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손창섭 지음 | -
잉여인간
손창섭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서만기: 만기치과의원 원장. 좀처럼 흥분하거나 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인물이다. 봉우 처, 처제 은주 등 많은 여자들이 따르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유지해 나간다.
천봉우: 서만기의 중학교 동창생으로, 거의 날마다 치과의원에 출근한다. 6. 25 때 피난 갈 기회를 놓치고 적치(敵治) 삼 개월을 꼬박 서울에서 보낸 그는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전쟁 중 양친과 형제를 잃고 난 후, 인간만사에 흥미를 잃고, 엄마에게 매달리는 어린아이처럼 간호사 홍인숙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닌다.
채익준: 서만기의 중학교 동창생으로, 거의 날마다 치과의원에 출근한다. 일제 강점기 때 겨우 중학교만 나왔으며, 특별한 기술도 빽도 없고, 나이까지 많아 취직을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세 명의 자식을 포함한 채익준의 여섯 식구는 아내의 생선장사로 생계를 잇는다.
봉우 처: 봉우와는 거의 남남처럼 지내며, 불미스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 만기치과의 건물주라는 이유로, 병원에 드나들면서 갖은 방법으로 만기를 유혹하려고 한다.
서만기의 중학교 동창생들
만기(萬基)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만기치과의원의 원장인 서만기에게는 채익준과 천봉우라는 중학교 동창생이 있다. 그들은 만기치과의원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특히, 채익준은 원장이나 간호사보다 먼저 나오는 일도 많다. 그런 날은 간호사인 홍인숙이 병원을 청소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소매까지 걷어 부친 채익준이 구석구석의 청소까지 도와주기 때문이다.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지 않는 그의 성격은 이런 데서도 잘 나타난다. 청소가 끝나면, 그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병원에서 구독하는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는다. 그리고 신문에 실린 기사에 대해 엄정한 비판을 가하곤 했다.
오늘도 간호사 인숙을 도와 병원 청소를 마친 채익준은 대합실에 앉아 신문을 펴들었다. 사회의 작은 불의나 부정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그는 오늘도, 신문 사회면에 실린 어느 제약회사의 부정 행위에 분개했다. 신문에 어느 제약회사에서 외국제 포장갑을 대량으로 밀수입해다가, 인체에 유해한 물질을 넣어 고급 외국약인 것처럼 팔았으며, 그것으로 수천만 환에 달하는 부당 이득을 취했다는 기사가 났던 것이다. 그것을 읽다 말고 채익준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앞에 놓여 있는 소형 탁자를 쳤다.
채익준은 자신의 격분이 지나친 것이 아님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확인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홍인숙에게도 그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법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에 채익준은 더욱 더 흥분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못사는 탓이 전부 그런 모리배들, 악당들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출근한 서만기에게도 자신의 격분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받고자 했지만, 서만기는 함께 흥분해 주지는 않았다.
이렇게 사회의 부정에 격분하는 채익준과 달리, 천봉우는 아무 것에도 의욕을 드러내지 않았다. 채익준이 격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때쯤이면 병원으로 들어서는 천봉우는 언제나 수면부족의 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자기 자리로 정해져 있다시피 한 대합실 소파의 맨 구석자리에 앉았다. 그는 채익준이 함께 흥분해주길 바라면서 그의 눈앞으로 들이대는 신문도 제목만 건성으로 읽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우두커니 앉아서 보냈다.
물론 중학교시절에는 천봉우도 재기발랄했고 야심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무슨 일에든 시들해지기 시작하더니, 전쟁 중에 양친과 형제를 잃은 후에는 인간만사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에게도 남편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봉우의 아내는 한 달이면 절반 이상은 집을 비우기 일쑤고, 여러 가지 불미스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 봉우와 그의 아내 사이에 아이도 둘이나 있지만, 두 아이 모두 봉우의 아이인지 불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력이 전혀 없는 봉우는 경제적으로 그녀에게 의지하며, 그래서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렇게 그림자처럼 조용한 그가 유일하게 생기를 띠는 때가 있다. 간호사 홍인숙을 바라볼 때, 그는 눈을 빛냈다. 어쩌면 천봉우는 홍인숙을 사랑하는지 모르고, 병원 대합실을 매일 찾는 까닭도 오직 홍인숙을 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퇴근하는 홍인숙을 그림자처럼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녀와 전차를 같이 타고, 그녀의 집 앞까지 따라 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 풀이 죽어 발길을 돌리곤 햇다. 이것이 천봉우의 유일한 일과였다.
봉우 처의 유혹
만기는 좀처럼 흥분하거나 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활동적인 타입도 아니지만 봉우처럼 유약한 존재는 물론 아니었다. 반대로 외유내강한 사내였다.
서만기는 그의 동창생인 채익준과 천봉우와는 달리 침착하고 기품 있으며, 풍부한 교양과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 좋은 의미에서의 영국풍 신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치과의사들 가운데에서도 기술이 출중한 편이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재는 병원 시설이 빈약하고 건물이 초라해, 딴 치과로 손님을 많이 빼앗기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목 좋은 곳에 아담한 건물을 얻어 최신식 시설을 갖추면 다시 손님을 끌 수 있겠지만, 서만기의 현재 경제 형편상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도 병원 건물의 소유주가 서만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건물의 소유주는 봉우 처이다. 본래 그 건물은 봉우의 장인이 살아있을 때, 빚 값으로 인수해서 6. 25 전쟁 이후로 쭉 세를 놓았는데, 봉우의 소개로 만기가 빌리게 되었다. 봉우 처는 그 건물을 거의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고, 그래서 다달이 셋돈을 받으러 병원에 나타났다. 사실, 그녀는 셋돈을 받아가는 일 이외에도 걸핏하면 치석이 끼었느니, 충치가 생겼느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어느 날은 치석을 긁어내고 있는 만기의 가운자락을 잡고 놓지 않기도 했다.
물론 서만기에게 봉우 처만 호의를 드러냈던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서만기를 따랐으며,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의 대부분이 여자였고, 그 중 적지 않은 수의 환자가 서만기에게 노골적으로 호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만기는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남편에게 애정과 신뢰를 바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그 여자들의 호의를 물리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기는 봉우 처에 대해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와서 봉우 처의 접근 공작이 너무나 집요하고 대담해져 만기는 은근히 골치를 앓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봉우 처가 서만기에게 병원 건물과 시설에 관하여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서만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봉우 처와의 만남을 피했다. 그러자 봉우 처는 자기와의 면담을 고의적으로 회피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라는 위협적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서만기는 어쩔 수 없이 봉우 처를 만나러 나갔다.
봉우 처가 만나자는 장소로 나가자, 봉우 처는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서 미리 나와서 서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논할 일이 무엇이냐고 만기가 묻자, 그녀는 병원 건물이 너무 낡아서 전면적인 수리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의 세를 인상하기로 했으니, 삼 개월 분의 선불을 내야한다고 했다. 일방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봉우 처는 자리를 옮겨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봉우 처는 자신의 여고 동창생이 마담으로 있는 음식점으로 서만기를 끌고갔다. 그리고는 봉우 처가 이끄는 대로 서만기는 그 음식점의 별실로 들어갔다.
봉우 처는 그곳에서 서만기의 거부를 묵살하고 그의 양복저고리를 벗겨 옷걸이에 걸고, 식사 중에 마치 남편에서 하듯 식사 시중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병원 시설을 다른 사람에게 팔 생각이지만, 서만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현대적인 최신식의 시설을 갖춘 병원을 차려주겠노라고, 서만기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편의를 보아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급기야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봉우 처는 상 밑으로 한쪽 발을 슬며시 서만기의 무릎 위에 얹었다. 만기가 슬며시 피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주기 도는 얼굴로 돌아왔다. 방안의 문고리를 잠그고 창문의 커튼까지 내리고 자리에 앉아, 봉우 처는 계속 술을 마셨으며, 서로 술 주전자를 빼앗으려는 실갱이 끝에 봉우 처는 서만기의 무릎에 엎드려,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채익준의 비참한 생활상
“울 아버지 안 오셨어요?” / 소년이 걱정스레 다시 물었다. / “아버진 아침에 잠깐 다녀 나가셨는데…. 그래 너 왜 아버질 찾아왔니?” / “어머니가 아버지 찾아오랬어요. 어머니 죽을 것 같애요”
병원 대합실 문 밖에서 어떤 아이가 안을 기웃대고 있었다. 그 아이를 본 간호사가 누구인지 묻자,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았다. 다시 만기가 그 아이에게 누구인지 묻자, 거지꼴을 한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는 채익준이며, 자신의 이름은 채갑성이라고 했다. 서만기는 그 아이에게 왜 아버지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다 죽어가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 아이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해서 자신의 가족들이 지금까지 먹고살았는데, 어머니가 반년 전부터 몸져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오십이 넘은 외할머니가 생선장사를 하고 있으며, 자신은 학교를 그만두고 신문장사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점심에 병세가 급작스럽게 심해진 어머니가 자신이 곧 죽을 것 같으니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해서, 병원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서만기는 그 아이에게 병원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전에 아버지와 돈을 꾸러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돈을 꾸지는 못했었다고도 했다. 채익준은 단 한번도 병원에 와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서만기에게 돈을 꾸어 달라고 손을 내민 적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서만기는 그의 생활 형편이 그렇게 어려운 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채익준의 비참한 생활은 채익준 자신의 책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서만기의 생활도 채익준의 생활에 비해 크게 나은 점이 없었으며, 서만기도 열 식구를 혼자 벌어 먹여 살리느라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익준은 일제 강점기 때 겨우 중학교만 나왔을 뿐, 특별한 기술도, 배경도 없었고, 벌써 나이도 서른 중반에 이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도 실직자이지만, 6. 25 전쟁 전에도 직장다운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밑천이 없어서 장사도 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고지식한 성격 탓에 어쩌다가 직장을 갖게 되어도 곧 때려치우고 말았다. 언젠가는 노동판에 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사무실에서 인부들의 임금을 속이자, 그는 시비 끝에 주먹다짐까지 하게 되었고, 결국 직장을 잃었다.
그런 채익준이 최근에는 양심적이고 동지적인 자본주를 얻어, 먹고 살 수도 있고 동시에 국가에도 이득이 될 사업을 일으키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 사업이란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상대의 일용잡화 및 식료품 상회였다. 어디선가 채익준은 외국인들이 한국 상인의 물품을 신용할 수 없어, 외국에서 일용품을 수입해다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양심적인 출자자를 찾아내어, 자신이 상점을 양심적으로 경영해보겠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그러나 채익준이 원하는 양심적 출자자가 나설 리 없었다. 그러한 현실에 또 한번 격분한 채익준은 행정 당국의 무능을 들먹이면서, ‘디디티를 살포해서 이나 벼룩을 박멸하듯이 국내의 해충적 존재들을 모두 말살해버려야 한다’, ‘부정, 불법을 자행하면서 국가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모두 총살을 시켜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흥분했다. 그렇게 흥분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때 채익준의 눈은 살기에 가까운 노기로 번뜩거렸으며,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핏발 선 눈을 뒹굴리는 미친 사람 같았다.
애정과 애욕의 미요한 혼란
어느 날 퇴근 시간이 임박해서다. 미스 홍이 조용히 의논할 말이 있노라고 했다. 그동안 석 달 치나 밀린 급료 얘기나 아닌가 싶어 만기는 새삼스레 가책을 느끼었다.
어느 날, 간호사인 홍인숙이 서만기에게 의논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눈치가 빠르고 재주도 출중해서 간호사로서의 지식이나 기술뿐만 아니라 웬만한 의사 못지 않게 능숙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만기는 그녀를 자신의 분에 넘치는 유능하고 성실한 간호사라고 생각했다. 삼 년 동안을 같이 지내면서 단 한번도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던 그녀가 의논할 말이 있다고 하자 서만기는 긴장을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그렇게 잘 이해해주는 그녀에게 최근 삼 개월 분의 급료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방에 들어가서 차를 시킨 후 홍인숙은 뜻밖에도 급료 독촉이 아니라, 봉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봉우가 거의 매일 자신을 따라다니는데, 인숙 자신도 처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제는 남의 이목도 두렵고, 봉우의 행동에 미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숙은 봉우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도 해보았지만, 봉우는 여전히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병원이 휴업을 하는 일요일이면 봉우는 하루종일 인숙의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다고 했다. 인숙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서만기는 다만 조금만 더 참고 지내라는 말만 했다. 서만기는 계산에 닿지 않는 애정에 열중하고 있는 봉우를 딱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서만기는 자신과 얽혀 있는 애정과 애욕의 문제를 떠올리면서 착찹한 마음이 들었다. 처제인 은주가 공공연하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은주는 형부인 서만기가 아무런 불평없이 자신의 식구들까지 모두 먹여 살렸을 뿐 아니라 학비까지 대주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서만기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동정했다. 그래서 은주는 대학교 일학년을 마치고는 취직을 해버렸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셋방을 얻어 나갔다. 그녀는 형부의 짐을 덜어주고 싶어서 독립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사해 나가는 날 마지막으로 식사를 같이 하고 나서, 은주는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언니에게 “언니, 나 형부를 사랑해두 좋아?”라고 말했다. 물론 그녀가 서만기와 단둘이 있을 때, 거북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서만기 부부 앞에서만 형부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사코 결혼하기를 거부했고, 평생동안 서만기만을 생각하면서 혼자 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래서 아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으면서도 서만기는 아내와 은주 사이에 낀 난처한 입장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실낱같은 변화의 가능성
한편 저 같은 계집에게도 선생님같이 점잖은 분을 비웃을 권리나 자격이 어쩌면 아주 없지도 않을 거예요. 삶을 대담하게 엔조이할 줄 아는 현대인 가운데 먼지 낀 샘플처럼 거의 폐물에 가까운 도금(鍍金)한 인간이, 자기 만족에 도취하고 있는 우스꽝스런 꼴을 아시겠습니까? 선생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표본이야요.
삼십이 좀 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봉우 처의 편지를 가지고 병원을 찾아왔다. 편지를 통해 봉우 처는 서만기가 삶을 즐길 줄 모르는 도금한 인간이며, 그런 자기 모습에 도취해 있다고 비웃었다. 그리고 편지를 가지고 간 남자에게 병원 시설을 팔고자 하니, 병원을 구경을 시켜주라고 했으며, 계약이 성립되면 곧 병원과 시설을 비워달라고 했다. 편지 끝에는 자신에게 용건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면서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