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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정찬주 지음 | 다연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정찬주 지음

다연 / 2019년 11월 / 328쪽 / 15,000원



1부 명상, 스님의 공감언어




산다는 것은?


[마중물 생각]: 아들 쌍둥이 외손자 백일잔치 초대를 받아 서울에 다녀왔다. 큰 소리로 우는 주영이, 방긋 웃는 태영이를 보니 ‘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며 흐른다’는 중국 금언이 실감난다. 그렇다. 갓난아이로 인해서 묵은 나무 같은 나에게도 청솔가지 하나가 솟구치는 느낌이다. 손님들이 묻는다. 왜 산중으로 내려와 사느냐고,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 수십 년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으로 내려왔다고.

방에서 창호 밖을 바라보는 산중 풍경과 툇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방은 바깥과 단절된 공간이지만 툇마루는 산중과 연결되어 있다. 툇마루는 방과 산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이다. 산중의 풍경이 보다 가깝게 다가와 보인다. 물소리 바람소리도 한층 또렷하게 들린다. 자연의 소리는 시비에 찌든 눈을 맑히고 귀를 씻어준다. 강론이나 설법이 따로 없다. 내가 입을 닫고 있으니 자연이 입을 연다. 그러한 삶의 순간순간이 더욱 투명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산중생활의 맑은 행운, 정복(淨福)이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한 날 같지만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사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 쉬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짐승이나 다를 게 없다. 보다 높은 가치를 찾아 삶의 의미를 순간순간 다지고 그려냄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피어남이다. 이런 탄생의 과정이 멈출 때 잿빛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삶을 소유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이니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새롭게 발견되는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나는 오두막에 살면서 내 자신을 만나고 되찾게 된 것을 무엇보다 고맙게 여긴다.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짐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홀가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이 순간에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한테는 사슬이 없다. 기억의 사슬도 없고 욕망의 사슬도 없다, 시냇물이 흐르듯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되풀이 같지만 적어도 현존재인 이 육신을 가지고서는 단 일회적인 생이기에 존엄하다. 존귀한 삶이 밝고 당당한 경우는 빛이 나서 이웃에까지도 두루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어둡고 병들어 있다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도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도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외떨어져 독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

(갈무리 생각): 비로소 마당가 홍매화 꽃이 보인다. 백매화 꽃도 피어 있고, 청매화 꽃은 꽃봉오리가 파랗게 부풀어 있다. 내 산방의 세 가지 매화, 삼매 향기가 귀로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문향(聞香)이라고 했을 것이다. 연못에서는 개구리들 합창소리가 절절하다. 겨우내 참았던 소리이니 그럴 것이다. 그렇다. 사람도 절절해지려면 참고 지그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대로 살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살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말이 아닐까.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눈앞의 밭을 봐야지 뒤를 돌아보면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 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왜 영롱하고 아름다운지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던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백척간두 진일보와 다르지 않다. 희비의 길 위에서 운 좋게 생존해온 나도 이제는 풀잎 끝의 이슬처럼 순간순간 온몸을 던지며 살고 싶다.

현대문명, 무엇이 문제인가?


[마중물 생각]: 급한 볼일이 생겨 서울에 다녀온 일이 있다. 한나절 시간이 나서 서울생활을 할 때 자주 찾아가 위안받곤 했던 관악산을 S대학교 정문쪽으로 올랐다. 그런데 관악산 산자락은 여기저기 망가진 채 숲이 사라지고 있었다. 불과 10여 년만인데 산자락에 S대학교 신축건물들이 자연을 무시하고 깔보듯 들어서 있었다. 이른바 학문의 전당이 자연을 훼손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도대체 학문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문명의 폐해는 자연의 훼손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까지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거듭거듭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오늘날 우리들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현대인으로서 그 대열에 처지지 않으려면 지식과 정보에 어둡지 않아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식과 정보의 양이 광대하면 오히려 거기에 매몰되어 인간이 부재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문으로 들어온 곳은 보배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바깥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다 보면 개인의 창의력을 묵히게 되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진다.

감정이 없는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있다. 둘레에는 삶의 율동과 지혜, 인간미와 흙냄새 등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지식과 정보와 가상공간이 있을 뿐이다. 차디찬 정보는 있어도 따뜻한 삶의 실존이 없다. 이것은 과학문명시대라는 우리 시대의 단적인 현상이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물리적인 풍요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심성과 생활환경이 말할 수 없이 황폐화된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저지른 재앙이다. 자연에서 이탈한 인간은 그만큼 부자연스럽다. 커다란 생명체인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잃으면 자연 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을 깔보게 된다. 우리가 어머니인 대지에 소속되려면 먼저 그 대지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돌아가 그 품에 안길 대지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불편함과 모자람으로 살아가는 나는 오히려 다행한 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문명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과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에는 독성이 들어 있어 점진적으로 사람을 시들게 만든다. 자연은 원초적이며 건강한 것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의지처이다.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낸 문명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그 문명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가 반드시 온다. 문명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즐기기 위해서 죽이기도 한다. 사냥이나 낚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요즘 사람들은 ‘레저’라고 한다. 여가를 이용한 놀이와 오락이라는 것이다. 당하는 쪽에서 보면 절박한 생사의 문제인데 그것을 놀이와 오락으로 즐기고 있다니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산토끼는 어린아이처럼 운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문명에 어떻게 삶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암담하다. 항상 크고 많고 빠른 것과 새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 만족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면서 소모적이고 향락적인 우리들. 생명과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면서 단 하나뿐인 삶의 터전인 고마운 지구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만들어가는 오늘의 문명에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갈무리 생각): 자신의 둘레를 배려하지 않는 염치없는 인간부재의 문명세상이 되어가고 있어 두렵고 씁쓸하고 걱정이 앞선다. 스님의 말씀을 빌지 않더라도 자연이 병들면 인간도 병들게 된다.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서로 얽혀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 산중에 산다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더불어 답답하다. 산중마을의 논밭도 농약 때문에 땅이 부실해지고 있다. 농약도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산물이 분명하다. 벌레들에게는 자기를 죽이는 독약일 것이다. 논밭의 벌레가 줄어드니 제비마저도 성미가 급해진 듯싶다. 올해는 제비가 너무 일찍 날아가 버리고 없다. 철새 중에서도 제비는 삼월 삼짇날 왔다가 구월 중양절에 간다고 하는데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내 산방 현관문 위에 살던 제비가 자꾸만 생각나 산책길에 절골 마을의 황씨 집에 가보니 거기도 제비집이 비어 있다. 찬 서리가 내리려면 아직 멀었는데 제비들이 왜 빨리 날아가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내가 산방 현관문을 너무 매몰차게 닫아 그랬는가 싶기도 하고, 온난화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 황씨에게 물어보았지만 선문답처럼 대답하며 웃는다. “스님허고 제비는 올 때는 알갑시라도 갈 때는 몰라불지라우.” 미소를 짓게 하는 대답이다. 아래 절에 스님들도 어느 날 와서 공부하다가 때가 되면 구름처럼 물처럼 가버리고 없다. 그래서 운수납자(雲水衲子; 누더기를 입고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떠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승려)라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갈 때를 모르는 것은 스님과 제비뿐이 아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금생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갈 때를 아는 천상병 시인 같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마중물 생각]: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대학 시절에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그가 역설한 핵심을 나는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다.

소유 지향적인 삶은 관형격이다. / 무엇의 나다. / 존재 지향적인 삶은 주격이다. / 무엇이 나다.

부처님도 어디에 종속되지 말고 자유를 향유하면서 자주적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부처님에게도 의존하지 말라고 했다. 오직 자신과 진리에만 의지하라고 했다. 게으르지 말라고도 유언으로 남겼다. 그저 여야하고 순일하게 정진하면서 주인공으로 살라고 당부했다. 선사들도 그 어떤 욕망, 부(富), 심지어 대의명분이라도 노예가 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좋은 말들의 성찬, 이데올로기에 속지말고 순간순간 깨어 있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데올로기가 약이 아닌 독으로 쓰일 때 맹독인 까닭은 이성과 양심까지도 마비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우리는 ‘내 것’이라고 집착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한다. 빼앗길까 봐 어디로 새어 나갈까 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다만 한때 맡아서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아닌데 자신이 지닌 것들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얼마만한 재물이 필요할까? 개인이 쓰는 데는 한도가 있다. 그 밖의 것은 개인의 소유가 아닌 인류가 함께 나누고 누려야 할 세상의 공유물이다. 사람은 무엇이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인지를 가려볼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디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뒷받침해준다.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자기 자신다운 삶을 조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살 줄 아는 사람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하고 만다. 돈이나 물건에 집착하면 그 돈과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반대로 반드시 무엇인가 잃는 것도 있다. 모두 두루 갖추고 편리하게만 지내려고 한다면, 사람은 그 틈새에 끼여 자주적인 활력을 잃게 된다. 인간의 자존과 창의력을 지키기 위해 얼마쯤의 불편은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어야 한다. 몸은 조금씩 이지러져가지만 마음은 샘물처럼 차올라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결코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간에 항상 배우고 익히면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나 삶에 녹이 슨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거듭거듭 일깨워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다음 생의 문전에 섰을 때도 당당할 것이다. 이제 나이도 들 만큼 들었으니 그만 쉬라는 이웃의 권고를 듣고 디오게네스는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결승점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만 멈추어야 하겠는가?”

사람은 저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독창적인 존재다. 사람마다 조건이 다르고, 삶의 양식이 다르며, 그릇이 다르다. 자신의 빛깔을 지니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결코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과 이웃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비교는 마침내 자기 몫의 삶마저 스스로 물리쳐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의 불행을 가져온다. 비교는 좌절감을 가져오고 시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부질없는 비교는 배움을 저해하고 두려움만 키운다.

때가 되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일몰 앞에 서게 된다. 그 전에 맺힌 것을 풀어서 안팎으로 걸림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 짐을 다음 생으로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날이다. 무릇 묵은 시간에 갇힌 채 새로운 시간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

커다란 침묵과 하나가 될 때 내가 사라진다. 무아의 경지에 든다. 어딘가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내가 없는 그 무한한 공간 속에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는 에너지가 있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혼돈 상태가 아니다. 정신은 또렷하고 아무 번뇌와 망상이 없는 그 침묵 속에 강물처럼 흐르는 에너지가 있다.

(갈무리 생각): 기쁠 때는 기쁨에 매달리지 말라. 슬플 때는 슬픔을 회피하지 말라. 무심코 기쁨이 되고 슬픔이 되라. 기쁨도 슬픔도 삶의 한 부분이니.

가을장마가 져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중이다. 더불어 뜬금없지만 삶의 방식을 생각해보고 있다. 미련하게 한곳에 붙박이로 사는 농사꾼 스타일이 있고, 먹이(풀)을 찾아서 끝없이 옮겨 다니는 유목민 스타일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두 스타일이 혼재된 경우도 있겠고,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민첩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비록 천수답일지언정 농사꾼 스타일로 사는 게 성정에 맞는 것 같다. 심신을 쉬게 한 채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점심을 먹은 뒤 방금도 아랫목에 누워 토막잠을 잤다. 머리와 눈과 가슴을 쉬게 했다. 이를 컴퓨터 용어로는 리셋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삶이 빛나는 것은 죽음이 있어서다


[마중물 생각]: 어른이 ‘죽다’라는 말을 우리는 ‘돌아가시다’라고 표현한다. 어느 지점이 아니라 또 다른 지점으로 가셨다는 뜻이다. 그 말 속에서 이 세상과의 인연이 끊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또 다른 인연으로 살아간다는 뜻이 숨어 있다. 불교 용어로는 ‘윤회하다’이다. 우리 말 속에 불교용어가 습합되어 있는 경우이다. ‘명복을 빈다’라는 문장도 ‘명부(지장보살이 있는 곳)의 복을 빈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이다. 한 종교가 문화와 역사가 되려면 5백 년 이상이 지나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 같다. 우리에게 불교문화, 유교문화, 샤머니즘 문화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 피톨 속에 정체성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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