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풍경
박태원 지음 | -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재봉이 이발소 소년. 사춘기 소년답게 매우 호기심이 많은 청계천의 소식통. 일하기보다는 이발소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일에 더 열심이다.창수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한약국집에서 일하게 된 소년. 서울 온지 반년도 채 못되어 도시의 '영리'한 소년이 다 되어 버린다. 금순이 결혼 첫날 밤에 남편이 공부하겠다고 달아나고, 다음에는 지나친 조혼으로 얼마 못 가 신랑이 죽어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불행한 여인. 낯선 사내의 손에 끌려 서울 로 올라오나 사내마저 돌아오지 않고….기미꼬 평화 카페의 여급으로 나중에 같은 여급 하나꼬와 시골 색시 금순이와 함께 살림을 차리는 인물. 여급같지 않게 얼굴은 못 생기고 성격도 고분고분하진 않으나, 『천변 풍경』에선 유일하게 당찬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점룡이 어머니 빨래터에 자주 나오는 '괴팍스럽고 변덕스러우며 감때 사나운 수다장이'. 빨래터에 모이는 귀돌 어멈, 칠성 어멈, 만돌 어미, 이쁜이 어머니 등과 함께 천변 주민들의 일상사에 참견하는 뉴스메이커다. 이쁜이 어머니 과부의 몸으로 외딸 이쁜이 하나만을 애지중지 길러 강석주에게 시집보내나 불행한 시집살이를 하는 딸 탓에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불쌍한 어머니다. 민주사 사법서사로 관철동에 첩을 두고 밤마다 색에 빠져 사는 인물. 돈은 많아 경성부회 의원 선거에까지 출마하나 낙선하고, 첩은 또 저대로 즐기느라 바람 잘날 없는데….
1. 천변풍경, 첫 번째 이야기(제1절∼10절): 천변 사람들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 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 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본문 중에서)
정이월의 청계천변 빨래터에는 마을 아낙들이 모여 빨래를 하면서 수다가 한창이다. 주근깨 투성이 얼굴에 이목구비가 모두 조그마하게 생긴 이쁜이 어머니, 한약국집에서 드난을 사는 귀돌 어멈, 민주사댁 드난살이 얼금뱅이 칠성 어멈, 얼굴이 감때 사나웁게 생긴 점룡이 어머니들이 앉아서 때때로 빨래 흔들던 손을 멈춰가며 사는 얘기, 동네 사람들 근황 얘기를 지절댄다.
신전집은 요새 가세가 기울어 딴집 살림하던 첩을 큰마누라하고 한집 살림을 시키고 있으니 그것 한 가지만 하더라도 알만 하다. 점룡이 어머니는 남의 일이지만 그것 참 안되었다. 점룡이 어머니 수다를 입가에 가만한 웃음을 띤 채 듣다가 빨래를 다 하고 일어서는 이쁜이 어머니를 향해 점룡이 어머니는 은근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쁜이 혼사는 어떠한지 묻는다. 마침 개천 건너 남쪽 천변으로 기생이 탄 인력거가 호기있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점룡 어머니는 부러움 가득한 얼굴을 해가지고 쳐다본다. 뭐니뭐니 해도 점룡 어머니 생각에는 취옥이라는 이 기생 어머니가 그를 기생으로 집어넣고 아주 호강하는 것이다. 이쁜이만큼 예쁜 딸을 기생에 넣지 않은 것이 점룡 어머니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 때 점룡이 녀석은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모래판에서 윷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 부리나케 한걸음에 달려간 놀음판에선 점룡이가 내리 돈을 따고 있는 판국이다. 점룡 어머니는 기어이 아들 주머니에서 백통전 열 닢을 받아쥔 다음에야 남의 돈은 얼른 갚아야 한다며 그 돈을 가지고 저편으로 건너간다.
소년은 그곳에 앉아 바라볼 수 있는 바깥 풍경에,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도 바깥 구경을 좋아한다. (본문 중에서)
한편 천변 건너편의 이발소에선 민주사와 젊은 이발사, 이발소 소년, 그리고 몇몇 남자 손님들이 있다. 민주사는 새로 얻어들인 안성집과의 연령차를 생각할 때 자기 머리 위에 가위를 놀리고 있는 젊은 이발사의 생기 어린 얼굴이 유난히 질투난다. 그래도 자신에겐 돈이 있으니까, 위로하려 해도 얼마 안 있어 시작될 부회의원 선거전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더욱 부귀가 탐이 난다. 그런 민주사 얼굴을 행길로 난 창 앞에 앉아 있던 이발소 아이놈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소년은 이렇게 이발소 창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다. 거지들의 둘째 대장인 땅꾼이 어딜 가고 있는지,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지 소년은 너무나 잘 안다. 느린 걸음으로 점잖게 지나가는 뚱뚱한 중년의 신사는 큰 거리에서 포목점을 경영하는 포목점 주인이다. 매부가 부회의원인 것을 자랑삼아 알고 점잖은 척 걷고 있는 그는 애용하는 중산모를 항상 머리 위에 사뿐 얹어놓은 채 걸어다니는데,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어 그것이 머리에서 떨어지길 소년은 적지 않이 명랑한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소년은 아까부터 천변 너머 맞은 편의 '평화' 카페 앞에서 안을 기웃거리는 오십대의 조그맣고 낡은 부인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한다. 그이는 그 카페의 여급 하나꼬의 어머니인데, 아까 하나꼬가 목욕 간 것을 아는 소년은 드난사는 그가 모처럼 딸을 보러 왔던 것이 허행이 되고 말 것이 애달프다. 한참이 지나서 삼십이 넘은, 그리고 얼굴이나 맵시가 결코 어여쁘지 않은 여급이 나와 제 동무가 목욕 갔음을 알려준다. 이이는 기미꼬로, 무뚝뚝하고, 못생기고, 늙었지만 참말 모르는 말로 여급 중에서도 술을 제일 많이 팔아주는 계집이다. 고개를 조금 돌리니 언제 봐도 의가 좋은 한약국집 젊은 내외가 같이 나오고, 한약국 안에는 주인 영감이 애꾸눈인 시골 손님과 마주 앉아 있다. 그밖에 창 밖을 지나가는 귀돌 어멈, 곰보 미장이의 여동생을 보고, 신전집 작은 아들이 치는 풍금 소리를 들으며 그 집의 기울어 가는 운세를 짐작하여 본다. 이렇게 남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며 창밖에 정신이 팔린 소년에게 젊은 이발사 김 서방이 '인마!'하고 소리를 꽥 지르며 닥달을 한다. 소년은 골이 나서, 볼 멘 소리를 지른다. '내가 왜 인마예요? 내 이름은 어엿하게 재봉이에요'.
그 때 한약국집에는 점원 소년 하나가 새로 들어오는데, 이 소년은 창수다. 막 시골서 상경한 소년의 마음에라도 이곳 천변풍경이 그다지 신기하거나 아름다울 것이 없었지만 오직 이곳이 서울이라는 까닭만으로 아름답고 신기하게 보인다. 하지만 담배 심부름에 거스름돈을 잘못 받아와 주인영감에게 혼나고 담배가게 주인에게 몰린 소년은 서러운 울음이 복받쳐 오른다. 음력 삼월 중순엔 이쁜이의 혼사가 치뤄지는데… 이 경사스런 날, 이쁜이에게 마음이 있던 점룡이는 어디론지 휙 나가버리고, 이쁜이 어머니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부디 혼자 애지중지 키워 온 이 딸이 아무 탈없이 잘 살아주기만을 바란다. 한편에서 이렇게 경사가 있었을 때 개천 하나를 건너 신전집은 완전히 가운이 기울어져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시골로 이사를 가고, 한약국집에 새로 고용살이를 시작한 만돌 어멈은 일은 서툴고 남편은 서울 와서도 매질에 계집질이 그치지 않으니 그야말로 불행한 여성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민주사는 요사이 부쩍 그 마음이 우울하다. 장난삼아 하던 마작을 못해서인가, 아니면? 그래도 믿었다고 할 수 있는 안성집이 천만 뜻밖에도 어떤 젊은 학생 놈하고 좋아지내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경성부 회의원 선거로 다사(多事)한 민주사는 분망한 하루 가운데 안성집 일을 잊었다가도 문득 뜻하지 않게 떠오르는 생각에 우울하게도 계집일이 궁금하였다.
2. 천변풍경, 두 번째 이야기(제11절∼20절): 가엾은 사람들얼마동안 계속되는 계인 날씨에, 빨래터는 역시 언제나 한가지로 흥성거렸다. 아낙네들은 그곳에 빨래보다도 오히려 서로 자기네들의 그 독특한 지식을 교환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것이나같이…. (본문 중에서)
빨래터에는 항상 동네 아낙들이 주고받는 여러 소문들이 있다. 만돌 아버지가 관철동에 첩이 하나 생겼다더니, 결혼한지 한 달밖에 안된 이쁜이 서방도 관철동에 있는 어느 식당 기집년에 미쳐 죽자 사자 한단다. 점룡이 어머니 말에, 이를테면 첩들은 모두 관철동에다 살림시키기가 유행인가 보다. 신랑은 외입하느라 구박이 심하고, 시어미라는 건 이쁜이를 종처럼 부려먹기에 바빠 친정 나들이 한번 안 시키니, 이쁜이하고 이쁜이 어머니의 타고난 팔자는 어찌 그리 기구한지 모른다. 평소에 소란하던 빨래터도 이쁜이 소식에 방망이 소리 하나 들리는 일 없이 얼마 동안은 입들을 봉하여 애닯게 조용하다. 눈을 들어보니, 한약국집 젊은 부부는 언제나 다름없이 의도 좋게 동부인하여 어디로 간다. 점룡 어머니는 그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만한 한숨을 토하였다.
서울 온지 이제 달 반이 되어 가는 창수는 자정이나 되어 돌아오도록 영화구경에 폭 빠졌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놀러만 다닌다고 혼이 나고서도 저러는 창수를 재봉이가 보고 있다. 천변으로 향한 평화 카페 창으로는 은방 젊은 주인의 옆 열굴이 흘낏 보인다. 그는 요사이 하나꼬에 빠져 있다. 하지만 얼굴도 곱고, 마음도 곱고, 행실도 곱다고 소문난 하나꼬가 거기에 응할 리 없다고 재봉이는 코웃음조차 치는 것이다. 평화 카페에는 대여섯 패의 손님들이 있어, 제법 활기 있어 보이는데, 아까 그 종로 은방 주인, 게다가 새로 나타난 최진사의 아들 '사이상' 역시 하나꼬에게 반해 있다. 삼호 박스의 대머리 손님, 손주사는 그날 아침 마누라를 잃고 이렇게 술에 취해 주정 중이다. 육호 테이블엔 결코 이런 데서 돈을 쓸만큼 유복해 보이지 않는 젊은 아이들 셋이 술을 마시는데 가만 보니 그 중 하나는 이쁜이 서방 강석주가 틀림없다. 그는 새로 곰보 미장이 동생인 정옥이라는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중이다. 세 젊은이가 밖으로 나왔을 때 큰 길거리에서는 아이스크림 장수인 점룡이와 용돌이가 그들을 가리키며 '흥' 코웃음을 쳤다. 부회의원 선거는 끝났는데 기어이는 포목전 주인의 매부가 다시 당선되어 그의 위세만 더욱 당당해지고, 민주사는 그간의 피로와 마음씀에 지쳐 앓아 눕는다. 민주사는 '용단'을 내려 안성집을 내보낼 '결단'을 한번 가져보지만 그러나 계집은 민주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여우여서, 마침내 민주사가 계집을 찾아갔을 때는 계집에게 속으러 간 것이었다.
창수는 아침 여섯 점(시)에 일어나 한약국 일하고 마당을 쓸고 하여도 툭 하면 게으르다느니, 꾀를 피느니, 버르장머리가 없느니 하는 주인영감 때문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겨우 사 원 받구 이 노릇을 하느니, 삼 원씩 받기는 하지만 일이 고될 것이 없는 평화 카페 보이 녀석이 부럽기두 하고, 제 딴에는 그것말고 동아구락부에 '겜도리'로 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 '다마'를 배울 수 있어서 좋고 돈은 십 환씩이나 벌고. 정신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어느 틈에 나온 이발소 재봉이 녀석이 주인영감 말투를 흉내내어 창수를 약올린다. 하지만 곧 정말 주인영감이 나와 창수는 쫒겨 들어가고 재봉이도 김 서방한테 핀잔을 듣는다. 그러는 재봉이 눈에 한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오는 한 남자의 모양이 보인다. 신전집이 떠난 후 그들이 살던 집에 '하숙옥'이 생겼는데 그 남자는 몇 번인가 하숙집에 드나들어 얼굴이 서투르지 않은 '금전꾼'이다. 하지만 정작 궁금한 것은 그의 뒤를 따라가는 젊은 시골 여자 일이었던 것이다.
미인은 아니지만 면추는 한 여자, 재봉이 눈에 그렇게 보인 이 여자는 '웬 것이 놈의 손에 또 걸려 들었누?'라고 한 김 서방 말대로 서울에 있는 공장에 소개시켜주겠다는 남자의 꼬임에 속아 따라온 불행한 여자였다.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병든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보던 금순이는 열다섯 살 되던 해 치른 혼사에서 신랑이 '큰 뜻'을 품고 야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버리고, 두 번째 맞이하였던 신랑은 혼인 당시에 겨우 십삼 세. 너무 어려 시집 온 지 이 년이 되도록 그의 처녀성을 유지하고 있는 불행한 색시는 시름시름 앓던 친정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또한 적지 않은 빚을 걸머진 채 동생과 함께 어디론지 떠나버려 돌아갈 곳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데, 불행은 이에 그치지 않아 어린 신랑마저 '호열자'에 걸려 십오 세의 나이에 죽고 만다. 호색인 시아버지와 악독한 시어머니 틈에 끼어 그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무작정 알지 못하는 이 사나이를 따라 서울 땅을 밟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닷새가 지나도록 깜깜 무소식이고 금순이는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무슨 도리가 떠오르지 않는 지금이었다. 그 날 한 여자가 금순이를 찾아왔다. 딸 생각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이쁜이 어머니에게는 시아버지 잠든 틈을 타 갑작스레 딸 이쁜이가 찾아왔다. 다신 안 가겠다는 딸의 말에 격한 마음으로 그러마고 했지만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딸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보내기는 보내야 할 텐데,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가 저녁이라두 먹여서 보내야겠다 싶어 이쁜이가 좋아하는 청인의 만두를 시키러 나간 사이, 이쁜이는 시집가기 전 모녀 단둘이서 지낼 때 하던 대로 풍로에 뜬솥을 올려놓고 불을 피우고 있다. 내키지 않는 발길로 돌아가는 이쁜이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이제까지 참아온 울음을 그대로 터지어, '어머니, 왜, 왜, 날, 날, 여자루 나놨수?'하며 흐느끼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였다.
어제나 그제나 한가지로 바람 한 점 없이 푹푹 찌는 여름 날, 창수는 백통전을 요란스러이 흔들며 돌아오다 호스를 끌고 나와 천변길에 시원하게 물 뿌리는 재봉이를 본다. 신기하고 부러워 한 번 해 보고 싶지만 장난 좋아하는 재봉이가 선선히 물려 줄 까닭이 없다. 화가 난 창수가 무심코 손을 번쩍 들어 본 것이 잘못되어 백통전 하나가 개천 속에 빠져버렸다. 경을 치면 쳤지 재봉이 보는 데서 어디 창피하게 개천 속으로 들어가 그걸 찾느냐고 돌쳐 약국 문을 들어서는 창수였다. 이발소에선 포목점 주인이 앉아 머리를 깎고 있다. 그는 자기 식구들이 모두 원산에 피서가 있는데 자기더러 오라 성화라고 은근히 자랑한다. 그 때 소복 입은 한 여자가 카페문 앞에 서 있는데, 그는 바로 하숙옥에 있던 시골 색시 금순이다. 정확한 재봉이 소식통에 의하면, 여자를 유인해 데려온 남자는 마짱을 하다가 경찰에 붙들려 갔고, 여관집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여자를 기미꼬가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밥값을 물어주고 함께 있게 되었다는데….
3. 천변풍경, 세 번째 이야기(제21절∼30절): 장마 풍경날은 어느 틈엔가 완전히 밝고, 양쪽 천변 길에는 구경 나온 사람이 많았다. 그 사이를 장정들이 기다란 장대를 들고 뛰어오고 뛰어갔다. 장마 때 이 개천에 물이 불으면, 의례 히 구경할 수 있는, 그것은 이를테면 한 개의 스포츠였다. (본문 중에서)
기미꼬는 하숙옥 상노로부터 금순이의 딱한 사정을 듣고 처음엔 아무런 계획도, 성산도 가지고 있지 않은대로 우선 자기의 일터이며 거처하는 곳인 카페로 그를 데리고 왔다. 자기처럼 여급을 만든다거나 그러한 의사가 아니라 하숙방에 그대로 두는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한방에서 숙식한지 사흘째 되는 날 기미꼬는 절묘한 방도를 생각해 내었다. 어디 방을 얻어 가지고 같이 살림을 하여 일체 생활비는 하나꼬하고 자신하고 책임을 맡고 금순이는 집안일을 맡으리라는 것이었다. 금순이나 하나꼬나 믿음직한 기미꼬가 한 말이라 만족하였지만 그들보다 몇 곱절이나 더 명랑한 기대를 가진 것은 기미꼬 자신이었다. 아무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살아오던 외로운 여자에게 이제 그런 것은 슬퍼하지 않아도 될 믿고, 의지하고, 깊은 사랑과 따뜻한 정을 나눌 동무들이 생겨난 것이다.
만돌이네는 만돌 아범의 행실 때문에 기어이 한약국집에서 쫓겨나 모교다리 어씨집으로 드난살러 이사가게 된다. 만돌 어멈은 앞길에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어 이 기회에 단독으로 행동을 취할밖에 도리가 없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낌새를 챈 만돌이는 먼저 가라는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치맛자락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때는 푹푹 찌는 여름, 날은 가물대로 가물어 한나절 거리에는 그늘이란 그늘이 없고, 사람들은 먼지만 풀싹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허덕이며 오고 간다. 점룡이의 '아이스크림' 매상고는 더위 때문에 내내 향상 중이다. 하지만 하늘은 하룻날, 낮부터 찌뿌듯하더니 드디어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의 피해는 깊숙한 다리 안에 자리잡은 깍정이들의 몸 위에 더 커서 갑자기 불은 개천 물에 집이며, 아끼던 물건 넣어 놓은 궤짝이며 다 잠기고 말았다. 날이 개자 사람들이 천변가에 몰려 나와 불어난 개천물에 떠내려오는 물건들을 건져내려고 한판 시합을 벌인다. 장대를 개천 속에 넣어, 물건을 제 앞으로 낚아 당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장대를 들고 뛰는 것은 '선수'나 하는 일이다. 그 구역에서 한번 놓쳐 버리면, 다른 구역에는 또 그곳의 '선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개 스포츠처럼 신나고 구경할 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