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그대
서영은 지음 | -
먼 그대
서영은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문자: 이 소설의 주인공. 마흔 고개에 접어든 노처녀로 아동도서를 간행하는 H출판사의 교정직원. 남들에게 무시당해도 내색하지 않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는 유부남 한수와의 사랑으로 아이까지 빼앗기고 지난 십 년 동안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수: 문자와 정을 통하는 유부남. 모질고 이기적인 성격의 소유자. 한때는 출세했지만 거듭된 사업 실패로 무위도식하고 있다. 사업자금조로 문자에게 수시로 돈을 요구해서 그녀를 경제적 어려움에 빠뜨린다.
한수의 부인: 표독하고 의심 많은 성격의 여인. 한수의 부추김을 받고 옥조를 데려간다.
이모: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부유층 여인.
옥조: 한수와 문자의 딸. 백일도 채 되기 전에 문자의 품을 벗어나 한수의 집에서 자란다.
남들은 모르는 문자의 자신감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거리를 차분히 내다보며, 문자는 장갑을 한쪽 또 한쪽 끼었다. 빨 때마다 오그라들고 털이 뭉쳐 작아질 대로 작아졌기 때문에 그녀는 장갑 낀 손가락 새새를 꼭꼭 눌러주어야 했다.
몇 년 전에 유행이 지나간 알록달록한 털장갑을 문자는 여태 끼고 다녔다. 장갑만 구식인 것이 아니었다. 소매끝이 닳아빠진 외투, 일년 내내 신어온 쫄쫄이식 단화, 통은 넓고 기장은 짧아 발목이 껑충해 보이는 쥐똥색 바지, 보푸라기가 한 켜 나앉은 투박한 양말 등 온통 구식 일색이었다. 반찬내를 물씬 풍기는 가방을 비롯해 문자가 몸에 걸치고 지닌 것마다 구멍만 뚫리지 않았다 뿐이지 너무나 낡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문자의 이런 차림새는 마흔 살이 가깝도록 노처녀로 알려진 그녀의 입장을 더한층 측은해 보이게 했다. 아동도서를 간행하는 H출판사에서 문자는 영업부 편집부 통틀어 최고참 직원이었다. 입사 이래로 문자는 줄곧 교정일만을 보았다. 그 사이 문자만 제외하고 자리마다 수없이 얼굴이 바뀌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원일수록 반년도 못 채우고 떠나갔다. 출근 첫날부터 의자가 기우뚱거린다, 화장실이 더럽다, 층계가 가파르다, 등등의 불만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문자보다 한참 나이 어린 동료들로부터 그녀는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들로서는, 가르마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생기도록 무엇 하나 이룩해 놓은 것 없이, 한평생 있어봐야 별 볼일 없는 출판사에, 말석에서만 십 년을 보낸 노처녀 동료가 있다는 그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교정지를 앞에 두고 등을 쭈그린 그녀의 등뒤에만 유난히 시린 바람이 회오리치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턱 언저리에는 늘상 소름이 돋아 있어 까실까실해 보였다.
밖에서 점심식사를 한 동료들이 사무실로 돌아와보면, 뜨거운 보리차컵을 두 손으로 감싸쥔 문자가 그들을 맞았다. 그런 문자를 보면 측은하다 못해 동료들은 괜시리 마음이 언짢아졌다. 그래서 어쩌다 문자가 말을 건네오면 그들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렇더라도 문자는 한번도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보인 일이 없었다. 나이 어린 부장으로부터 이따금 민망할 정도로 면박을 받아도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성실하게 일했다. 동료들이 사장을 흉보고, 시설이나 월급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아도 문자만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 문자를 두고, 나이 어린 동료들은 그녀가 밥줄이 떨어질까봐 두려워서 몸을 사린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자가 주눅들고 처량해 보일 때마다 자신들도 저렇게 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토요일 오후 사무실을 나오는 문자 등 뒤로 미스 최의 조심성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요일인데도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는 그녀가 참 안됐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다른 동료가 집으로 가봤자 반겨주는 가족 하나 없다고 거들었다. 문자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하나 있는 오빠마저 수년 전에 이민을 가는 바람에 그 때부터 그녀 혼자 고생하며 살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재산이라고는 문자가 용두동에 세들어 있는 방 전세금이 전부라는 말에 미스 최는 깜짝 놀랐다. 문자는 옷도 안 해 입고, 도시락도 꼭꼭 싸오는 등 알뜰하게 십 년이나 직장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문자는 자신이 동료들의 얘기를 들었다는 걸 알고 그들이 무안해 할까봐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계단에서 내려왔다. 거리는 한산했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이 남 보기에 그렇게 안되어 보일 만큼 실패한 걸까 생각해봤다. 그러자 괜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문자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자기가 동료들과 세상 사람들을 멋지게 속여넘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번듯한 애인을 숨겨둔 것도 아니었고 돈 많고 지위 높은 아버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자에게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그녀 맘 속의 어떤 그윽하고 힘찬 상태가 있었다.
문자는 유행의 흐름이나 동료들의 시선 같은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눈에 자기가 형편없이 초라하게 비쳐지는 것이 의식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동료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사내(社內)의 궂은 일이 그녀에게만 떨어져도 문자는 견디고 묵묵히 그 일을 해냈다. 봉급을 더 줄 테니 회사를 옮기라는 옛 동료의 제의에도 문자는 한사코 거절했다. 몇 푼 더 받겠다고 철새처럼 옮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깟 몇 푼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보다 몇 배나 불리하고 괴로운 일을 당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에게 지워진 어떤 가혹한 짐에 대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탄식하지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억센 정신은 아직도 얼마든지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다는 듯이, 항시 무릎을 끓고 있었다.
H출판사 직원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문자는 그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문자의 그런 침묵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 자신감이,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와 겨루면서, 몇 만리나 되는 고독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생겨난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일만큼은 문자로서도 곤욕스러웠다. 오늘 저녁때까지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십만 원을 구해야 했다. 며칠 전 통화했을 때 이모는 확실한 어조로 거절했다. 사정이 다급해지자 문자는 다시 한번 이모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급한 돈을 변통해 왔던 친구에겐 아직 갚지 못한 빚이 있어서 더 이상 부탁할 수 없었다. 문자는 염치불구하고 또 다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얼굴이나 좀 보자고 말했다. 문자는 어떻게 해서 불사(不死)의 낙타가 되었나
매달 얼마씩 가져가는 것 이외에 이따금 한수가 적지 않은 목돈을 요구해 오는 데 대해서 문자는 한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받아넣으면서 불안해진 한수가 제풀에 화를 내곤 했다. “젠장, 내가 뭐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두고보라구”
항상 이번만은 틀림없다고 전제하면서 한수는 돈을 요구하였다. 광산에 자금을 투자해줄 유력한 자본주를 만나는 데 돈이 급히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의 진실여부는 문자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딸 옥조를 한수가 데리고 있는 이상, 그를 돕는 것이 옥조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사 한수가 하룻밤 술값으로 날려버린다 해도 역시 상관없었다. 그런 일 때문에 문자는 더이상 마음 상하지 않았다. 한수는 그녀에게 천 개의 흉터를 내었지만 그녀는 그 흉터를 스스로 딛고 일어섰다. 그는 문자의 마음 속으로부터 이미 지나가버린 그 무엇이었다. 한수가 그녀에게 낸 상처를 딛고 설 때마다, 문자의 정신은 마치 짐을 얹고 또 얹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낸 불사(不死)의 낙타 같았다.
한수는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바보스러울 만큼 착하다고 여겨지던 문자가 딱 한번 무서운 여자라고 생각된 때가 있기는 했다. 왜 그렇게 생각되었는지 한수 자신도 그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문자가 옥조를 낳은 지 한 달도 못 돼서 한수는 아내의 등을 떠밀었다. 문자로부터 옥조를 빼앗아오기 위해서였다. 아내와의 사이에 일남 일녀를 둔 그가 새삼스럽게 자식이 탐난 것은 아니었다. 한수는 옥조를 데려옴으로써, 문자를 영원히 자기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급기야 한수의 아내가 문자의 전세방으로 가서 옥조를 데려왔다. 그녀는 미리 겁부터 주려고 때려부술 것을 찾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손바닥만한 경대조차 없었다. 한수의 아내는 문자의 살림이 캐비닛 하나뿐인 것을 알고 속으로 안심했다. 남편으로부터 늘상 아무것도 없이 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남편이 광업소 소장으로 있었을 무렵, 봉투나 값진 선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업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자에게 빼돌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수의 아내는 남편 덕택에 밍크나 보석 같은 것을 몸에 지니게 될 때마다, 문자가 자신보다 더 좋은 걸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한수는 광업소를 그만둔 뒤 자영(自營)을 해보겠다며 중석광산을 하나 사들였다. 집이고 선산이고 모든 재산을 팔아 광산에 집어넣었다. 끼니거리가 없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보석반지까지 팔아야 했을 때 한수의 아내는 자신만 거지꼴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속을 태웠다.
용두동 개천가에 있는 문자의 셋방에 쳐들어가 그녀의 살림속을 읽고 난 후에야 한수의 아내는 안심하게 되었다. 남편이 가져다주었음직한 것은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흔한 텔레비전 한 대조차 없었다. 남편의 문자에 대한 사랑이란 건 대수롭지 않음이 분명했다.
문자는 의외로 아기를 순순히 내놓았다. 한수의 아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문자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아기만 잠자코 들여다보다가 딱 한마디만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기가 한밤중에 깨어서 우는 습관이 있으니 그럴 때는 숟갈로 보리차를 몇 모금 떠먹이라는 얘기였다. 한수는 제속으로 난 자식을 맥없이 뺏긴 문자가 바보스럽다고 아내 못 듣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단단한 쇠꼬챙이에 명치를 치받친 듯 입을 다물었다. 예상치 못한 문자의 소리없는 조용함이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이다.
십 년 전 한수가 처음으로 문자의 자취방을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는 한겨울이었다. 그 해 겨울 문자는 지붕에 쌓인 눈을 퍼내기 위해 지붕 위에서 살다시피했다. 쌓인 눈이 녹아 천정에 스며들면 곳곳에 물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오르내릴 사다리도 변변치 않았고 고압선이 길게 늘어져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문자는 부삽을 들고 지붕을 오르내렸다. 그녀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눈을 퍼서 지붕 아래로 집어던졌다. 어쩌다 지붕 아래로 던진 눈을 행인이 맞고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면 문자는 몇 번이나 내려가 사과하곤 다시 지붕으로 올라갔다.
또 문자의 부엌에는 수도가 없어서 안집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물을 길러다 먹어야 했다. 안집 마당으로 가려면 부엌 뒷문으로 나가서 높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안집에 세들어 사는 여인들에게 그 계단은 일종의 죽지 못해 오르내리는 굴욕의 사다리였다. 그 여인들은 자신들이 양손에 물 바께쓰를 들고 계단을 오를 적에 주인집 여자가 비죽이 웃으며 자신들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일이 무엇보다 싫었다.
똑같이 방을 빌어 사는 처지이면서도 문자는 다른 세든 여인들과는 달랐다. 그녀가 뒷문에 나타날 때 보면, 무슨 좋은 일을 하다가 중단하고 나온 것처럼 그녀의 두뺨은 항상 발그레했다. 때때로 그녀는 양손에 바께쓰를 든 것도 잊고 층계참에 서서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고 난 뒤에는 그녀의 두 뺨의 발그레한 빛이 마치 안에서 불을 켠 것처럼 더욱 짙어졌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몸 속에 깃들어 있는 싱싱한 생명의 탄력이 음계를 밟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 계단은 그 위에 있는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녀 혼자만 누리기 위해 외부로 나타난 부분을 일부러 조악하게 꾸며 놓은 것 같이 보였다.
문자의 부엌의 아궁이에서는 물이 솟았다. 주인집과 그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문자가 새벽같이 층계참에 나와 매운 연기를 마셔가면서 연탄화덕에다 부채질을 해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문자는 때로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부채질을 했다. 아궁이뿐만 아니라, 지붕이며 방고래를 고쳐달랄 만한데도 문자는 혼자 힘으로 잘 참아나갔다. 주인집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에게 물세, 불세까지도 터무니없이 많이 요구했다. 문자는 한마디 따지지 않고 선선히 주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큰 여유가 있어 그만한 일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한 집에 세들어 사는 여인들은 문자의 살림형편이 겉보기보다 훨씬 여유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어느날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짜고 불시에 문자의 방을 방문했다. 문자의 방안을 보니 물이 스며든 천정이 페인트칠이 일어나 너덜거렸고 캐비닛 이외에 이렇다할 세간도 없었다. 그 여인들로서는 문자의 두 뺨에 서린 발그레한 홍조와 발랄한 생기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중 누가 엄지손가락으로 돌았다는 시늉을 해보였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문자는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것도 아니고 남다른 무엇을 소유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엇을 하든 그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노라면 어딘가 높은 곳에 등불을 걸어둔 것처럼 마음 구석구석이 따스해지고 밝아지는 것을 문자는 느꼈다. 그 따스함과 밝은 빛이 문자의 뺨을 물들이고 생기가 넘치게 하는 것을 그녀 자신은 오히려 깨닫지 못했다.
한수가 문자에게 오는 것은 단지 일요일 밤뿐이었다. 그는 항상 그녀의 시렁 위에 걸려있는 등불과도 같았다. 문자는 시장에서 물건을 깎다가도 그가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하고 깎는 일을 그만두었다. 남과 다툴 뻔하다가도 그를 떠올리곤 분노를 가라앉혔다. 일요일이 되었을 때 문자의 손길이 닿는 것은 모두 금빛물이 들어 있었다. 문자가 한수의 옷을 벗기면 그 옷이 금빛으로 물들었고, 양말을 벗기면 양말이 그러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가져와 그의 발을 씻기면 그 발 역시 금빛이 났다. 그녀가 한수를 위해 마련한 저녁상은 가난한 자가 일주일 내내 힘들게 번 돈으로 성전 앞에 켤 양초를 사는 것과 같이 마련된 것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의 철저한 사랑
한수는 그녀가 살코기를 집어줄 때마다 입을 딱 벌려 받아먹기만 할 뿐, 자기도 그녀의 입에 그 고기를 먹여주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한수의 마음은 무디고 이기적이어서 온 방안에 가득찬 금빛을 보지 못했고, 가만히 있어도 그 침묵이 노래임을 알지 못했다.
한수에게는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그가 문자와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그의 아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시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때 한수는 여당소속 국회의원의 비서라는 그럴싸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입은 변변치 못해서 그녀에게 생활비를 보태줄 형편이 못 되었다. 문자가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한 적이 없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이 줄 수 있는 한도 밖의 것을 그녀가 요구해오면 어쩌나 불안해했다. 그는 문자가 욕심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간파했으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한수가 모시고 있던 K의원이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한수는 광업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한수의 살림은 매우 풍족해졌다. 그는 멋진 새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좋은 옷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한수는 문자에게 정식으로 딴살림을 차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으며 그녀에겐 아무것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일단 문자에게 무엇을 주기 시작하면 그녀가 끝없이 요구의 손길을 뻗쳐오지 않을까 겁이 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