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말뚝
박완서 지음 | -
엄마의 말뚝
박완서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 여덟 살에 엄마를 따라 상경하여 서울 문밖 현저동 꼭대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쉰 살이 다 된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을 회상하며 엄마와 오빠의 일을 서술한다.
엄마: 남편을 잃고, 자식만은 서울서 공부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삯바느질을 하며 자식들을 공부시 키는 억척 여성. 서울에서도 낙후된 곳에 살면서도 시골서 살던 때와 같은 자존심과 귀골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오빠: 화자보다 여덟 살 많은 의젓하고 효성심 많은 아들. 가장을 잃은 집안에서 자라 일찍부터 책임감에 눈떠 나이보다 성숙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시대가 바뀌는 6.25 전후의 혼란 속에서 정신이 망가진 채 죽어간다.
대처로 향하는 시골뜨기 소녀
내가 최초로 만난 대처는 크다기보다는 눈부셨다. 빛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토담과 초가지붕에 흡수되어 부드럽고 따스함으로 변하는 빛만 보던 눈에 기와지붕과 네모난 2층집 유리창에서 박살나는 한낮의 햇빛은 무수한 화살처럼 적의(敵意)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박적골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덟 살 먹은 계집애다. 아버지는 어려서 돌아가시고 엄마는 오빠와 함께 서울에 있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숙부, 숙모와 함께 살았다. 박적골집은 나의 낙원이었다. 뒤란은 작은 동산같이 생겼고 딸기줄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밖에도 앵두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가 때맞춰 꽃피고 열매를 맺었고 뒷동산엔 조상의 산소와 물 맑은 골짜기와 밤나무, 도토리나무가 무성했고, 마당에는 토종국화나무가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심한 복통으로 괴로워했다. 곧 한의사를 부르고 탕제들을 달여 먹였지만 아무 차도가 없자, 엄마와 할머니가 무당집에 달려가서 무꾸리를 했다. 무당은 집터에 동티가 나도 단단히 났으니 큰굿을 해야겠다고 했다. 하지만 굿날을 먼저 받아 놓고 집에 오니 아버지는 막 숨을 거둔 뒤였다. 사람들은 집터 동티가 과연 무섭긴 무서운 거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미 처녀 적에 문명의 소문을 접할 기회가 좀 있었던 엄마는 생각이 달랐다. 엄마는 아버지를 죽게 한 병은 대처의 양의사에게만 보일 수 있었으면 생손앓이처럼 쉽게 째고 도려내고 꿰맬 수 있는 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는 이때부터 대처(도시)로의 출분을 꿈꿨다. 마침 오빠의 소학교 졸업을 기화로 그 꿈은 구체화됐다. 엄마는 아버지의 3년상도 받들기 전에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맏며느리로서 시부모 공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신성한 의무를 포기하는 대신 엄마는 아무런 재산상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했다. 숟가락 하나도 집안 것은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당신의 단 하나의 재간인 바느질솜씨만 믿고 어린 아들의 손목을 부여잡고 표표히 박적골을 떠났다.
그러나 어느날, 엄마는 나까지 대처로 데려가기 위해 나타났다. 집안은 시끄러워졌다.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엄마의 말에 시골 어른들은 불같이 반대했다. 그럴 때 나는 어떡하든 할머니 역성을 들면서 막무가내로 안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한 사건으로 내가 엄마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댕기를 들여 한 가닥으로 의젓하게 땋아내린 머리를, 엄마가 빗기다가 나 몰래 싹둑 잘라버린 것이었다. 뒷머리가 아궁이 모양으로 패이고 뒤통수의 맨살이 허옇게 드러난 머리 모양이 나는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엄마는 서울 아이들은 다 이렇게 단발머리하고 가방 메고 학교 다닌다고 내 귓전에 연방 속삭였다. 나도 서울 가서 학교 나오고,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신여성이 뭔지 내가 알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오빠가 성공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엄마가 대처와 공모해서 나에게 씌운 올가미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발버둥치며 마다하지 못했다. 보기 흉한 단발머리가 내 기를 꺾어 놓은 것이었다.
박적골에서 송도까지 사이에 있는 네 개의 고개 중 마지막 고개인 농바위 고개의 정상에서 처음으로 대처를 마주했다. 처음 보는 송도는 아름다웠고, 아마 서울은 더 아름다울 것이지만, 대처는 올가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를 무엇인가로 만들려는 올가미가 싫었고, 신여성 같은 건 되기 싫었다. 나는 할머니 치마폭에 감겨들어 치마꼬리를 안 놓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농바위 고개의 내리막길 중간쯤에서 별안간 나를 당신의 치마폭에서 떼어내고는, 반짝 들어올려 바위 위에 엎어놓고 치마를 치켜올리고 엉덩이를 까더니 떡치듯이 철썩철썩 내 볼기를 치시기 시작했다. “이 웬수야, 이 웬수야, 할미 속 좀 작작 썩여라. 이 웬수야.” 그것으로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와 엄마에게 골고루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고독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송도로 들어오면서 하나같이 옷 잘 입은 사람들, 심심찮게 눈에 띄는 양복쟁이들, 번들대는 기와지붕, 네모나고 유리창이 달린 이층집들, 흙이 안 보이는 신작로, 가게마다 즐비한 울긋불긋하고 신기한 물건들, 시끌시끌하면서도 활기찬 소음…. 이런 대처의 번화(繁華)에 맹종(盲從)하고 있는 질서가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거야말로 참으로 낯설었 다. 대처 사람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질서에 길들여지는 거라는 걸 나는 누가 가르쳐 주기 전에 본능처럼 냄새 맡고 있었다. 오래 방목된 야성이 내 속에서 벌써 주눅이 드는 걸 느꼈다. 엄마는 이까짓 송도는 서울에다는 댈 것도 못 된다면서 서울 칭송을 했다.
기차에 앉아 유리창 밖으로 할머니를 보았다. 친했던 할머니가 막막하게 먼 곳에 서계신 것처럼 보였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점점 보이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엄마는 내가 서울 가서 앞으로 되어야 하는 신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여성은 서울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란다. 신여성이 되면 머리도 엄마처럼 이렇게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뽀죽구두 신고 한도바꾸(핸드백) 들고 다닌단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바라는 신여성이라는 것에 실망했다. 신여성의 구색이라는 검정치마, 검정구두, 검정한도바꾸가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이번엔 신여성이 뭐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한창 고운 물색에 현혹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박을 한 다홍 댕기에 자주고름이 달린 노랑저고리를 받쳐입고 꽃신을 신고 널이나 그네뛰기를 하고 싶었다.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 엄마 말에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는 더 크게 실망했다. 신여성이 그렇게 시시한 걸 하는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안 하겠다고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기차는 칙칙폭폭 무서운 속도로 서울을 향해 달렸다.
서울 입성과 이상한 동네
“아니” 엄마가 뜻밖에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나에게 그건 거기가 서울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뜻밖이었다. “여긴 서울에서도 문밖이란다. 서울이랄 것도 없지 뭐. 느이 오래비 성공할 때까지만 여기서 고생하면 우리도 여봐란 듯이 문안에 들어가 살 수 있을 거야. 알았지.”
경성역에 나온 엄마는 할머니가 여다 준 짐까지 합해서 세 개나 되는 보따리를 이고, 들고 있었다. 밖으로 빠져 나오자 지게꾼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엄마는 지게꾼하고 지게삯을 놓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엄마가 가자는 현저동이 도대체 어떤 동네인지 모르지만 지게꾼들은 모두 다 마다했다. 늙은 지게꾼 하나가 남아 엄마는 그와 흥정을 했다. 지게꾼은 짐을 지고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지게꾼은 새로운 흥정을 요구했다.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 마침내 사다리를 세워 놓은 것 같은 좁다란 층층대로 변했다. 이상한 동네였다. 시골집의 뒷간만한 집들이 상자갑을 쏟아부어 놓은 것처럼 밀집돼 있었다. 송도에서 처음 목격한 것도 이런 밀집상태였지만 거기에는 그걸 다스리는 질서란 것이 있어 밀집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허위단심 기어오르고 있는 동네엔 질서란 게 없었다. 그래서 더럽고 뒤죽박죽이었다.
“여기가 서울이야?” 나는 힐난하는 투로 말했다. “아니” 엄마가 뜻밖에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나에게 그건 거기가 서울이라는 것보다 훨씬 더 뜻밖이었다. “여긴 서울에서도 문밖이란다. 서울이랄 것도 없지 뭐. 느이 오래비 성공할 때까지만 여기서 고생하면 우리도 여봐란 듯이 문안에 들어가 살 수 있을 거야. 알았지.” 엄마가 나를 데리러 시골에 나타났을 때 엄마에게 서려 있었던 기품 같은 건 바로 서울로부터 묻혀온 거였는데, 알고보니 엄마는 겨우 서울의 문밖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보는 엄마는 모든 것이 시골에 있을 때와는 크게 달랐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늘같은 시부모님한테도 다소곳한 채로 또박또박 할말을 다하던 엄마가,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의 안집 식구라면 코흘리개까지도 두려워하고 굽신대는 것이었다. 엄마가 서울 사는 법에 대해 늘어논 잔소리도 대개는 다 셋방살이의 법도에 관해서였다. 나는 차츰 엄마 앞에서 안집 애한테 기겁할 짓을 해서 동전을 얻어내서는 군것질하는 데 눈이 뒤집히다시피했다. 나는 하루하루 꺼칠하고 눈에 총기가 없어지고 교활해지면서 못쓰게 돼 갔다.
어느 날 나는 단골 구멍가게의 진열장 유리를 깨뜨리는 큰일을 저질렀다. 그 일 때문에 엄마는 가겟집 주인의 버릇없는 삿대질을 당해야 했다. 엄마의 자신감을 무너뜨리게 된 것에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꾸지람도 없이 다만 혼잣말처럼, 탄식처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아아, 저런 상것들하고 상종을 하며 살아야 하다니….” 엄마는 툭하면 상것들이란 말을 잘 썼다. 그럴 땐 안집한테 덮어놓고 쩔쩔맬 때와는 딴판으로 엄마에게서 느닷없이 기품이 느껴졌다. 엄마가 서울에서 그렇게 도도할 수 있었던 건 시골에 있는 집에 대한 믿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게 엄마의 긍지였다. 이 사건은 그대로 일단락 지은 줄 알았는데, 그후 며칠 있다가 오빠한테 회초리를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이보다 우울하고 과묵해진 오빠는 나를 뒷동산에 데리고 가 회초리를 만들어 나의 철없음을 꾸짖었다. 엄마가 기생 바느질 품팔이를 해서 번 돈으로 철딱서니 없이 군것질 해대는 동생에게 목멘 소리로 항복하라고 꾸짖는 오빠의 목소리가 너무나 구슬펐다.
서울 생활은 여덟 살짜리 계집애에게는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금지된 것이 많았다. 안집에 들어가지 마라, 골목 앞에 나가지 마라, 안집 애하고 놀지 마라, 동네 애들하고 놀지 마라, 상종할 만한 집 자식 하나도 없더라. 상종이 엄격하게 금지된 것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매혹은 은밀하고도 짜릿했다. 나는 심심하다는 골병이 들어 있었다. 엄마도 오빠도 심심함이 얼마나 깊숙이 나의 생기를 잠식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빠는 나에게 한문이나 일본 가나 같은 글씨쓰기를 숙제로 내주었다. 나는 글씨공부를 후딱 끝내고 공책의 여백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차츰 공책의 여백을 넘어서 온 장에다 크게 그리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선 공책의 소모가 문제였다.
어느 날 오빠는 석필을 사다 주면서 공책엔 글씨만 쓰고 그림은 그걸로 땅바닥에 그리라고 일러주었다. 그날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었다. “나하고 놀자.” 어떤 키 큰 아이가 내 앞에 서서 말했다. 함께 놀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낭떠러지 밑에 사는 땜장이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못 그리는 게 없었다. 전찻길 건너 붉은 벽돌담이 드높은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전중이(징역꾼을 일컫는 속어)도 그리고, 비행기, 전차, 인력거, 새나 과일도 그릴 줄 알았다.
“아이, 심심해.” 그 아이는 모든 그림에 익숙했으므로 싫증도 잘 냈다. 그 아이는 속바지를 벗고 서로의 성기를 보자는 기발한 제안을 했다. 그 아이가 심심한 게 내 탓만 같아서, 엄마한테 들키면 매맞을 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그것은 심심하다는 축 늘어진 의식에 고도의 긴장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장난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집 담벼락과 대문에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거기에 주인집 어른들의 이름을 썼다. 이 그림은 우리 식구에게 당장 큰 화를 몰고 왔다. 말리던 오빠가 안집 아저씨한테 후레자식 소리를 들었던 것이었다. 엄마의 신앙이었던 오빠가 후레자식 소리를 들은 것에 충격을 받은 엄마는 울면서 시골에다 편지를 썼다. 돈을 좀 보태주면 집을 살 엄두를 내보겠다는 편지였다.
낙서 사건은 당연히 땜장이 딸과 놀지 못하게 하는 좋은 구실이 됐지만 나는 엄마의 눈을 속이며 그 아이를 따라 조금씩 집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전찻길을 건너가기까지 했다. 전찻길 너머에는 그 큰 대궐 같은 집 담장이 있었다. 전차 타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바로 그 큰 집에 있는, 물이 흐르도록 패인 홀에서 미끄럼을 타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 곳에서 전중이를 직접 보았다. 나는 그들이 무서워서 미끄럼 타는 재미도 잊어버리고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전중이가 뭐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논 곳이 감옥소 마당이란 것을 알게 된 엄마는 한바탕 대경실색을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한가지 결정을 내린 듯했다. 감옥소가 있는 문밖 동네에서 문안 동네를 바라보는 엄마의 절절한 소망은 불시에 나를 문안에 있는 소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현저동 가까운 문안에 사는 친척을 찾아 주소까지 옮기면서 매동학교 시험을 치게 했고 나는 합격을 했다.
엄마라는 말뚝
이사간 날, 첫날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 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문밖에 살면서 일편단심 문안에 연연한 엄마는 내가 그 동네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문안 애가 되길 바랐다.
엄마는 내 국민학교 합격을 마치 과거급제처럼 과장해서 시골에다 알렸고 시골에서도 둘밖에 없는 손자손녀가 서울에다 뿌리를 박은 바에야 며느리한테 너무 인색하게만 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돈을 마련해줬다. 그러나 서울선 푼돈이어서 금융조합에서 집값의 절반은 융자를 받았건만 우리가 살 수 있는 집은 역시 현저동 꼭대기였다. 세들어 살던 집에서도 오르막길로 더 올라가 동네가 인왕산 마루턱을 치받으면서 끝나는 데 있는 여섯 칸 짜리 작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어엿한 기와집이었다. 엄마는 그 꼭대기에 새로 장만한 집이 대견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런 귀살스러운 집에서 어찌 살까 난감스럽던 오빠와 나도 엄마의 정성어린 손길에 매일매일 달라지는 집을 보고 신이 나서 엄마를 도왔다. 이 집은 여섯 칸 짜리지만 없는 게 없었다. 마당도 있었다. 마당이 네모나지 않고 삼각형인 게 흠이었지만, 엄마는 이런 마당을 ‘우리 괴불마당’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엄마는 문밖에 살면서도 내가 그 동네 아이들과는 다른 문안 애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나는 정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었다. 나는 동네에서도 친구가 없었지만 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한동네 사는 애들하곤 격이 다르게 만들려고 엄마가 억지로 조성한 나의 우월감이 산등성이 하나만 넘어가면 열등감이 되었다.
괴불마당 집주인이 된 후에도 엄마는 초가집에 세들어 살 때와 마찬가지로 이웃을 상것 아니면 바닥 상것으로 평하길 서슴지 않았고 나를 그들로부터 고립시키려고 애썼다. 엄마가 이웃을 상종해도 괜찮을 이웃과 상것, 바닥 상것 세 가지로 나누는 기준은 들쑥날쑥해서 일정치 않았다. 기분 내키는 대로였고 또 매우 변덕스러웠다. 엄마는 남들이 다 김서방이라 부르고 하대하는 늙은 물장수를 김씨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하세요’라는 존댓말을 썼다. 나는 엄마가 무엇 때문에 동네 아이들까지 반말로 하대하는 영감을 깍듯이 존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는 씩 웃으면서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김서방 할아버지는 물장수 노릇을 해서 아들을 둘씩이나 전문학교에 보내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