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소리
김동리 지음 | -
까치소리
김동리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봉수: 소설의 주인공.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자해하여 명예제대한다.
봉수 어머니: 군대간 아들을 그리워하다 기침병이 걸릴 정도로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한 어머니옥란: 봉수의 동생. 오빠가 없는 동안 병든 어머니를 돌본 마음 착한 처녀
정순: 봉수의 애인. 봉수가 군대간 사이 상호의 꾀임에 빠져 상호와 결혼
상호: 봉수의 친구로 정순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봉수가 군대에 징집되자 그의 전사통지서를 조작, 정순을 유혹하여 그녀와 결혼
영숙: 상호의 동생으로 봉수를 짝사랑함. 갑자기 폭발한 봉수의 분노로 인해 희생되는 가엾은 소녀
어머니의 기침 소리
까치가 울 때마다 기침을 터뜨리는 어머니는 아주 흑흑 하며 몇 번이나 까무러치다시피 하다 겨우 숨을 들이키면 으레 봉수(奉守)야 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것도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여다오’를 붙였다.
'나‘는 단골서점에서 우연히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나의 생명을 물려다오」라는 책을 보게 된다. ’나‘는 흥미로운 제목에 이끌려 책의 도입부를 열어보았는데 ’전쟁이 나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 주었다‘는 부분과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다‘는 말에 공감을 느낀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사게 되었고 집에 와서 자세히 보니 문학적으로 우수하고 내용 또한 감동과 여운이 있어 본문을 살려 소개를 한다고 적어 놓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살인자의 수기는 다음과 같다.
‘봉수’의 고향마을 한복판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의 곁에는 늙은 회나무 한 쌍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몇 아름이 될지 모르는 밑둥을 가지고 있는 이 두 그루의 회나무 가지 위에는 오래된 까치둥지가 있었다. 까치둥지는 세 개나 되었는데 이 까치둥지에 까치가 얼마나 살고 있는지 아는 동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까치둥지는 오래된 회나무와 함께 당연히 그 곳에 있어왔던 것처럼 고향마을을 상징하는 하나의 풍경이었다.
게다가 ‘아침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는 옛말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질 만큼 까치둥지에서 들리는 까치소리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까치소리의 영험함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까치소리에 맞춰 봉수의 어머니는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쿨룩 쿨룩 쿨록, ……’ 연달아 터지기 시작한 기침은 아주 까무러치는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서야 그치곤 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기침을 이기지 못해 마지막엔 아들인 봉수의 이름을 부르거나 ‘나를 죽여다오’를 외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봉수의 누이동생인 옥란의 말을 빌리면 봉수의 어머니가 이 같은 심한 기침병(천만)을 앓기 시작한 것은 봉수가 군대에 간 지 일년 남짓 지나서부터이다. 봉수의 어머니는 이제나저제나 군대간 아들로부터 소식이 올까 기다리다 그만 그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인데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모두 그러하겠지만 봉수 어머니의 그리움과 안달은 그만큼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봉수 어머니도 마을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아침에 들리는 까치소리에 혹시 아들이 돌아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신경을 썼던 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그 같은 몹쓸 병에 걸리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하지만 봉수에게 어머니의 기침소리와 기침소리 끝에 터지는 ‘봉수야 나를 죽여다오’라는 외침은 참기 힘든 고역으로 다가온다. 다른 이들은 어머니의 이 같은 외침소리를 기침을 참지 못해 내뱉는 아무 의미 없는 부르짖음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들인 봉수의 입장에선 ‘견딜 수 없는 설움과 울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치료해 드릴 수도, 그렇다고 딱히 위로해 드릴 수도 없는 봉수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기침소리는 죄책감만 불러일으키게 하는 고통의 절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어머니의 기침소리를 듣고 봉수는 야릇한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된다. 어머니의 ‘죽여달라’는 그 부르짖음대로 해버리고 싶은 살인 충동이 저도 모르게 일어났던 것이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죄책감과 괴로움이 지나쳐서일까. 봉수는 까치소리에 맞춰 예의 그 어머니의 까무러질 듯한 기침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어머니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기와도 같은 살인충동은 점점 더 강렬해져서 누이동생인 옥란이 말리지 않는다면 언제 그 같은 욕망을 실행에 옮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봉수는 이런 살인충동을 참기 위해 까치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방문을 박차고 집을 뛰쳐나오거나 검둥이(개)를 발로 차고 죄 없는 바지랑대를 분질러 놓곤 하였다.
결국 저녁 까치의 울음소리는 봉수에겐 어머니의 기침소리와 겹쳐져 살인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된다. 정신착란이라 할까, 환각이라 할까. ‘까작 까작’ 저녁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봉수는 사지가 부르르 떨리고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전율을 느낀다. 어쨌든 봉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기침소리에 말려들어간 것이었다. 그것은 봉수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전후 경위는 대충 이렇다.
믿었던 정순은 어디에
옥란은 이렇게 말을 시작해 놓고는 얼른 뒤를 잇지 못했다. 순간,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확 들었다. 그것은 내가 집에 돌아온 지 꽤 여러 시간 되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 한 번도 정순이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봉수가 군에서 제대하고 고향의 늙은 회나무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정순을 만나보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사실 봉수는 군대에 있는 동안 나를 기다리는 홀어머니나 하나 뿐인 누이동생 옥란보다도 옛애인인 정순이 더욱 그리웠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을 탈출하여 살아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정순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봉수가 고향집에 들어섰을 때 집은 너무나도 황폐해져 있었다. 남자가 없는 집은 모두 그런 것일까. 자리에 드러누운 어머니와 가난에 찌든 누이동생 옥란만이 썰렁한 고향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봉수는 자신만을 기다려온 어머니와 옥란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다. 다만 군에서 쓰던 담요와 군복, 그리고 ‘초콜릿 두 갑, 껌 두 매듬, 건빵과 통조림’ 등이 전부였다. 그러나 군용 백 깊숙한 곳에는 정순에게 주기 위해 사 둔 빨간 스웨터가 들어 있었다.
봉수는 자신만을 기다리다 병까지 든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미안했지만 집으로 돌아온 이후 줄곧 정순을 만날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누이동생이 할말이 있다며 불러 세운 것이다. 집에 들어선 이후 정순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봉수에게 누이동생의 이런 행동은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결혼했어.” “뭐? 뭐라고?” 옥란에 의하면 그토록 그리워했던 정순이 ‘나’를 버리고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봉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순이 나를 배신하다니, 그것도 자신의 친구인 상호와 정분이 났다는 말에 치솟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봉수는 옥란을 통해서, 정순이 봉수가 죽었다는 전사통지서를 꾸며 꼬이는 상호에게 속아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 옥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봉수는 심한 충격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변심해 버린 정순을 위해 목숨을 같이 하던 전우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전선을 탈출해 왔던가, 자신을 기다리다 못해 병이 난 어머니보다, 자신 때문에 시집도 못가고 병든 어미를 지킨 누이동생보다 정순만을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이것은 현실이 아닐 것이다. 현실일 리 없어.’
저녁까치가 울고 어머니의 기침이 시작될 무렵 나는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선다. 그 때 옥란과 이야기를 나누던 상호의 동생 영숙을 보게 된다. 군에 가기 전 유난히 봉수를 따르던 어린 소녀가 이젠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영숙은 봉수를 짝사랑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봉수는 영숙이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영숙은 애인 정순을 빼앗아가버린 상호의 동생일 뿐이었다. 봉수는 영숙에게 상호와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정순의 오빠인 윤이 아버지를 찾아간다.
봉수는 정순의 결혼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이 아버지의 말도 옥란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순은 봉수를 기다리다 전사통지서를 꾸며온 상호에게 속아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윤이 아버지는 봉수에게 미안한 태도를 감추지 못하지만 이제는 잊어야지 어떡하겠느냐는 듣기 싫은 충고의 말을 해줄 뿐이다.
결국 봉수는 천천히 술이나 들고 가라는 윤이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결코 정순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 살아 돌아온 고향인데’, ‘얼마나 그리워한 정순인데……’. 봉수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상호를 만나야만 했다. 상호와 담판을 짓고 정순을 직접 만나 확인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호는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출장을 핑계로 봉수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봉수는 직접 상호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가 다니는 면사무소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였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봉수가 수소문 끝에 알아낸 바로는 상호는 출장을 간 것이 아니라, 봉수를 피해 읍내의 고모 집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호와의 담판
“이제 나는 내 목숨을 처리할 현실이 없다네. 그래서 정순이를 만나야 되겠다는 걸세. 이왕 이 보기 흉한 손을 들고 돌아온 이상 정순이를 만나지 않아서는 안 되네. 빨리 대답을 해 주게."
상호를 만나기 위해 동구 밖 주막에 늘 나가 있던 봉수는 결국 그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 주막에 들어서자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들에게 쏠렸다. 이미 그들의 어색한 관계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막으로 들어간 상호는 봉수 보기가 미안하고 어색하였는지 막걸리만 거푸 들이켰다. “자 들게, 이렇게 보니 무어라고 할 말이 없네.” 그리고는 정작 정순의 이야기는 피한 채 봉수에게 쓸데없는 질문만을 계속 던지는 것이었다. 전선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어느 전선에 있었는가. 중공군의 인해 전술은 어떻든가. 국군의 사기는 어느 정도인가 등등. 처음 얼마동안 봉수도 상호를 따라 막걸리만 들이키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상호였다. 그런데 그 말이란 것이 바로 자기 동생인 영숙이 얘기였다. 영숙이 벌써 고삼이라는 둥. 봉수에게 위문편지를 보낸다고 해서 정순이에게 주소를 물어봤는데 그녀도 모르더라는 둥. 마치 빼앗은 정순이 대신으로 자기의 누이동생을 주겠다는 듯이 상호는 속 모르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봉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정순이 말일세, 어떻게 된 건지 간단히 말해 줄 수 없겠는가?” 결국 봉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상호에게 물었다. 하지만 상호의 어떤 대답이 봉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상호는 거듭 용서를 빌 따름이었다. 자기가 죽일 놈이라고. 정순이 탐이 나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비겁하게 봉수의 전사통지서를 꾸며 정순을 속인 것까지 순순히 실토하고 용서를 빌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장학금으로 대학에 간 봉수에게 보다 유복했지만 공부를 못해 간신히 고등학교를 마친 상호는 항상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호에게 봉수는 여유로울 수 있었다. 가진 자의 너그러움이랄까. 그래서 상호가 어지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항상 봉수 편에서 상호를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상호는 봉수의 목숨과도 같은 정순을 뺏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야비한 방법을 동원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봉수에게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봉수는 정순을 만나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지금도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봉수는 지금이라도 정순이 마음을 돌린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정순을 만나야만 했다. 결국 봉수는 상호에게 정순을 만날 수 있게 협조해 달라고 부탁한다.
처음에 망설이던 상호는 봉수에게 거절의 뜻을 비친다. 지금에 와서 자기의 아내가 된 정순을 꼭 만나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봉수는 상호가 어떻게 생각하든 정순이 지난날의 했던 약속을 지킨다면 지난 일은 불문에 붙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다시 말해 정순이 봉수에게 돌아올 의향이 있다면 그녀와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이었다. 이 말에 놀란 상호는 봉수의 이같은 행동은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며 생각을 돌려보라고 애원조로 설득한다. 하지만 봉수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하였다.
봉수는 상호 앞에 식지와 장지가 뭉턱 잘라지고 없는 보기 흉한 바른 손을 내 보였다. “그렇다. 정순이가 이미 결혼을 한 줄 알았다면 나는 이 손을 들고 돌아오진 않았을 거야. 자넨 역시 내가 손가락을 얘기하는 줄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게 아니라네. 잘못 살아 돌아온 내 목숨을 얘기하고 있는 걸세. 이제 나는 내 목숨을 처리할 현실이 없다네, 그래서 정순이를 만나야 되겠다는 걸세, 이왕 이 보기 흉한 손을 들고 돌아온 이상, 정순이를 만나지 않아서는 안 되네. 빨리 대답을 해주게.”
봉수의 완강한 태도에 상호도 더이상 그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봉수에게 얼마간의 말미를 두어 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호와 헤어진 후 봉수는 상호의 저녁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한 다. 그가 만약 상호의 저녁 초대에 응했더라면 정순을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특히 상호 앞에서 정순과 만나기는 싫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회신이 영숙을 통해 왔다. 정순이가 친정엘 가는데 자신도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옥란을 통해 알려온 것이었다. 봉수는 영숙이 왜 간접적인 방법으로 정순의 친정행을 알려주는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정순을 만나고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정순이, 아, 그 어느 꿈결에서 보던 설운 연꽃 같은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의 어디가 어떻다는 것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결국 봉수는 꿈에도 그리던 정순을 다시 만나보게 되었다. 정순을 보는 순간 봉수는 한동안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정순과의 만남이었던가.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인 후 정순을 만나려고 한 이유를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옆에는 동행했던 영숙도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또다시 식지와 장지가 잘린 자신의 흉한 손을 내보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군대에서 보낸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강제 징집당한 그는 최전방 전투사단의 수색대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전투사단의 수색대는 매일같이 생과 사를 넘나들어야만 했다. 한번 출동하면 반 이상이 죽어 돌아오던 그 때 운 좋게도 그는 몇 번의 수색대 출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아서 돌아온들 그와 교대해 줄 군인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수색활동을 벌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결심했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살아서 정순이를 만나야겠다고. 그 순간 그에게는 밤잠을 설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도, 하나뿐인 누이동생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사를 같이 하다 옆에서 쓰러지는 전우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정순이를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를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서야 그는 죽어가는 전우들을 뒤로 한 채 사지에서 도망치듯 탈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