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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지음 | -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시골에서 올라와서 육사 시험에 실패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다.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다.

안:나와 동갑내기인 스물 다섯 살의 청년으로 부잣집 장남이며 대학원생이다. 지독히 개인주의 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인물이다.

사내: 삼십 대의 월부책장사. 열심히 일했지만 자신의 전부였던 아내의 죽음으로 그 역시 처절하게 무너진다.



서울, 1964년 겨울의 어느 선술집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에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트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軍用)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나는 육사를 가고 싶었지만 시험을 실패하고 군대에 다녀왔다. 제대 후 서울로 올라와 취직한 곳이 구청의 병사계였다. 나는 퇴근 후 우연히 술 생각이 나 선술집에 들렸다. 길쭉한 카바이트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안(安)이라는 대학원 학생을 만난다. 그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데 그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가난뱅이같이 보였다. 그리고 서른 대여섯의 나이처럼 보였다.

나는 안과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었다. 둘은 그럭저럭 자기 소개를 나누었는데 안은 나이가 스물 다섯 살이고 부잣집 장남이었다. 대학 구경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이었다. 나 역시 안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되기에 나 역시 스물 다섯 살이며 시골 출신이고,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는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군대에 갔다가 지금은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둘은 서로 각자의 소개가 끝나자 갑자기 서먹해졌다.



나와 안의 의미없는 대화

자기 소개들은 끝났지만 그러고 나서는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잠시 동안은 조용히 술만 마셨는데 나는 새까맣게 구워진 군참새를 집을 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군참새에게 감사하고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잠시 둘 사이엔 말이 오가지 않고 술잔만 오갔다. 구워진 참새를 집을 때 나는 겨우 안에게 말을 걸었다.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안은 아직까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다시 나에게 “김형은 파리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예.”라고 대답하곤 그 이유로 파리가 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적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안은 가만있어 보라며 잠시동안 있더니 역시 파리밖에 없노라고 대답했다.

낮에는 날씨가 따뜻했기 때문에 길은 얼음이 녹아 흙물로 가득했는데 밤이 되면서 다시 기온이 내려가 흙물은 우리의 발 밑에서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내가 신고 있는 쇠가죽으로 된 검정 구두는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충분히 막아내지 못했다. 사실 이런 술집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한잔하고 싶을 때나 들릴 데지, 옆 사람과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실 만한 곳은 못 되었다. 하지만 때마침 안이 나에게 그럴 듯한 질문을 해왔기 때문에 추위 때문에 저려드는 발을 좀더 참기로 했다.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안의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사관학교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얼마 동안 나는 나처럼 대학 입시에 실패한 친구 하나와 미아리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장교가 된다는 꿈이 깨져서 퍽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재미를 붙인 것이 있었는데 아침에 만원이 된 버스에 타는 것이었다. 친구와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숨을 헐떡거리며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에게 가장 부러운 것은 밤이 되면 불빛이 환하게 켜지는 빌딩들 숲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고, 신기한 것은 버스에서 1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사이에 두고 예쁜 아가씨 곁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아가씨들과 살을 비비고 서 있을 수도 있어서 그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버스를 이것저것 갈아타면서 보낸 적도 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자 안은 중간에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며 말을 끊었다. 나는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친구와 하숙을 했을 때 친구와 나는 출근 시간이면 만원 버스 속을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젊은 여자 앞에 섰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아랫배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 처음에는 얼른 눈에 띄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그 여자의 아랫배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호흡하기 때문이라고 안이 대꾸하자 나는, 물론 그렇겠지만 아침의 만원 버스간에서 보는 젊은 여자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지 모르겠으며, 그 움직임을 지독히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음탕한 얘기라고 기묘한 음성으로 안은 말했다. 나는 안의 말에 화가 났다.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것은?’이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답하려고 일부러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 결코 음탕한 얘기가 아니며 그 얘기는 정말이라고 나는 강경하게 말했다. 그 동작은 ‘오르내린다’는 것이지 꿈틀거린다는 것은 아니라는 김형은 아직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안이 말했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으로 떨어져서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에, 안이 방금 생각해봤는데 그 오르내림 역시 꿈틀거림의 일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나는 몹시 즐거워져서 안형은 어떤 꿈틀거림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어떤 꿈틀거림이 아니라 그냥 꿈틀거림이라고 안은 대답했다.

우리의 대화는 또 끊어졌다. 이번엔 침묵이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이제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됐다고 다소 서글픈 기분으로 생각했다. 결국 뭐라고 인사를 할까하고 궁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안이 내 손을 슬그머니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안형은 몰라도 내가 한 얘기는 정말이었다고 좀 귀찮아져서 대답했다. 안형은 또래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면 꼭 꿈틀거림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어지지만, 그 얘기는 언제나 5분도 안돼서 끝나버린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다.

다른 얘기를 하자며 그가 얘기를 꺼내자 나는 심각한 얘기를 좋아하는 안을 곯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의 음성을 자기가 들을 수 있는 취한 사람의 특권을 맛보고 싶어서 얘기를 시작했다.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 선 가로등들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 째 등은 불이 켜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좀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자 신이 나서 계속했다. “그리고 화신백화점 6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졌다. 안의 얼굴이 놀라운 기쁨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도 빠른 말씨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안과 나는 서로 엉뚱한 질문과 대답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의 말투는 점점 서로를 존중해가고 있었다. “나는…”하고 동시에 말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번갈아서 서로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다가 나는 이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은 말이 틀림없다면 안경을 번쩍이고 있는 이 안이라는 친구는 부잣집 아들이고, 높은 공부를 한 청년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나는 안에게 부잣집 아들이고 대학원생인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안은 자신의 아버지가 부동산만 해도 천만원쯤 되는 부자이고,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학생증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나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면서 “실은 좀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데, 안형 같은 사람이 추운 밤에 싸구려 선술집에서 나 같은 사람이나 간직할 만한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좀 열띤 음성으로 그렇지만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김형이 추운 밤에 거리를 쏘다니는 이유는 뭐냐”고 물어왔다. 나는 습관은 아니지만, 나 같은 가난뱅이는 호주머니에 돈이 좀 생겨야 밤거리로 나올 수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하숙방에 혼자 있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었다. 안은 나의 말에 자신은 밤이 되고 거리로 나오면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안는 “사물의 틈에 끼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며 “낮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놓고 있는 그런 사물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일이겠느냐”고 했다. 둘 사이엔 꽤 진지한 이야기가 오갔다.

안은 이번에는 쾌활한 음성으로 여기서 나가 따뜻한 데로 가서 한잔씩 더하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가끔 이렇게 밤거리를 쏘다니는 밤엔 꼭 여관에서 자고 간다고 말했다. 우리가 각자 계산하려고 할 때, 한 사내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옆에서 술잔을 받아놓고 연탄불에 손을 쬐고 있던 사내였는데 술을 마시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불을 쬐고 싶어서 잠깐 들렀다는 꼴을 하고 있었다. 제법 깨끗한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엔 기름도 얌전히 바르고 있었지만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서른 대여섯 살짜리 그 사내는 나와 안 중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그냥 우리 쪽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 있습니다만.” 그 힘없는 음성으로 봐서는 꼭 끼어달라는 것은 아닌 것도 같았고,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나와 안은 얼굴을 마주보고 나서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 함께 가시자고 말했다. 사내는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고맙다고 하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아내의 시신을 판 돈을 들고 나온 서글픈 사내와의 만남

안은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유쾌한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술좌석에서 알게 된 사람끼리 의외로 재미있게 놀게 되는 일이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경우 이렇게 힘없는 목소리로 끼여드는 사람은 없었다.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끼여들어야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목적지를 잃은 사람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갔다.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 판 속에서는 예쁜 여자가 웃고 있고, 소주 광고며 약 광고의 네온사인이 꺼졌다가는 다시 켜지며 오랫동안 빛나고 있었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여기저기 엎드려 있고, 그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지금 몇 시쯤 되었느냐”고 힘없는 아저씨가 안에게 묻자 “아홉시 구분 전”이라고 안이 대답했다. 힘없는 아저씨는 아직 저녁을 안 했다며 자신이 살 테니까 같이 가자고 했다. 나와 안은 저녁을 먹었다고 하고 “내가 혼자서 드시라”고 하자 아저씨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따라가 드릴 테니 저녁을 드시라고 안이 말했다.

우리는 근처의 중국 요리집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서 앉자 아저씨는 우리에게 뭘 좀 먹으라고 또 한번 간곡하게 부탁했다. 우리가 사양해도 그는 또 권했다. 내가 그의 권유를 막기 위해서 아주 비싼 걸 시켜도 되냐하자, 그는 처음으로 힘있는 목소리로 사양말고 그러라는 것이다. “돈을 써버리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나는 그 사내에게 어떤 속셈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불안했지만, 통닭과 술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가 주문한 것과 내가 말한 것을 모두 청했다. 안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사내는 안에게도 뭘 좀 먹으라고 권했는데, 안은 펄쩍 뛰며 사양했다. 전차의 끽끽거리는 소리와 자동차들의 달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가까운 곳에서는 이따금 초인종 울리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어색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사내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들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제 슬프지도 않다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거 안되셨군요 하며 안과 나는 각각 조의를 표했다. “아내와 나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몽땅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돈은 넉넉하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우리는 어디든지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딸기철엔 수원에도 가고, 포도철엔 안양에도 가고, 여름이면 대천에도 가고, 가을엔 경주에도 가보고, 밤엔 함께 영화 구경, 쇼 구경하러 열심히 극장에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무슨 병이었느냐고 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성 뇌막염이라고 의사가 그랬습니다. 아내는 옛날에 급성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도 있고, 급성 폐렴을 앓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모두 괜찮았는데 이번의 급성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죽고 말았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동안 무언지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안이 손가락으로 내 무릎을 찌르며 우리는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눈짓을 보냈다. 나도 역시 동감했지만 그때 사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계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눌러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는 재작년에 결혼했는데,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친정이 대구 근처에 있다는 얘기만 했지 한번도 친정과는 내왕이 없었다. 나는 처가집이 어딘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 수 없었다. 사내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입을 우물거렸다.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이냐고 내가 물었다. 한참 후에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천 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 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실습 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자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사환이 접시를 놓고 나가는 동안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분 나쁜 얘길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버리고 싶은데요.” “쓰십시오.”하고 안이 얼른 대답했다.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달라고 사내가 말했다. 다시 한번 사내가 간청하자 우리는 승낙했다. 멋있게 한 번 써보자며 사내는 처음으로 웃으면서 하지만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중국 집에서 나왔을 때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 원이 없어졌다.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한쪽 눈으로는 웃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도 지쳤다고 말하고 , 나는 액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다며 중얼거리고, 거리는 춥고 한산했고, 소주광고와 약광고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고, 전봇대의 아가씨도 그대로 웃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하고 아저씨가 말하고 안과 나도 그 말을 흉내내며 말했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사내가 양품점의 쇼윈도를 가리키며 우리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내 아내가 사주는 거라며 호통을 치면서 넥타이를 골라 가지라고 했다. 우리는 넥타이를 들고서 양품점을 나왔다. 돈은 6백원이 없어졌다. 아내가 귤을 좋아했다며 사내는 귤 수레 앞으로 돌진했다. 3백원이 없어졌다. 우리는 귤껍질을 벗기면서 부근에서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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