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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아지는 살들

이호철 지음 | -
닳아지는 살들

이호철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아버지: 은행장으로 일하다 은퇴하고 명예역으로 있는 칠십이 넘은 집안의 주인. 현재는 귀가 멀고 반 백치 상태에 거동이 불편하다. 그러나 이북으로 시집간 맏딸이 꼭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으며, 이따금 가족단위의 기다림이라는 행사를 한다.

성식: 정애의 남편이자 영희의 오빠.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했으나 미대를 들어가 졸업했다. 고학력 백수로 지내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장남으로 집안 일에 대해 항시 방관자적 자세를 유지한다.

정애: 이 집안의 며느리이자 성식의 아내로 남편에 대한 애정은 없으나 시아버지와 시누이와는 잘 지낸다. 시아버지와는 다른 의미의 백치상태이며, 현재의 상황에 대한 변화의 의지는 없다.

영희: 스물 아홉 살 먹은 막내딸로 현실을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있으며, 뭔가 바꿔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재와는 결혼에 대한 묵시적 약속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선재: 이북으로 시집간 이 집 맏딸의 시사촌 동생으로 1.4후퇴 때 월남했다. 이 집 어머니가 생전에 몹시 아껴주고 측은하게 여겼던 인물이다.

식모:아버지의 집안 통제력이 약해지자 반비례하여 자유롭고 활달하고 뻔뻔해진 인물이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 그 무료함에 대하여……

“꽝 당 꽝 당. 단조로운 소리이면서 송곳처럼 쑤시는 구석이 있는, 밤중에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이상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 저 소리는 기어이 이 집을 주저앉게 하고야 말 것이다.”

오월의 어느 날 저녁 맏딸이 열 두 시에 돌아온다고 해서 온 집안은 기다림이라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서성대거나 함이 없이 마치 언제나처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은행장으로 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명예역으로 이름만 걸어 놓고 있는 칠십이 넘은 늙은 주인. 단정하고 귀티나 보이는 외모와 옷차림이나 헐렁해 보이고 축 늘어진 앉음새는 매우 힘없어 보였다. 사실 그는 귀가 멀고 반 백치였다. 그 옆에는 한복을 싫어하는 시아버지의 뜻을 따라 봄 스웨터에 통이 좁은 까만 바지 차림의 며느리 정애와 시누이이자 이 집의 막내딸인 영희가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정애는 시아버지의 한 팔을 부축하고 앉았고 영희는 옆에 턱을 받치고 앉았다.

꽝 당 꽝 당. 조용하고 썰렁한 분위기의 집에 멀리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긴 여운의 쇠붙이 뚜드리는 소리가 단조로운 느낌을 주며 송곳처럼 신경을 자극했다. 특히 영희는 이 소리가 신경에 거슬리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소리인지 정애에게 물었고 정애는 다시 무슨 소릴까 라고 반문하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 소리는 밤 새 이어질 듯 했고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바깥의 나무들도 그 소리의 여운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고, 방의 벽 틈서리도 쪼개지고 있는 것이었다. 저 소리로 인해 이 집이 주저앉게 되고 말 것이며 그리고 모두 마지막 향연을 벌인 후 유감없이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바로 저 소리로 인해…….영희가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깔깔대고 웃으며 정애에게 아버지 팔 부축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며느리 같지 않고 딸 같다고 말하자 정애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그 옆의 아버지는 물론 못 듣고 있었고, 제 코 앞의 사마귀만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영희는 다급하게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우리 집도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이 정도쯤 되어 있으니 민주적이라는 둥, 집안을 받들어 주는 기둥이 빠진 것 같다는 둥 얘기를 계속했다. 저 쇠붙이 뚜드리는 소리를 안 들으려는 억지 조잘거림이었다. 정애는 대꾸가 없었다. 시아버지와는 다른 성격의 백치가 되어 있었다. 마치 대화란 서로의 신경을 긁어 놓는다든지, 모여 앉아 잊어버렸던 일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골치 아파하거나, 쓸모 없는 사변을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믿는 듯 했다.

열두 시. 기다림의 시간의 최종 종착시간은 대개 밤 열두 시였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모두 그냥 그렇게 그 시간까지 기다리곤 해왔다. 오빠가 이층에 있는지, 선재가 들어왔는지를 묻던 영희는 문득 장난치듯 모두 헤어져 버리자고 정애에게 말을 던졌다. 선재는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주위에서도 생각하고 있고, 또 서로가 각오하고 있는 사이의 사람이었다. 때마침 이층에서 오빠 성식이 내려오며 다들 뭐 하는지 묻자 영희는 다소 가시 돋친 소리로 오빠가 늘상 파자마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언니를 기다린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오빠가 이 집의 젊은 주인이므로 같이 기다려야 한다고 하고 아버지에게도 알린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하나 그냥 머리를 끄덕였다. 선재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방관적이며, 선재에 대해선 경멸하고 있는 오빠의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기던 영희는 오빠에게 인신공격성의 말을 한 다음 복도로 나와버렸다.

꽝 당 꽝 당. 잠시 잊었던 그 소리는 다시 방안에서 보다 더 큰 무게로 마치 지축을 흔들 듯이 영희의 신경에 달려들었다. 이북에 있는 언니가 열두 시에 돌아올 것이라 생각지도 않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일에 이젠 익숙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년 전부터 귀가 멀어져 말수도 적어지고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대개는 눈짓이나 표정으로 뜻을 전하곤 하면서 점차 반 백치가 되어갔다. 그로 인해 집안 전체를 통솔해 나가는 줄이 끊어지면서, 식모는 훨씬 자유스러워지고 활달해지고 뻔뻔해졌으며, 이 집에서 선재를 제일 만만하게 본 셈인지 곧잘 농을 걸기도 하여 영희의 자존심을 긁어 놓았다. 그리고 외출도 잦아졌다. 4.19데모 때나 5.16때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었다. 설마 데모에는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시장을 보아 가지고 들어설 때는 넓은 터전의 냄새를 거칠게 풍기고 있었다.

부엌에서 나오던 식모는 혼자 푸념으로 곱게 미치지 하필이면 저녁 12시냐고 하자 영희는 너 뭐라고 그랬냐고 다그치다, 너는 같은 식구 아니냐며 눈물지었고, 식모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혼자 한 얘긴데 라고 변명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오빠 성식은 흰 테 안경을 쓰고 한손에는 코카콜라 통을 든 채로 신문만 보고 있었다. 걷어올린 파자마 밑으로 보이는 하얀 살결의 여윈 다리에 심줄이 솟아있고 털이 무성했다.

아버지는 그냥 전의 자세 그대로였다. 영희는 시누이 정애가 오빠와 자리를 같이 하면 언제나 우수에 서린 얼굴을 하고, 오빠와 시선조차 마주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시아버지나 시누이인 자신에게 어떻게 그토록 충실할 수 있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큰 벽시계가 10시를 치자 늙은 주인은 마치 그 소리를 들은 듯 허한 눈길을 시계 쪽으로 주었고, 영희는 올케의 무릎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아버지의 그 신묘한 행동을 보며 키들키들 웃었다. 영희는 조용한 어조로 그러나 차츰 격해지며 정애에게 오빠의 무기력과 무능을 지적하고, 아버지의 상황과 자신의 스물 아홉이라는 나이, 시누이가 현재 집안의 주인이라는 사실 등을 들며 왜? 무슨 명분으로 이 집을 지키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모두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한 눈치였으나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성식의 긴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정애의 남편이나 영희의 오빠는 없고 찬 안경알만이 있었다. 아버지 또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허한 눈길만을 보내왔다. 영희는 집을 팔고 교외로 이사가고, 아버지는 빨리 돌아가시도록 하고, 올케는 이혼하고 식모는 내보내고, 둘이….라며 말꼬리를 흐리다 잠겨드는 목소리로 올케에게 현재 상황의 답답함과 그것을 바꾸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했다. 그러나 올케는 묵묵 부답이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의 쇠망치에 부딪는 소리가 조용해진 틈서리로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선재, 밋밋한 이 집안에서 그나마 변화의 하나

“결국 이 기다림의 향연은 늙은 주인이 역시 아직은 이 집안의 주인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맏딸이 돌아온다고 고집을 부리면 맞이할 준비들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돌아올 것 같은 실감이 나기도 하였다.”

식모가 응접실 문을 열었을 때 영희는 정애의 한 손을 잡고 있었고, 성식은 다시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딱히 신문을 보는 눈치는 아니고, 불빛에 안경 알만 번쩍였다.. 늙은 주인은 그냥 어두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주인의 맏딸이자 정애는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맏시누이를, 영희는 언니, 성식은 누님을.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분명하게 기다린다는 의식은 없었다. 도대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저 모두가 막연하게 기다린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런 것조차도 없다면 그들은 한집에서 한가족이라고 살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다림의 향연은 모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고 또 결국에는 늙은 주인이 아직은 이 집안의 주인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맏딸이 돌아온다고 고집을 부리면 맞이할 준비들을 해야 했고, 그렇게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으면 정말 그녀가 돌아올 것 같은 실감이 나기도 했다.

식모가 선재가 영희를 찾는다는 말을 전하자 영희는 화들짝 놀라듯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영희는 차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형광등 불빛에 비해 골목 끝 어귀의 잡화상 전등불빛이 따뜻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순간 무엇인가 그리워졌다.

옆 담벼락에 또 술에 엉망으로 취한 선재가 서 있었고 영희는 그런 선재를 술 취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좋아했다. 취한 선재의 등뒤로 다가가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스스로 꽤 따뜻한 솜씨라고 느끼며 뭐 꺼리길 것이 있다고 들어오지 못하고 항상 자기를 찾느냐며 선재씨 답지 않다고 말했다. 선재는 허붓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영희에게 따질 것이 있다며 당장 우리 이 집에서 나가자고, 오늘 정말 나가자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뭔지 몰라도 정말은 정말이라고 영희도 생각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에 쇠망치 두드리는 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취한 선재와 마주한 영희에게 그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자극이 둔해졌다. 선재가 토하기 시작하자 영희는 복받치는 웃음으로 킬킬대며 구토물들을 손으로 받아 한 쪽으로 버린 후 선재의 눈에 배어 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선재는 또 한 번 허붓하게 웃었다. 한 팔로는 선재의 전신을 부축하고 한 손으로는 등을 두들겨 주었다. 영희에게는 건장한 사내를 부축해주고 있다는 알이 찬 실감과 동시에 결국은 이렇게 낙착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서서히 흥분되고 있었다.

꽝 당 꽝 당. 쇠붙이 소리는 평범하게 멀었다. 근육이 좋은 사내가 두드리고 있을 것이고 불꽃은 튀기기도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근처 뜰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 거리의 얘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영희가 선재에게 저 소리가 들리느냐고 묻자 선재는 잠시 어리둥절히 귀를 기울이는 눈치를 보이다 들린다고 답하자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영희는 선재를 부축하고 들어오다 층층다리 밑에 두고 응접실에 들러 약간 짜증이 났다는 투로 선재가 또 취했다고 얘기하자 정애는 그 무엇이나 다 알고 있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영희는 약간 낮을 붉혔다.

마침 식모가 황급히 문을 열면서 웃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으로 선재가 현관복도에다 토했다고 하자 영희는 식모와 같이 달려나갔다. 식모는 꽤 좋은 눈치를 보였다. 응접실은 다시 휑해졌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냐 눈짓으로 묻고 정애는 위층을 가리키며 선재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식모와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선재가 이층 방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애는 선재라는 사람이 꽤 좋게 생각됐다. 성식이 천천히 일어나 말없이 나가려하자 정애가 이층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대꾸 없이 그냥 이편을 내려보다 기어이 나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소리에 정애는 까닭 없이 놀랐다. 천천히 몇 시간이 걸려 올라가는 듯 했고 친아버지 같은 느낌의 시아버지의 팔을 정애는 더욱 힘주어 잡으며 눈을 감았다.

식모가 응접실 문을 열자 싸늘한 하얀 불빛 아래서 정애가 혼자 이상하게 울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고 늙은 주인은 뜰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냥 서 있다가 문을 닫으려는 식모에게 정애는 영희가 안 내려오는지 물었다. 식모는 좀 있다 내려온다고 했다고 하자 정애는 왜 라고 반문하다 알았다는 말을 하며 대화를 마쳤다.

식모는 정애가 정말 알았을까하고 생각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피차가 화난 듯 쳐다보았고, 그런 그녀들을 늙은 주인은 여느 때답지 않은 뚜릿뚜릿한 눈길로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희의 실질적 결혼, 늙은 주인의 오래된 기억들

“열두 시에 언니가 돌아온대요 …… 정말 정말이야요, 늘 답답하지요? 선재씨도 그렇죠?.…… 모두 무엇을 놓치고 있어요, 큰 배경을 놓치고 있어요, 뿔뿔이 떨어져 있어요,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답답하죠?“

선재의 방은 초라하게 좁고, 독신남자의 씁쓰름한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선재를 침대에 눕히고 뜰로 향한 창문을 열었다. 영희는 아직 아까의 흥분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흥분을 유지하고 싶었고, 흥분이 가시기전에 일을 치르고 싶었다. 원피스를 벗고 침대에 걸터앉아 선재를 흔들며 자지 말라고, 술을 깨라고 종용했다. 선재는 술이 깨고 정신을 차렸다고 대답했다. 꽝 당 꽝 당, 그 소리는 계속되었고 무척 가까이에서 들렸다. 뚫린 창문은 마치 그렇게 뚫려진 구멍 같았고 뚫린 구멍 저편의 초여름 밤은 쾌적한 기분을 연출하고 있었다.

영희는 선재에게 취하지 말라고 얘기하자 선재는 안 취했다고 답했다. 영희가 오늘 같은 날 하나라도 놓치지 말라고 하자 대답대신 선재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몸을 한번 뒤척였다. 둘은 모로 누워졌고, 꼭 알맞은 공간이 됐다. 오늘 며칠이냐는 영희의 물음에 선재가 모른다고 답하자 그런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고 속삭이며, 여느 사내와 다름없는 선재의 조급함을 뒤로하며 얘기부터 하자고 했다. 영희는 이런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열두 시에 언니가 돌아온다고, 정말이라고 말하는 영희의 목소리는 차츰 애처롭고 가냘픈 목소리로 변하고 답답함이 배어 나왔다. 잠시 뜬 영희의 눈에는 창문 저편의 오월 밤이 보였고, 부끄러움에 다시 눈을 감고 입만 쉴새없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쫓아오는 딱딱한 쇠망치 소리를 혼자 감당하기가 너무 무서워 저녁 내내 도망하고 있다고 선재에게 말했다.

늙은 주인은 과거의 기억과 현실을 오가고 있다. 세일러복을 입은 맏딸이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정구 라켓을 들고 이겼다며 아버지의 팔에 매달리고 어떻게 이겼냐는 질문에 ‘이렇게!’라며 정구 라켓을 휘두른다. 집안은 맏딸이 있어서 웅성웅성하다. 성식은 숫돌에 칼을 갈고 있고 꽝꽝한 햇볕에 숫돌과 칼이 번쩍인다. 정문은 휑하니 열려있고 바람은 제멋대로 드나들고 뜰의 나무들도 기름이 올라 미끈미끈하고 흙 냄새 나뭇잎 냄새가 섞여 물씬물씬하다. 불만이 없어 짖을 거리가 없는 바둑이는 뜰 한 가운데 자빠져 누워있고, 그런 개를 영희는 아장아장한 작은 발로 걷어찬다. 개는 부당하게 채인 넋두리를 하듯 짖지만 곧 웃으며 꼬리를 흔든다. 늙은 주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오줌이 마렵다. 며늘아 오줌이 마렵다.’

문을 열고 호젓이 서 있는 식모애에게서 신 살구알 냄새가 나고 버르장머리가 없다. 아내는 뜰에서 장미꽃을 따고 있고, 허리에는 살이 올라 있다.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는 영희를 마음대로 울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맏딸이 아내에게 라일락꽃을 심자고 하자 아내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은 일은 못 할 일이야 있겠냐며 심자고 한다. 식모가 지나가자 아내는 그녀에게 어딜 가냐고 묻고 그녀는 우그러들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늙은 주인은 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오줌이 마렵구나, 며늘아 오줌이 마렵구나.’

머리가 까만 어머니가 뽕나무에 올라가 있다. 서산에 걸린 해를 보라고 얘기하지만 어머니는 들은 체도 안 한다. 서산 그늘이 달려오고 있다. 죽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던 아버지는 뜰에 나와서 또 울고 있다. 풀어진 머리카락이 길어 어머니 같지가 않다. 지붕 위에는 수염이 시커먼 사람이 올라가 이상한 고함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온다.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와서 절을 한다. 웅성웅성해서 좋기도 하고 어머니가 죽었대서 서러워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자꾸자꾸 운다. 아버지 울지마, 울지마. 늙은 주인은 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며늘아 오줌이 마렵구나, 오줌이 마려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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