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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기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줄거리

동경 유학생이던 김희준은 학자금난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원터에 돌아와, 청년회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을 이끌려고 한다. 서울 민판서 집 땅을 부치고 사는 소작인인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론 마름 안승학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한편으론 마을 사람들끼리의 갈등과 애정에 부대끼며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김희준은 그 자신도 소작인으로서 농사를 짓는 한편, 농민 봉사, 계몽활동 등을 통하여 농민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 간다. 마름 안승학은 그의 본부인을 서울로 보내 자식들을 교육시키도록 하고 자신은 첩 숙자와 함께 살며 딸 갑숙을 두고 있다.



김희준은 많은 회의와 갈등 속에서도 야학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깨우치고 스스로도 성장해 간다. 생활이 어려운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근처의 제사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전제(專制)를 참다 못해 가출한 안승학의 딸 갑숙 역시 희준의 주선으로 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옥희라는 가명으로 일을 한다. 한편 안승학은 경호가 읍내 유지인 권상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빌미로 한 밑천 뜯어내려고 하지만 딸 갑숙이 경호와 연애를 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이에 안승학은 갑숙을 괴롭혔고, 그 바람에 집을 나온 것이다. 갑숙은 점차 선진적인 노동자로 성장해 가게 된다.

마을에서는 희준을 중심으로 두레가 생겨, 마을의 단결과 협동의 정신이 고취된다. 그러던 중 수재가 나서 집이 무너지고 농사를 망침에 따라, 소작료를 감면해 줄 것을 요구하나 안승학은 이를 거절한다. 안승학과 마을사람들이 서로 대립해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투쟁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갑숙은 그들에게 은밀히 돈을 건네 그 어려움을 잠재우고, 소작인을 괴롭히는 아버지에 반대해 희준과 힘을 합치게 된다. 결국 희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안승학의 양보를 얻어내고, 희준과 갑숙은 이성 간의 애정을 초월해 동지로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돌아온 아들

희준이 동경서 돌아온 이듬해 봄이었다. 희준이는 뒷동산에 앉아서 지금 떠나는 기차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동안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작년에 지금 떠난 저 차를 타고 왔을 때 유쾌한 기분과 팔딱이던 기상은 지금도 기억에 떠오른다. 그런데 그것은 불과 사흘이 못 가서 없어지지 않았던가. 그는 그때 동경을 떠나올 때 차 안에서부터 여러 가지 생각에 얽혔었다. 그는 실로 고향에 돌아와서 할 일을 궁리해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런 포부는 현해탄을 건너서 부산에 접어들면서부터 더 크게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지 벌써 일 년이 되어가는데 그동안에 자기는 무엇을 했는가? 하긴 청년회 일을 안 보지는 않았다. 그는 청년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청년회란 무엇을 하는 게냐? 그는 처음 나와서 읍내 있는 청년회를 가보고 놀랐다. 그것이 청년회인지 오락 기관인지 몰랐기 때문에, 어떻든지 청년들이 모이긴 모였다. 그래도 그들이 노동 야학을 시작한 것만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역시 유명무실로 선생들의 태만한 행동은 학생들의 열성을 꺼지게 했다. 그때보다는 청년회 꼴이 제법 쇄신된 모양이다. 그러나 희준의 안목으로 본다면 지금도 그것은 비빔밥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유흥 기분에는 백 퍼센트의 열을 띠고 나선다. 그도 그럴 것은 그들은 대개 장사치들과 은행 회사원들의 중산 계급으로서 지식 정도로도 중학 한 개를 똑똑히 마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거의 일 년 동안이나 그들과 싸워왔다. 그는 어떤 때 스스로 실망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자기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인물로 비관해본 적도 있었다. '나도 그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나의 한 일은 무엇이냐?'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을 다 집어치우고, 멀리 해외로나 어디로나 가고 싶게 했다. 하나 그의 다음 생각은 그것을 물리쳤다. 그것은 마치 추수할 곡식을 문 앞에 두고 다른 곳으로 찾아가는 자기 도피와 같기 때문에.

춘궁

아래 장터 영생양조소(永生釀造所) 문 앞 광장에는 오늘도 남녀노소의 군중이 몇 겹으로 둘러서서 목을 길게 빼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제가끔 빈 그릇을 들고 있다. 누르퉁퉁한 얼굴에 초라한 의복으로 간신히 살을 가리고 있는 그들은 흉년을 만난 피난민을 방불케 한다. 사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 사무실에서 양복쟁이 하나가 호기 있게 뛰어나오자 군중은 웅성거리며 일시에 그에게로 주목한다. 그는 참으로 자기의 행복한 처지에 자긍을 가진 사람처럼 그의 혈색 좋은 얼굴을 마치 '나 좀 봐라'라는 듯이 번쩍 들고 군중을 둘레둘레 본다. 그는 양복바지 옆구리에 손을 찌르고 군중에게 연설하듯 한다. "예, 오늘도 이렇게 많이 왔는데 물건이 많지 못하니 우선 그런 줄을 미리 알란 말이야! 그러나 누군 주고 누군 안 줄 수 없으니까, 오 전 이상은 팔 수가 없어. 자, 그러면 이렇게 질서가 문란해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은 즉 차례차례로 하나씩 늘어서라구." 말이 떨어지자 여러 사람들은 일시에 일렬종대로 늘어섰다. 서로 앞을 서려고 떼밀고 끄잡고 하는 바람에 한동안 왁자지껄하였다.



양조소에는 물물이 술지게미가 많이 나왔다. 그전에는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팔고 거저 주기도 했는데 누가 먼저 발견을 했는지 지게미를 사러 오기 시작했다. 그는 읍내 사는 막벌이꾼이었었는데 몇 때를 굶고 나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마침 동전 몇 닢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재강을 사다가 끓여 먹어보았다. 그 뒤로 이것이 전파되자 재강{{ 재강 : 술을 거르고 남은 찌끼}}은



훌륭한 푼거리 양식으로 이 근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용되었다. 재강은 나기가 무섭게 번쩍번쩍 팔렸다. 그래서 그전에는 그저 내버리듯 하던 재강은 훌륭한 상품이 된 것이다. 다급하면 거름하려고 면에서 얻어 온 콩깻묵으로 죽을 쑤어 먹기도 하는데(비료를 사람의 뱃속에다 하는 셈인가?) 거기다 비교하면 이 재강이야말로 훌륭한 고등 요리가 아닌가? 지게미에서는 야릇한 누룩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떤 것은 곰팡이가 나서 초같이 신 내가 난다. 그 속에는 지푸라기·솔잎사귀·피·벼깍지·돌 별별 잡동사니가 다 섞였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밀깍지만 남은 재강을 한 바가지씩 받아 가지고는 입을 헤 벌린다.

청년회

갑숙이는 어려서 어깨동무로 커나던 희준이-함께 소꿉질하고 신랑각시놀음을 하던 사람이- 그와 같이 장성한 것을 볼 때, 그는 남다른 정분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무슨 연모의 정이라기는 속단일지는 모르나, 또한 그렇다고 평범한 우정도 아닌 것 같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되풀이하는 갑숙이는 부지중 얼굴이 붉어짐을 깨달았다. '그이는 벌써 아들까지 두었다지 그리고 나도 처녀가!' 두 사내의 얼굴이 필름같이 돌아간다. 경호의 얼굴과 희준의 얼굴이! 그는 그만 울고 싶다. '나도 아버지의 유전을 받아서 음란한 여자로 태어났나? 왜 그때 순진한 우정으로 못 사귀었던가…….' 그러나 갑숙이는 미구에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 날 밤 집안 식구는 나들이를 가고 빈집을 지키고 있을 때 그는 그만 처녀로서의 마지막 것을 경호에게 뺏기고 말았다. '아, 그날 밤! 그날 밤!' 갑숙이는 지금도 몸을 떨며 그날 밤을 생각하였다.



"가갸거겨…… 一二三四五六七八九十!" 그들은 이런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 남부끄럽고 우스워서 어른들도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가갸 뒷다리도 모르는 막동이도 그들의 틈에 끼어 앉아서 '메기' 입을 헤 벌리고 읽으면서 그들을 따라 웃었다. 야학은 여덟 시 반부터 아홉 시 반까지 한 시간 동안을 하였다. 요새는 밤이 짧은 까닭에 어떤 때는 늦게 와서 아홉 시에 시작하는 때도 있었다. 진종일 일을 하고 온 사람들은 저녁에는 고단해서 여간 큰맘을 먹지 않고는 야학에 오지 못했다. 그들은 열 시만 지나면 꼬박꼬박 졸았다. 청년회관에는 전등불이 켜졌다. 사방이 툭 터진 덜름한{{ 덜름하다 : 어울리지 않게 홀로 우뚝하다.}}

언덕위에



지은 이 집은 서늘한 저녁 바람이 활짝 열어붙인 유리창 안으로 불어온다. 지금 막 넘어간 저녁 해는 아직도 훤하게 넓은 들에 후광을 남기고 있다. 익어가는 보리밭이 굼실굼실 물결을 친다.

김선달

"내남없이 여북해서 사는가. 목구멍이 보두청{{ 보두청 : '포도청'의 변한말.

}}이라고!

하…… 그런데 청년회란 건 무엇 하는 게라나? 자네가 거기 대장이라지?" 한동안 담배만 피우고 있던 조첨지는 마치 오래전부터 한번 들어보자고 벼르던 것을 여러 번째 정신이 상막해서 잊어버렸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것처럼 묻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대장은 무슨!" 희준이는 허구픈{{ 허구프다 : 허전하고 어이없다.}}

웃음을 마주 웃었다. "그래 그거 하면 뭐 생기는 게 있는가?" "생기긴 뭐 생겨요. 아저씨도 참 딱하신 말씀도 하십니다." 김선달은 가장 자기가 그 속을 잘 아는 것처럼 묻는 말을 가로챈다. "그럼 무슨 목적으로 그 짓들을 한단 말인가? 내 밥 먹고 내 신발 떨어뜨리고 허허허 원! 그렇지 않은가?" "허허 참. 아저씨두 퍽은 완고하십니다. 그게 다 사회상을 위해서 갸륵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같은 우매한 백성은 그저 개돼지처럼 제 목숨 하나만 먹고 살랴기에 겨를이 없지만두 잘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희준이는 어쩐지 차차 듣기가 면구스러웠다. 그는 벙어리처럼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참 청년회 일은 어떻게 되었나?" 김선달이 별안간 생각난 듯이 묻는 말에 "무얼 어떻게 돼요. 그 뒤에 그럭저럭 말었지요." 희준이는 무심히 대답하였다. "흥!" 무슨 의미인지 김선달은 허구픈 콧소리를 한다. "그렇게 시비를 할 테면 애초에 시작을 왜 했나! 참 선비들의 하는 일일세.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이지, 참 아저씨도 아까 그러한 말씀을 합디다마는 그까짓 청년회는 무엇 하러 가는 겐가? 그까짓 것들하고 무슨 일을 같이 하겠다고. 하긴 자네가 나온 뒤로는 좀 달라진 것 같데마는! 어떻게 했으면 오늘은 심심풀이를 잘할까? 하는 유복한 자식들이나, 그렇지 않으면 제 에미 애비가 뼛골이 빠지게 일을 해서 보통학교나마 공부를 시켜놓으니까, 번둥번둥 처먹고 놀면서 '공'인지 급살인지 치러 까지르는 것들이 무슨 제법 큰일을 하겠다는 말인가, 흥! 그래도 내세우는 말은 장관이지. 뭐? 그런 운동을 하면 몸이 튼튼해지고 먹은 게 소화가 잘된다고! 아니 못 먹어서 부황이 나 죽을 놈이 부지기수인데 돼지죽으로만 알던 지게미도 못 얻어먹어서 양조소 굴뚝을 하누님 쳐다보듯 하고 한숨을 짓는 이러한 살얼음판인데, 그래 기껏 걱정이 밥 먹은 것을 삭일 걱정이로구먼! 천하에 기급을 할 놈들 같으니!"



김선달은 가래침을 탁 뱉으며 담뱃대로 상앗대질을 한다. 이때 희준이는 마치 그 말에 자기가 모욕을 당한 것 같아서 무색하기가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희준이는 김선달에게서 무슨 자기와 공통되는 것을 발견한 것 같은 것이 있자 심중에 진득한 생각을 갖게 하였다. '그렇다! 참으로 그런 자식들과 무슨 일을 할 것이냐?' 그는 비로소 자기의 가진 신념이 더욱 굳어지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다시 한편으로 자기의 인텔리 근성을 자책하기 마지않았다.



두레

"깽무깽깽, 깽무깽깽, 깽무갱, 깽무갱, 깽무깽깽……"

아침해가 쀼주름히 솟을 무렵에 이슬은 함함하게 풀 끝에 맺히고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내 건너 저편으로 불어온다. 깃발이 펄펄 날린다. 장 잎을 내뽑은 벼 포기 위로는 일면으로 퍼렇게 푸른 물결이 굼실거린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꽁무니에는 일제히 호미를 찼다. 쇠코잠방이{{ 쇠코잠방이 : 여름에 농부가 일할 때에 입는 잠방이.}}

위에 등거리만 걸치고 허벅다리까지 드러난 장딴지가 개구리를 잡아먹은 뱀의 배처럼 불쑥 나온 다리로 이슬 엉긴 논두렁 사이를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간다. 그중에는 희준이의 하얀 다리도 섞여서 따라갔다. 희준이가 원터 사람들을 설득해서 시작한 두레가 난 뒤로 마을 사람들의 기분은 통일되었다.

한참을 다시 논을 맬 무렵에 희준이도 호미를 들고 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제일 거머리에 뜯기는 것이 징그럽고 둘째로는 허리가 아픈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저 따라다니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서 그러는 줄만 알고 공원은 논을 매지 않아도 좋다고 만류한다. 그러나 희준이는 그런 생각이 아닌 만큼 논매는 것을 배워본다고 참참이 대들어서 매보았다. 처음에는 호미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떡덩이 같은-지심이 잔뜩 낀- 흙덩이를 잡아 파내서 엎지르며 벼 포기 사이로 기어 나가기란 여간 힘이 들지 않는다. 장 잎은 좌우로 얼굴을 스쳐서 까딱하면 눈을 찌르기 쉬운데 등허리에서는 불볕이 내리쪼인다. 발 밑에는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는 대로 숨이 콱콱 막히며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철철 흐른다. 내 살을 꼬집어서 남의 아픈 사정을 알랬다고 자기가 직접적으로 육체적 노동의 고통을 당하고 보니 그전에 놀고먹던 허물이 뉘우쳐진다. 이들의 피땀의 결정인 곡식을 거져 앉아 먹은 것이 황송하다. 그날 밤에 희준이는 밤새도록 허리를 끙끙 앓았다.



소유욕

안승학은 상리 사는 작인 춘학이를 만나서 새로 들은 소문과 곽첨지의 말을 종합해본 결과 경호는 분명히 권상철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은 물론이요, 바로 곽첨지의 아들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혹시는 곽첨지의 아들까지는 확실히 모른다 할지라도 상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벌써 틀림없는 사실 같다. 승학은 문득 한 꾀를 생각하고 읍내 사는 권상철을 그길로 찾아갔다.



"오랜간만이외다. 어서 오시지요." 권상철은 깎은 머리에 감투를 쓰고 전방에 앉았다가 승학을 보고 인사를 한다. 안승학은 적삼감 한 감을 끊은 뒤에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주인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권상철은 구부정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와서 의아한 눈치로 승학을 쳐다보며 '저 사람이 또 무슨 소리를 하랴구 저러는가?' 하고 속으로 불안한 생각을 느꼈다.



"권상! 내가 요새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요." 안승학은 화두를 이렇게 꺼내놓고 우선 권상철을 의미 있게 마주 쏘아 보았다. "네, 무슨 소문이어요." "경호가 당신 아들이 아닙디다그려!" 승학은 아주 은근하게 다정하게 말하는데 이야말로 웃음 속에 칼을 품은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게 다 무슨 말씀인가요?" 권상철은 참으로 아닌 밤중에 칼을 맞는 것 같은 이 말에 별안간 새파랗게 질려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아니, 그렇게 놀랠 것은 없어요. 내가 결코 소문은 내지 않을 테니까!" 승학은 책상다리를 동개고{{ 동개다 : '포개다'의 방언.

}}

앉아서 가재수염을 한 손으로 비틀어 꼬며 교활한 웃음을 짓는다. "그게야 소문을 내고 안 내고 간에 백주에 낭설이니까 아무 상관은 없지만, 허허 원! 누가 그런 실없는 말을 해요?" "소문을 내도 괜찮구먼! 그럼 고만둡시다." 안승학은 한 걸음을 물러앉으며 거침없이 배짱을 퉁긴다. 상철이는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는 체하나 속으로는 여간 초조하지를 않았다. 승학은 속으로 약을 올리며 배를 퉁기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다져놓았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권상이 잘 알 테니까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그런데 나 듣기에는 증거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자제가 우리 집에 기숙하고 있는 것으로 보든지 또 무엇으로 보든지 그대로 있기가 뭐하더군요. 언무족이 천리라고 그런 말이 사실이야 있고 없고 간에 직접 자제의 귀로 들어간다면 재미없는 일이 아니어요. 그렇게 되는 날이면 하여간 재미없거든요. 그렇지 않소!" "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대단 고맙습니다. 지금은 좀 부산하니 그럼, 일간 한번 댁으로 가 뵙지요." "그럼 그렇게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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