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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

최정희 지음 | -
인간사

최정희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문 오: 지주의 아들. 허윤의 아내인 마채희와 불륜 관계를 맺음. 배반한 채희를 끝까지 사랑하고, 금아를 끝까지 돌본다. 4-19의거 때 데모에 참가한 동생의 아들 홍기와 금아, 민을 찾으러 나갔다가 총탄에 맞는다.

오경배: 일본에서 문오와 함께 한 친구. 친일행위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선택이라 생각한다. 금아의 양육비, 허윤의 뒷바라지, 문오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등 불행한 동지들을 끝까지 챙기는 인물.

마채희: 허윤의 아내. 돈을 찾아 남편 허윤도 버리고 문오도 버린다. 나중에 서상철의 고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며 온전치 못한 세 아이를 돌보며 남편의 병수발을 한다.

마채균: 마채희의 오빠로 빨치산. 사상성이 없는 동생을 허윤과 결혼시킨 것에 대한 자책감에 젖어 있다. 감옥에서 최후를 맞는다.



문오의 귀국과 잘못 맺은 인연

목욕탕에서 돌아오던 길로 문오는 오경배가 일러준 허윤의 집을 찾아 떠나려고 옷을 갈아입고 툇마루에 나섰다. 기색을 알아챈 옥주 여인이 어디 가느냐고 마당에 내려와서 물었다.

어제 저녁 문오가 경성역에 내려 여관으로 갈 생각을 하고 안내원의 뒤를 따라가 보니, 그 길은 전에 자신이 거처하던 하숙집과 통하는 익숙한 길이었다. 하숙집은 그 사이 변화가 많았다. 4년 동안이나 묵었던 하숙집의 딸 옥주가 상복을 입고 여전히 하숙을 치고 있었다. 열병으로 양친을 사흘 간격으로 잃은 옥주는 다니던 소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해사 살다가 작년에 남편마저 세상을 뜨자 부모님이 하던 하숙을 어린자식 하나를 데리고 꾸려가고 있었다. 하숙하던 시절 친구들의 입 위에 오르내리곤 했던 옥주는 문오가 ‘꼭 다녀온다’는 말을 하자 안도의 빛을 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오는 발걸음을 옮기다 총독부 꼭대기에 꽂혀 나풀대는 일본국기를 보았다. 그리곤 불던 휘파람을 멈추고 울적한 기분과 불쾌한 걸음으로 허윤의 집에 이르렀다. 허윤의 집 대문을 넘어서자 병색이 완연한 허윤의 상반신이 문턱에 걸려 있었다. 문오는 허윤에게서 오경배의 소식과 다른 동지들의 소식을 들었다.

오경배는 친일파인 부친의 회사에 지배인으로 있었다. 마루에서 뒤뚱거리던 금아의 ‘엄마 엄마’하는 아우성소리에 대문께를 바라보니 물지게를 걸머진 채희가 들어왔다. 전에나 마찬가지로 날씬한 채희였지만 문오는 그녀에게서 측은한 감정을 느꼈다.

이들이 도쿄에서 함께 했던 ‘청년동지회’는 좌익 계열의 인사들로 이루어진 조직체였고, 허윤은 ‘조선지부’의 총책이었다. 허윤이 조선으로 나온 얼마 후 마채균과 문오는 검거되었으며, 이후 문오는 3년만에 출감해 귀국했고 채균은 아직 감옥에 있었다. 채균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동생 채희를 허윤과 결혼시켰다. 채균은 동생을 허윤과 결혼시키면 그녀의 성향이 혁명적이며 사상적인 성향으로 바뀌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합을 ‘동지적 결합’이라 했다. 하지만 채희는 기질적으로 그런 동지가 못되는 여자였다.

다음날 문오는 채희가 일하는 장안백화점 레코드 판매부에 갔다. 완구부에서 나팔이 눈에 띄어 값을 치르고는 채희에게 갔다. 채희는 남편 허윤이 날마다 별나게 돼간다고 하면서 월급의 반을 놓고 가는 하용빈이 다녀간 뒤엔 생트집이 점점 더해간다고 했다. 아픈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문오 말에 채희는 동경서도 허윤이 동지들 덕으로 살면서도 공연히 거드름을 피웠으며 제일 많이 희생당한 이가 문오라 말했다.

문오는 채희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저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창 밖으로 새어든 달빛이 파도처럼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달빛 속에서 낮에 본 채희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백화점을 가지 않았더라면, 가서 채희를 보지 않았더라면,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제 와서 하숙집을 옮긴다는 것도 옥주 여인한테 박절하다고 생각했지만 문오는 채희를 잊기 위해선 고향으로 당장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채희 생각으로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희 없는 틈에 허윤이나 한번 더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동료이자 사상을 같이 한 허윤, 하용빈, 채희는 서로 친하게 지냈다. 이들이 서로 막역하고 친밀하게 잘 지낸다는 생각에 문오는 문득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오경배를 문오는 반가워하며 사람은 외로울 때 비굴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경배는 일본에서 나올 때 엄청나게 마른 몸이었다. 그는 늘 뼈따귀 뿐인 팔에 살을 붙여준 건 부친이라 했다. ‘일본에서 투쟁했다는 것, 감옥살이했다는 것은 장한 일이지만 그 투쟁 뒤에 뭐가 있느냐’며 현실은 그대로 부자유한 것뿐이고 피압박 민족일 따름이라 말했다. 문오는 경배의 말이 불쾌했다. 속으로 그는 ‘이런 새끼’하고 술 마시는 자신을 한심해하면서도 외톨이가 될 것을 두려워해 오경배를 힐책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경배는 채희가 가난에 지쳤고 돈밖에 모른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몇 차례 채희의 옷감이나 양말을 가지고 찾아갔다고 했다. 문오는 경련이 이는 것을 느끼며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허윤에게 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돈을 채희 면상에 던져줄 생각을 했다.



‘청년동지회’ 사건으로 투옥

백화점엔 불빛이 휘황했다. 그리로 쏠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층 레코드 판매부에도 불빛이 화안했다. 채희가 어떤 남자 손님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코가 유난히 뾰족한 남자라는 인상을 깊이 가졌다.

문오는 다시 채희를 찾아갔다. 백화점에 불빛이 화려하게 빛났다. 이층 레코드 판매부에도 불빛이 환했다. 채희는 남모르는 손님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문오는 그런 채희를 바라봤다. 문오를 본 채희는 그를 반겼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문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문오는 채희의 면상에 돈을 콱 던져주겠다던 분노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채희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다시는 채희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오의 마음을 알았는지 채희는 이내 자신은 다른 나뭇가지로, 새처럼 포르르 날아갈거라고 했다.

그날 저녁 둘은 함께 산에 올랐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는 채희가 집에 돌아가리란 예측을 하면서 채희의 어깨를 부둥켜안은 채 채희더러 집에 들어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채희는 ‘초생달이 산허리를 다 넘어간 이 밤중에 가긴 어딜 가느냐’고 말하며 ‘채희는 인제 영영 강문오의 것’이라고 앙탈을 부렸다. 채희의 반응에 문오는 하용빈, 허윤을 밟고 선 기분이고 두려울 게 없다고 느껴졌다. 채희의 전부를 차지한 밤이었다. 문오가 눈을 떴을 때 채희는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동료인 하용빈이 발을 친 방안의 정경을 모조리 목격하고 ‘여기가 바로 에덴동산’이라며 고함을 쳤다. 그리고 문오의 얼굴로 그의 주먹이 지나갔다. 그 고함소리만 들었을 뿐 문오는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 간신히 바른편 손을 움직여 얼굴을 만져보았지만 도무지 제 살 같지 않게 감각이 무디고 얼굴 전면이 뻐득뻐득했다. 창피스러워서 수색원을 제출할 엄두도 못 낸다는 하용빈은 문오를 두들겨 패고 나서는 악취가 풍긴다며 침을 뱉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로부터 거의 한 달 만에야 문오는 거동을 하게 됐다. 문오는 채희를 그들(허윤, 하용빈)과 멀리 떨어진 곳에 두고 싶어, 고향에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허윤에게서 채희를 도로 찾은 기쁨이 하늘에 오른 듯, 기쁘기만 했다.

이렇게 한창 즐거운 때 C읍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들이닥쳤다. 모친한테서 송금이 오는 대로 시골로 내려가라는 당부를 했다. 문오는 우선 채희가 걱정됐다. 분명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문오는 C읍에 가서야 ‘청년동지회’라는 모임이 반일 사상을 가진 단체라는 이유 때문이 동지들을 구속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오에 이어 ‘청년동지회’에 연루된 하용빈, 이춘길 등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수감되었다. 채희 역시 넉 달 후에 수감되는데 문오는 그녀가 아무런 죄가 없음으로 곧 석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하용빈이 채희는 ‘사상적으로 백지와 다름없다’고 진술함으로서 그녀는 무사히 석방됐다. 하지만 하용빈의 이런 진술을 한 것은 단지 채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문오는 하용빈이 채희를 석방시켜 놓고 뒤를 따라다닐 공작을 벌이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푹푹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미간 하나 찡그리는 일없이 당당히 서 있는 하용빈은 감옥 안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반면 문오는 잡범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다. 문오는 오직 채희 생각뿐이었다. 문오는 채희를 차지하지 못하는 세상은 암흑일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하기 싫은 세상이었다.

얼마 후 채희는 문오를 면회 왔다. 면회실에 들어선, 청색 오버에 윤이 나는 칠피 구두를 신고 채희가 서 있었다. 여느 때의 채희보다 더 아름다웠다. 어머니한테서 온 편지를 건네주는 채희에게 문호는 어머니께 가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채희는 그냥 혼자서 호텔에서 지낸다고 말했다. 3월에 있었던 최종 공판에서 문오는 3년 집행유예의 언도를 받았고, 하용빈, 장병위, 이춘길은 5년 징역선고를 받았다. ‘청년동지회’에 대한 여러 가지 변명과 주장을 늘어놓는 문오에 비해 하용빈은 시종일관 다른 회원을 위해 그들이 발뺌 할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는 데 더 골몰했다. 모친의 표정에서도 그를 우러러보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오 역시 그의 영웅스러움에 고개가 수그러졌지만 잠시뿐이고 출옥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문오가 출감하는 날, 어머니가 친히 마중을 나왔다. 모친은 집으로 가던 길에 문오에세 채희가 씀씀이가 너무 헤프다고 했다. 모친은 채희가 호텔에 머문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그동안 여러 차례 보낸 거액의 돈을 문오의 옥바라지에 쓴 게 아니라 호텔 유숙비와 옷차림에 소비했을 것이라며 탐탁치 않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채희는 문오가 나오고 한 달 남짓해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채희는 아이를 낳고 몸이 안 좋다고 하며 병원에서 한 달 동안이나 지냈다. 한 달 만에야 퇴원하는 것도 못 이겨 하더니, 집에 돌아와선 밥 짓는 일이 지겹다고 다시 병원에 눌러 있자고 앙탈을 부렸다. 채희와 문오에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던 모친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도 돈 백 원과 짤막한 사연만을 보냈을 뿐이었다. 아들 민이 둥싯둥싯 기어다닐 무렵, 집안 일을 도와주라고 쓰던 밥짓는 애가 어려워만 가는 살림에 진력이 난 모양인지 집을 나가버렸다.

얼마 후 문오는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조선청년을 앞세우고 경성역으로 나가는 행렬에서 오경배를 발견했다. 회사직원인 청년의 출정을 격려하는 격려사를 끝내고 문오를 만난 자리에서 오경배는 허윤의 병세가 악화되어 평양 도립병원으로 옮겼다는 것과 허윤의 자식 금아의 양육비를 다달이 자신이 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문오는 왠지 불쾌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부턴가 채희의 외출이 잦아졌다. 문오도 사치가 심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채희가 조금씩 싫어졌다. 둘은 만나면 자꾸만 언성을 높이게 되고 싸움하는 날이 늘었다. 채희는 돈도 없고 사상도 없는 비참한 남자는 싫다고 앙탈을 부렸다. 일본 군대가 진주만을 폭격했다고 떠들던 날 채희는 다시 장안백화점 레코드 판매부에 나가게 됐다.

늦게 들어오는 날이 점점 늘고 술 냄새를 풍기는 일도 있었고 문오에겐 말할 것도 없고 민에게까지 자주 짜증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문오는 동네 골목에서 채희와 낯선 남자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니라 예전부터 매일 채희에게 레코드를 사 가던 코가 뾰족한 남자였다. 문오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채희 또한 문오에게 미안한 기색조차 없었다. 둘은 흥분되었고 결국 싸움으로 번졌다. 사소한 말대꾸에 채희는 우는 어린 것을 내동댕이치고 미닫이를 걷어차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새처럼 날아갔구나. 어느 때까지 이 가지에 앉아 있겠다던 네가 잘두 날아갔구나’ 하고 문오는 혼자 중얼거렸다.



새처럼 포르르 날아가 버린 채희

아무래도 문오는 장안백화점엘 가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채희가 거기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채희의 소식을 듣자는 것도 아니지만 거기밖에 찾아갈 데라곤 없으니 가본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은 꼼짝을 안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채희가 돌아오는 기척을 듣기 위해서 귀가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문오는 밤낮 귀를 바깥 세상에만 내놓고 지냈다.

문오는 집을 나간 채희에게 소식이 없자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채희를 찾기 위해 그는 장안백화점으로 향했다. 문오에게 나팔을 팔았던 완구점 점원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진열장으로 데려가더니 탱크, 군함, 소총, 군도 비행기등 장난감을 무더기로 꺼내 놓았다. 문오는 내 놓은 것들을 와락 밀어놓으며 나팔을 달라고 했다. 완구점 주인은 문오에게 골탕이라도 먹이려는 듯, 채희가 있던 자리에 새로 온 점원을 바라보며 ‘저기 저 사람이 애기 엄마(채희) 남자애인의 이종사촌’이라 했다. 문오는 새로운 점원의 코가 비슷하다고 여기면서 뾰족한 코들은 유전인가보다는 생각을 했다.

문오는 백화점을 나와 오경배에게 들렀다. 일을 하던 오경배는 문오를 반갑게 맞이하며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었다. 아버지가 소개한 곳으로 문화인들한테 임전태세를 갖추도록 서둘러주는 문화기관이라고 했다. 안하겠다는 문오에게 오경배는 팔을 잡아끌며 ‘사랑의 열병은 그만 앓으라’ 고 하며 말을 꺼냈다. “우리는 똑같이 열병적인 사회주읠 했단 말이야. 기분적이란 말두 맞겠군…… ” “문오군 어쨌든 이젠 열병을 그만 앓으란 말이야. 채희도 울타리 밖 생면부지의 뚱딴지같은 놈에게루 가구 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 몰라……”

그날 밤 문오는 오경배와 같이 그의 집에 가서 이틀 밤과 낮을 잠으로 때웠다. 오경배의 집에 기거하는 문오를 부친은 물론이고 그의 부인과 식모까지 천덕꾸러기 취급을 했다. 문오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뼈가 볼글볼근 삐어지게 마른 데다가 화류병(성병)까지 얻게 됐다. 오경배는 문오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하고 주인댁에 맡겨 놓은 민을 찾아가는 문오를 세심히 보살펴 주었다.

일본병대가 싱가포르 홍콩을 함락했다는 축하의 시가행렬이 경성 장안을 뒤집어엎던 날, 문오는 문화연맹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문오는 오경배네 집에서 나와 채희와 함께 살던 집으로 들어가 민과 같이 살면서 어떤 날은 오경배를 시켜 금아를 데려와 민과 놀게 하는데 둘은 다정하게 잘도 놀았다.

민이 세 살을 먹고 금아가 여섯 살 먹던 가을에 채희의 오빠인 채균이 감옥에서 출옥했다. 채균은 뜻밖에도 손을 내밀어 문오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간의 사정을 대강 전해들은 채균은 “채희 때문이냐. 모두 채희 때문이야. 그렇더라도 문오군. 채희를 미워하지 말아 줘. ” “채흴 그 지경 만든 건 나야. 사상이니 주의니 하는 건 그 애 생리에 맞지도 않는걸, ” “그걸 그 애한테 주입시키려고 한 데서 오늘날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어.…… ” “난 채흴 미워하지 않네. 오늘날의 이 시대, 이 현실을 미워해. 채흴 불쌍하게 만든 조선을” 독백처럼 그는 말했다.

오경배가 그동안 그들 주변에 있었던 사정을 모조리 들려주자 사상은 무너졌어도 아름다운 정은 남아 있노라 하며 기뻐했다. “계획이 있을 리 있느냐, 사는 날까지 이대로 사는 것 뿐” 이라며 채균은 문오에게 동경시절 열성분자가 아니었냐며 땅을 한 번 힘껏 걷어차고 훌쩍 솟아보라고 했다.

마채균은 친구의 알선으로 근교 절간에서 금아와 지내고 문오는 민을 데리고 가서 금아와 놀게 하곤 했다. 문오는 채균이 금아와 민을 데리고 노는 것을 보고 서글픔을 느꼈다. 아이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져 채균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네무라라는 창씨로 이름을 바꾼 C가 평양에서 단독으로 시국강연회를 열게 되었고 그 사회자로 문오가 결정되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채균은 이번 기회에 어린 걸 모친께 맡기고 중국으로 가든지 삭발을 하고 중이 되든지, 이 어려운 상황에서 헤쳐 나오라고 말했다. 문오는 채균의 이 말에 충격을 받고, 결국 어머니가 계신 평양에 갈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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