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
전상국 지음 | -
우상의 눈물
전상국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이유대: 주요 사건의 관찰자.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는 담임과 그에게 동조하는 임형우, 그리고 순수한 악마 최기표 사이의 대결을 담담히 그린다.
임형우: 반장. 담임과 함께 최기표를 구원하기 위해 애쓴다. 최기표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하지만 최기표를 우리가 동정해야 할 불쌍한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최기표: 1학년 때 낙제를 한 유급생. 교활하고 지능적인 순수한 악마였지만 담임과 임형우에 의해 효자면서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받자, 수줍은 학생이 되어버리고 만다.
김선생: 담임 선생님. 기표의 린치, 중간고사에서의 부정행위 등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최기표를 불쌍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다.
임시반장이 돼 최기표에게 린치를 당하다
학교 강당 뒤편 으슥한 곳에 끌려가 머리에 털 나고 처음인 그런 무서운 린치를 당했다. 끽소리 한번 못 한 채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다.
나는 새학년을 맞아 2학년 13반이 됐다. 새 학년이 시작된 날, 담임이 된 김선생님은 일 년 동안의 포부를 밝히셨다. 66명이 운명을 함께하는 출항이 시작되었으니,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한 명의 낙오자나 이탈자 없이 항해를 순조롭게 마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의 순탄한 진로를 막는 학생 즉, 항해에 역행하는 학생을 스스로 엄단할 것임을 밝혔다. 아무튼 선생님은 무사안일의 1년을 바랐다.
선생님은 특히 자율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학생들을 제어할 수 있는 고삐를 담임인 자신에게 넘기지 말고, 학생들 스스로 고삐를 쥐라면서 말이다. 그래선지 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겠다는 생각에 우스운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우리가 탄 배의 선장은 누굽니까?”
나는 자율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우리들 머리 위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싶어하는 그의 저의를 찔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반격을 가했다.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의 번호와 이름은?” 그것 때문에 나는 엉겁결에 일주일간 임시반장을 맡았다. 그런데, 그것이 기표의 비위를 거슬렀던 모양이다. 학교 강단 뒷편 으슥한 곳으로 끌려간 나는 최기표를 중심으로 하는 재수파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했지만, 소리를 질렀다고 해도 누구 하나 나와서 나를 구해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날은 토요일 늦은 오후였고 학교 교정에 한 사람도 얼씬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끌려갔던 강당은 본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재수파는 모두 일곱 명으로 매우 민첩하고 분명하게 움직였다. 기표는 웃옷을 벗고 사이다 병을 담벽에 깨 날카로운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뚝을 여러 번 그었다. 기표는 그 팔뚝을 내 눈 앞에 들이대고, 내게 그것을 핥으라고 명령했다. 고개를 뒤채며 피했으나 그들에게 정강이를 채인 후, 나는 결국 그의 팔뚝을 핥았다. 구역질이 났다. 곧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비벼댔다. 그들은 나를 일으켜 세워 내 바지를 벗겼고, 담뱃불로 허벅지를 다섯 군데나 지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메스껍게 놀지 마”라는 기표의 말소리를 들었다. 이 일에 대해 나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 사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반 아이들을 장악하려는 담임
맞아. 신이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악마란 바로 네가 말한 놈처럼 착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악마지,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 속으로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
담임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왔다. 가정방문을 통해 선생님은 여러 가지의 정보를 얻어내기 때문에 가정방문을 당한 뒤에는 독 빠진 뱀처럼 맥을 쓸 수 없게 된다. 담임선생은 내게 계속해서 반장을 맡으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일에 적성이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옆에서 엄마도 거들었다. 사실 중학교 3년 동안 반장을 맡았는데, 그것이 구속이었다. 남을 다스리는 자유보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데서 얻는 마음의 안일이 좋았고, 아이들에게서 고립돼 외로운 처지에 놓이길 원치 않았다.
내 얘기를 들은 담임은 임형우가 반장으로 어떤지 물었다. 나는 임형우가 반장으로서 적임자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형우는 사실 반장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한 아이였다. 무게도 있고 결단력도 있으며, 학교 당국의 지시에는 일단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일하다가도 문제점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공격을 하는 용기도 갖췄기 때문이다.
반장 문제를 일단락 지은 담임은 내게 우리들의 항해에 방해가 될 만한 그런 아이에 대해 귀띔해달라고 했다. 나는 허벅지를 담뱃불로 지진 최기표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자 담임이 최기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엄마는 1학년 때 유급한 애가 아니냐면서 알은 체를 했다.
담임은 보기보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임형우가 반장으로 적임자인 것을 알아챈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최기표가 문제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최기표에 대해 전형적인 범죄형이며, 음침하고 포악할 뿐 아니라, 교활하고 지능적이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흥분하는 담임을 보니 앞으로 한 해 동안 담임과 최기표의 대결이 흥미로울 것 같았다.
담임은 다른 집으로 가정방문을 가는 도중 내게 우리 반을 위해 협조해 주었으면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고자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반 전체를 위한 나의 조언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치욕이었다. 1학년 때, 나는 담임이 원하는 반에 관한 정보들을 낱낱이 담임에게 알렸다. 물론 그때는 ‘우리’를 위해 내 힘이 쓰여지고 있다는 데 기쁨을 느끼면서 고자질을 했다. 그러나 그 일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이용했던 담임이 새로운 담임에게 나를 인수인계했던 것이다.
담임과 기표의 최초의 대결
담임과 최기표 사이의 최초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춘계 교내 체육대회를 앞두고 우리는 쳬육복 외에 매스게임을 위한 옷을 한 벌씩 더 마련해야 했다. 불만도 있었지만 우리 반은 재수파 둘을 빼고 모두 옷을 마련했다. 그러자 담임은 두 사람 때문에 결속을 깰 수는 없다면서, 두 사람 분의 옷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기표와 다른 재수파 아이는 주머니에게 칼을 꺼내 그 옷을 조각조각 찢어 쓰레기통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우리 반 총무 정수와 그 뒤의 아이에게 옷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반 66명은 매스게임용 체육복을 전부 사 입을 수 있었다. 기표는 구제불능이며, 철저하게 악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중학교 때부터 기표를 알고 지내 온 아이들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아이들마저도 기표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핏보면 기표에 대한 공포감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다들 기표에게 무자비한 린치를 당해도 그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뭔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힘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 말한 것처럼, 기표는 신이 거북하게 생각하는 ‘순수한 악마의 화신’임에 분명하다. 순수한 악마란 신을 돋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신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며, 절대로 추방되지 않는 존재라고 형은 말했었다.
재수파에게 린치를 당한 반장 임형우
5월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오후 반장인 임형우가 드디어 재수파한테 당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포악한 기표도 반장인 임형우에게만은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형우는 모든 아이들에게 인심을 살 줄 알았고, 천성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외모로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형우는 기표에게도 아우가 형을 대하듯 스스럼없이 대했으며, 그렇다고 특혜를 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기표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기표에 대한 공포심도 없었다. 그런 형우가 기표에게 린치를 당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5월 중간고사에서 시작됐다.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날, 형우는 반에서 성적이 좋은 몇몇 아이들을 모아놓고, 기표를 포함한 재수파의 시험을 도와주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간고사를 잘못 보면 그들이 또 낙제할 수도 있으니, 조금씩 도와주자는 것이었다. 형우는 모든 뒷일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말하는 형우에게서 나는 교활한 웃음을 보았다. 나는 형우에게 그들을 도와주는 행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물었다.
그러나 형우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돕는 일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우리는 형우의 지시에 따라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무슨 과목을 누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준다는 등 그들이 또다시 유급하지 않을 정도의 점수를 올려주기 위해 우리들은 빈틈없는 준비를 하고 시험날을 기다렸다.
중간고사 첫날, 첫 시간에 기표와 대각으로 앉게 된 정수는 기표가 답안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둘째 시간에는 문제 번호와 답을 쓴 커닝페이퍼를 몇 사람 손을 거쳐 기표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기표는 벌떡 일어나 감독선생 앞으로 걸어가서 쪽지를 내밀었다. “어떤 새끼가 이걸 나한테 전해 왔습니다.”
감독선생이 쪽지를 누가 보냈는지 묻자, 반장인 임형우가 자신이 보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딴 자리에서 총무를 보는 아이도 일어났다. 함께 모의를 했던 또 다른 아이도 일어났다. 사방에서 우르르 아이들이 일어났다. 그러자 감독선생은 이삼십 명의 아이들을 자리에 앉도록 지시하고, 그 일을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일은 매듭지어졌다. 끝 시간까지 별일 없이 끝났고, 청소시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청소가 다 끝난 뒤 담임은 나와 정수와 반장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러나 반장도 정수도 찾을 수 없어서, 먼저 교무실에 갔다. 담임은 화학시험지 채점을 위해 우리를 불렀다. 곧 정수가 와 반장이 기표 패거리에게 붙들려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답안지 채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담임은 오늘따라 채점 속도가 너무 느리다면서 재촉을 했다. 그러면서 담임은 반장이 잘하고, 기표도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실소하며 정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담임이 지금 형우가 처해있는 상황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수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이마에 번지르르 땀이 배어나고 있었으며, 눈알도 불안하게 움직였다. 나에게 반장의 소식을 전할 때, 정수는 내가 담임에게 형우의 사정을 곧바로 알릴 것이라고 생각헸겠지만, 나는 담임의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정수의 눈을 바라보며 눈싸움을 벌였다. 정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형우의 입원과 담임의 술책
형우는 우리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이 돼버렸다. 예상 안 한 건 아니지만 그 여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3학년에서도, 1학년 하급생들도 2학년 13반 임형우가 입에 올랐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고도 끝내 그 상대를 입에 올리지 않음으로 해서 형우의 존재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담임은 넙쩍이라고 불리는 교무실 사환에게 자신에게 연락이 오면 화학실로 전해달라고 지시했다. 밖에서 전화 올 게 있다는 것이었다. 담임은 우리의 채점 속도가 너무 늦다고 계속 재촉했다. 그때 화학실 문이 열리면서 넙쩍이 아가씨가 헐떡이며 말했다. 전화가 온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내려가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담임은 허둥지둥 달려나갔고, 정수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리들이 답안지를 정리해 들고 교무실로 내려오자, 넙쩍이 아가씨는 담임이 한강병원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사환 아가씨에게 들어보니 어떤 아줌마가 달려와서 학생들이 뒷산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달려가보니, 2학년 13반 반장이 혼자 뒹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강병원으로 달려갔다. 외관상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형우의 열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넓적다리에 매놓은 붕대에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우리를 발견한 형우는 재빠른 동작으로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댔다가 뗐다. 나는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학생주임은 형우가 누구에게 맞았는지 집요하게 물었지만, 형우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벌을 받으면 받았지, 그 아이들이 누군지 말할 수 없다고 버텼다. 물론 담임도 형우를 때린 아이들이 기표네 패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담임은 내가 기표네 패거리에게 린치를 당한 일과 형우와 몇몇 아이들이 기표네 패거리를 위해 중간고사 때 부정행위를 하려 했던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른들의 음흉스러운 저의가 무엇일까 무서움을 느꼈다.
영웅이 된 형우
그 일이 있은 후 형우는 우리들 사이에서 영웅이 됐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도 끝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상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표는 그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부터 내리 사흘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학생부에 불려가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담임은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기표를 찾기 위해 뚝방 동네를 연 이틀이나 헤매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리고 기표가 학교에 나온 날 담임은 조회시간에 간단한 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최기표군은 그 동안 피치 못할 가정 사정으로 결석했다. 앞으로 다시는 결석이 없을 것으로 안다.”병원에 있을 때 나는 남들 앞에서 물어볼 수 없었던 것을 형우에게 물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담임이 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우는 내 질문에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 담임과 자신은 기표를 구원해주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형우는 사실 우리가 무서워했던 것은 기표가 아니라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재수파들이었는데, 그 조직은 사라졌다고 했다. 자신이 병원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은 서로가 모르게 사과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기표가 악마이며, 자기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형우 말에 의하면, 기표는 가난한 집 아이고, 부모가 병들어 누워 있으며, 시집간 누나가 대주는 돈으로 겨우겨우 먹고살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버스안내원을 하는 기표의 바로 밑 동생이 생활비를 보탰는데, 그것도 그만두게 되어 생활이 더 어렵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수파들이 매달 얼마씩 돈을 모아 생활비를 보태줬는데, 돈이 없는 아이들은 혈액은행에 피를 팔아 돈을 내놓기도 했다는 것이다. 형우는 이제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형우와 헤어져야 하는 길목에서 그가 자기 집 골목 쪽으로 사라져 버리자, 나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동정받아 마땅한 한 마리 벌레
형우는 기표네 가정사정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기표의 허상을 빈곤이라는 그 역겨운 것의 한 자락에 붙들어맨 다음 벌거벗기려 하는 것 같았다. 기표는 판잣집 그 냄새나는 어둑한 방에서 라면 가락을 허겁지겁 건져 먹는 한 마리 동정받아 마땅한 벌레로 변신되어 나타났다.
담임의 예언대로 기표는 결석하지 않았으며, 형우와 기표 사이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여름방학이 지나갔다. 재수파들이 기표를 찾아 교실을 드나들었지만 아이들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기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담임은 가끔 기표에게 학급 사무를 맡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