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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화

김동리 지음 | -
을화

김동리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을화:굿 잘하기로 소문난 무당. 처녀 때 낳은 아들 영술과 무당 시절 박수와 낳은 딸 월희가 있 다. 절에 맡겼던 아들이 십 년 만에 예수교도가 되어 나타나자 충격을 받는다.

영술:을화의 아들. 예수교도가 되어 어머니와 월희를 전도시키기 위해 나타난다.



월희:영술의 씨 다른 동생. 어릴 때 원인 모르게 말을 잘 못하게 되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 태를 지니고 있다.

박장로:을화가 사는 곳 읍내 교회의 설립자로 영술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성방돌:월희의 생부. 을화가 빡지 무당 밑에 있을 때 빡지를 도와주던 박수. 을화와 월희를 낳고 영술과 행복하게 지냈으나, 영술이 절에 가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한 이후 사이가 벌어져 을화와 헤어져 혼자 산다.



무녀의 집

을화가 당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왔을 때에도, 월희는 그냥 곤히 잠든 채였다.



을화는 매일 아침 남보다 먼저 그녀의 집에서 한 마장이나 되는 당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다. 지금 을화가 살고 있는 집은 오랜 옛날 무슨 신당(神堂)으로 세워졌던 뱃집이다. 을화는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맨 동쪽의 넓은 마루방에다 신단을 꾸몄다. 그러나 매일 아침 드리는 제의나 수시로 올리는 축수를 매번 신단방까지 가서 할 수가 없어 그들 모녀가 거처하는 온돌방 안 구석에다 작은 신단을 따로 마련해두었다.

을화가 정화수를 들고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월희는 잠들어 있었다. 을화는 월희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딸을 깨우는 법이 없었다. 부엌으로 나온 을화는 아침상을 차린다. 을화가 그나마 끼니를 돌보는 것은 하루에 아침 한 차례뿐이다. 밥 한 그릇을 신단 위에 올려놓지만 그것이 월희의 점심, 저녁이라 을화는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 신단 위의 밥은 그대로 남았다.

그 동안 월희도 일어났다. 월희가 방에서 나와 뜰까지 내려오는 것은 아침에 세수할 때뿐이다. 월희는 을화가 준비해준 옹배기의 물로 세수를 하곤 곧 들어가버린다. 둘 다 아침 인사를 하는 법은 없다. 을화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을 때 월희는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월희가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리고 손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밥상을 든 을화에게 월희는 아름답고 소중할 뿐 아니라 신비스럽고 거룩하게까지 보인다.

반찬이 간장, 김치뿐인 밥을 먹고 을화는 지난 꿈에 몽달귀를 봤다면서 월희에게 몽달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를 준다. 을화는 아침상을 치우고는 곧 나가버렸다. 을화는 근동에 무당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어 큰굿(오구)은 열흘이나 보름 전에 이미 청탁이 들어왔다. 어떤 때는 사오십 리 밖에서 청이 들어올 때도 있었다. 을화는 동네 푸닥거리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보수도 그냥 주는 대로 잡곡이라도 두말없이 받았다. 누가 신발값도 안 되겠다고 할라치면 내 다리 아프다고 남의 목숨 안 살릴까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으레 그런 을화를 고맙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당연한 듯 알았다. 굿이 없는 날은 단골 술집에서 남자들과 어울렸다. 을화는 그날도 월희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들고 돌아왔다. 월희의 얼굴을 황홀한 듯 바라보던 을화는 몽달귀가 안 들어왔냐고 묻고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말에 안심했다.

한 청년이 마차에서 내렸을 때 길 위에는 안개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청년은 다 낡은 검정 가죽가방을 끼고 머리에는 회색 캡을 썼다. 그가 살던 백곡 동네는 읍내에서 북으로 이십 리 거리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았으나 어차피 오늘 밤 안으로는 닿기 힘들다고 생각해 급하지는 않다. 달은 이미 진 뒤고, 별 무더기를 보며 쉬엄쉬엄 걷는 길이다. 그러나 옛집을 찾았을 때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오마니”라고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재차 부르자 남자 목소리가 들리면서, 무당네는 이미 성 밖 근방으로 가고 없음을 알려준다. 청년, 곧 영술이는 무당 아들이란 말이 듣기가 싫다. 그는 동사(동네 집회소)를 찾는다. 가는 길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그 풍경을 보니 안심도 되지만 뭔지 쓸쓸하다. 그는 동네 공용 집회소로 쓰이는 동청(동사 대청)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이튿날 저녁 햇살이 설핏할 무렵, 이사 간 어머니의 집을 찾았다. 을화라는 이름을 대면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는 가능하면 을화니 무당이니 라는 말을 피하고 싶었고, 또한 동네 이름이 여러 가지인 탓도 있었다. 성외리는 남문거리 쪽으로 돌아와 앞에서 보면 부자동네 같다. 그러나 동네 앞 당나무 밑을 돌아 골목에 들어서면 전부 초가집이다. 온 동네에 지리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어머니 을화의 집은 골목 서쪽에 있는 유일한 기와집이자 뱃집이었다. 지금은 무당집으로 불리는데, 낡고 퇴폐스럽기가 도깨비굴 같은 곳이었다.

청년은 그 집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혀 사람이 사는 집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무더기로 에워진 담장에는 삽짝이나 대문의 흔적도 없었다. 돌담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처마 앞으로 다가서니 방문 앞 벽에는 그림이 붙어 있었다. 천왕신주 태주와 선왕신모 명두라 적힌 남자의 상과 여자의 상이 각각 그려져 있었다.

청년은 툇마루 앞에 다가가 사람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다시 부르며 방문을 두드리자 새하얀, 조그만 얼굴이 나타났다. 청년은 직감적으로 월희라고 생각했다. 금세 방문은 다시 닫히고 다시는 응답이 없었다. 청년은 자기가 영술임을 밝히려다가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 동안 집을 한바퀴 돌아다보는데, 그때, 잡풀 속에서 호통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청년은 자기가 십 년 전에 기림사에 맡겨진 영술임을 밝힌다. 그러자 여인의 머리 속에는 십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여인은 아들을 안은 채 눈물을 흘린다. 신이 내리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녀가 사람을 안고 눈물을 흘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월희는 두 사람을 보자 겁에 질려 떨었다. 월희가 을화에게 청년이 몽달귀가 아니냐고 불명확한 발음으로 묻자 을화는 오라버니라고 알려준다.

들어가자는 을화의 말에 영술은 조그만 검정 가죽가방을 든다. 영술의 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을화와 월희는 그 가방에 눈길을 주었다. 월희는 맨발로 아무 거리낌없이 먼저 방에 들어간다. 영술이 방문을 열었을 때 월희는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그는 얼른 방문을 닫고 나왔으나 얼핏 본 월희의 희고 어여쁜 몸이 얼른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옷을 갈아입은 월희가 방문을 열며 오라버이라고 부르자 그는 방으로 들어왔다. 북쪽 벽을 제외한 삼면 벽에는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얼굴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영술은 속으로 중도에서 물러서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저녁상을 받고 식사를 하려는데 영술이 머뭇거리자 을화는 반찬이 없어서 그러냐고 물었다. 영술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얼른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을화가 보니 아들은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을화는 아들이 마음속으로 무슨 주문을 외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두 눈에 노기를 담은 채 불도에서도 밥 먹기 전에 주문을 외우느냐고 따졌다. 영술은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은 불도가 아니고 예수교라는 것을 밝힌다. 절에서 불도를 배울 때 스님들의 모습에 실망하여 불도가 싫어졌음을 알리는데, 그 얼굴에는 어머니에 맞서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양해를 구하기 위해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영술은 열여섯까지 불도를 배웠으나 실망했고, 예수교는 빛과 생명을 주는 세계적인 종교라고 어머니를 설득하지만 을화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하나님이란 말을 듣자 화를 내고 만다. 을화가 하나님이란 지석님(제석을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을 이르는 것이라고 하자 영술은 우상이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을화는 화를 내며 몽달귀가 영술에게 옮은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숟가락을 물그릇에 걸쳐놓았다. 그것은 몽달귀가 붙은 아들과는 같이 밥을 먹을 수 없다는 행동이었다. 그러자 월희도 어머니와 같이 행동한다.

영술이 자기는 진정으로 오마니가 그리워서, 오마니의 힘이 되고 싶어서 왔으며 그동안 선교사의 도움으로 잘 지냈다고 이야기하자 일단 을화의 화는 풀린다. 그러나 을화는 자기 아들이 예수교가 되었다는 사실이 해괴하고 망측할 뿐이다. 을화는 영술이 오마니라고 부르는 것도 마땅치 않다.

그 다음 날 을화가 영술에게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고 당부하고 나간 뒤 영술은 월희에게 월희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월희는 당황해하며 감포로 갔다고 말한다. 저녁에 을화가 돌아와보니 오전 중에 나간 영술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을화는 속으로 영술에게 씌인 야수 귀신을 쫓아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신의 내력

을화는 그때 아직 열여섯 살밖에 나지 않은 어린 처녀의 몸으로 영술을 낳았다.



영술을 낳을 때 을화는 열여섯 살 난 처녀였다. 상대방은 이웃집 더벅머리 총각이었다. 그 당시 을화의 이름은 옥화였다. 더벅머리 총각은 이름이 성출이로, 어느 날 나물을 뜯으러 산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있는 출(성출)을 만났다. 을화는 같이 먹자는 성출의 말에 몇 번 거절하다가 같이 맛있게 먹었다. 그때 둘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둘은 보리밭 고랑으로 함께 구르기 시작했다.

옥선의 배가 불러오자 모녀는 성출네가 마련해준, 옥선이가 태어났던 역촌 동네 삼거리 집으로 옮겨갔다. 옥선의 아버지는 역졸 집 아들로 노름을 좋아하는 놈팡이였는데, 결국 옥선이 세 살 때 노름판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그 이후 옥선이 엄마는 옥선이를 데리고 이 동네로 와 그럭저럭 인정을 받고 살아왔는데, 옥선의 임신 사건으로 외면을 당하자 성출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옮겨간 이후 옥선 엄마는 술청을 차렸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옥선이는 잘생긴 아들을 낳았다. 처음에는 슬픔이요, 낙담이던 것이 어느새 기쁨이요 행복이 되어주었다. 영술이란 이름은 옥선이 지은 것으로, 그 어머니는 그 때문에 옥선이 아직 성출이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비록 술청을 하지만 어머니는 옥선을 허드렛일은 시킬 망정 술청에는 절대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소문이 좋게 나 혼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이 쉰두 살의, 장성한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는 유족한 중늙은이였다. 그녀는 열아홉 때 시집가서 그런 대로 잘 살았다. 그러나 시집간 이듬해부터 남편이 기침을 하기 시작해서 아프더니 결국 쉰다섯 때 죽고 말았다.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건만 상황이 그렇게 되자, 원망은 온통 옥선에게 쏠렸다. 영감의 큰아들만이 옥선을 편들어주었다.

그 뒤 줄곧 방에만 들어박혀 지냈는데, 석 달이 지난 그해 겨울 친정어미가 복국을 먹고 갑자기 죽었다. 옥선은 주막집 방에만 박혀 지내다가 이듬해 봄 거기서 십 리나 더 들어가는 잣실(백곡)로 이사를 갔다. 큰아들은 옥선이 헐값에 주막집을 팔았다는 것을 알고 따져 밭을 받아내주었다. 옥선이 고마워하며 영술과 사는데, 영술이 마마에 걸리고 만다. 사흘 동안 영술의 곁에 있던 옥선은 거기서 한 오 리나 되는 을홧골 서낭당을 찾아갔다. 거기서 절을 열세 번인가 했을 때 ‘빡지한테 가거라’하는 소리를 듣는다. 빡지는 그 동네에 사는 유명한 무당의 이름이었다. 얼굴이 얽어서 빡지라고 불렸다. 그 길로 옥선은 빡지 무당을 찾아가 거기에 영술의 목숨을 맡기리라 생각한다. 옥선은 앞동네 건물전을 한다는 오생원을 찾아가 명태, 건문어, 밤, 대추 등을 얻어왔다. 그리고 대강 빻은 쌀가루로 흰떡을 쪄내고 메를 지었다. 저녁 때 빡지 무당이 찾아와 굿을 하기 시작했다. 굿을 끝낸 뒤 무당은 내일이면 나을 것이란 얘기를 하고 급한 일 있으면 자기를 찾아오라는 친절한 말까지 덧붙인 뒤 떠났다.

그런데 영술이 회복되기 시작했을 무렵 이번에는 옥선이가 앓아누웠다. 죽은 영감의 큰아들이 쌀과 돈을 들고 위문을 하고 갔다. 그 돈으로 약을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눈을 붙이면 죽은 어미가 나타나더니 그 다음에는 노파가 나타나 밤새 끌고 다녔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난 다음 옥선은 서낭당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사흘이 지난 밤 다시 노파가 나타나 그녀를 끌고 어디엔가 가더니 장승배기라고 하며 손을 들어 가리키더니 사라졌다. 그 다음날도 나타나 “저기가 장승배기다. 장승밑이다”라고 하고는 사라지더니 그 다음날 또 나타나 화가 난 얼굴을 하였다. 옥선은 결국 이웃사람에게 물어 장승배기가 경주 읍내 근처 작은 동네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찾아갔다.

길을 나서니 아픈 것 또한 훨씬 덜한 것 같았다. 옥선은 장승이 서 있는 곳에 가 덮어놓고 서쪽에 선, 반 동강짜리 장승 밑을 팠다. 그러자 까만 보자기로 싼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네모난, 푸른 돌 함이 나왔다. 다시 그 안에는 흰 종이로 싼 것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동그란 청동 거울 하나와 옥가락지 한 쌍, 방울 하나가 있었다. 거울 뒷면에는 선도산 그림과 해, 달이 그려져 있고 일월대명두, 선도성모, 대왕마님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옥선은 그날밤 잠을 자다가 헛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했는데,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새벽에 다시 서낭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데, 또 ‘빡지한테 가거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옥선을 이야기를 들은 빡지는 옥선이 자기와 인연이 있다는 말을 하고 옥선의 등에 손을 얹으며 신딸을 얻었다 하였다. 그러자 옥선은 이제 와서 무당의 딸이 되는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드는 한편, 앞으로는 빡지를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흘렀다.

옥선의 집에 같이 가서 갖고온 석함을 열어 신물을 꺼냈다. 사흘 뒤 보름날에 내림굿을 하기로 했다. 장소는 옥선이 집, 굿상은 노구미로 차렸지만 몽두리(무당옷) 한 벌은 빡지가 댔다. 굿을 하는데 남새밭으로 쫓아냈던 영술이 다시 들어와 에미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주당 살가림이 끝나자 동네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빡지는 선왕마님과 대화를 하면서 몽두리를 옥선에게 던지며 입으라는 시늉을 했다. 무당옷을 입은 옥선은 아름다웠다. 옥선이 굿상을 향해 두 번 절을 한 뒤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날밤 빡지는 옥선의 집에서 함께 잤다.

옥선은 작은 방을 치우고 신당을 차렸다. 그 뒤 얼마 동안은 빡지의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빡지도 옥선에게 감추지도 아끼지도 않았다. 그녀는 옥선을 꼭 을화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선도산 할머니가 옥선을 처음 만난 곳이 을홧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빡지가 을화를 데리고 다니는 동안 빡지의 굿은 영험을 내고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을화는 옥선 때부터 먹고 사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빡지가 주는 대로 그냥 만족했다. 그래서 자기 혼자 작은 굿이나 푸닥거리를 해서 돈이나 곡식을 받으면 고스란히 빡지에게 갖다주었다. 빡지도 원래 돈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을화가 주는 것은 다 받아넣기만 했다.

한쪽 다리를 못쓰는 아홉 살 난 독자와 이름 모를 병에 시달리는 늙은이를 굿을 통해 낫게 하면서는 을화의 굿이 유명해졌고, 빡지보다 을화의 굿을 원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러나 을화는 빡지의 허락을 먼저 받았다.

한번은 안강에 큰 굿을 하러 빡지네 식구들과 같이 갔는데, 하는 도중에 빡지 몸에 쥐가 났다. 빡지는 이것이 선왕마님이 을화를 찾는 증거라 하면서 을화가 굿을 하게 하였다. 굿이 끝나자 구경꾼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굿을 마치고 을화는 열술이 때문에 새벽에 성도령(작은 박수-박수는 굿에 필요한 장비들을 챙겨주는 사람)과 길을 떠났다. 도중에 쉬게 되었는데, 거기서 둘은 서로를 원하게 되어 같이 밤을 보냈다.

을화의 굿 소문은 경주 읍내 서문 밖의 정부자네 집에도 들어갔다. 정부자의 어머니가 굿을 좋아하는 데다가 큰 손주가 병이 나서 이 참에 을화를 부르고자 하였다. 을화가 빡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선뜻 나서지 않자, 며느리가 친정 어미와 함께 빡지를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 빡지는 자기를 먼저 통하지 않은 것에 섭섭했지만 성도령에게 징, 장고 등 금구를 지워보냈다. 그제서야 을화는 굿을 하러 갔다. 굿이 끝나자마자 손주는 벌써 일어나 앉을 정도로 나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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