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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촐라체

박범신 지음

푸른숲 / 2008년 3월 / 364쪽 / 9,800원

베이스캠프


내가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탄 것은 10월 하순이었다. 아무런 예정도 없었고 돌아올 기약도 없었다. 10월 하순인데도 카트만두는 무더웠다. 닷새 후 나는 포카라로 날아갔다. 포카라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카트만두에 비해 공기가 맑았고 시야가 드넓었다. 나는 안나푸르나 일주 코스를 두 주일에 걸쳐 주파했다. 만년설이 덮인 봉우리들이 햇빛과 만나 뒤집힐 때마다 나는 자주 눈을 감았다. 눈 덮인 쏘롱 라를 넘을 땐 공연히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성지가 된 묵티나트에서만 이틀을 머물렀고, 나머지 코스에선 무조건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걸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앞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스님이 내게 정견과 명상과 행위에 대해 말했다. "그 어떤 그림자나 얼룩에 방해받지 않고 본성을 똑바로 꿰뚫어 보는 것이 정견이지요……." 나는 스님의 설명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로소 열일곱 살 꽃다운 봄날, 중이 되겠다고 산사로 들어간 현우 생각이 났다. 왜 하필 그 길이냐, 하고 묻고 싶은 걸 참고 앉아 있을 때 그 애가 아퀴를 짓듯 낮고 또렷하게 내던진 한마디가 생생히 살아났다. "……그리워서요."



포카라는 안나푸르나를 찾는 세계의 트레커들이 사철 몰려드는 곳이라서 호안(湖岸)을 따라 카페,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가 즐비했다. 나는 매일 한낮까지 깊이 잤고, 깨고 나면 반바지에 슬리퍼만 꿰고 거리를 어슬렁거리거나 호숫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오래 자도 이상하게 머릿속은 맑아지지 않았다. 해가 질 때의 호수는 놀빛과 만년설의 흰빛이 교접, 황홀한 빛의 스펙트럼을 연출했다. 박상민을 우연히 만난 것도 바로 해가 질 무렵이었다. "……선생님?" 박상민은 처음 나를 그렇게 불렀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랬을 터였다. 우리는 얼결에 와락 손을 잡았으나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피차 활달한 성격이 아니어서 우연한 만남을 어떻게 잡아챌지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상민은 중학교 교생을 할 때 내가 배정받은 반의 반장이었다. 산에 미쳐서 휴일마다 빠지지 않고 암벽 등반을 하러 다닐 무렵이었다. 어쩌다 한 번 함께 산에 올라 인연이 깊어졌고, 교생 실습 후에도 산 때문에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곧장 카페로 들어갔다. 네팔 소주 락시를 시키고 나서야 박상민을 따라와 나란히 앉은 청년에게 시선이 미쳤다. 어깨가 야무지게 벌어지고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오른 잘 생긴 청년이었다. 박상민이 동생이라고 했다. 나를 향한 청년의 시선이 웬일인지 저돌적이고 불순해 보여서 되도록 청년 쪽은 보지 않았다. 박상민은 12월에 촐라체를 오른다고 했다. 한겨울에 빙설로 뒤덮인 산을, 그것도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오른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가 오래전 고산 등반을 그만두었다는 걸 상기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카트만두로 다시 돌아온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돌아온 카트만두는 날씨가 쾌청했다. 카트만두 근교의 나가르코트에서 나는 잊고 있던 박상민을 비로소 떠올렸다. 촐라체가 어디쯤일까. 나는 시선을 모으고 설산 연봉들을 바라보았다. 촐라체의 빙벽을 오르고 있는 박상민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빌라 에베레스트에 머물 거라던 상민의 말이 생각나 그곳에 들렀으나 상민은 이미 떠난 후였다. 매니저가 말했다. "사흘 전 전화가 왔었는데, 베이스캠프를 지켜줄 사람이 없어 등반을 뒤로 좀 미루고 있는가 봐요."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배낭을 꾸려 촐라체 베이스캠프로 향했고, 그렇게 박상민의 캠프지기가 되었다.



그들은 두 주 동안 '피켈체조'라는 것을 매일 천 번씩 했다. 피켈로 수직 빙벽을 양팔로 번갈아 찍는 연습이었다. 하영교가 암벽 등반 경험은 있지만 고산이나 빙벽 등반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나는 상민의 등반일지를 보고 알았다. 빙벽 등반에선 무엇보다 안자일렌을 해야 하는 파트너가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2천여 미터 가까운 촐라체 거벽을 계속 어느 한쪽에서 선등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영교는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라고 했다. "힘은 나보다 뛰어나요." "힘 가지고 되는 거냐, 저것이……." 나는 어두운 북벽을 보며 반문했다. 상민의 시선도 나를 따라 촐라체로 날아갔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무덤과 정상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나갈 때 '오히려 지각이 맑아지고 민감해지며' 마침내는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는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혼자 무산소 등정했고, 낭가파르바트 8천 미터 리지에선 '갑자기 둥근 모양을 한 투명체가 등 뒤에 구름처럼 떠 있는 걸' 본 사람이었다. 나는 미간을 모으고 북벽의 검은 아가리를 뚫어져라 보았다. '둥근 투명체'들이 다투어 그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 어떤 투명체는 나였고, 또 어떤 투명체는 상민이었다. 홀연히 산으로 떠나고만 내 아들 현우도 그중의 하나였다. '추락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이라고 메스너는 계속 썼다. '……무대는 천국의 빛으로 가득 차고…… 하늘나라의 고요함이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첫째 날

박상민: 나는 앉은자리에서 일어선다. 신혜의 모습이 어른거리지만 애써 고개를 젓는다. 암벽 등반에는 지난 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한 발 한 발 목숨을 통째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빙탑들과 크레바스가 교묘하게 배치된 세락 지대가 한눈으로 봐도 범상치 않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스를 오르다가 실패하고 내려온 것도 이런 형태의 세락 지대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둔산 동지 길에서 처음으로 내게 암벽 등반의 세계를 열어 보여준 김형주 선배가, 눈사태의 후폭풍에 휘말려 천 미터가 훨씬 넘는 빙벽 밑으로 나뭇잎처럼 날아가 버린 일도 바로 세락 지대에서 생긴 일이다. 수없이 암봉과 빙벽 모서리에 부딪치면서 추락하던 김 선배의 모습이 상기도 너무나 또렷하다. 나는 왜 그때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지도 못했을까.



내가 등반을 중단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어디로 고개를 돌려봐도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김 선배가 보였으며, 그것이 주는 고통은 아직도 다 지워지지 않고 있다. 내가 에베레스트 남서벽이 보일 듯한 이 촐라체를 재기 등반의 첫 번째 무대로 선택한 것도 알고 보면 그 때문이다. 나는 잡념을 떨치려고 또 고개를 젓는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세락은 그때의 것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더 복잡하고 기기묘묘해 보인다. 이제는 단순히 오르는 게 아니라 숨은그림찾기 하듯 수많은 빙탑과 위장된 크레바스와 명줄을 건 술래잡기를 해야 한다. 술래잡기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 그리고 촐라체를 이겨내야 난공불락의 에베레스트 남서벽으로 갈 수 있다. 김형주 선배가 나를 그곳에서 부르고 있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한 발 철컥, 앞으로 내민다.

하영교 :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비몽사몽 하다가 잠이 깨고 또 비몽사몽 하다가 잠이 깬다. 어머니가 언뜻 보인다.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어머니는 꽃무늬 양산을 든 하얀 원피스 차림이다. 엄마, 하려다 말고 나는 그만 입을 다문다. 그 아이는 내가 아니라 상민 형이다. 꿈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젊었던 어머니 얼굴에 기미가 끼고 주름이 생기더니 마침내 머리칼이 다 빠진 얼굴이 보인다. 암종에 붙잡혀 죽은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은 다시 기억해내고 싶지 않다. 잇달아 나는 또 버둥거리다 소리치며 눈을 뜬다. 역시 꿈을 꾼 것도 같고 환상을 보았던 것도 같다. 누가 어두운 빙하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누구일까. 그의 등은 촐라체 북벽처럼 어둡다. 나는 칼을 든다. '나팔귀 아저씨'야. 나는 미친 듯 칼을 휘두른다. 칼끝이 이윽고 어두운 괴물의 옆구리에 쑤셔 박힌다. 나는 소스라쳐 잠을 깬다.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것은 빚뿐이었고, 그중에서 놈이 받아 가야 할 것은 겨우 2천만 원에 불과했다. 놈을 찌르고 도망친 일에 대해 후회는 없다. 아버지가 가장 믿었던 후배 아닌가. 아버지 살아생전 놈이 시나브로 뜯어 간 용돈만 해도 2천만 원이 넘을 터였다.



상민 형은 비박색의 지퍼를 콧등까지 올려 잠근 채 몸을 오그리고 오버행의 하단 틈새로 바짝 끼어 들어가 있다. 어떻게 저처럼 죽은 듯이 잠들 수가 있단 말인가. 가쁜 숨소리 사이사이에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배어 나온다. 저렇게 체력이 저하된 상태로 오늘 올라온 것보다 더 가파른 빙벽을 계속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사실 빙벽을 오르는 일보다 어둠과 추위가 더 고통스럽다. 혹시, 형은 죽은 게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형.' 하고 소리쳐 불러보고 싶다.



맨 처음으로 형을 본 기억은 형이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더니 아버지 등뒤에 가방을 든 그가 서 있었다. "니 형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생선을 굽고 있다가 나오면서 눈가를 훔칠 때, 형이 가방을 든 채 내 옆을 지나쳐 거실로 들어갔다. 번쩍이는 섬광이 형의 눈빛에 떠오른 것과 가방 모서리가 내 옆구리를 거칠게 치고 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그 충격으로 주저앉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빨리 커서 힘이 센 사람이 돼야지.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날 저녁 일기에 그렇게 썼다.

둘째 날

박상민 : 섣달그믐 날, 오늘은 해가 뜨지 않는다. 침낭 안엔 성에가 가득하다. 영교는 밤새 악몽에 시달린 눈치다. 짐짓 여유를 부리지만 하룻밤 새 볼이 홀쭉해진 것처럼 보인다. 내 볼도 그럴 것이다. 꿈에 내가 간헐적으로 본 것은 검은 강이다. 촐라체 봉우리가 강물에 거꾸로 박혀 있었던 것이다. 강 건너 우두커니 서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흐릿하게 어른거린다. 영교도 혹시 어머니의 꿈을 꾸었을까. 김형주 선배의 모습도 떠오른다. 꿈에서 김 선배는 어두운 가면을 쓰고 여전히 활강 비행으로 빙벽 사이를 날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꿈을 꾸는 것은 설산에 올 때마다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시작이 문제이다. 앞을 가로막아 선 오버행 암릉은 몸집이 거대하다. 배를 허공으로 내밀고 뻗어 올라간 상단까지 10미터도 훨씬 더 될 것 같다. 나는 이윽고 이중 로프에 의지해 암릉의 둥근 배를 사선으로 타고 올라 서쪽 빙벽에 피켈을 찍어 넣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전략이다. 오버행의 상단에 도달하니 거기서부터 약간 꺼진 듯한 얼음골이 시작되고 있다. "올라와!"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친다. 얼음골에는 수많은 틈새가 감춰져 있다. 신경의 갈래 갈래가 극도로 곤두서 있어 나는 안자일렌 상태인 영교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하늘은 아직도 구름이 벗겨지지 않고 있고, 올라가야 할 빙벽의 끄트머리는 이미 흐릿해서 원근이 느껴지지 않는다. 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제 삼십 분쯤 후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어둡기 전에 비박 준비를 마쳐야 한다. "어떡하죠?" 영교의 눈빛이 우물처럼 가라앉는다. "더 갈 순 없다. 여기서 잘 수밖에." 엉덩이만 간신히 걸치게 얼음 선반을 깎아내고 나자 벌써 침침하다. 70도가 넘는 경사면이다. 머리 위엔 하켄을 박아 로프로 몸을 확보한 뒤, 발 디딜 곳엔 아이스스크루를 박아 간신히 디딤 자리를 만든다. 얼음 선반 위에 매트를 대고 엉덩이를 걸친 다음 아이스스크루에 발을 올려놓았지만 푸줏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언 고깃덩어리 꼴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영교가 버너를 정리하다가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만 것이다. 그건 이제부터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다는 촐라체 북벽의 준열한 꾸짖음이다. "왜 암말도 안 해요?" "무슨 말을?" 한참만에 영교가 묻고 내가 반문한다. "지금 속으로 화를 내고 있잖아요? 멍청한 놈, 하고 소리치는 게 오히려 나아요." "멍청한 놈! 됐냐, 이제?" "누가 모를 줄 알아요? 형은 나, 악살 먹이려고,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형편없는 놈인가 확인시키려고 여기에 날 데려왔어요." "산소가 지상의 반이다, 여기. 넌 아직도 기운이 남았냐?" "갈 데 없어서……. 그래요, 갈 데 없어서 형한테 간 건 사실이지만요, 꼬랑지 내리곤 못 살아요, 나." 왜 그걸 모르겠는가. 그는 이 벽과 정적과 어둠이 무서울 것이다. 그는 도망쳐서 내게 왔다. 나는 알고 있지만 계속 아는 체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강한 놈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서워서 말을 많이 하고 무서워서 시비를 건다.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다.

갑자기, 콧날 중심선이 가파르게 울린다. 대학 입학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처음 만난 어린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와 모든 게 또렷이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잘 빗어 넘긴 머리, 깨끗하고 질 좋은 셔츠, 반짝이는 눈과 새하얀 피부가 떠오른다. 다감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와 돈 잘 버는 아버지 사랑을 홀로 누렸으니까. 어머니보다 두 살이 어렸던 그의 아버지는 지적으로 세련되고 사업 수완도 남달랐던 사람으로서, 특별히 탓할 것이 없던 분이었다. 어머니를 너무 깊이 사랑한 것이, 돌아보면 그분의 유일한 결함이었을지 모른다. '니 엄마가 내 젊은 날을 구해주었지.' 앓아 누워 있을 때 영교의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당신의 젊은 날을 구하려고 내 아버지 젊은 날과 나의 어린 시절은 엉망진창이 되었지요'라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나는 물론 참고 넘긴다.



셋째 날

캠프지기 : "놀랍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먼저 움직인 것은 상민 쪽이었다. 여명이 틀 때부터 나는 망원경을 들고 수직 빙벽에 매달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살았네. 둘 다 살았어." 짜릿한 환호가 내 가슴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나는 잠시 암벽 등반을 취미로 한 일은 있지만 빙벽 등반은 전무했다. 만약 현우가 없었다면 고향 근처에서 작가 겸 교수로서 평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을 터였다. 어린 현우를 안고 고향을 떠난 건 서른세 살, 대학원 논문 학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신의 아이에요." 현우를 내 품에 안겨주고 대학 정문 쪽으로 내달리던 아이의 생모는 다시 오지 않았다. 이후로 빙벽은 물론이고 암벽 등반도 그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일은 암벽 등반보다 더 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나는 종일 텐트 앞을 지켰다. 정적은 깊고 집요했다. 나는 망원경으로 자주 촐라체 정상을 향해 꾸준히 올라가는 그들을 보았고, 나머지 시간은 책을 읽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는 와락 정적이 무서워 짐짓 서성거리면서, 소리내어 대답 없는 그 무엇엔가 말을 걸곤 했다. 평생 동안 이런 정적을, 그것도 하루 종일 만나본 일은 처음이었다. 밤이 되면 그 정적의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현우야." "예, 아버지……." 내가 혼잣말로 부르고 혼잣말로 대답하기도 했다. "왜 하필 산으로 들어가려는 게야?" "……그리워서요." 심지어 나는 '그리워서요, 그리워서요, 그리워서요오오……' 하고, 메아리 소리를 냈다. 미지의 누가 나를 보았으면 실성한 사람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넷째 날

박상민 : 오늘이 벌써 베이스캠프를 출발하고 나흘째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베이스캠프에 귀환해 철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전인미답의 검은 산 촐라체 북벽을 만만히 본 것이 탈이다. 가까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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