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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느티나무

강신재 지음 | -
젊은 느티나무

강신재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숙희 18세 미모의 여고생. 주인공. 이복 오빠 현규를 사랑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고뇌한다.현규 스물 두 살의 물리학과 대학생. 이복 동생 숙희를 이성으로 사랑한다.

엄마 전쟁 중에 남편과 사별한 미모의 젊은 여성. 결혼 전에 혼담이 있었던 무슈 리와 재혼한다. 재혼 후,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무슈 리 현규의 아버지이자 숙희의 새 아버지. 대범하면서도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경제학과 교수이다.지수 현규의 친구이며 장관의 아들. 숙희를 사랑하는 의과대학생. 그의 연애편지로 인하여 숙희는 현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이복 오빠 현규에 대한 숙희의 사랑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올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숙희는 현규의 몸 냄새, 더 정확히 말하면 목욕을 막 마치고 나온 현규의 몸에서 나는 비누냄새를 통해서 현규를 느끼고 사랑한다. 그런데 현규는 숙희를 단순히 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숙희는 애써 현규에게서 자신에 대한 이성적 감정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일이 매일 되풀이될수록, 숙희의 괴로움과 슬픔은 더 깊어만 갔다.

자신의 고민이 깊어 가는 찰나, 숙희는 그의 ‘누이동생’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됐다. 오늘도 현규는 스스럼없이 숙희의 방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 일을 하면서 숙희는 현규가 굳이 자신의 방까지 와서 심부름을 시키는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숙희가 음식을 가지러 아래층에 내려간 사이 현규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겨 있던 현규는 숙희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같이 정구를 치러 가자고 한다. 현규의 제의에 다음날이 중간고사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숙희는 현규를 따라 나섰다. 테니스장은 구 왕가에 속하는 옆집 공터에 있었다. 원래 텅 비어 있는 공터에 현규와 숙희는 석회를 뿌리고, 금을 그어서 테니스 코트를 만들었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집 공터에 테니스장을 만든 것이라, 주인의 호령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으면, 그 집주인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끌고 나와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숙희는 시골에서 테니스를 배웠으나, 현규와 함께 테니스를 치면서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공부만 하는 샌님인 줄 알았던 현규는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운동도 시골 코치 이상으로 잘했다. 원래 숙희는 머리가 둔한 사람이나 운동을 잘 못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규는 그 두 가지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숙희는 현규의 그런 재능에 감탄하면서 그에게 만족감, 즉 사랑을 느꼈다.

테니스가 평소와는 달리 잘 쳐지지 않자, 둘은 테니스를 그만 두고 약수터로 같이 갔다. 약수터에 표주박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약수터를 지키는 무서운 할아버지가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둘은 그 할아버지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얌전히 물을 마셔야 한다고 속삭였다.

현규는 약수터에 있는 표주박을 들어 숙희에게 물을 줬다. 약수터에서 표주박을 자신의 입가에까지 대어서 물을 먹여 주던 현규를 보면서, 숙희는 현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현규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은 기쁨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면서도 숙희는 자신을 사랑하는 현규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오빠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자신이 부조리한 존재라고 생각되었고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났다.

저녁이 다 되어 라켓을 들고 집 정원을 둘러싼 담장을 넘어서 집안으로 들어온 숙희는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정원을 걸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숙희는 별안간 감정이 혼란스러워서 중얼거림이나 대꾸하기조차 싫어졌다.

이럴 때면 숙희는 자신이 잠시 지녔던 유쾌함이나 행복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며, 슬픔과 괴로움이 자신의 것임을 확인했다. 오누이, 동생이란 말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혐오와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그녀는 그의 곁에 머무를 용기마저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숙희에게 농담을 하거나, 더 웃고 쾌활해지라고 말없이 명령하는 듯했다. 오늘따라 더 한층 숙희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현규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정원에서부터 맨발로 걸어오는 통에 마루바닥에 낸 자신의 발자국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샤워를 하고서 창 밖을 보니, 현규가 등나무 밑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숙희는 자신의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몰래 그가 일어날 때까지 내다보았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현규는 한참 동안 불꺼진 숙희의 창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숙희는 자신의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저녁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가 마시다가 두고 간 그의 술잔에 살짝 입술을 대어 현규의 체취를 느꼈다.



단란한 가족에서 비롯된 행복감과 고통

어쨌든 내 편에서는 도저히 그를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 생소하여서, 그리고 나중에는 또 다른 이유들로. 이것은 무슈 리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보다 몇 갑절이나 힘든 일이었다.

재작년 늦겨울에 숙희는 무슈 리의 손목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날 숙희는 어머니로부터 이과대 수재라는 이복 오빠 현규를 소개받는다. 소개를 하면서 엄마는 현규가 어떻게 숙희를 대할까 몹시 두려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숙희는 첫 만남에서 현규의 외모를 보고 마음속으로 채점을 하면서,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는 숙희의 눈을 피하면서 살짝 웃었다. 그의 웃음에 오히려 숙희는 관찰 당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긴장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단순한 태도로 숙희를 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현규의 태도에 숙희의 어머니는 안도와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슈 리는 매우 대범한 성격이어서 만사를 단순하게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숙희가 서울 무슈 리 집의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 후 현규는 숙희를 ‘헤이, 숙!’ 하고 부를 정도로 편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숙희에게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편하게 대했다. 그것이 그녀에 대한 무관심으로 비쳐져서, 오히려 섭섭할 정도였다. 근래에 와서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갖다 달라거나 약을 발라 달라고 숙희의 방에 와서 부탁할 정도였다. 그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숙희는 생소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현규를 이성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에 오빠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규는 숙희를 여동생처럼 이해해 주었다.

서울로 온 이후 더 아름다워진 숙희는 지난 4월에는 ‘미스 E 여고’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미스 E에 당선되자 무슈 리나 숙희 어머니는 무척 좋아했으나, 현규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현규가 숙희를 보고 수줍어하자, 숙희는 도리어 기분이 좋았다.

시골에서는 동무도 많고 노래도 잘 부르던 숙희였으나, 조용한 서울에 와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외형적으로는 조용해진 대신에 도리어 내면적인 감정은 격렬해진 것을 숙희 스스로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무슈 리의 로맨틱한 색채가 집안의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현규의 아버지를 숙희는 무슈 리라고 부른다. 프랑스 영화에서 본 불쌍한 아버지와 외모가 닮아서 숙희가 지은 별명이었다. 실제로 현규 아버지인 무슈 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재혼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변상황이 나빠지면 정말 불행해질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숙희 어머니 역시 행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나, 무슈 리와 재혼한 후 행복해 보였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일도 숙희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반면에 숙희는 현규를 보면 행복과 더불어 고통을 느꼈다. 그래서 숙희의 감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곤 했다. 감정의 변화가 극심해진 숙희에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무슈 리가 외국 여행 중인 것이다. 무슈 리가 여행을 떠나자 숙희는 어머니에게 식사시간을 지키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현규와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숙희가 식사시간을 피하자, 현규는 엄마와 단둘이서 식사를 했다.

숙희는 혼란스런 자신의 마음 상태를 혼자서 강물을 내다보며 점검해보았다. 자신이 현규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현규를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가 되찾은 행복, 아니 이 가정의 행복을 깨질 것만 같았다. 즉 어머니, 무슈 리, 현규와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가족이 동시에 파멸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숙희 어머니는 무슈 리와 재혼하기 전에는 조용히 그림자처럼 집안에서만 지냈다. 그런 어머니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을 보는 것은 숙희에게는 고통이었다. 자신을 낳게 한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들었지만, 숙희는 그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도, 관심도, 감정도 없었다.

다만 무슈 리가 피난지에서 할아버지의 과수원을 두 번 찾아 온 후, 어머니도 서울로 상경했다는 사실만이 숙희에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밤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인 경애라는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숙희는 무슈 리가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 혼인 말이 오갔던 사이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서울로 올라가는 어머니가 행복해 보여서, 숙희는 기뻤다. 그러나 어머니가 없는 시골에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셋이 지내는 것이 쓸쓸해서 섭섭하기도 했다.

그런데 재작년 늦겨울에 무슈 리가 찾아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설득하여 숙희를 서울로 데려왔다. 숙희는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불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슈 리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다. 그에게 외할아버지에게서 느끼던 것보다 더 강한 부친의 정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무슈 리나 현규는 숙희에게는 혈연이 아니라, 타인인 것이다. 다만 가족이라는 사회적 제도로 묶여있는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상기할 때, 숙희는 현규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 역시 현규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그 둘 사이는 남매라는 형식으로 얽매여서는 안 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숙희는 현규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침대 위에 엎드려 울었다.



숙희에 대한 현규의 사랑

뜻밖에도 거기에는 현규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없을 때에 그렇게 들어오는 일이 없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몹시 화가 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도 맹렬한 기세에 나는 주춤한 채 어떻게 할 지를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숙희 엄마가 숙희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네줬다. 그 편지는 지수라는 K장관의 아들이 보낸 것이었다. 그는 현규와 정구를 함께 치는 친구로서 의과대학생이다. 그는 지프차를 몰고 다녔다. 그 차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을 싣고 학교에 가곤 하는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숙희 역시 그의 차를 얻어 탄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현규와 함께이고, 다른 한 번은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서였다.

숙희 어머니는 숙희에게 지수가 보낸 러브레터를 건네주면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숙희의 문제에 대해서 다 알고 싶다고 말을 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숙희는 혼자 속으로 ‘엄마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연애편지에 대해 숙희의 어머니가 심각해하는 것과는 달리, 숙희는 그 편지를 받아 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구겨 넣고, 풀밭을 걸었다.

요즈음 숙희는 현규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다. 산책하면서 숙희는 풀밭 위에 앉아 현규를 골탕 먹일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상상해 보았다. 자신이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면, 못생긴 부인과 무용을 보려 온 현규가 자신의 아내와 숙희와 비교하면서 아파할 것만 같았다. 그를 골탕먹이는 대신에 그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숙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풀밭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동생들과 산보 나온 지수와 마주쳤다. 지수는 숙희에게 편지를 보았냐고 물으면서, 회답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숙희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면서, 다음에 현규와 더불어 정구나 한 번 치자고 제의했다. 지수는 아쉬워하면서 숙희와 작별을 하였고, 숙희는 지수와 헤어진 후 지수처럼 휘파람을 불면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규가 방안에 있었다.

우연히 지수가 보낸 연애 편지를 본 현규는 숙희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종국에는 숙희의 뺨을 때리고서는 숙희의 방 밖으로 나갔다. 현규가 뺨을 때리고 숙희의 방을 나간 후, 숙희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 담장 옆에 아직도 지수가 보였고, 지수와 같이 걸어오던 길이 전부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숙희는 현규에게 뺨을 맞은 것이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현규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현규와의 사랑과 갈등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에 우리는 어두운 숲 속을 산보하였다.

어두운 숲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안겨 버렸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

여하간 나는 숲 속에 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숙희는 현규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했다. 그러나 현규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가족의 평화가 깨질 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두렵고 괴로웠다. 그래서 차츰 현규를 피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마저 무슈 리를 따라 미국에 일년 정도 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현규에게 이미 말하고, 현규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미국 행을 숙희에게도 허락을 받으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현규와 숙희 둘만 큰 집에 두고 떠나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않아, 큰댁의 꼬부랑 할머니를 모셔올까도 생각했지만, 미덥지가 않다고 말했다.

숙희 역시 어머니에게는 미국에 가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현규와 단둘이 집안에 있어야 하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현규와 숲 을 같이 걷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있는 마당에 현규와 단둘이서 집안에 있어야 하는 상황을 그녀는 감내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운명적인 사건, 즉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길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숙희는 할아버지 댁이 있는 시골로 내려갔다.

숙희는 시골에서 지내면서 학교도 포기하고, 인생마저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절망감에 빠졌다. 고통스런 나날을 달래느라 숙희는 뒷산에 올라가 젊은 느티나무 사이에 앉아서 들장미 향기를 맞곤 했다. 그때 급한 비탈 올라오는 현규가 보였다. 현규가 숙희가 있는 시골로 숙희를 찾아온 것이었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서로 헤어져 있기로 약속함

그는 두 발로 땅을 꾹 딛고 서서 말하였다. 나는 느티나무를 붙들고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때 숲속에서의 일은 우리에게는 어찌할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을 수도 없고 이제 이 일을 부정하고는 살아가지도 못할 게다. 우리는 만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야. 우리에겐 길이 없지 않어. 외국엘 가든지···” 그는 부르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말을 알아줄까,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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