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지음 | -
무진기행(霧津紀行)
김승옥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윤희중): 주인공. 서른세 살. 장인이 경영하는 제약회사의 전무 자리에 오르기로 되어 있으 나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무진으로 가지만 허무를 느낄 뿐이다.
하인숙: 무진 중학교 음악 선생. ‘나’를 만난 후 허무를 벗어나기 위해 무진을 떠나고 싶어하나 그 삶을 수용하며 무진에 머무는 여인
조:‘나’의 시골 학교 동창생. 고시에 합격, 그 곳 세무서장으로 있다.
박: '나'의 중학 후배. 교사. 하인숙을 사랑하는 순정적 인간
무진으로 가는 뻐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뻐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Mujin 10km'라는 이정표를 보았다.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 뻐스를 갈아탄 이래, 나는 농사 관계 시찰원들인 듯한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무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반수면 상태’에서 듣고 있다. 뻐스의 덜컹거림이 덜하고 더함을 나는 덜그덕거리는 턱으로 느끼고 있다.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유월의 바람이 수면제와 같이 나를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는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있는 정도의 소금끼”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지상 최고 수면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약방에 진열된 어떤 약들보다도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라고 공상을 해본다. 이런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무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실감됐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나의 공상은 언제나 엉뚱한 것이고,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했던 것이다.
며칠 전날 밤, 아내는 나에게 무진에 다녀올 것을 권유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내와 장인은 주주총회에서 나를 장인이 경영하는 제약회사의 전무로 추대할 것이었다. 내가 나이가 든 뒤에 무진에 간 것은 몇차례 안되지만 그 때마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나의 무진에 대한 연상의 대부분은 “나를 돌봐주고 있는 노인들에 대하여 신경질을 부리던 것과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쫓아 보려고 행했던 수음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꽁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거나 그것들에 관련된 어떤 행위”들이었다. 문득 한적(閑寂)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靑年)이었다.
무진에의 연상이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닌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나는 무진을 잊고 있었던 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역구내를 빠져 나왔을 때 보았던 미친여자 때문에 무진에서의 어두운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의 기억이었다. 6․25로 대학 강의가 중단되자 무진에 내려 온 나는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처박혀져 의용군 징발도,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 버렸다.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갔을 때 나는 골방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뻐스는 무진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붕들은 강렬한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번쩍이고, 어디선지 분뇨 냄새가 새어들어 왔고, 병원 앞을 지날 때는 크레졸 냄새가 났고, 상점의 스피커에서는 느린 유행가가 흘러 나왔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사람들은 처마 밑의 그늘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고, 텅빈 광장 눈부신 햇볕 속에서 개 두 마리가 교미를 하고 있었다.
밤에 만난 사람들
학교 선생들과 사무소의 직원들도 달그락거리는 빈 도시락을 들고 축 늘어져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이 모든 것이 장난처럼 생각되었다. 학교에 다닌다는 것,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사무소에 출근했다가 퇴근한다는 이 모든 것이 실없는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서 낑낑댄다는 것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이모님 댁에서 도착한 나는 낮잠에서 깨어나 신문지국에 가서 신문 구독 신청을 했다. 신문지국을 나올 때 신문지국 사람들이 나에 관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밖으로 나오면서 그들이 나에게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해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진과 서울의 차이일 것이다. 몇 시간 전 뻐스에서 내릴 때보다 거리는 번잡해져 있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내 옆을 빈 도시락을 달그락거리며 학생들과 사무소 직원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모 댁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박’의 방문을 받았다. ‘박’은 나의 중학 후배로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4년 전 나의 무진행의 내용 ― 실직하고 동거하던 희와도 헤어진 후 실의에 빠진 상태에서 무진에 내려온 것 ― 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박’은 “무슨 나쁜 일이 있었던 것 아니겠죠?”라고 묻는다. 나는 “응, 아마 승진이 될 모양인데 며칠 휴가를 얻었지.”라고 대답한다. ‘박’에게서 ‘조’가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세무서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으로 향했다. 밤길을 걸으며 내가 “모든 게 여전하군.”하니까 “그럴까요?”하고 ‘박’이 반문한다. 조의 응접실에는 손님이 네 사람 있었다. 세 사람은 세무서 직원들이었고, 한 사람은 ‘나’의 모교에서 음악 선생을 하고 있는 하인숙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개성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곽은 갸름했고 눈이 컸고 얼굴색은 노리끼리했다. 그녀는 졸업 연주회 때 『나비부인』 중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고 말하는데 그 음성이 마치 그 때를 그리워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 여자의 <목포의 눈물>은 이미 유행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비부인> 중의 아리아는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나는 방바닥의 방석 위에 놓인 화투를 보며 여전히 ‘무진이다’라고 느꼈다. 그들과 대화가 오가던 중 ‘조’가 하인숙에게 노래를 청하자 그녀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여자의 노래가 끝나자 나는 ‘박’이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선이 ‘박’에게로 갔을 때 박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을 배웅하러 따라 나온 나는 ‘박’과 ‘조’가 하인숙과 삼각관계임을 확인했다.
나는 다시 조의 집으로 들어가 ‘속물’들 틈에 끼었다. 밤이 퍽 깊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나와 하인숙만이 남았다. 그녀에게서 바래다 달라는 부탁을 받자 나는 ‘그 여자가 내 생애 속에 끼어 든 것을 느꼈다.’ 논 곁을 걷던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느끼던 옛날의 느낌에 대해 생각했다.
하인숙은 나에게 무진이 싫다며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나는 그녀의 청에 대답을 흐렸다. 그녀는 내일 자기와 함께 오후에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나는 그녀와 내일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헤어져 이모댁으로 돌아와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통금 싸이렌 소리를 들었다. 나는 하인숙과 좀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지만 떠올려지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음을 느끼고, 무진을 떠나면 그것마저 깨끗이 지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통금 해제 싸이렌을 듣고 난 후에야 나는 잠이 든다.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받쳐들고 어머니 산소로 가 절을 했다. 나는 풀을 뜯으며 나를 전무로 만들기 위해 전무 선출과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웃음을 흘리고 있을 장인을 상상했다. 돌아갈 때는 좀 멀지만 방죽길을 걷기로 했다. 방죽의 경사 밑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모여 있었다. 읍내에 있는 술집 여자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것이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하여 이상스레 정욕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니 조가 낸 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서장실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아침밥을 먹고 나는 조를 만나러 갔다. 나는 조가 어쩐지 초라해 보였고, 서툴러 보였다. 나는 조에게 하인숙과 결혼할 것인지를 묻자 처가 덕을 볼 수 있는 배경이 좋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며 하인숙을 “성기 하나를 밑천으로 시집가 보겠다”는 여자 가운데 하나라고 폄하했다.
하인숙과의 약속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그녀를 만나기로 한 방죽으로 갔다. 그녀는 노란 파라솔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폐병으로 요양하던 집을 찾아갔다. 주인들은 변함없이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 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그 집 부부는 옛날에 내가 들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 방에서 하인숙과 성교를 했다. 우리는 그리고는 방문을 열고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한참 후에 그녀는 “서울에 가고 싶어요. 단지 그것 뿐이예요”라고 말한다. 그녀와 바닷가로 나온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 말하지 못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읍내로 돌아온 것은 저녁의 어둠이 밀려 든 뒤였다.
집에 돌아와 박이 낮에 다녀간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무진에 계시는 동안 심심하지 않을 까 하여 읽으시라”고 책 세 권을 놓고는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하며 갔다는 것이다. 나는 피로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핑계를 대고, 이모에게 소주를 사오게 하고는 취해서 잠이 들 때까지 마셨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새벽에 잠깐 잠이 깼는데,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 이유는 불안 때문이었다. 나는 “인숙이”하고 중얼거려 보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늦은 아침, 이모가 나를 깨웠다. 이모는 나에게 서울에서 온 전보 한 통을 건네주었다. 나의 급상경을 알리는 아내의 전보였다. 아내의 전보는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아내의 전보는 마치 하인숙과 나의 짧은 만남에 대해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자유 때문”이라고,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 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오랫동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죄의식에 시달렸으나 타협안을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고.
그리고는 나는 하인숙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러나 쓰고 나서 읽어보고는 찢어 버렸다. 결국 나는 하인숙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무진을 떠났다. 무진을 벗어나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면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중첩된 스토리 속의 무진 사람들
『무진기행』(1964년 「사상계」에 발표)은 얼핏 보면 주인공의 사흘간의 여행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있다. 무진에서 암울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 윤희중은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도시에서 출세한 후 무진에 왔다가 사흘 후 돌아가게 되는 궤적을 중심 스토리로 본다면, 중학교 후배인 ‘박’과 세무서장 ‘조’ 및 하인숙과 연결되는 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수적 스토리로, 이 외에도 하인숙, 세무서장 ‘조’ 등, 각각의 개인들의 삶의 내력과 관련된 스토리와 윤희중이 부재하는 서울에서 ‘그의 전무 승진’을 도모하고 있을 그의 아내와 장인의 스토리가 존재한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고 있음에도 해석상의 혼란이 야기되지 않는 것은 적절한 대목에서 필요한 서사정보를 공급하거나 통제하는 서술 덕택이다.
김기주는 여러 이야기들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의 서술적 특징을 말했다. 그것은 첫째, 능란한 시간 변조의 기술로써 장면, 휴지, 요약의 시간 변조 기법이 서술상 교차됨으로써 리드미컬한 흐름을 형성한다. 현실을 보여주는 듯한 환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을 때에는 대화를 주로 한 장면을, 주인공의 발랄한 상상력과 세계인식을 보여 줄 때에는 휴지를, 필연적으로 제공되어야 할 정보는 요약의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것들은 비교적 분명한 경계선을 가지고 교대로 나타난다.
둘째,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나 사건과 관련이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수법으로 거의 독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과거의 경험을 끼워 넣음으로써 현재의 의미를 확산시키고 풍성하게 한다. 셋째, 중심 사건과 주변 사건의 명료한 구분으로써 한 장면의 내부에서 의미론적 차원에서 중요하고 비중있는 에피소드나 회상 장면을 삽입하면서도 중심 사건과 명료하게 구분, 배치함으로써 스토리 구축의 장애물이나 혼란을 제거한다. 넷째, 중심 사건의 장면, 장면에 끼어드는 에피소드들이 일관된 원칙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과관계를 지니고서가 아니라 독특한 정서나 분위기를 환기하는 차원에서 개입된다. 이와 같은 특징은 단편소설의 장르적 관습에 대한 저항이자, 이 작품의 개성이며 미덕이다.
진정한 자아 탐색을 위한 방황과 그 좌절 기록
이 소설에서 서술되는 사건들의 주 무대인 무진은 서울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아내가 있는 서울이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이라면, 내가 찾아간 무진은 나른하고 축축한 몽환의 세계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무진은 서울과 대립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서울과 마찬가지로 물화된 세계라는 점에서 무진은 서울의 연장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무진이란 공간의 의미 규정상의 애매성은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항구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과 같은 모호한 설정에서부터, 모든 것을 불명료하게 만드는 무진의 명산물인 ‘안개’, 그리고 주인공이 무진에 들어설 때의 ‘반수면상태’에 이르기까지 작품 내적 논리를 통해 치밀하게 구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