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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수필 1

피천득 외 지음 | 을유문화사
자반을 먹으며

- 유병석(수필가ㆍ국문학자, 1936∼1995)

우리가 자랄 때는 시골에서 어지간히 잘사는 부농이어도 평소에 고기 반찬을 먹을 수 없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에야, 또는 집안 어른의 생신에나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고기라고 해야 멀건 국물에 몇 점 떠다니는 것이지 갈비찜이라든가 불고기처럼 고기만 빡빡하게 먹은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 꼬마인 우리들은 제사 지내고 음복할 때 한두 점 얻어먹는, 탕 위에 얹었던 고기점과 산적꽂이에 눈독을 들였었다.



그렇다고 우리 몸에 필수적인 동물성 단백질을 전연 섭취하지 못하고 산건 아니다. 가끔 가다 대수롭지 않은 손님이 와도 핑곗김에 닭을 잡아 국을 끓이고(닭고기도 돼지고기나 쇠고기와 마찬가지로 고기만 빡빡하게 먹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특히 여름철에는 값이 치이지 않는 개를 잡아(그래서 '개값'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온 식구가 포식하곤 했다. 그 밖의 거의 끼니마다 밥상에는 생선 종류가 올랐다. 하다못해 새우젓이라도 올랐다. 생선이라고 했지만 이건 현대적인 표현이고 우리 시골말로는 그것을 '괴기' 또는 '괴기 반찬'이라 불렀다. '생선'이라는 음식은 글자 그대로의 싱싱한 생선을 그것만 가지고 싱겁게 국 끓이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동물성 단백질은 물고기가 주종이어서 생선을 '괴기'라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시골이 바닷가였던 이유도 있으려니와 고기라면 물고기였을 정도로 생선은 많이 먹은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선도 생선국인 '생선'으로 해서 먹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경제성을 앞세워야 했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짜디짜게 절인 자반으로 해서 먹었다. 요즘처럼 생선 조기를 통째로 싱겁게 소금 뿌려서 굽거나 심심하게 조려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생선의 몸부피보다 별로 적지 않을 양의 소금을 포함한 짜디짠 자반이 '괴기 반찬'의 주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골에서는 '건건이'라 하면 흔히 '비린 것', 곧 자반 생선을 뜻했던 것이다. 자반이라고 해도 흔히 먹는 종류가 정해져 있다. 관솔같이 쪽쪽 째지는 암치포나 굴비 같은 것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고급 어종이어서 아무 때나 먹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귀여운 맏손자에게도 평소에 그런 것을 먹이지 않는다. 흔히 먹는 자반은 갈치나 고등어를 소금에 절인 종류였다.



우리 집은 밥상이 셋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맏손자인 나, 할머니와 삼촌과 둘째인 내 동생, 어머니와 여동생들, 이렇게 삼상(三床)이 정립되어 있었는데 상마다 반찬이 달랐다. 반찬의 종류가 다르기도 하지만 질에 차이가 난다. 편의상 할아버지 상을 갑, 할머니 상을 을, 어머니 상을 병이라 기호화하면, 갑상이 가장 질이 우수하고 병상이 가장 형편없다. 가령 배추김치만 해도 하얀 속고뱅이는 갑상에, 퍼런 꼬리 부분은 을상에, 그리고 병상에는 뿌리와 잎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것이다. 갑, 을상의 것은 통배추를 가로로 절단했는데 병상의 것은 흔히 세로로 쪼갠 것이 많았다. 갑상에서 남은 것은 다음 끼니에 을상으로, 을상에서 남은 것은 다음 끼니에 병상으로 가는 일도 흔했다.

갑상에 자리한 나는 으레 생선의 가운데 토막 중에서 등 부분의 살코기만 먹었다. 할아버지가 가시 없는 부분을 뚝 떼어 내 밥에 올려놓으시곤 했고, 그러다 보니 나는 당당히 그 부분만 먹을 권리가 있는 것이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멀컹멀컹하고 재미없는 배 부분을 드시거나 뼈를 씹어 자시었다. 좋은 부분을 놓아두고 왜 하필 그런 것을 자시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진짜는 그것이 맛있는 부분이라고 대답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뒤 40여 년이 지난 얼마 전 우리 아이들과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3대가 한 상에서 식사할 때였는데 무심코 내 젓가락은 조기조림의 복부(배때기)를 헤집고 있었다. 큰놈은 습관대로 등허리 부분의 살코기를 헤집어다 먹었다. 아버지는 큰놈이 헤집고 난 곁부분의 살코기를 뭉텅 떼어다가 둘째아이의 밥 위에 올려놓으시는 것이었다.



40여 년 전의 갑상의 형식의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른 것은, 아버지는 지금도 당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복부와 뼈를 자시려 드는 것뿐이었다. 50을 바라보는 이 아들이 아직도 살코기밖에 못 먹는 줄 아시는지, 아니면 가시를 삼킬까 걱정이 되셔선지, 그것도 아니라면 복부와 뼈야말로 생선의 가장 맛있는 부분이어서 그러시는지. 이 아들을 제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어느덧 생선의 살코기는 먹지 못하는 부분으로 인식하게 되어 버렸는데도 말이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언제나 복부와 뼈만 먹고,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이들 엄마는 항상 머리 부분(대가리)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생선의 내장 근처와 뼈가 정말로 맛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얼마 있다가 손주를 보면 생선의 살코기를 덜렁 떼어다가 그놈의 밥 위에 올려놓게 될 것이며, 그 놈의 아비인 우리 아이들은 배때기와 가시의 맛을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쇠고기를 구워도 빨간 살은 제 아이들이 먹고, 저희들은 기름기가 섞인 조각을 먹을 줄 알 것이며, 갈비는 제 아이들이 대충대충 뜯다 버린 뼈를 갉아 먹으며 이게 정말로 맛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생선은 배때기, 뼈, 대가리, 고기는 기름기가 섞인 조각과 뼈와 밀착된 힘줄이 맛있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의 체험으로 알게 되면서 사람은 어른이 되어 간다. 세상은 아무래도 이러한 어른들이 다스려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는 물론이고 잘못된 아이들을 잡아가는 사람들, 재판하는 사람들의 자격 시험으로 생선과 고기를 아이들과 함께 먹어보게 하는 과목을 과하면 어떨까. 오늘도 집의 아이들과 자반을 먹으며 부질없는 생각에 잠긴다.



아름다운 소리들

- 손광성(수필가ㆍ동양화가, 1935∼)

소리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소리는 제철이 아니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또 어떤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어야 하고 다른 소리는 멀리서 들어야 한다. 어떤 베일 같은 것을 사이에 두고 간접적으로 들어야 좋은 소리도 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난 친구와도 같이 그립고 아쉬운 그런 소리도 있다. 폭죽과 폭포와 천둥 소리는 여름에 들어야 제격이다. 폭염의 기승을 꺾을 수 있는 소리란 그리 많지 않다. 지축을 흔드는 이 태고의 음향과 '확'하고 끼얹는 화약 냄새만이 무기력해진 우리들의 심신에 자극을 더한다. 뻐꾸기며 꾀꼬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폭염 아래서는 새들도 침묵한다. 매미만이 질세라 태양의 횡포와 맞서는데,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힘찬 기세에 폭염도 잠시 저만치 비껴 선다.



낮에는 마루에 누워 잠을 청해본다. 야윈 잠결. 문득 지나가는 한 줄기 소나기. 파초 잎에 듣는 빗소리가 상쾌하다. 밤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물가를 거닌다. 달이 비친 수면은 고요한데 이따금 물고기가 수면 위로 솟았다 떨어지면서 내는 투명한 소리. 그 투명한 음향이 밤의 정적을 지나 우리의 가슴에 가벼운 파문을 던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절실한 것을. 흔들리는 아지랑이 속으로 아득히 비상하던 종달새의 가슴 떨리는 소리는 언제나 꿈, 사랑, 희망과 같은 어휘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상아빛 건반 위로 달려가는 피아노 소리는 오월의 사과꽃 향기 속으로 번지고,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는 나른한 졸음에 금속성의 상쾌함을 더한다. 이런 소리들은 초여름의 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들을 때 더 아름답다.



대체로 청각은 시각보다 감성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호소하는 힘이 크다. 나는 특히 사람의 소리를 좋아한다. 파바로티의 패기에 찬 목소리를 좋아하고, 휘트니 휴스턴의 소나기 같은 목소리도 좋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와 케니 지의 소프라노 색소폰 소리를 좋아한다. 애수 어린 그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내 나이를 잊고, 내 차가 낡았다는 사실을 잊고, 젊은이처럼 빗속을 질주할 때가 있다.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는 멀리서 들어야 한다. 대금 소리와 거문고 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림자가 비친 창호지 저쪽에서 들려오거나 아니면 저만치 떨어진 정자에서 달빛을 타고 들려올 때가 제격이다. 적당한 거리는 베일과 같은 신비스러운 효과를 낸다. 그런 간접성, 그것이 아니면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국악인지도 모른다.



새 소리를 들을 때도 그렇다. 온전히 깨어 있을 때보다 반쯤 수면 상태에서 들을 때가 행복하다. 풀잎에는 아직 이슬이 맺혀 있고, 아침 햇살은 막 퍼지려고 하는데,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그 청아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난밤의 악몽에 시달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새 소리로 열리는 새 아침은 언제나 새 희망 속에 우리를 눈뜨게 한다. 봄이 꽃과 새들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낙엽과 풀벌레의 계절이다.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잠들 수 없는 긴 밤과 텅 빈 가슴을 마련한다.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 자연은 온통 흰색과 검정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다. 겨울에는 겨울만이 낼 수 있는 다양한 소리가 있다. 싸락눈이 가랑잎에 내리는 간지러운 소리와 첫눈을 밟고 오는 여인의 발걸음 소리. 이런 소리는 언제나 나를 향해 오는 것 같다. 얼음장이 '쩡' 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지축을 흔드는 눈사태의 굉음과 굶주린 짐승들의 울부짖음. 이 모든 소리는 겨울이 아니면 들을 수 없다. 눈이 많이 오는 나의 고향에서는 아름드리 원목을 실은 기차가 가파른 함경선 철로 위를 오르지 못해서 밤새 올라갔다가는 미끄러지고, 다시 올라갔다가는 또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런 날 밤은 언제나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는데, 꿈속에서도 기차는 올라갔다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그러나 아침에 깨어서 나가 보면 기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소리 가운데는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가 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도마소리와 반쯤 졸음 속에서 듣는 속삭임 소리가 그렇다. 병마개를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술병에서 나는 소리처럼 듣기 좋은 소리도 드물다. 그것은 가난한 시인에게도 언제나, '꿈, 꿈, 꿈' 하고 노래한다. 그리고 여인의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조용히 미닫이가 열리는 소리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찾아올 이도 없는 빈 하숙방에서 책을 읽다가 가끔 이런 환청에 놀라 뒤를 돌아다보곤 하던 그런 젊은 날도 있었다. 그리고 한때는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그래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리운 소리들이 있다. 다듬잇소리, 대장간의 해머 소리, 꿈 많던 우리들에게 언제나, '떠나라! 떠나라!' 외쳐대던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 목이 잠긴 그 소리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가.



그리고 울긋불긋한 천막과 원숭이들과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외발자전거를 타던 난쟁이가 있던 곡마단의 나팔 소리. 나의 단발머리 소녀는 아직도 아득이 높은 장대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데 내 머리칼은 벌써 반이나 세었다. 안개 낀 어느 항구의 썰렁한 여관방에서 홀로 듣던 저 우수 어린 무적(霧笛) 소리와 한 떼의 갈까마귀들이 빈 밭에서 날아오를 때 내던 무수한 깃털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하늘 한복판을 유유히 지나가던 기러기의 아득한 울음소리. 이제 이 모든 소리들이 그립다. 돌이킬 수 없는 유년의 강물처럼, 우리 곁을 떠나버린 옛 친구의 다정했던 목소리처럼 그렇게 그리운 것이다.



가난한 날의 행복

- 김소운(수필가ㆍ일본 문학가, 1908∼1981)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이 있다. 여기에 있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들이다.



1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 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 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2

다음은 어느 시인 내외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역시 가난한 부부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세수를 하고 들어와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있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기에 우리도 좀 사왔어요. 맛이나 보셔요." 남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뭔지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아내를 대접하는 뜻에서 그 중 제일 작은 놈을 하나 골라 먹었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드셔요." 아내는 웃으면서 또 이렇게 권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또 한 개를 집었다.

어느새 밖에 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남편은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하고 재촉했다. "지금 잡숫고 있잖아요. 이 고구마가 오늘 우리 아침밥이어요." "뭐요?" 남편은 비로소 집에 쌀이 떨어진 줄을 알고, 무안하고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다. "쌀이 없으면 없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 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유분수지." "저의 작은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아내 앞에, 남편은 묵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서 형언 못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 왔다.



3

다음은 어느 중로의 여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여인이 젊었을 때였다. 남편이 거듭 사업에 실패하자, 이들 내외는 갑자기 가난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에 갖다 넘기면 다소의 이윤이 생겼다. 그런데 한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 날로 돌아오기는 어렵지만, 이틀째에는 틀림없이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다.



"춘천에만 닿으면 만나려니 했어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나 봐요. 정말 막막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여관을 뒤졌지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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