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이범선 지음 | -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송철호 계리사. 한 가정의 가장이며, 사무실에서 일하는 대표적인 소시민. 해방촌에 살면서 양심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전쟁 이후의 암담한 현실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다.철호의 어머니 이북에서의 풍족한 생활과 월남한 후 남한에서의 궁핍한 생활의 괴리를 이해하지 못 한 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좌절로 미쳐버렸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늘 '가자!'를 반복해서 외친다.송철호의 아내 십년 전 대학 음악도였던 재기발랄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던 아내. 가난으로 인 해 외모가 추해지고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진다. 결국에는 아기를 낳다가 죽는다.송영호 철호의 남동생.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상이군인으로 제대했다. 제대 후에 직업을 얻지 못해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낸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도질을 한다.송명숙 철호의 누이동생. 가난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양공주가 되어 미군과 어울린다. 남들이 천시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삶의 무게로 인해 송장 같은 어머니를 안고 밤이면 처절하게 운다.
성실한 가장인 철호의 무기력한 일상과 울분잉크. 그것은 잠시 대야 밑바닥을 기다 말고 사뿐히 위로 떠올라 안개처럼 연하게 피어서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하고 그 색의 농도가 연해져갔다. 맑게 갠 가을 하늘색으로 대야 가장자리까지 번져 나간 그것은 다시 중심의 손끝을 향해 접어들며 약간 진한 파란색으로 달무리 모양 동그란 원을 그렸다. 피! 이건 분명히 피다!(본문 중 에서)
계리사 사무실의 서기인 송철호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6시간이 넘도록 사무실 한 구석에 있는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있다. 다른 동료들은 이미 5시가 되자마자 모두 퇴근해버렸다. 철호는 점심도 못 먹어서 허기진 데다가 딱히 정해진 갈 데가 없었다.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청소를 해야 하니 나가달라고 하자, 낡아빠진 해군 작업복 윗저고리에 손을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비질하는 먼지가 철호의 얼굴로 몰려왔다. 철호는 모서리 창가로 가서 양동이의 물을 대야에 따랐다. 그리고 두 손끝을 물 속에 담갔다. 그는 물 속에 있는 펜대에 시달려 못이 박힌 오른손 손가락을 보았다. 못이 박힌 자리에서 잉크가 풀려 나와 대야의 물 속으로 파랗게 풀려나갔다.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점점 연해 가는 잉크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그것이 '피'라고 생각했다.
철호는 손을 빼내고 대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은 마치 원시인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이마에 길게 흐트러져 있고, 두 눈은 이마 밑에 움푹 패여 있고, 볼은 깎아지른 듯했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송장처럼 꺼멓고 윤기가 없었다.
철호는 원시인이 원시 도끼를 가지고 식구들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맨발로 숲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용기가 없고, 힘이 모자라고, 사냥감이 너무 날쌔고, 사냥꾼이 너무 많아서 아무 것도 사냥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무엇이든 들고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손을 씻고 있었다. 다시 물에 퍼진 잉크가 자신의 손에서 흐르는 피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시인과 같다고 생각한 철호는 자기 손에 들린 사냥감이 아닌 숲 속의 누군가가 버린 짐승의 징그러운 내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 사냥은 하지 못하고 누군가 숲 속에 버린 것을 주워오고 있었다. 이때 철호는 상념에서 벗어나 비누를 가지고 자신의 손바닥을 부벼대며, 이유 없는 울분이 끓어오름을 느꼈다.
해방촌의 비참한 삶과 전쟁의 상처로 미쳐버린 어머니"가자!" 철호가 그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그만치 그 소리는 더 크게 들 려왔다. 가자는 것이었다.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정신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철호의 어머니가 입버 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본문 중에서)
철호는 빈 도시락마저 홀가분한 몸이었지만 해방촌 고개를 오르기에는 너무 허기졌다. 해방촌 막다른 비좁은 골목에 있는 집 문틈에서 어머니의 '가자!'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머니의 미친 목소리는 예전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고, 쨍쨍하고 간사한 목소리였다.
철호는 수세미 같은 머리를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중학교 시절 박물관에서 본 미이라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하는 어머니의 '가자!'라는 쨍쨍한 소리가 어머니의 해골 같은 몸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윗방으로 가서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아내는 만삭으로 배가 바가지처럼 불러 있었다. 그녀는 마치 몽유병자처럼 부엌으로 나갔고,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철호의 딸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삼촌 영호가 구두를 사다 준다고 했다며 자랑한다.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다섯 살 난 딸은 철호의 헌 셔츠를 잘라 만든 치마와 기워놓은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었다.
철호는 집안보다 집밖의 바위 위에 걸터앉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저녁만 먹으면 언제나 집밖으로 나와 바위 위에 앉아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바위의 냉기가 느껴지자 일어서서 하늘을 보면서 정북에 있는 북극성을 찾아내었다. 그러자 고향 마을과 마을의 좁은 길 하나 하나가 떠올랐다. 철호는 한기를 느끼며 바위 밑으로 내려왔다.
천천히 골목에 들어서자 다시 어머니의 '가자!'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무거워졌다. 집 쪽으로 갈수록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철호는 두 달 전까지 어머니가 알아듣건 아니건 상관없이 퇴근 후 인사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하지 않고 그냥 윗방에 올라가 버리곤 한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가자!' 소리는 철호에게는 저주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정신 이상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소리였다.
철호가 아무리 삼팔선에 대해 설명하고 북에 있는 고향에 갈 수 없는 이유와 남한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설명해도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자유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죽어도 고향에서 죽고 싶어했다. 그리고 북에서 마을의 지주로 살던 어머니는 월남 후 해방촌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철호는 끝내 어머니에게 남한에 있어야 하는 이유와 자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을 단념했다.
어머니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해도 모르는 일 투성이였다. 해방으로 나라를 찾았다면서 고향집을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남한으로 온 후에 단 하루도 가자는 말을 안한 날이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한국전쟁으로 발 밑에서 내려다보이는 용산 일대가 폭격으로 지옥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 이후 어머니는 완전히 정신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가자!'만을 외치게 되었다. 철호는 지금의 어머니가 시체 같다고 느껴졌다.
생계를 위해 사회적 관습과 양심을 저버리고자 하는 동생들"아니요, 엉뚱하긴 뭐가 엉뚱해요. 그저 우리들도 남처럼 다 벗어 던지고 홀가분한 몸차 림으로 달려 보자는 것이죠 뭐." "벗어 던지고?" "네, 벗어 던지고.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 던지고 말입니다." 영호의 큰 두 눈이 유난히 빛나는가 하 더니 철호의 눈을 정면으로 밀고 들었다. (본문 중에서)
아내는 철호가 방안에 들어서자 딸의 빨간 신발을 보여주면서 영호가 사다주었다고 한다. 철호는 오래간만에 웃는 아내의 웃음을 본다.
밤이 깊어 영호가 집에 들어온다. 철호는 딸아이의 새 신발을 보면서 영호의 얼굴을 바라본다. 영호는 군대에서 나온 지 이 년이 넘도록 아직 직업도 못 잡으면서 저녁마다 술에 취해 들어와 양담배를 피우곤 한다. 철호는 이런 영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영호는 돈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교통비도 제대로 안 나오는 월급을 받는 형처럼 살기를 거부한다. 그는 취직을 하기보다는 용기를 내어 한탕내기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을 계획한다. 철호는 영호에게 엉뚱한 계획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호는 남들처럼 양심, 윤리, 관습, 법률 따위를 모두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달려들어야 잘 살 수 있다고 하면서, 형이 가진 양심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한다. 영호에게 양심과 관습은 허수아비에 불과해 가난한 사람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철호는 영호의 얼굴을 한참 노려보다가 돌아앉아 잠든 딸의 얼굴을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아내는 옆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아이의 새 신발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영호는 치료비가 없어 치과에 가지 못하는 철호에게 양심적인 성실한 삶으로 인해 가족들이 얼마나 희생하는가를 말했다. 영호는 자신들만이 옹색한 양심의 틀에 박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밤이 깊어지자 하이힐을 신은 명숙이 돌아왔다. 철호는 언젠가 퇴근하는 길에 을지로 입구에서 미군과 함께 지프를 타고 가는 명숙이를 본 적이 있다. 지프 안의 명숙은 색안경을 쓰고 미군과 정답게 수작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양공주인 명숙을 보고 쑥덕거렸고, 철호는 그 이후로 명숙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명숙이도 철호를 본체 만체 했다. 그러나 철호는 슬픔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 모두 잠들었다. 아랫목의 어머니와 윗목의 영호 사이에 누운 명숙은 어머니의 '가자!' 소리에 눈을 떴다. 명숙은 자신을 느끼지 못하는 어머니의 손으로 입을 막고 몰래 숨죽여 울었다. 철호의 어린 딸도 잠결에 오줌이 마려워 엄마를 부르자 아내가 일어난다. 볼일을 다 본 아이에게 아내는 빨간 새 신발을 보여준다. 딸은 이불 속에 누웠다가 몰래 새 신을 신어보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강도질을 한 영호의 수감과 아내의 병원비를 주는 명숙권총강도. 형사에게서 동생 영호의 사건 내용을 들은 철호는 앞에 앉은 형사의 얼굴을 바 보처럼 멍청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핏기가 가셔 가는 철호의 얼굴은 표정을 잃 은 채 굳어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사무실에서 점심을 못 먹는 철호는 보리차로 배를 채우곤 했다. 특히 오후 두 세시가 되면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펜을 장부에 놓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철호는 아이에게 이미 보리차 두 잔을 심부름시켰기에 더 이상 심부름을 시키지 못하고 직접 일어서 컵을 들고 출입문을 나서서 뜨거운 보리차를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막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철호에게 전화가 왔다고 알려왔다. 동생 영호의 일로 경찰서에서 오라는 전화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서 있자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철호에게 쏠렸다. 철호는 교통사고냐고 묻는 과장한테 그렇다고 하고 보리차를 그대로 남겨놓고 사무실을 나섰다.
철호는 전에도 경찰서에서 몇 번 호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양공주 명숙이가 걸리면 신원보장을 해왔던 것이다. 철호는 치안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가 명숙이를 데리고 경찰서 뒷문으로 나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철호는 울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명숙을 정말 미워하고 원망했다. 철호는 명숙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왔고, 명숙은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딴 길로 가버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명숙이 아니라 영호의 일로 호출을 받았다. 철호는 며칠 전 영호가 취해서 한 말을 떠올리고 불안해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경찰서에 들어갔다. 영호의 죄명은 권총강도였다. 철호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을 잃었다.
경찰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어귀에서 어머니의 '가자!' 소리가 들렸다. 철호는 울면서 도대체 어디를 가자는 거냐고 소리를 지른다. 집에 들어가자 명숙이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어린애가 팔부터 나와서 위독해 병원에 갔다고 했다. 명숙은 지금쯤 아기를 낳았거나 그렇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 하면서 아기 기저귀를 고르고 있었다. 철호는 무언가 새로 시작할 때 하는 버릇인 담배를 꺼내어 물고 일어섰다. 철호는 명숙이가 주는 백 환짜리 한 다발의 돈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철호는 명숙의 구멍 뚫린 나일론 양말을 보면서 명숙에게 어떤 깨끗함과 그 동안 잃어버렸던 오빠로서의 애정을 느꼈다.
이때 철호는 어머니의 '가자!' 소리에 돈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집어들고 병원에 갔다. 이미 아내는 이미 죽어있었다. 철호는 시체가 어디 있는지 묻지도 않고 무언가 큰 일이 끝났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좀처럼 생각해내지 못하고 병원 현관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방향을 잃은 오발탄 같은 소시민의 삶'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도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 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든 가긴 가야 한다.' (본문 중에서)
철호는 병원 문을 나서서 천천히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여섯 시가 지났기 때문에 사무실로 가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찻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경찰서 앞에 왔다.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아니 하고 발길 닫는 대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 치과라고 써 있는 간판을 보았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치통을 느꼈다. 양쪽 어금니 아래위가 모두 다 쑤시는 데 어떻게 정말 쑤시는 건지 알 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호주머니에 남아있는 돈 한 다발을 만졌다.
치과로 올라가 시커멓게 썩은 이를 뽑았다. 다른 이마저 한쪽을 뽑아달라고 했다. 의사가 출혈이 심해 안 된다고 거절하자 할 수 없이 치과를 나왔다. 잇몸이 아픈 것도 같고 어쩌면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를 걷다가 또 다른 치과 간판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의사가 꺼렸지만 우겨서 한쪽 어금니를 마저 뽑았다. 입안에서는 빨간 핏덩어리가 엉겨 나왔다. 치과를 나서서 서울역 앞까지 오자 오한이 나고, 입안에서는 자꾸 피가 고이고, 머리가 아찔하고 관자놀이가 쑤셔오자 집에 가서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철호는 택시를 잡아타고 '해방촌'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 운전수가 속력을 줄여 해방촌으로 차를 돌리려 할 때 그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고 S병원으로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운전수는 핸들을 다시 돌렸다. 철호는 눈을 감고 있다가 차가 로터리를 돌고 있을 때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내리지 않고 그냥 가자고만 외친다. 운전수는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다고 중얼거린다. 철호는 그 소리를 듣고 가장의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정말 조물주의 오발탄일지도 모른다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철호는 점점 잠에 빠져들고 머리의 감각이 없어져 갔다. 그는 어머니의 '가자!'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쓰러졌다.
택시는 네 거리 앞에서 빨간 불이 켜지자 멈춰 선다. 어디로 가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벨이 울리자 자동차 행렬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택시도 목적지를 모르고 따라서 움직였다. 철호의 입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선지피가 흘러 와이셔츠를 적셨다. 교통 신호 등의 파란 불 밑으로 택시는 지나갔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절망적인 현실 문제 고발우리의 현대사에 남겨진 가장 큰 비극은 단연코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은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이념에 의해 혈족간에 총칼을 들이밀어 가족과 고향을 생으로 잃게 한 민족의 지울 수 없는 상처의 원점이다. 전후문학에 대한 이범선의 시각은 치밀하다. 대부분 전후문학이 분단의 아픔을 소재와 주제를 삼고 있다. 그런데 『오발탄』은 전후문학의 주 흐름에서 빗겨 선다. 이범선은 분단 문제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분단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현실의 논리로 설명했다. 『오발탄』은 월남한 가족의 삶을 통해 전쟁 직후 현실 사회의 파탄상을 세부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