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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환(幻)

김채원 지음 | -
겨울의 환(幻)

김채원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가 혜: 서른 둘에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마흔세 살의 중년 여인. 지금껏 스스로를 여자로 자각하고 살지 못한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와 비슷한 운명에 처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 신: 가혜의 남자친구 겸 애인. 가혜와 3년째 사귀고 있다. 그녀의 편지에서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가혜와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살았다.

어머니: 교사출신으로 첩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화투로 소일하며 딸 둘을 키운다. 어머니의 불효를 문제삼는 큰 딸 가혜와 말다툼을 벌이다 쓰러지는 바람에 현재 거동이 불편하다.

외할머니: 함경도 실향민 출신으로 남편의 첩살이로 타지에서 혼자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영 혜: 가혜의 여동생. 간호원으로 서독에 파견되어 나갔다가 독일인과 결혼해서 그곳에 산다.

외삼촌: 타향살이에 실패한 인물로 가혜의 외할머니에게 행패를 일삼다가 6.25 전쟁 때 월북한다.

남 편: 결혼예물, 아이 문제 등으로 가혜와 갈등을 겪는다. 이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산다.

순젱이: 가혜의 친척 아주머니. 실향민 출신으로 망나니 아들을 따라 미국에 이민갔다가 혼자서 돌아와 쓸쓸히 눈을 감는다.

아저씨: 가혜의 친척 아저씨. 가혜와 함께 외할머니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가 산불을 낸다.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

사람들 마음 속에는 왜 응어리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와서 세상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고 보면 세상사가 모두 손바닥 안에 있다는 그 말에 수긍하고 공감하면서도 왜 마음은 이렇게 늘 괴로운 것일까요?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보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지나쳐 들었습니다, 라기 보다 글이라고는 편지와 일기 정도밖에 써보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쓸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감정의 훈련도, 또한 그 감정을 끌어내어 표현하는 능력도 갖고 있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의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말 자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강한 매혹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마흔 세 살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여자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서 새 속치마를 꺼내어 입을 때, 혹은 화장을 할 때, 혹은 생리 냅킨을 꺼낼 때 간혹 자신이 여자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느낌에 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 저는 언제나 자신의 용모나 성 따위를 전혀 잊고 살았고 언제나 자신 안에 있는 나일 뿐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말을 했을 때 저는 그 말 자체가 무언가 설레게 하는, 인생에서 어떤 신묘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가는 것은 단지 멸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늙어가는 여자의 떨림이 있을 수 있다는 확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되었다는 자각이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자각은 저로 하여금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 선조의 여자들까지 거슬러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어머니라는 의미, 동양의 여자, 이런 의미들이 물밀듯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한때 서구의 개인주의에 공감했고 그것을 따르려 했었습니다. 이제 저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미덕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시간, 동양권인 이 공간에서 태어난 것도 하나의 운명이고 당신과 만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 쓸 당시 저는 몹시 흥분된 상태였고 내일 새벽까지 글을 마쳐 보겠다는 각오 하에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TV 뉴스에서 산불 진화작업 현장이 보도되는 광경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산불은 오늘 제가 할머니 묘소에서 집안 아저씨와 함께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불이 나는 장관스런 풍경을 보고 불현듯 그런 대자연 앞에서 내가 없으면 산불도 무엇도 다 없다는 사실이 이상스러웠습니다.

뉴스를 본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저씨는 내일 아침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함께 출두하려 했으나 노모를 돌봐드려야 한다는 아저씨의 만류에 그만두었습니다. 묘소에서 화재가 발생했던 건 사실이지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불을 끄고 나서도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앉아 있다 자리를 떴는데, 불씨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가는 불길의 환영을 보았습니다. 다 타 버린 묘자리를 보고 그 일이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왠지 무덤 속의 망자들이 타오르는 불길에 가슴 속 맺힌 응어리들을 다 녹이는 후련함을 맛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왜 응어리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와서 세상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고 보면 세상사가 모두 손바닥 안에 있다는 그 말에 수긍하고 공감하면서도 왜 마음은 이렇게 늘 괴로운 것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다양하게 변모하며 그러한 마음이 세상 속 자연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보았습니다. 즉 천둥과 번개, 바다와 시냇물, 들판․꽃밭․비․눈 등은 사람들의 감정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을 닮아 사람들의 감정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산 하나를 다 태운 불길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에 흰 연기만 날릴 소화 후의 빈 산 역시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불은 나버렸습니다. 저는 타들어 가는 불기운에 힘입어 글에 대한 지식이나 훈련이 없음에도 이 밤 자신이 무언인가 써낼 듯한 기(氣)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일로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

내 나이 그 때 서른 둘, 여자로서 절정일 때일까요?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으면 가장 젊은 젊음이 은은히 울려퍼지는 때, 그런 나이에 저는 결혼생활 육 년만에 구겨진 버선처럼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와 저의 손은 똑같이 생겼습니다. 실지 두 손을 맞대어 본 적은 없지만, 마주하면 오른손과 왼손이 만난 듯 아마 꼭 맞을 것입니다. 갸름한 손톱 모양과 매듭, 어느 순간 꼭 닭다리로 착각되는 손가락,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손금일 것입니다.

어머니와 저의 손금이 다른 이유는 두 사람의 운명이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확실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딸의 운명은 한줄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밥상에서 가장 자신이 어머니와 운명적임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김장김치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식구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김장을 백 포기나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겨울을 지나 초여름까지 먹고 남한테도 한바께스씩 퍼주었습니다. 된장찌개 역시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추억거리로 얘기하던 음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김치뿐만 아니라 된장찌개도 맛있게 만들기 때문에 서민적인 음식을 만드는 데는 자신이 제일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저의 마음속에는 반감이 솟아올랐습니다. 김장김치 얘기의 경우 기억을 떠올려보면 수긍이 가지만 된장찌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 어머니가 담은 김치와 동치미는 시원하고 맛있었습니다. 그러나 된장찌개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어린 시절 자라면서 늘 갈증을 느꼈던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교원생활을 오래 한 분이었지만, 잠시 방황하던 시절 화투로 날을 지새웠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집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듣기로 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얻어 생활하였고, 동생이 태어나던 해 객지에서 병사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화투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화투를 치다가 늦은 저녁 때가 되면 부엌에서 떨고 있는 저와 동생에게 소리쳤습니다.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 된장 한 숟가락과 두부, 마늘 등을 좀더 집어넣고 끓여서, 상을 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된장을 한 숟가락 더 푸기 위해 저는 동생과 함께 장독대로 갔습니다. 그 때 저와 동생이 느낀 것은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다 대고 소리치는, 교사까지 지낸 어머니의 교양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신비감도 없이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 라고 서슴없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불을 땐 방은 화투치는 방뿐인데, 아이들이 있을 곳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도 반감을 느끼는 요인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어린 시절 항상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지냈습니다. 된장찌개의 가장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파를 썰어 넣는 일이 대개는 빠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음식에서는 항상 그 파와 같은 부분이 빠졌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 것이 저희 집 음식은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을 때도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음식은 더 빛을 잃고 뭉뚱그려졌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저는 어머니의 자랑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음식이 설혹 맛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따뜻한 밥상은 아니었습니다.

어린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제 할머니는 매일 매일 세끼의 밥을 따뜻이 먹게끔 차려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저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밥상을 깨부시는 힘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저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것이 앞서 얘기한 손금, 어머니와 자신의 운명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긴 겨울밤 동생과 광으로 동치미 뜨러 다니던 일을 기억합니다. 남폿불을 들고 방문 밖으로 나왔을 때 눈이 펄펄 내린 적도 있었고 마당과 장독대, 지붕,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눈이 쌓여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흰눈을 밟을 때마다 들리던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 그 음향과 감촉이 지금도 전해져 옴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저와 동생은 동치미를 먹으며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방학숙제인 그림일기 속에 눈이 내리고 있는 풍경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 때 그림일기에 그린 것은 제가 실제로 본 눈의 풍경이 아니라 달력이나 어린이 책에서 본 풍경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달력이나 책에 있는 풍경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벅차하면서도 그것이 먼 곳에 있는 것으로 느껴져 그리워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저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로서의 떨림, 여자의 성을 자신이 느끼지 않고 살아온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저는 방학숙제 속에 눈의 세계를 그려 넣던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여인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커왔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얘기를 듣고 처음으로 여자라는 성을 감지하는 느낌을 맛보았던 것은, 제가 어린 시절 눈의 세계를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으로 그리워했듯 여자라는 성을 그저 그리워만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제게 여자의 성을 띄워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뒤늦게 마흔셋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감지하고 무언가 스스로 북받쳐오르는 어떤 격류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운명을 얘기하기 위해 저는 좀더 지난날을 들추기로 했습니다.

내 나이 그 때 서른 둘, 여자로서 절정일 때일까요?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으면 가장 젊은 젊음이 은은히 울려퍼질 때, 그런 나이에 저는 결혼생활 육년 만에 구겨진 버선처럼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아이가 없는 것도 큰 이유였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결혼예물이었습니다. 장롱은커녕 이불조차 변변히 해오지 않은 저를 두고 친척들은 따가운 눈총을 주었습니다. 제가 결혼생활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모든 여자들처럼 첫 출발에 꿈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저는 자신이 밥짓고 반찬하는 일이 훈련되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가져온 버선도 속치마도 입지 않고 오로지 살림과 싸우기에 분투했습니다. 친척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남편은 결혼 당시 친척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존심이 상하는지 항상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저는 울음을 삼키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리곤 했다.

돌아올 용기를 제게 직접적으로 불어넣어 준 것은 눈이었습니다. 홀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현관에서 문상객들의 구두를 정리하던 저는 하늘 가득히 내리는 눈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고무신이 벗겨지면서 버선발이 드러났습니다. 며칠 동안 갈아 신지 못한 버선은 부엌바닥의 찐득한 때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자신의 인생이 바로 이 버선바닥처럼 더럽게 구겨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지로 가던 날도 눈이 왔는데, 버스 유리창에 달라붙은 눈은 어린 시절 제가 품었던 눈의 세계를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저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짐을 쌌다. 저는 남편의 밑바닥에 깔린 감정을 볼 수 있도록 제 어머니가 다른 집 어머니처럼 잘 해보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이 말을 하자마자 저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자유스러움을 느꼈습니다. 결국 저는 친정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회사에서 파견되어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났습니다. 겉으로는 남편의 파견이 구실이었으나 실은 아주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결혼예물이 파경의 원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이 어머니 운명을 딸이 닮는다고 하는 것, 즉 운명의 손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남편을 섬기며 사는 여자이지 못했듯 저 역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남편은 엽서 몇 통을 보내기도 했으나 사우디에서 임기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아 잘 살고 있다는 소식도 보내왔습니다. 시집가기 전 쓰던 방에 누워있으면 저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갓 삼십을 넘기고 친정에 돌아왔던 저는 어느덧 노모와 단둘이 사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왠지 모를 갈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따금 어머니에게 울면서 달려들기도 했고 무언지 모를 불만을 한숨을 섞어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 한숨의 뒤끝에는 칠순 노인인 어머니와 같을 순 없지 않느냐는 속말이 중얼거리듯 새어나왔습니다.



운명은 그 누군가의 염원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신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라는 것을 그런 데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일까요.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이치, 무엇인지 극에 달해 더 나아갈 수 없을 듯할 때 새로운 어떤 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 무렵 저는 일이 진정으로 하기 싫고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아 짜증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가 관절염으로 바깥출입을 전혀 못하고 있었으므로 외식을 하고 영화를 구경하는 작은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당신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 왔었는데, 저는 쉽게 그 집을 찾아주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저는 이상한 끌림을 받았고 우리는 우연한 만남을 몇 번 가졌습니다. 당신이 제가 너무나 외로운 나머지 꾸며낸 상상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당시 저는 희망이 없는 노년과 같았고 어머니의 검버섯과 같은 칙칙함, 무미건조함에 젖어 있었습니다.

당신이 전화하겠다고 했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후 보름 간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다가 저는 시장거리로 나가 동동주를 마신 다음 기분 삼아 동그라미 던지기를 했습니다. 되는 대로 던진 링이 마을 젊은 장정들이 모두 실패한, 제일 뒤에 있는 대두 한 되들이 소주병에 가서 걸렸습니다. 저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강한 힘이 작용했던 거라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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