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손창섭 지음 | -
비 오는 날
손창섭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정원구: 리어카에 잡화를 벌여놓고 장사를 한다. 동욱과는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동창인데, 우연히 길에서 둥욱을 만난 후, 그의 거처를 알고, 장사를 할 수 없는 비 오는 날이면 동욱의 집을 찾는다.
동욱: 원구의 오랜 친구. 여동생 동옥과 빗물이 새는 낡은 목조 건물에서 살며,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주문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초상화 주문 받는 일이 어려워지자, 어느날 동생을 놔둔 채 사라진다.
동옥:동욱의 여동생. 왼쪽 다리가 가늘고 짧은 장애인. 그림 공부를 해 오빠 동욱이 초상화 주문을 받아오면, 그림을 그린다. 모은 돈을 자신이 살고 있는 목조 건물의 주인인 할머니에게 빌려주었으나, 할머니는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고 도망을 간다. 그 일로 상심하다가 오빠 동욱이 사라진 후, 어느 날 그녀도 사라진다.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추억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원구는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풍경이 떠올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의 뇌리에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가는 목조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리어카에 잡화를 벌여놓고 장사를 하는 원구는 어느날 거리에서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던 동욱을 만나게 됐다. 원구는 동욱에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청했는데, 동욱은 밥보다는 오히려 술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둘 다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갔다. 저녁을 먹으면서 원구는 동욱이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며, 한때 몇몇 교회에서 찬양대를 지도했음을 기억해냈고, 동욱에게 요즘도 교회에 잘 나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동욱은 아주 가끔, 그것도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에나 나간다고 말했다.
생활이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동욱은 행색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소매와 깃이 너슬너슬한 양복저고리에 교회에서 구제품으로 탄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검은 줄이 죽죽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원구의 눈에 무엇보다 괴이하게 여겨졌던 것은 그가 신은 구두였다. 그는 개미허리처럼 중간이 잘록한데다가 코숭이만 주먹만큼 뭉툭 솟아오른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무엇을 하며 먹고 사느냐는 원구의 물음에 동욱은 서양 여자와 아이들의 초상화가 붙어있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견본을 가지고 미군부대를 찾아다니며, 초상화 주문을 맡아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서 동욱은 자신이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한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자조의 웃음을 띄었다. 사실, 원구는 어릴 때부터 동욱의 그 닝글닝글한 웃음이 싫었다. 그의 웃음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스럽게 친근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원구는 누가 초상화를 그리냐고 물었다. 그러자 동욱은 지금 여동생 동옥과 함께 살고 있는데, 초상화는 그녀가 그린다고 했다. 동욱의 말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던 그녀는 초상화도 곧잘 그린다는 것이었다. 동욱은 계속해서 여동생 동옥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동욱이 동옥을 데리고 온 것은 1.4후퇴 때였으며, 그녀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라고 했다. 동옥의 이름을 들으면서 원구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원구가 소학교시절 동욱이네 집에 놀러 가면 그때 대여섯 살밖에 안 되던 동옥은 원구를 귀찮게 졸졸 따라다녔고,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했던, ‘중중 때때중 바랑 메고 어디 가나’를 부르며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술에 취한 동욱은 원구의 어깨를 한 손으로 투덕거리며, 자신의 여동생이 정말 가엾다고 했다. 그 총기와 인물이 아깝다는 말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서 머리를 떨어뜨린 채, “내가 자네라면 주저 없이 동옥이와 결혼할 테야, 암 장담하구 말구” 혼자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음식점을 나와 헤어질 무렵 동욱은 원구에게 “꼭 목사가 되겠어”, “그것이 나의 갈 길인 것 같아”, “이제 새학기에는 신학교에 들어가겠어” 라고 말했다. 물론 원구는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구는 어깨가 축 늘어져 걸어가는 동욱의 초라한 뒷모양을 바라보며 그를 아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성격적 불구인 동옥과의 만남
이 폐가와 같은 집 앞에 우두커니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집에 도대체 사람이 살고 있을까? 아이들 만화책에 나오는 도깨비집이 연상되었다. 금시 대가리에 뿔이 돋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사십 일이나 계속 된 긴 장마가 시작된 어느날, 원구는 동욱을 찾아갔다. 동래(東萊) 종점에서 전차를 내려, 동욱이 쪽지에 그려 준 약도를 펴보며, 비탈길을 올라가자, 동욱의 집이 나타났다. 인가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이 서 있는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한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통나무 기둥이 모로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고, 기와를 얹은 지붕에는 두세 군데 잡초가 반 길이나 무성해 있었다.
전면(前面)도 원래 전부가 유리 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고,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 오른편 창문 안에 가마니때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고, 우산을 받기는 했으나 비가 후려치고 흙탕물이 튀고 해서 원구의 정강이 밑은 말이 아니었다. 폐가와 같은 이런 집에 도대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면서 원구는 그 집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원구는 다시 한번 쪽지에 그린 약도를 보고 확인한 후, 몇 걸음 다가가면서 인기척을 내었다. 같은 말은 여러 번 되풀이했으나, 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좀더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기척을 내었다.
그러자 문안에 친 거적 너머로 백지에 먹으로 그린 초상화 같은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살결이 유달리 희고, 눈썹이 남보다 검은 그 여인은 원구를 내다보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원구는 속으로 그녀가 동옥이라고 여기고, 이 집이 김동욱의 집이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만 까딱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거만해 보였다.
동욱이 집에 없음을 확인하고 원구는 불쾌와 후회의 감정을 느끼면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쯤 가다가 원구는 별 생각 없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창문 안에 드리운 거적을 캔버스삼아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있는 동옥의 흰 얼굴이 보였다. 비 내리는 창문에 붙어 서서 짓궂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옥에게서 사람을 홀린다는 여우 이야기를 연상하면서 원구는 전신에 오한을 느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린 원구는 곧바로 멀리서 찢어진 종이 우산을 받고 다가오는 동욱을 만나게 되어, 다시 그의 집으로 갔다. 동욱은 잠시 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방안은 비 오는 날인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때기로 가리워서 굴속같이 침침하고 천장 한 쪽에서는 쉴새없이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는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동욱은 식사준비를 하기 위해 사잇문을 닫고 부엌으로 나갔고, 원구는 동옥과 한 방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원구는 별안간 엉덩이가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양동이의 빗물이 넘쳐, 옆에 앉아 있는 원구의 자리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원구가 젖은 양복바지의 엉덩이를 만지며 일어나자 동옥도 양동이 물이 넘친 것을 알게 되었다. 동옥은 이 사실을 알고도 직접 일어나 양동이를 치우지 않고, 앉은 채 부엌 쪽을 향해 물이 넘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겸, 원구는 한 손으로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손잡이의 한쪽 끝 갈고리가 고리 구멍에서 벗겨지면서, 양동이는 ‘철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한 쪽으로 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순식간에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동옥도 냉큼 일어나서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순간, 원구는 동욱의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다리를 보았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어린애의 손목처럼 가늘고 짧았다. 자연히 다리를 옮겨 디디는 순간, 동옥의 전신은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 가늘고 짧은 다리를 옮겨 놓는 일없이, 젖지 않은 구석 자리에 재빨리 주저 않았다. 그리고는 희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에 독이 오른 눈초리로 원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동욱의 집에서의 하룻밤
불구인 그 신체와 같이, 불구적인 성격으로 대해 주는 동옥의 태도가 결코 대견할 리 없으면서도, 어느 얄궂은 힘에 조종당하듯이, 원구는 또다시 찾아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침침한 방 안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일까? 동옥의 가늘고 짧은 한쪽 다리가 지니고 있는 슬품에 중독된 탓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찾아갈 적마다 차츰 정상적인 데로 돌아오는 동옥의 태도에 색다른 매력을 발견한 탓일까?
그 뒤로는 비가 와서 장사를 할 수 없는 날이면 원구는 자주 동욱이네 집을 찾아갔다. 원구 자신도 동욱의 집에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계속 찾아갔다. 원구는 어쩌면 자신이 찾아갈 때마다, 점차 정상적인 데로 돌아오는 동옥의 태도에서 색다른 매력을 발견한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동옥의 태도는 원구가 찾아갈 때마다 눈에 띠게 부드러워졌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동욱은 원구를 보자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세 번째 찾아갔을 때 동욱은 원구를 보고 해죽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 원구와 동욱이 웃을 때는 함께 따라 웃었으며, 간혹 한두 마디씩 말도 했다.
원구는 그날 일찌감치 저녁을 얻어먹고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비가 하도 세차게 퍼부어서 자고 오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동욱도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이런 비에는 앞 도랑에 물이 불어서 못 건너십니다”라는 동옥의 말에 원구는 동욱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결정을 했다. 그날 밤부터 원구는 가벼운 기분으로 동옥과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원구와 동욱은 어릴 때 이야기들을 나누고, ‘중중 때때중’ 이라는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동옥을 대하는 동욱의 태도는 이상했다. 동욱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이년”, “저년” 하고 동옥에게 욕을 퍼부었다. 동옥이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원구가 동욱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동욱은 동옥의 마음 씀씀이가 틀렸다면서, 원구에게 그 경위를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그림값도 반씩 똑같이 나눠 가지다가, 최근 들어 그녀는 동욱을 신용할 수 없다면서 한 장에 얼마씩 또박또박 선금을 받고서야 그림을 그려주고 있으며, 생활비도 둘이 똑같이 절반씩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옥이 자신은 병신이기 때문에, 자기대로 약간이라도 밑천을 장만해 두어야 비참한 꼴을 면하지 않겠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욱 자신도, 그러한 동욱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기만 하면 화가 치민다고 했다.
아무튼, 모두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동옥은 불을 끄고는 잠을 이룰 수 없는 반면, 동욱은 불을 꺼야만 안심하고 잠을 들 수 있어서, 동옥과 동욱 사이에는 한동안 실갱이가 있었다. 심지를 낮추어서 희미하게 켜놓은 불빛에도 동욱이 화를 내며, 아주 꺼버리라고 소리를 질렀고, 동옥도 자신을 왜 데리고 왔느냐고 따졌다.
그 때문에 원구는 쉽게 잠들지 못한 채 뒤척거렸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려고 할 때, 원구는 동욱의 잠꼬대를 듣게 되었다. “커다란 적선으로 생각하고 동옥과 결혼할 용기는 없는가?”라고 동욱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간신히 잠이 들려했을 때, 원구는 발치 쪽에서 ‘빠드득 빠드득’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원구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 소리는 뒷집 계집애가 자면서 이 가는 소리였다. 동욱의 설명에 의하면, 뒷집에 육순이 넘은 집주인 노파가 열두 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사는데, 그 계집애는 잠만 들면 반드시 이를 간다는 것이었다.
동옥 자신도 처음 며칠 밤은 그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제 습관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원구는 이런 방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내면 누구라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구를 찾은 동욱
사오 일 지나서였다. 오래간만에 비가 그치고 제법 날이 훤해져서, 잡화를 가득 벌여 놓은 리어카를 지키고 섰노라니까, 다 저녁때 원구의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동욱이었다.
며칠 후, 원구는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서 리어카 위에 잡화를 벌여놓고 장사를 했다. 다 저녁 무렵에 동욱이 원구를 찾아왔다. 동욱의 행색은 여전히 초라했다. 동욱은 소매와 깃이 다 처진 저고리와 검은 줄이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비에 젖은 것을 그냥 짜서 말리곤 해서인지 여기저기 꾸겨져 있었다. 괴이한 채플린식의 그 검정 단화의 코숭이도 온통 흙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 동욱의 꼴에 원구는 이상스럽게 정을 느꼈다.
원구는 리어카를 주인집에다 맡기고 와서 원구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동욱은 우연히 만났던 그날처럼 밥보다는 술 생각을 더 간절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두 가지 다 먹을 수 있는 집으로 갔다. 술을 몇 잔 마시자, 동욱은 초상화를 주문 받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미군들도 약아져서, 돈을 떼이기도 하고, 부대가 패스 없는 사람의 출입을 엄중히 단속하기 때문에 전처럼 드나들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돈을 받으러 몰래 부대에 들어갔다가 순찰장교에게 걸려서 하룻밤을 멍키 하우스에게 갇혔다가 풀려났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국민병 수첩까지 잃어버려, 마음놓고 거리를 나다니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차라리 군에라도 들어가 버릴까” 하며 의미없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그런 얘기 끝에 동욱은 원구에게 가끔 집으로 찾아와서 동옥을 위로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조소하고 멸시한다고 생각해서,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도 바깥 출입을 일체 하지 않고 방에만 처박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 동옥이 원구만은 자신을 자연스럽게 대해 준다고 여겨, 원구를 기다린다고 했다. 특히 초상화가 잘 팔리지 않게 되면서 동옥의 정신 상태는 더욱 불안해졌고, 자신의 고독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게 되었는데, 그런 그녀가 동욱은 측은하기만 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동욱은 언젠가처럼, “내가 자네라면 예쁜 동옥이와 결혼할 테야, 암 하구말구” 라고 말했다. 술집을 나와서 동욱은 이번에도 원구의 손을 꼭 쥐고 “나는 기어코 목사가 되겠어”, “동옥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그것만이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
사라진 동욱과 동옥
그 뒤에 한번은 딴 본일로 동래까지 갔던 길에 동욱이네 집에 잠깐 들른 일이 있었다. 역시 그날도 장마비는 구질구질 계속되고 있었다.
그 뒤에 딴 일로 동래에 갔다가 원구는 동욱이네 집에 잠깐 들렀다. 그날도 역시 장마비는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런데 동욱만 자신을 맞아주고, 동옥의 기척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보니, 동옥은 담요를 머리까지 덮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동옥이 동욱이 모르게 뒷방에 살고 있는 주인 노파에게 이만 환이나 빚을 주고 있었는데, 노파가 그들이 사는 집까지 팔아먹고 도망을 간 것이었다.
동욱과 동옥은 이 사실도 집을 산 사람이 전날 갑자기 이사를 와서 알게 됐다. 더 괴로운 일은 집을 당장 비워야 하는 일이었다. 원구는 동옥이 수면제 같은 것이라도 먹고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불편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새로 구해야 한다면, 자신도 구해보겠노라고 말하고 그들의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