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숙한 밤의 포옹
서기원 지음 | -
이 성숙한 밤의 포옹
서기원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 지식인 청년, 군인. 전쟁터의 살인과 죽음을 혐오하던 중 애인 상희로부터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탈영한다.
상희: 폐병 환자. 나의 애인.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
선구: 북측에서 피난내려 온 정체 불명의 **협회 지부의 활동가. 창녀 진숙의 애인.
진숙: 포주에게 진 빚만 계속 늘어가는 창녀. 선구의 애인
김상사: 소대장이 죽자 소대장 대리로 승격된 하사관. 적의 포로를 이유 없이 쏘아 죽인다.
중위: 명예욕이 가득한 소대장. 전투원 사망 보고를 허위로 작성해서 보고한다. 전사한 소대원의 장례를 허락하지 않는다.
전쟁터의 비인간적 현실
김상사는 주먹밥을 먹다가 말고 밥풀이 붙은 손으로 총을 잡고는 적의 포로를 단방에 쏘아 죽였다. 그는 총구를 적병의 가슴에 바싹 붙인 채 방아쇠를 당겼다.
육이오 전쟁에 참전한 전투보병인 나는 전쟁터에서 자인되는 살벌한 살인에 대해 몹시 심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 소대장이 죽자 소대장 대리가 된 김상사는 문득 주먹밥을 먹다가 생포한 포로를 쏘아 죽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소총을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전쟁 중일지라도 포로를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군법인데 김상사는 자기의 감정에 따라 포로를 죽인 것이다. 나는 김상사를 발로 걷어차고 반항했다. 그것을 지켜본 전우들은 나를 정신 이상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비인간적 현실에 좌절하고 말았다.
김상사의 비도덕적 행동과 유사한 행동은 소대장에 의해서 자행됐다. 소대장은 소대원이 전사한 시체를 앞에 두고 바라봤다.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 나의 의지는 꺾이고 말았다. 적군의 총에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대장이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병력손실을 최대한 줄이고 작전 개시일에 맞춰 총력을 다하라는 상부의 명령 때문이다. 소대장은 명령을 이행했다는 행정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그 병사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허위 보고를 통해 공명심을 채우겠다는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전쟁터의 살벌한 모습들에 혐오감을 느끼는데 어느 날 상희로부터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탈영을 감행하다
상희가 폐가 악화되어 나를 불렀고, 나는 그 편지를 받자, 지체없이 탈영을 단행했을 따름이었다. 나의 애인이 방금 죽어 가고 있다고 선임하사에게 애걸했으면 아마도 휴가를 줬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상희에게로 달려가는 출발만이 중요했지 다시 돌아올 보증과 의무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사치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상희의 편지를 받고 나는 정식적으로 휴가를 신청하지 않고 부대에서 무단이탈을 감행했다. 목숨을 건 전투가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휴가증을 발급해서 정식으로 휴가를 갈 수 있는 것이 전쟁의 상황이다. 나의 동료 중 한 사람은 관인만 찍은 백지 휴가증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위세를 부리며 돈을 벌기도 했다. 나는 애인이 폐병으로 위독하다고 말했으면 휴가증을 받고 정식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만 먹었다면 위조 휴가증 정도야 쉽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헌병들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도 나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오로지 상희를 만날 생각만이 온통 머리를 에워쌌다.
나는 탈영을 감행해서 사흘동안 산을 헤맸다. 그러던 중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나게 됐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를 겁탈한 다음 엉겁결에 목 졸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산을 도망쳐 내려왔다. 나는 기차를 타고 도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은 내가 바라던 그 눈길들이 아니다. 전선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도시의 삶에서는 전쟁터의 살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목숨을 담보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나에 대해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도 무관심했다.
상희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그 골목 안 막다른 벽에 의지한 그녀의 집까지는 캄캄한 동굴 속을 더듬어 기어가는 악몽이어야 했고, 거기까지 이르기 전에 내 삭신은 두개골로부터 와르르 허물어져 버릴 것이었다. 나는 패배하였다. 나는 내가 도망병이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상희의 집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하여 끝내 패배한 낭비자인 것이다.
산 속에서 여자를 죽인 죄책감 때문에 나는 상희를 곧장 만나지 못했다. 나는 산 속의 시골 처녀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어도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위로는 되지 않고 죄책감의 골은 깊어만 갔다. 나는 그 여자를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쓰레기통 근처를 헤매고 있는 갈비뼈가 앙상한 개라고 생각했다.
나는 상희를 만나기 위해, 상희가 죽기 전에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탈영을 했지만 상희의 집 앞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한번은 실수로 지나쳤다가 두 번째는 의식적으로, 상희의 집이 있는 골목을 지나쳤다. 도저히 들어갈 용기를 못 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기의 인생을 패배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패배자이며 낭비자일 뿐이었다.
나는 상희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밤이 되자 사창가로 들어갔다. 산 속에서 시골처녀를 겁탈한 것처럼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다. 욕정을 채우고 탈영병인 자기의 신상을 숨기기 위한 장소로 사창가를 택한 것이다. 나는 사창가에서 선구라는 고마운 사내를 만났다. 선구는 사창가 옆방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해장술을 하자고 권했던 사내이다. 그는 북쪽에서 피난을 내려온 **협회 지부의 활동가이며 창녀 진숙과는 애인 사이이다. 그는 욕정을 채우기 위해 금요일마다 진숙의 방에서 잔다고 했다. 나와 선구는 해장술 한 잔에 친구가 됐다. 선구는 자기의 방에 나를 데려가서 편히 쉬게 해줬다. 밥 사먹을 돈을 주고 잠까지 재워줬다. 그는 낮에는 **협회 지부에 나가서 일을 하고 밤에는 들어와 술을 마셨다. 나는 전쟁터의 살벌함에 치를 떠는 젊은이고 선구는 후방의 현실에 치를 떠는 젊은이이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사회현실의 부조리를 몸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루만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구와 나는 사회의 지저분한 윤리에 대해, 전투 행정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침대 밑에 모아둔 오줌병을 어떻게 할까
무엇보다도 나를 당황케 해준 물건은 침대 아래 꽉 들어찬 술병들이었다. 아니 그것들은 빈 병이 아니었다. 마개가 없는 병 속엔 거의 액체가 차 있었는데, 병의 유리 빛깔에 따라 노랗게도 비쳤고 어떤 것은 푸른빛으로도 보였다. …… 그 액체는 오줌이었다.
나는 선구의 방에 처음 들어가서 침대 밑에 쌓여 있는 술병을 보고 무척 놀란다. 술병들이 침대 밑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맥주를 담아 놓은 것으로 보였다. 술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선구가 모아놓은 오줌병이었다. 선구는 화장실이 멀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인 여자가 눈치를 챈다면 당장 쫓겨날 것이라고 한다. 선구는 나를 새 식구로 맞아들이면서 내가 싫다면 같이 치우자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해지만, 병 속에는 냄새까지 삭아져 없어진 오래된 오줌도 있었다.
이 오줌병들은 선구의 성격을 나타내줄 뿐 아니라 궁핍한 현실을 상징했다. 선구의 방은 판자로 대충 막은 열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그런 방도 세를 내고 살아야 했다. 화장실이 멀어서 가지도 못했다. 이러한 상황이 선구로 하여금 술병에 오줌을 누고 그것을 침대 아래에 쌓아두게 만든 것이다. 선구는 **협회 지부에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딱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일하면서 월급을 받았다.
오줌병이 있는 선구의 방에서 지내면서 나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상희를 찾아갔다. 상희는 피를 토하며 몹시 앓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상희에게 다가앉지 못하고 말았다. 다가앉으면 등을 쓸어줄 것이고 등을 쓸어준다는 것은 자기가 애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등을 쓸어주는 것밖에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가 된다고 생각해서 다가앉지도 않는 것이다. 폐병쯤은 현대 의학으로 쉽게 나을 수 있다고 위로한 것이 상희에게 내가 해준 일의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선구의 집으로 돌아와 잠에 깊은 빠졌다.
선구가 회사에서 돌아와 오줌병 치울 묘안을 생각해냈다고 자랑을 했다. 구두닦이 소년 하나를 불러서 줘 버리자는 것이었다. 소년은 병을 팔아서 돈을 벌게 될 것이고 자기들은 치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며 마침 주인 여자가 없는 틈이니까 그것은 가히 천재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선구는 구두닦이 소년을 불러서 오줌병을 치운다. 소년은 병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며 ‘횡재를 했다’고 기뻐했다. 소년은 친구를 불러 병을 지키게 하면서 선구의 방과 대문 밖을 왕복하며 오줌을 버리고 병을 챙겼다.
자살과 죽음
“만일 갈보년하구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면 남들이 비웃겠지?” …… “자살하려는 이유가 뭣인가?” 나는 그렇게 간신히 반문했다. “진숙이가 나하고 함께 죽자는 거야.” 그는 비명에 가까운 높은 목소리로 끼익끼익 웃었다. “자살이 유희인 줄 아나? 농담은 그만하게.” 내 얼굴은 울상이었을 것이다.
상희에게 갔다가 좌절하고 돌아온 나에게 선구는 자기가 자살을 해도 좋겠냐고 묻었다. 포주에게 진 빚만 늘어나는 진숙이가 함께 자살을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나는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살고 싶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상희와 너무나 대조적으로 생각되었다. 선구는 농담처럼 자살 이야기를 꺼냈다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날 진숙이가 찾아왔다. 진숙은 빚만 자꾸 늘어간다고 불안해했다. 나는 진숙에게 돈을 줄 테니 같이 자자고 했다. 진숙은 무척 화를 냈다. 내가 계속 같이 자자고 말하자 진숙은 기어이 나가버렸다. 나는 장례를 치러주지 못한 전우의 죽음을 생각했다. 장례 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소대장의 비인간적인 면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 전우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고 혼절하고 말았다.
어슴푸레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의식을 회복했다. 선구와 진숙이 보기에 나는 죽은 사람이었다. 선구와 진숙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서로에게 말했다. 선구는 나에 대해 탈주병이라는 사실밖에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진숙은 여자(상희) 때문에 자살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소리를 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희에게로
“상희야, 너한테 가서 내가 지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너의 뚫어진 허파에서 마지막 핏덩이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음식점과 창가가 꽉 들어찬 이 거대한 도시 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혓바닥으로 빗방울을 받아 마셔 가며 걸음걸이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의식을 회복했다. 벽에 걸린 누더기 같은 군복을 입으려고 했지만 몸에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선구와 진숙에게 미소를 보내주고 선구의 집에서 나왔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정처없이 걸었다. 나는 내 몸에서 나는 악취를 즐겁고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분명한, 자기 자신의 냄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희에게 가서 자기가 겪은 모든 일들과 자기의 진심을 털어놓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비가 내리는 도시에서 나는 상희에게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전후 현실의 고발과 지식인의 책임감
서기원이 1960년 6월 「사상계」에 발표한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은 1961년 제5회 동인문학상 후보상 수상 작품이다. 이 소설은 서기원 초기 소설의 대표작으로 전후 현실의 궁핍함과 전쟁터의 살벌함을 ‘나’의 심리를 중심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6.25의 후유증으로 인해 비인간적이고 속악한 세태가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서기원의 소설을 포함하여 당시에 발표된 많은 소설들은 이러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비해 서기원 소설이 특징적인 것은 그의 작품에는 ‘고발’과 함께 ‘책임의식’도 문제되어 있으며 그것이 일정한 시대적 공감을 얻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이 성숙한 밤의 포옹』에 등장하는 나의 행동은 전쟁터의 살벌함과 후방 도시의 혼란과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고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서기원의 투철한 작가 의식에서 발원한다.
『이 성숙한 밤의 포옹』과 유사한 모티프를 보여주고 있는 서기원의 다른 소설로는 「전야제」, 「연가」가 있다. 세 작품에서 공통적인 모티프는 주인공이 전쟁터를 떠나 애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주인공이 애인을 찾아가려는 마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찾아가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이 세 소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이 성숙한 밤의 포옹』,「전야제」,「연가」의 주인공은 탈영을 하고 애인을 찾아가려는 목표를 갖고는 있으나 그 목표와 끊임없이 갈등한다. 주인공은 그 갈등을 극복한 다음 현실과 맞설 의지를 회복한다. 서기원 초기 소설에는 이와 같이 현실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개선의 의지에 대한 촉구가 들어 있다. 서기원의 소설은 그럴 때에야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진정한 치유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욕망과 도덕의 줄다리기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은 ‘나’가 애인 ‘상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나는 탈영병으로 헌병들의 눈길을 피해 다닌다. 탈영하기 전에 주인공 나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전쟁터에서 자행되는 비인간적인 살인이다. 그런데 나는 탈영을 한 지 사흘만에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살인을 저지른다. 욕정을 채우기 위해 여자를 겁탈하고, 그 여자를 살려두면 자신의 탈영이 탄로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여자에게 가기 위해 다른 한 여자를 죽인 이율배반적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나’가 산 속에서 여자를 겁탈한 것은 “삼 년 동안이나 굶은” 성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기차를 타고 도시에 들어가 상희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이다. 애인을 만나기 위해 탈영을 감행했던 것인데 한 여자를 죽이고서야 애인의 집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나의 심리는 ‘여자를 겁탈한 욕망’과 그 ‘여자를 죽인 것에 대한 도덕적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게 된다. 나는 상희의 집에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돈을 내고 성욕을 채울 수 있는 사창가로 가고 그곳에서 수치심과 회의를 동시에 느낀다.
나는 상희를 찾아가지 못하는 동안 끊임없이 탈영의 이유와 목적을 생각한다. 처음부터 목적은 단 한 가지, 상희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희를 만나러 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산 속에서 여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얼굴이 상희의 얼굴과 오버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나는 회의하고 절망한다. 나는 탈영의 목적이 ‘책임없는 자유’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회의한다. 그렇지만 나는 책임없는 자유란 현실에서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욕망만을 추구하는 인물이 아니라 도덕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가 잠시 머물기로 한 선구의 집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오줌을 담은 술병이 침대밑에 가득하다. 몸을 팔아도 빚만 늘어가는 진숙의 경제적 상황은 당시의 경제적 궁핍상을 상징한다. 전쟁터에서 겪은 나의 체험은 전쟁의 비참하고 비도덕적인 살벌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후방 도시에서 살아가는 선구의 삶은 경제적, 사회적 궁핍과 피폐함, 비인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와 선구는 각각의 비참한 상황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나와 선구는 해장술 한 잔만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결국 나와 선구는 당시를 살아가던 젊은이들 모두의 자화상의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