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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푸른역사
1. 시인의 출생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태어난 아기


1917년 여름 내내, 북간도의 비옥하고 너른 땅 도처에서 흰콩 포기들이 검푸르게 우거지며 자랐다. 당시 북간도의 한인들은 너나없이 '백태(白太)' 가꾸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콩이 여물어 거두어지는 대로 '구라파(歐羅巴)'로 실려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사실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극동의 만주 벌판이 유럽의 곡식 창고 역할을 했다"라는 문구에 담겨서 역사책에 남아 있다. 북간도 명동(明東) 학교촌에 있는 큰 기와집 윤하현 장로 댁의 1917년은, 넓은 백태밭에서 자라는 콩 포기들만으로 풍요로웠던 것은 아니다. 외아들인 윤영석(1895~1962)의 아내 김용(1891~1947)이 임신 중이었던 것이다. 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콩 포기들 못지 않게 뱃속의 아기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리하여 그 해 겨울, 12월 30일에 드디어 아기가 태어났다. 윤씨 댁 장손의 출생은 지난 8년간이나 온 집안이 기다려왔던 큰 경사였다. 아기의 아명(兒名)을 '해환(海煥)'이라고 지었다. '해처럼 빛나라'는 기원의 뜻인가. 이 아기가 곧 훗날 '민족시인'의 큰 이름을 얻은 윤동주이다. '구라파 전쟁'은 윤동주가 태어난 다음 해 11월에 가서야 독일의 항복으로 인해 포성이 멎었다. 전쟁이 끝나자 구라파에서는 만주산 곡물의 수입을 끊어버렸다. 주변사정은 여러모로 처절했고 다사다난했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대혁명의 여파는 굉장했다. 또한 같은 해에 고종의 밀사였던 이상설의 죽음이 있었다. 대한 제국이 멸망하기 전인 1906년 용정에 북간도 최초의 신학문 교육기관을 세운 그는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인 이 교육기관을 사재를 털어 경영했다고 한다. 그가 1907년에 고종 황제의 밀조를 받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로 간 후,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던 본국의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17년 3월 2일에 망명지인 시베리아의 니콜리스크에서 4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1917년은 또한 한국문학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해였다. 춘원 이광수가 장편소설『무정(無情)』을 쓴 것이다. 『무정』은 "우리 근대 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기에 기념비적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정황들은 윤동주에게 와서 하나로 종합된 감이 없지 않다. 그는 시기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이 대전쟁의 주역이 된 적국 일본의 감옥에서 옥사한 후 화장되어 그 재의 일부가 현해탄 어느 고요한 바다에 뿌려졌다. 또한 문학사적으로도 그러하다. 한국문학사는 그의 존재와 작품들로 해서 민족사상 최대의 암흑기였던 일제 말기의 그 참혹한 어둠을 밀어내는 거대하고 휘황한 횃불 하나를 소유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문학 역시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기념비로 우뚝 선 것이다.



2. 지사들의 마을 명동



1899년에 세워진 한인 마을


마을이란 본래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명동마을은 인위적으로 한꺼번에 만들어 졌다. 이 점이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의 특징이다. 그것은 만주땅이 지닌 역사적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가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이래, 청나라 조정은 만주가 '청태조의 발상지'라 해서, 만주족 외에 타 민족은 만주에 들어감을 금하는 봉금책(封禁策)을 썼다. 우리나라도 그 정책에 따라야 했다. 그래서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들어가는 것은 '월강죄(越江罪)'라 하여 사형까지 시키는 막중한 범죄로 다스려져 왔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텅 비다시피 하여 비옥해진 이 광활한 땅에 만주족 아닌 민족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청나라 국운의 쇠퇴와 시기를 같이하여 1880년대에는 청조에서 만주 개척민을 위한 이주 정책까지 수립했다. 나아가 우리 이주민이 많아지자 1903년에는 교민들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관리로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란 직함으로 간도에 주재하게 했다. 그러나 북간도는 본래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로서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가혹한 '월강죄'가 위세를 부리던 시절, 사람들은 두만강 속에 있는 사이섬[間島]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배를 내어 몰래 강 건너의 비어 있는 선조들의 땅에 건너가서 농사를 지었다. 좁고 척박한 토지와 상습적인 기근에 시달리다 못해 시작한 도둑 농사였다. 이들에게 있어 '사이섬', 즉 '간도'는 곧 강 건너 대륙에 대한 일종의 암호였다. 처음엔 두만강 위쪽 땅을 그냥 '간도'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라 하면서, 두만강 이북은 '북간도'로 구분해서 불렀다(사람에 따라서는 '북간도'를 한자로 표기할 때 땅을 개간한다는 뜻의 간(墾) 자를 써서 '北墾島'로 쓰기로 했다).

이러한 땅 '북간도'에 명동촌이 섰다. 1899년 2월 18일의 일이다.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 종성 등에 거주하던 학자들 네 가문의 대소가 스물 두 집의 식솔들 도합 141명의 대 이민단이 그 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 그곳은 본래는 청국인 대지주의 땅이었다. 이들은 돈을 낸 비율에 따라 땅을 분배했는데, 이 때 주목할 만한 조치를 했다. 공동의 부담으로 '학전(學田-교육전이라고도 함)'이란 명목의 땅을 따로 내어놓은 다음에 각 집안의 땅을 분배해 가졌다는 것이다. 학전의 용도는 그 땅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 기금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들 학자들은 뚜렷한 동지적인 목적의식을 갖고 이민을 단행한 것이었다. 첫째 목적인 '조선 땅에서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살아 보자'는 물론 성취되었다. 둘째 목적인 '집단적으로 들어가 살아감으로써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자'는 것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 뜻을 지닌 많은 동포들의 힘으로 청국의 국경 안에 존재하는 '조선 땅'을 실제로 만들어 내었다. 그곳의 통치 체제가 청조에서 중화민국으로, 다시 중국으로 바뀌어 온 동안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그 땅을 차지하고 지켜왔다. 그리하여 그 결과가 '연변 조선족 자치주'란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인재를 기르자'는 셋째 목적 역시 그들은 해내었다. '윤동주'란 존재 하나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그 얼마나 큰 공헌을 한 것일까. 명동은 그곳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이 생기면서부터 명동마을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 곳은 한인들이 들어가 살면서 지명들이 모두 바뀌기 시작했는데, 먼저 학교촌, 용암촌, 장재촌, 사동(뱀골), 수남촌, 세호동네, 중영촌 등 작은 마을 단위의 명칭이 생겼다. 뒤에 '명동촌'이라 할 때엔 이런 작은 마을들을 포함한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 되었다.

윤씨 가문은 이민단이 명동에 들어간 바로 다음 해인 1900년에 명동 땅을 사서 이주해 들어왔다. 두만강변인 자동의 많은 가산을 정리하여 이주해 온 윤동주 집안은 명동에서 가장 잘사는 축에 속했다. 윤동주의 개인사를 놓고 볼 때, 이 때의 윤씨 가문의 명동 이주를 하나의 운명적인 전기로 꼽게 된다. 이주해 온지 10년 만에 운영석이 명동 처녀 김용과 결혼하여 윤동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김용은 이민단의 주역 중의 한 분인 김약연 학자의 이복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넉넉하면서도 너그러운 인품으로 시아버지 윤하현 장로와 나란히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윤동주의 명동소학교 시절

1914년에 간민회가 해산된 후 한때 침체되었던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의 기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때로부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920년 10월 대규모의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하여 청산리전투를 거쳐 간도 대학살을 벌이기까지 근 2년간은 가히 북간도 전체가 독립군들의 세상이었다. 이 무렵에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의 활약이 컸다. 그래서 일본군은 1920년 10월 20일에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재로 만들어 버렸다. 청산리전투 개시 하루 전날이다. 일본군이 간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토벌한 것이 명동학교였던 것이다. 당시 '경신대학살'이라 불릴 만큼 처참했던 대토벌을 최초로 당하면서도, 명동마을 사람들이 학살은커녕 구타조차 당하지 않았던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그것은 오로지 명동마을이 큰 규모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갖고 있는 기독교촌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중에 서구 열강과의 사이에 시끄러운 외교문제가 일어날 것을 일본군 나름으로 경계한 것이다. 1920년을 고비로 독립운동가의 양성소이다시피 했던 명동학교의 상대적인 몰락은 일본군의 대토벌 이래 북간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의 기세가 크게 꺾인 것과도 관련이 깊었다. 당시 많은 독립군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노령이나 중국 본토로 망명하여 북간도를 비웠던 것이다. 결국 윤동주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1925년에 명동중학교는 더 이상의 운영이 불가능하여 문을 닫고, 소학교만 명동마을 출신의 학생들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명동과 명동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28년 생애에서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는 것 외에도, 그의 인격 및 시적 감수성의 골격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1932년에 윤동주와 그의 동료들이 용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거기 교과서가 모두 일어로만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어를 모르면 상급학교 진학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교육계 실정이었다. 전에는 체조 시간이면 대한제국 군대 장교 출신 체조 교사 아래서 독립군가를 배우며 목총을 들고 실제 군사훈련과 흡사한 훈련을 받던 상무의 기상이 넘치던 학교가 명동이었다. 그러나 윤동주가 다니던 무렵엔 주위여건과 세월의 변화에 따라 학교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이젠 보다 문학 쪽에 가까워 졌다. 어학만도 조선어, 중국어(1915년에 발표된 중국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정규과목이었다), 일본어 3개 국어를 배워야 했다. 그리고 윤동주네의 학급은 특히 문학소년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것은 윤동주의 1살 아래 외사촌 동생이자 명동소학교 동창생인 김정우 시인의 회상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동주는 벌써 소년소녀들을 위한 월간잡지를 구독했다. 동주의 고종사촌이며 동갑인 송몽규란 친구가 있었다. 두 소년이 서울에서 월간잡지를 구독해 읽는다는 것은, 그 당시 만주 벽촌에서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5학년이 되면서 동주와 몽규의 발기로 우리들도 월간잡지를『새 명동』이란 이름으로 몇 호 발간하였다." 윤동주는 1931년 3월 20일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윤동주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 화룡현 현청 소재지)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했다. 이 학교에서의 추억이 윤동주의 시「별헤는 밤」에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 하나에 붙여준 패(佩), 경(鏡), 옥(玉)이란 중국 소녀들의 이국적인 이름들 속에 녹아 있다.



3. 해란강의 심장 용정龍井



은진중학교 시절


북간도에서의 1930년대. 그 시절은 사상 문제뿐 아니라 경제와 정치적으로도 거친 회오리 속에 휩쓸렸다. 1929년 미국 뉴욕 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북간도에도 곧장 밀려왔다. 1930년 가을 곡식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공산당은 더욱 크게 득세했다. 이어 정치, 군사적인 대격변이 잇달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만주 침략에 나선 일본이 동삼성과 열하 및 내몽고 동부를 판도로 하는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傅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앉힌 것이다. 북간도는 이리하여 '만주국'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한인들로서는 더욱더 힘든 시절이었다. 윤동주는 1932년에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용정이라는 소도시의 미션계 학교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부자들이 공산당의 테러 공포 때문에 도시로 빠져나가던 명동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치안이 유지되고 있는 도회지로 피신했다는 것이 더 사리에 맞는다. 어쨌든 윤동주 가(家)의 용정 이주는 가족 전체로 볼 때 대변혁에 속했다. 우선 가장인 조부 윤하현으로서는 이 이주가 '상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생 농부였고, 그것도 성공한 독농가였던 그가 농토를 떠난 것이다. 그의 아들인 윤영석은 아직 36세의 장년이었다. 그는 새롭게 시작하는 도회지의 삶을 맞아 변신을 시도했다. 인쇄소를 차린 윤영석은, 그러나 천성적으로 사업가는 못 되는 선비형의 사람이었다. 결국 사업에 실패한 그는 평생 '경제'에는 실패만 계속하는 창백한 인텔리의 고달픈 삶을 살았다. 용정 이주로 변화한 것은 이러한 어른들의 생활 모습만이 아니었다. 주거 환경도 크게 변했다.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넉넉하게 살다가, 20평짜리 초가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 소년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자라나는 어린 나무처럼 한껏 뻗어갔다.



1935년에 들어서서 은진중학교 3학년을 수료한 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윤동주는 생전 처음으로 집을 떠나 본국에 들어가서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하는가 하면,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 이런 변화들은 윤동주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 특히 송몽규의 독립운동 투신 경력은, 훗날 윤동주의 체포와 옥사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주목할 것으로서 '송몽규의 <동아일보> 산춘문예 당선' 사실이 있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에 시행된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작품 모집에 응모하여 콩트 부문에 당선했다. 작품명은「술가락」. 아직 미성년자인 그가 일반인들과 겨뤄야 하는 국내 저명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이란 성과를 올린 것이다. 이 일은 윤동주에게 문학적 자극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할 사건이다. 윤동주가 '자기작품'을 소중히 챙기고 그것을 쓴 날짜를 명기해가며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 시기적으로 보아, 바로 이 때 받은 문학적 자극과 곧장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윤동주 연구가들이 소홀히 지나친 사실 중의 하나가, 윤동주가 자기작품에 '지은 날짜'를 명기하며 보관하기 시작한 시점이 지닌 의미이다. 그가 최초로 날짜를 명시해서 보관한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에 쓰여진 것으로, 「삶과 죽음」「초한대」「내일은 없다」 세 작품이다. 전에 썼던 것을 최종적으로 다듬어 완성시킨 것이 그 날짜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윤동주가 '자기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각오를 단단히 하게 되었음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그의 새로운 문학적 출발점이 된 세 편의 시 중에서 특히「초한대」는, 거기 나오는 시구 그대로 '깨끗한 제물(祭物)'이 된 그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하여, 연구가들의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다.



4. 평양에서의 7개월



숭실중학교의 편입시험


당시엔 중학교라 하면 '5년제'가 정규 학제였다. 그래서 그보다 수업연한이 1년 짧은 4년제 중학교를 나오면 고등학교나 전문학교, 또는 대학 예과 등의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 매우 불리했다. 그런데 5년제 중학교들은 4학년 때까지만 편입생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3학년을 수료한 시점에서, 4학년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5년제의 새 중학교로 옮겨갈 수속을 마쳐놓아야 했다. 당시 용정에서는 친일계통의 '광명학원' 중학부가 유일한 5년제 정규중학교였다. 그러나 광명은 친일 학교였기에 민족의식이 있는 집안, 특히 기독교 계열에서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평양의 미션계 숭실중학교(5년제)로 전학시켰다. 1935년 봄, 새 학기가 되자 급우들의 자리가 여기저기 비었다. 윤동주도 물론 숭실중학교로 전학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4학년 가을학기에 전학하기로 어른들을 설득했다. 그런데 막상 전학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생애 최초의 큰 좌절을 겪었다. 그가 숭실의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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