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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지음 | -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형: 외과의사이며 소설을 쓴다. 자신의 책임도 아닌 소녀의 수술 실패로 인해 병원 문을 닫는다. 이후 고민에 빠지고 6․25의 상처가 되살아나자 괴로워한다. 하지만 소설 쓰기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아픔을 극복한다.

나: 화가. 혜인을 사랑하면서도 놓쳐버리고 매사에 끝없는 무기력과 패배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형의 소설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고 반성하게 된다.

오관모: 형의 소설 속 인물. 인간의 이기심과 생존 욕구의 전형이다.



김일병: 형의 소설 속 인물. 암담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으며 사라지는 인물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형과 그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나

화폭은 이 며칠 동안 조금도 메워지지 못한 채 넓게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버린 화실은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외과의사인 그가 열 살배기 소녀의 수술 실패로 인해 소녀가 죽게된 사건으로 받은 충격과 관계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수술의 실패는 분명히 형의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자 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을 만큼, 어차피 절반의 성공가능성도 없었을 뿐더러 어느 병원에서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형은 차츰 병원 일에 등한해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병원 문을 닫고 진종일 방에만 들어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밤이 되면 시내로 가서 만취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소설을 쓴다는 것인데 처음에 나는 그것에 대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느날 우연히 그 몇 장을 들추어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소설에는 형이 그토록 오래 입을 다물고 있던 십 년 전의 패잔과 탈출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외과의사로서 조용히, 성실하게 지내온 사람이다. 결혼 전 형수를 사이에 두고 다른 남자와 길고 힘든 싸움을 벌였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질긴 신념이 없으리라 여겨졌던 형이 그녀와 결혼하게 됐다. 어쨌거나 그다지 마음씀이 깊지 못한 형수와도 그럭저럭 별탈 없이 지내오는 인내심 있고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내가 언제나 형에게 궁금한 한가지는 형이 6․25 때 강계(江界) 근방에서 패잔병으로 낙오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같이 낙오되었던 동료를 죽이고서 그때는 이미 38선 부근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우군 진지까지 천리 가까운 길을 탈출해 나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형은 한번도 이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일이 없었는데 바로 요즘 쓰고 있다는 소설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히 형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더욱이 형은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곳에 와서 이야기를 딱 멈추고 있었는데, 그 동안은 나 역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소설이 끝맺어질 때까지 고통스럽게 기다리게 됐다.혜인과의 이별 그리고 오관모와 김 일병과의 만남

창으로 흘러든 어둠이 화실을 채우고 네모반듯한 나의 화폭만을 희게 남겨두었을 때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그림자처럼 혜인이 문에 들어서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불을 켰다.



혜인은 형 친구의 소개로 내가 운영하는 화실에 나오게 된 학사 아마추어이다. 그림 공부를 하는 중 입맞춤을 통해서 사랑하는 감정을 갖게 됐지만, 어느 날 그녀는 이제 화실을 나오지 않겠으며 나로부터도 아주 떠나는 것이라 했다. 나는 황급히 나의 감정을 정리해 버렸다.

혜인은 내게 청첩장을 주러 왔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혜인과 지냈던 화실 시절과 청첩장을 받아들고 있는 지금 그녀의 이야기와 그녀의 결혼, 모든 것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는 곧장 형의 방으로 가서 원고 뭉치를 폈다. 전날 그대로였다. 하루 종일 애쓴 흔적이 역력했으나, 형은 이야기의 결말에 대해서 즉 하나의 살인에 대해서 무척이나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대로 소설의 결말을 얻어보려고 밤을 세우면 상념에 젖기도 했다.

‘나’의 고향 마을에는 가을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사냥꾼이 찾아든다. 겨울이면 특히 마을 사람들 가운데 날품 몰이꾼을 데리고 산에 들어갔는데, 어느 겨울날 ‘나’는 그 몰이꾼에 끼어 사냥을 따라 나섰다. 어느 능선 너머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울려왔다. ‘싸늘한 음향 ―분명한 살의와 비정이 담긴 그 음향이 넓은 설원을 메아리칠 때, 나는 부질없는 호기심에 끌려 사냥을 따라 나선 일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은 상처 입은 노루의 핏자국을 따라 쫓았다. ‘나’는 마지못해 일행을 쫓다가 저녁 무렵에야 먼저 되돌아왔고, 곧장 앓아 누워버렸다. 결국 노루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끔찍스러워 몸서리를 쳤다.

형의 소설의 서장에는 이와 같이 무서운 긴장과 비장미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형의 소설이 나의 그림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인과 헤어지고 나서부터 나는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 그리고 싶어졌다.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려보지만, 실상 나는 그 많은 얼굴들 사이로 방황하고 있을 뿐, 튀어나갈 듯이 긴장된 선으로 얼굴의 외곽선을 떠놓고서 며칠 동안 고심만 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

형의 소설의 본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그것은 6․25 사변 전의 국군부대 진중에서부터 시작됐다. 형의 소설은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 사람은 오관모라고 하는 이등중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대 신병으로 들어온 김 일병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오관모는 키가 작고 입술이 푸르며 화가 나면 눈이 세모로 일그러지는 뱀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부대에 신병이 들어오기만 하면, “내게 배를 내미는 놈은 한 칼에 갈라놓는다.”고 위협을 하며 기를 꺾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날 밤이면 가엾은 신병들은 ‘배를 내밀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곤 했다. 그런데 김 일병이 신병으로 들어온 다음날부터 어찌된 일인지 관모는 약이 바짝 올라 김 일병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통나무를 베어 들고 부대 뒤로 돌아오고 있을 때였는데, 관모가 김 일병을 엎드려 놓고 빗자루로 정신없이 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자 대뜸 통나무를 뺏어다가 김 일병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러나 김 일병은 무서울 정도로 가지런한 자세로 매를 맞고 있었다. 관모는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끔찍스러운 광경이었다. 언제까지나 자세를 허물어뜨리지 않을 것 같던 김 일병이 마침내 천천히 머리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는데, 그때 ‘나’는 호흡이 멈춰버린 것처럼 긴장이 됐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바로 김 일병의 눈빛이었다. 김 일병은 타격이 있을 때마다 눈에서 ‘파란 불꽃’ 같은 것이 지나갔다. ‘내’가 관모와 김 일병 사이의 기이한 싸움에 끼어 들어 구경꾼이 되어버린 동기는 아마도 그것을 보게된 데 있었던 것 같았다. 형이 그 순간에 파란 눈빛의 환각에 빠졌을 만큼, 그것은 형에게서 강렬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음에도 여러 번 그 기이한 싸움을 구경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 일병의 파란빛이 지나가는 눈을 보면서 이상한 흥분과 초조감에 몸을 떨었고, 더세게 더세게 하며 관모의 매질을 재촉했다. ‘내’가 왜 그렇게 초조하고 흥분했는지, 또 누구를 편들고 있었는지, 하나도 모른 채 그리고 그 기이한 싸움이 끝나지 않은 채 6․25 사변이 터지고 말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한 단락이 끝났다. 아직 이야기의 초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즉 형이 패잔 때 죽였노라고 했던, 그리고 죽였기 때문에 그 먼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노라던 그 일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형은 이야기의 초점을 향해 치밀하게 집중시켜 가기 위해 사건을 상당히 생략하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의 초조와 긴장

다음에는 형은 곧 패잔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강계 어느 산골에 있는 동굴로 장소를 옮겨갔다.

동굴 바깥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고, ‘나’는 굴 어귀에 드러누워 있다. 안쪽에 오관모가 앉아 있고, 가장 안쪽에는 김 일병이 가랑잎에 싸여 누워 있다. ‘나’는 눈이 덮이는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도 신경은 줄곧 관모에게 가 있었고, 그 역시 낮게 뜬 눈이 ‘나’의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긴장감을 형은 ‘첫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하고 지나갔다. 김 일병은 오른 팔이 잘려나간 채 누워있었다.

강계 북쪽, 어디쯤인가 새벽에 갑작스럽게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같은 장소에서 꼬박 하루 동안을 총소리와 포성 속에서 지내면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버텼다. 다음날 새벽, 부상병을 나르던 중 ‘나’는 오른 쪽 팔이 동강나간 김 일병을 발견하고 끌고 와서 응급지혈을 했다. 별안간 총소리가 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더니, 부상당한 김 일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국군은 남쪽으로 내려가 버렸고 중공군이 산을 누비며 지나갔다. 날이 밝았을 때는 이미 골짜기가 중공군의 훨씬 후방이 되어 있었다. 그날 해가 질 무렵에야 김 일병은 정신을 차렸고 다음날에는 포성마저 사라져가고 중공군도 뜸해졌다. 그래서 이제 골짜기는 정적과 햇볕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서 김 일병을 부축하며 좀더 깊고 안전한 곳으로 은신처를 찾아 나섰다. 포성마저 사라져 버린 지금 국군을 찾아 떠나기는 불가능했고, 포성이 되돌아올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다.

골짜기를 타고 올라와서 ‘나’는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내’가 동굴 안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어떤 놈들이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기웃거리고 있어!”하며 관모가 총을 겨눈 채 웃고 있었다. 그는 내가 부축하고 있는 김 일병의 팔을 들춰보더니 쓸모가 없겠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하지만 고맙지 뭐냐. 적정을 살피러 가래놓고 다급해지니까 저희들만 싹 꽁무니를 빼 버린 줄 알았더니 너희들이 날 기다려줬으니.” 거기까지 이야기한 다음 소설은 다시 눈이 오고 있는 동굴로 돌아왔다.

오관모는 카빈총을 짊어지고 ‘장소’와 인적을 탐색하러 갔다. 이 골짜기에서 총소리를 내도 좋은가를 미리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선 전투지역에 흩어진 식량거리를 한데 모아놓고 하루나 이틀 분씩 날랐 다. 그래서 김 일병만 남겨놓고 둘은 매일 한 차례씩 산을 내려갔다. 사실 그 모든 행동의 결정은 관모가 내렸는데, 그는 김 일병을 제외한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눈치를 여러 번 보였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 했으나 막상 둘이 되었을 때도 어떤 이야기의 주변만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산 아래의 식량을 마지막으로 메고 모두 오던 날이었다. 관모는 자기가 메고 가던 쌀자루를 툭툭 치면서 “요걸로 얼마나 지낼까?”하더니 표정이 변하면서 “입을 줄이는 수밖에 없지.”하고 말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내가 그 말을 씹으며 뒤따르고 있는데, 관모가 위생병은 그런 일에 적당치 않고 자신이 다 알아서 하겠으니 참새 가슴은 구경만 하라며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미 모든 것을 정해놓았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첫눈이 오는 날이 좋겠어. 그 사이에 포성이 오면 또 생각을 달리해도 될 테니까.” 그날 밤, 관모는 또 ‘나’에게로 왔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불쾌한 듯 그를 쫓았다.

우리가 이 동굴로 온 첫날 밤, 막 잠이 든 뒤였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나는 몸이 거북해서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정신이 들고 보니 엉덩이 아래를 뭉툭한 것이 뿌듯이 치받고 있었다. 귀밑에서 후끈거리는 숨결을 의식하자 나는 울컥 기분이 역해져서 몸을 비틀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구렁이처럼 감겨드는 놈을 밀쳐버리고 바닥에 등을 꽉 붙이고 누웠다. 관모는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더니 별 수 없었는지 안쪽으로 굴러가더니 김 일병에게로 갔다. 아마도 그것은 김 일병이 관모에게 뒤를 맡긴 최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김 일병의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관모는 김 일병을 그다지 괴롭히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관모가 다시 ‘내’게로 와서 더운 입김을 뿜어댔다. 김 일병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관모를 김 일병에게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며칠 뒤부터 관모는 김 일병에게로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첫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김 일병의 상처에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냄새가 났다. 이제 김 일병은 아무리 포성 이야기를 해도 눈빛을 발하지 않았고, 소독약을 발라주는 것도 거절했으며, 미음조차 받아먹으려 하지 않았다. 포성에 대한 희망은 까마득한 채 드디어 첫눈이 내렸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짜기 아래서 관모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김 일병 쪽으로 가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천장의 어느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시신경은 이미 작용을 멈춰버린 것 같이 텅비어 있었다. 눈이 오고 있다는 ‘나’의 말소리에도 그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일지 않았다. 김 일병의 상처에 싸맨 천을 풀었을 때 나는 흠칫 놀랐다. 상처 벽이 흙벼랑처럼 무너져가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의 눈에 맑은 액체가 가득히 차오르더니 그 눈물을 되삼켜 버린 듯 그의 눈이 다시 건조해졌다. 그때 ‘나’는 김 일병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아마도 형이 죽였다고 한 것은 김 일병이었을 테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관모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거기서 형이 천리 길을 탈출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면, 가해자가 누구인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형은 이미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형은 망설이고 있었다. 관모와 김 일병의 눈빛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망설이고 있는 ‘나’를 연상케 했다. 형은 지금 무슨 이유로 그 살인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지 또 그 살인의 기억 속에 이야기의 결말을 망설이고 있는지 형의 심사를 알 수가 없었다.

매일 저녁 나는 형의 소설을 뒤져보고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항상 그 상태였다. 형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나는 화실에서 나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회의주의적인 나와 행동주의적인 형

다음날 내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올 때까지 형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낮 동안은 될수록 형의 소설을 생각지 않고 나의 작업에만 전념해 보리라 마음을 다지고 일찍 화실로 나갔다.

그러나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결국 화폭을 앞에 두고 나는 형의 소설만을 생각했다. 그것의 결말을 보지 않고서는, 즉 형이 김 일병을 죽이기 전에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형은 언젠가 자기가 동료를 죽였다고 했지만, 형의 약한 신경은 관모의 행위에 대한 방관을 자기의 살인 행위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형은 언제나 망설이기만 하고,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다. 자기의 실수만도 아닌 소녀의 사건을 자기 것으로 고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양심을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자신을 확인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형은 그 관념 속의 행위마저도 마지막을 몹시 주저하고 있었다.

내가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은 나가고 없었다. 형의 원고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먹고 형수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꼭 형을 두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노여움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형의 원고를 들고 내 방으로 와서 화풀이라도 하듯이소설을 썼다. 김 일병을 잡았다. 살해범이 누구인지 확실치도 않은데, 그것을 ‘나’로 만들어버렸다. 관모가 오기 전에 ‘내’가 김 일병을 쏘아버리는 것으로 소설은 끝냈다. 형이 다음에 탈출 이야기를 이어 쓸 것인지는 모르지만, 망설이고 두려워하기만 하는 형을 기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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