다. 모니터에는 국제 특허관련 기술 문헌들이 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우유팩과 먹다 남은 카스테라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다.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는 사직서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사직서를 써 놓고도 차마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며칠째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며 자료들을 뒤지는 중이었다. 별 기대도 없이 화면들을 넘기면서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날아다녔다.
박진혁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회사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이렇게 큰일이 닥쳐오도록 아무런 대비도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단 말인가. 그는 몇 번이나 강조해서 주장했었다. '분쟁 사례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특허팀을 따로 만들어서 전문화하고 인력을 확대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러나 번번이 묵살하더니 분쟁이 빈번해지니까 이제 와서 그 중요성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박진혁은 벌써 4년째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직책을 맡아 홀로 울타리를 여미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 일을 맡고 있는 4년 동안 그의 삶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가정생활은 물론이요, 박진혁 개인의 여가생활이라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세월이었다. 휴일을 휴일답게 보낸 게 언제였던가. 그럼에도 이번 분쟁에서 패한다면 1순위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물론 자신이 될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한 채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사표를 던지자니 22년의 회사생활 동안 개인적으로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회사로부터 받은 지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22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청춘과 피땀을 바친 회사가 아닌가. 그야말로 원망과 애착이 서로 뒤엉켜서 들끓는 중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 같아서 어디를 시작점으로 잡고 풀어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국책 사업체이던 회사가 공기업으로 전환되고 다시 민간 기업으로 바뀌면서 그의 삶도 많이 달라졌다. 당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자신이었지만 박진혁은 이 일이 천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번 A텔레콤과의 소송에서 보기 좋게 이기고 싶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사표도 휴식도 아니었고 오직 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찾아지지 않았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박진혁은 이 괴로운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과 이기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하루하루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1998년 WTO협정의 일환으로 국내 정보통신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나라의 문이 열리자 선진국의 정보통신 업체들이 막강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앞세워 국내시장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 즈음 문제의 미국 회사인 A텔레콤이 필리핀, 스페인, 멕시코에서의 시장 패권 장악에 이어 한국 시장 쟁패에 나선 것이다. 이때까지 국내시장을 독점해왔던 K텔레콤은 무방비 상태에서 막강한 적을 맞게 된 것이었다. 상대는 이 싸움을 위해서 벌써 6년 전부터 물밑 작업을 해온 상태였다.
박진혁의 회사인 K텔레콤은 연간 20억 달러어치의 통신장비를 사들였는데 6년 전부터 A텔레콤은 이 장비들을 통상가격의 60%의 가격에 저렴하게 수입할 수 있도록 조건을 낮춰줌으로써 수십 년간 거래해오던 국내 제조업체들을 따돌려놓은 것이다. 그들은 무려 80%나 되는 장비 물량을 장악한 후에 원가를 다시 120%로 올려놓았다. 전적으로 A텔레콤의 장비에 의존했던 회사는 이 전략으로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렇게 해서 회사를 허약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 A텔레콤은 시장이 개방되기만을 기다려 준비했던 일격을 가한 것이다. 바로 특허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미국 정부는 WTO협정으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그에 발맞추어 A텔레콤은 K텔레콤에 소송을 건 것이다.
박진혁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고, 결국 회사는 백척간두에 서게 된 것이었다. 만일 이번 분쟁에서 진다면 회사는 지난 10년간 사용료 10억 달러와 매년 2억 달러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할 처지였다. 그렇게 된다면 가뜩이나 재무구조가 허약해진 회사로서는 더 버틸 힘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박진혁은 국내의 다른 반도체 메이커 그룹이 같은 이유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사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든 회사를 구하고 싶었다. 바윗덩이를 지고 있는 듯 괴롭고 힘에 부쳤지만 이 일에 관련해 4년 동안 쌓아온 지식과 열정과 업무해결 능력을 총동원해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러나 A텔레콤의 소송에 반론을 제기할 자료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특허법원에서는 3개월 이내에 반대 의견서를 제출하지 못하면 A텔레콤의 승소로 결정할 것이라는 심판결정예고 통지서가 날아온 상태였다. 통지서가 날아오도록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회사의 반응에 A텔레콤은 승리를 예감하며 득의양양해 있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국내 정보통신부와 권력기관이었다. 어차피 승소할 수 없다면 분쟁을 포기하라는 식의 압력을 가해 온 것이었다. 어이없기는 회사 고위층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싸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출구전략부터 짜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특허부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박진혁을 불러들이더니 대뜸 질문부터 했다. "박 과장, 자네가 반론 자료를 찾을 수 있겠어? 괜히 시간만 끌게 되는 건 아니지? 난 이제 더 버틸 수 없어. 위에서는 괜한 시간과 비용 쓰지 말고 특허법원에 포기서를 쓰든지 아니면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선에서 합의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압력을 넣고 있어. 사실 내 생각도 그래. 괜히 시간만 끌고 나서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게 되면 피해만 늘려 놓았다고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게 뻔하잖아?"
박진혁은 울컥 치미는 화를 삭이며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통지서가 날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 야단들입니까? 다들 놀고 있으면서 답을 내놓지 않는 겁니까? 협력해서 모두가 방법을 찾아 봐야지요. 어째서 내줄 생각들만 먼저 하고 있는 거예요?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서부터 쓰자구요? 놈들이 그걸 바라고 이리저리 압력을 넣으며 설치는 거 아닙니까. 3개월만 조용히 기다리면 끝날 일을 왜 저리 설치겠습니까? 분명히 뭔가 있을 겁니다. 찾아보겠어요.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밥그릇을 내줄 순 없어요. 부장님이 책임지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책임집니다. 까짓것 목 달아나기밖에 더 하겠어요? 이런 식으로 불한당같이 밀어 붙여서 필리핀이나 멕시코니 스페인 시장까지 먹어버리고 이제 우리까지 먹으려 하는데 곱게 바칠 수는 없지요. 그러니 제발 도움을 주지 않으려면 시간이나 벌어 줘요."
부장은 다소 기가 꺾인 얼굴로 박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기한은 정해야 할 거 아냐. 아무 대책도 없이 마냥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박진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이렇게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며 일하다가는 3개월은커녕 1주일도 못 버티고 쓰러질 지경입니다. 어쨌든 한 주만 시간을 더 끌어보세요. 그때까지도 못 찾으면 사표 쓰겠습니다."
근래 회사의 분위기는 폭풍 전야의 상태였다. 수뇌부에서는 벌써 막강한 적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고 판단하고 솟아날 구멍을 마련하느라 연일 분주했다. 중역들은 특허 패배 비용 지출과 시장잠식 대비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원 6만 명 중 2만 명을 감원할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소문은 소리 없이 번지기 마련이어서 사내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서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사부서와 감사부서 사람들은 동료들을 평소와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회사 안의 화제는 대부분 누가 살아남고 누가 떨어져 나가느냐를 가지고 수군거리는 소리들뿐이었다. 박진혁은 이 모든 상황이 고스란히 부담으로 다가왔다. 일개 과장의 어깨에 이렇듯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모두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끔찍한 고독감에 몸을 떨며 빈 사무실을 새삼 둘러보았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전등까지 꺼져버렸다. 8시가 된 모양이었다. 자동 소등장치가 작동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