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풍경
박태원 지음 | -
박태원은 문자 그대로 '천변'의 풍경화를 그려보이듯 1930년대 서울 변두리 지역의 도시적 삶의 일상성을 샅샅이 그려낸다. 최재서나 임화는 박태원의 기법을 영화의 '카메라 아이'라 불렀다. 박태원은 일찍이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영화에 눈을 떴고 실제로 영화적인 기법을 소설에 이용하고자 많이 노력했다.
『천변풍경』은 특히 몽타주 수법을 많이 활용했는데, 몽타주란 쇼트(short)와 컷(cut)으로 나누어지는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는 것과 관련된 수법이다. 『천변풍경』이 50개의 절(折)로 나뉘어진 것도 영화의 컷과 유사하다. 『천변풍경』에는 특히 공간 몽타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천변풍경』은 특정한 주인공이 없으며, 따라서 한 사람에게 초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치 카메라가 천변을 따라 움직이며 갖가지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군의 생활상을 골고루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신전집 주인, 포목전집 주인, 한약국집 주인, 그 심부름꾼 창수, 드난을 살고 있는 귀돌어멈, 행랑살이 하는 만돌어멈, 한약국집 아들 부부, 평화카페 여급인 기미꼬, 하나꼬, 금순이, 민주사와 관철댁, 이쁜이 모녀, 점룡이 모자, 순동이 재봉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천변풍경』은 얼핏 보면 여러 에피소드들이 질서없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발소와 빨래터를 중심으로 공간의 구도에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처럼 구성된 것이다. 이 때 동일한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동시성의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데, 시간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시간의식은 대도시의 생활과 관련이 있다. 대도시는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데도 일상적인 사건이 소모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나며 사람들은 집단의 부속물로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변풍경』은 '선명하고 다각적인 도회 묘사'를 이루어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천변풍경』에 나오는 등장인물 재봉이의 시선이야말로 『천변풍경』의 카메라 아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재봉이는 항상 호기심을 가지고 이발소의 유리창 너머를 바라본다. 재봉이가 돈도 얼마 받지 못하는 이발소를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이발소 창 너머로 '천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해서이다. 제2절 '이발소 소년'은 이발소 소년인 재봉이의 눈에 비친 인물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첩실을 두고 있는 민주사가 이발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나이와 작은집 살림을 걱정하는 순간을 묘사한 데 이어, 소년의 눈(거울)에 비친 뭇인물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이발소 창 앞을 점잖게 지나가는 중년의 신사, 포목집 주인의 우스꽝스럽고 가식적인 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보고 나서, 천변 넘어 맞은편 카페로 눈을 옮겨 카페 여급 하나꼬, 기미꼬를 소개하는 식이다. 소년의 눈은 이어서 한약국집 아들 내외→주인 영감→돌석이→귀돌 어멈→곰보 미장이 누이→신전집 작은아들 순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이 없는 이 소설에서 재봉이가 그래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데에는 이러한 '바라봄'의 역할이 크다.『천변풍경』은 일정한 주인공이나 중심서사 없이 천변에 사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정한 플롯이나 서사가 없는 비유기적 구성은 기존의 소설양식들을 비웃는다. 안회남은 박태원의 소설을 가리켜 "기교의 세계가 퍽도 윤택한 대신 사상의 세계는 너무도 수척하지 않은가 한다."(「작가 박태원론」, 『문장』,1937. 1)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박태원에 대한 평가는 사상성의 결핍과 기교의 성과, 이 두 가지로 요약되어 왔다.
「천변풍경」은 임화나 박종화, 최재서와 같은 리얼리스트들로부터도 '조선 문단의 가장 큰 수확의 하나'요, '순수한 경알이 문학'이자, '리얼리즘의 확대'라고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임화와 최재서는 또한 각각 이 작품을 비판하여 '전형의 제시도 없고 구성도 미약하며, 모자이크적 수법으로 만들어진 단편의 집합'(「세태소설론」, 『문학의 논리』,1940), '좁은 천변의 배후를 이끌어 가는 사회의 힘, 작가의식의 부족'(「리얼리즘의 심화와 확대」, 『문학과 지성』,1938)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반면, 문학에 있어 이른바 순수성과 기교를 중시했던 김환태는 박태원이 유행사조를 따르지 않고 관조적 감상과 세태적인 관찰과 칼날 같은 감각을 형상화한 점을 들어 이를 의연한 문학정신의 발로라고 높이 평가했다(「순수 시비」, 『문장』, 1939. 11).
흔히 박태원을 논할 때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말하는데 모더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경향의 문학인가는 워낙 광범하고 애매하기도 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태원이나 이상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라 분류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 있어서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것은 시에 있어 낭만주의와 소설에 있어 리얼리즘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원이 모더니스트에서 프로 문학가로 변신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천변풍경』 이후의 작품에 대해서는 논의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태원의 한계라기보다는 한국문학이 처한 입장에서 비롯된 한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태원이 모더니즘을 실험하고 있을 때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있어 다만 문학만의 문제로 실험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라는 점,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기교주의 문학이란 얼마나 허무한 문학행위인가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했던 그의 친일행위가 얼마나 조국에 대해 부끄러운 행위인가에 대한 자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재능이 아무리 탁월해도 정치적 조직에 걸맞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희생된 예를 역사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해방 후의 한국의 분단상황은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박태원을 비롯한 월북 문인 대다수나 이남에 남아서도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지 못한 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박종화 「신간평총―「천변풍경」을 읽고」, 「박문」 6호, 1939. 3임 화 「신간평 박태원 「천변풍경」 평」, 「조선일보」, 1939. 2. 17
「세태소설론」, 『문학사의 논리』, 학예사, 1940
최재서 「리야리즘의 확대와 심화 ―「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야」, 『문학과 지성』, 인문 사, 1938
강진호·류보선·이선미·정현숙 편 『박태원 소설연구』, 깊은샘, 1995
김교봉 「박태원 「천변풍경」연구」
이선영편 『1930년대 민족문학의 인식』, 한길사, 1990
김상태 「박태원론―열려진 언어속에 담긴 내면풍경」, 『현대문학』, 1990. 4
김용희 「「천변풍경」에 나타난 소시민들의 리얼리즘」, 『이화어문논집』제5집, 1982
김윤식 「고현학의 방법론 ―박태원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민음사, 1989
신재성 「박태원 「천변풍경」론 ―장식적 현대와 언어의 축제」, 『장편소설로 보는 새로운 민족문 학사』, 열음사, 1993
안숙원 「박태원의 소설연구 ―도립(倒立)의 시학」, 서강대 박사논문, 1993
윤정헌 『박태원 소설연구』, 형설출판사, 1994
이선미 「구인회 소설가들과 모더니즘의 문제 ―이태준과 박태원의 경우」
상허문학회 편 『근대문학과 구인회』, 깊은샘, 1996
이재선 「1930년대의 도시소설 ―「천변풍경」에 나타난 박태원의 작품세계」, 『문학사상』, 1988. 8 별책부록
정덕준 「박태원 소설에서의 도시적 삶」
서종택·정덕준 편 『한국현대소설연구』, 새문사, 1990
정현숙 『박태원문학연구』, 국학자료원, 1994
최혜실 「모더니즘소설에 나타나는 공간성―박태원의 「천변풍경」」
구인환 외 편 『한국현대장편소설연구』, 삼지원, 1990
한상규 「박태원 「천변풍경」에 나타난 창작기술의 양상」, 한국현대문학 연구회, 『한국문학과 모 더니즘』, 한양출판사, 19941909(1세) 음력 12월 7일(양력 1월 6일) 경성부 다옥정(茶屋町, 통칭 수중박골, 지금의 수송동)에서 박용환과 남양 홍씨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등 한쪽에 커다란 점 이 있다하여 점성(點星)이었으나 1918년 8월 14일 태원(泰遠)으로 개명했다.1916(8세) 큰할아버지 박규병으로부터 『천자문』과 『통감』 등 한문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18(10세) 『춘향전』, 『심청전』, 『소대성전』등을 탐독하고 고소설을 섭렵했다.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 입학.
1922(14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4년제) 졸업. 경성제일공립보통학교 입학.
1923(15세) 「동명」지(4월호)의 소년칼럼난에 「달맞이」 이란 작문이 뽑혔다.
1926(18세) 3월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한다. 필명으로 泊太遠을 사용하면서 「동아일보」, 「신생」 등에 시,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7(19세) 경성제일고보 휴학. 문학 활동에만 전념하면서 양의사인 숙부 박용남과 여학교 교사인 고 모 박용일의 주선으로 춘원 이광수와 백화 양건식에게 문학 지도를 받았다. 1928(20세) 3월 15일 아버지 사망, 큰형 진원이 가업인 약국을 물려받았다. 제일고보 복학. 1929(21세) 경성제일고보 졸업. 泊太苑, 夢甫라는 필명으로 소설, 시, 평론, 번역 등을 발표하였다.1930(22세) 동경 법정대학 예과 입학.
영화, 미술, 음악 등 서양예술 전반과 신심리주의 문학에 경도. 동경 유학생활에 관한 것 은 소설 「반년간」에 잘 반영되어 있다.
「적멸」을 「동아일보」에 연재. 삽화를 자신이 직접 그렸다.
1933(25세) 조용만의 추천으로 이상과 함께 '구인회'에 가입, 활동했다. 「반년간」을 「동아일보」 에 발표.
1934(26세) 경주 김씨 김중하(한약국 경영)의 무남독녀 김정애와 결혼한다. 김정애는 숙명여고를 수 석으로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딱한 사람들」, 「애욕」 등을 발표. '구인회' 주최 문학공개강좌에서 '언어와 문장'을 강연했 다.
1936(28세) 맏딸 설영 출생(이 날은 눈이 제법 오고 매서웁게 춥던 날인데 어버이가 되는 시간에 다 방 낙랑에서 시인 이상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결혼 5년의 감상」에서 술회하였다). 「조광」에 「천변풍경」을 연재하였다.
1937(29세) 둘째달 소영이 출생했다. 『조광』에 「속천변풍경」을 연재한다.
1938(30세) 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을 출간했다.
1939(31세) 맏아들 일영 출생. 『박태원 단편집』과 중국소설 변역집 『지나 소설집』을 출간했다. 1941(33세)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여인성장」을 연재하는 한편, 번역소설 「신역 삼국지」를 「신세대」에 연재했다.
1942(34세) 둘째아들 재영 출생. 「조광」에 중국 소설 「수호지」를 3년에 걸쳐 연재하였다. 장편 『여인성장』, 『국군의 어머니』, 『아름다운 봄』을 출간하였다.
1945(37세)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6(38세) '조선문학가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조선순국열사전』을 출간했다.
1947(39세) 셋째딸 은영 출생. 장편소설 『홍길동전』을 출간했다.
1948(40세) 단편집 『성탄제』, 장편소설 『금은탑』, 『중국소설선1』, 『중국소설선2』를 출간 했다.
1949(41세) 후에 『갑오농민전쟁』에 모태가 되는 「군상」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도중하차 했다.
1950(42세) 전쟁 중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오장환을 따라 월북하였고, 한국전쟁 중 종군기자 로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해방 직후 최고의 미술운동이론가였던 남동 생 문원, 숙명여고 졸업 후 좌익에 참여했던 여동생 경원, 고모를 쫒아온 맏딸 설영도 월 북하여 평양에서 재회하였다.
1953(45세)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국립고전예술극장 전속작가로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 을 출간했다.
1955(47세) 정인택의 미망인 권영희와 재혼.
1956(48세)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당하고 함경도 벽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어 갔다. 『갑오농민전 쟁』을 16부작으로 구상하고 농민전쟁에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리하기 시작했다.1960(52세) 작가로 복귀하여 「싸우라!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를 발표했는데, 이 글은 남한의 4·19소식을 듣고 자신의 아들 딸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투쟁을 독려한 글이다. 1965(57세) '혁명적 대창작 그루빠'의 계획 아래 『갑오농민전쟁』의 전편에 해당하는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발표한다. 안질환 악화로 거의 실명하게 된다.
1975(67세)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겹친다.
1977(69세)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의 몸으로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 『갑오농민전쟁』제1부를 출간한다.
1980(72세) 『갑오농민전쟁』제2부 출간.
1986(78세) 북한 『조선문학』 7월 호에는 박태원이 고혈압으로 7월 10일 오후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박태원이 구술한 것을 아내 권영희가 정리하여 『갑오농민전쟁』제3부를 출간한다.
▣ 생애와 작품한편 천변 건너편의 이발소에선 민주사와 젊은 이발사, 이발소 소년, 그리고 몇몇 남자 손님들이 있다. 민주사는 새로 얻어들인 안성집과의 연령차를 생각할 때 자기 머리 위에 가위를 놀리고 있는 젊은 이발사의 생기 어린 얼굴이 유난히 질투난다. 그래도 자신에겐 돈이 있으니까, 위로하려 해도 얼마 안 있어 시작될 부회의원 선거전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더욱 부귀가 탐이 난다. 그런 민주사 얼굴을 행길로 난 창 앞에 앉아 있던 이발소 아이놈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소년은 이렇게 이발소 창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다. 거지들의 둘째 대장인 땅꾼이 어딜 가고 있는지,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지 소년은 너무나 잘 안다. 느린 걸음으로 점잖게 지나가는 뚱뚱한 중년의 신사는 큰 거리에서 포목점을 경영하는 포목점 주인이다. 매부가 부회의원인 것을 자랑삼아 알고 점잖은 척 걷고 있는 그는 애용하는 중산모를 항상 머리 위에 사뿐 얹어놓은 채 걸어다니는데,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어 그것이 머리에서 떨어지길 소년은 적지 않이 명랑한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소년은 아까부터 천변 너머 맞은 편의 '평화' 카페 앞에서 안을 기웃거리는 오십대의 조그맣고 낡은 부인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한다. 그이는 그 카페의 여급 하나꼬의 어머니인데, 아까 하나꼬가 목욕 간 것을 아는 소년은 드난사는 그가 모처럼 딸을 보러 왔던 것이 허행이 되고 말 것이 애달프다. 한참이 지나서 삼십이 넘은, 그리고 얼굴이나 맵시가 결코 어여쁘지 않은 여급이 나와 제 동무가 목욕 갔음을 알려준다. 이이는 기미꼬로, 무뚝뚝하고, 못생기고, 늙었지만 참말 모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