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경작생
박영준 지음 | -
모범경작생
박영준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길서: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학교를 마친 자작농이자 모범경작생. 그는 총독부가 한국 농촌의 순 화와 수탈을 위해 설정한 모범경작생으로 각종 특혜를 받으며 관과 결탁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
의숙: 길서를 흠모하는 성구의 여동생. 순박한 농촌 여성으로 길서와 연인 관계며 파란 비누를 선 물받고 길서를 좋아하게 되지만 길서가 호세 인상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한다.
성두: 의숙의 오빠이자 소작농. 여러 가지 비용과 빚에 쪼들려 장가들 밑천으로 장만한 돼지를 싼 값에 판다.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소작료 인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일제시대 소작 농민들의 삶과 애환
“얘, 나 한마디 하마.” “얘, 얘, 기억이보구 한 마디 하래라. 아까부터 하겠다고 그러는데.” “기억이 성내겠다. 자, 한마디 해보게.” 한참 소리를 하는데 이런 말이 나와 일하던 손들이 쥐었던 벼포기를 놓았고, 모든 눈이 기억의 얼굴로 모이었다.
성두의 논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날이다. 목청이 남보다 곱지 못하다고 해서 한 차례도 소리를 시키지 않은 것이 화가 났던지 기억이는 권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목소리를 다 빼며 소리를 했다. 같은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기억의 메나리곡에 합세해 다시 노래를 주고받았다. 소리를 하면 흥겨워져서 모르는 사이에 일이 빨리 되니 일터에서는 웃는 소리가 아니면 노래가 그치지 않았다. 성두의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빠진 사람 없이 단 한번씩이라도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옆의 논에서 자동차 온다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논에서 일하던 이들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달려오는 자동차를 봤다. 길서가 오는 것이다. 기억이는 누구는 땀 흘리며 종일 일만 하는데 누구는 자동차만 슬슬 굴린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길서가 부러운 듯 자동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동차는 여름 먼지를 뽀얗게 휘날리면서 동네 앞까지 왔으나 사람들 앞에서 머물지 않고 그냥 달아나버려 모여 섰던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리며 제각기 일터로 돌아갔다. 길서가 안 온 것이다.
길서는 그 마을에서 가장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물론 기억이 같은 몇 사람은 길서를 시기하고 속으로 미워했지만, 동네 전체로 보아 소학교 졸업을 혼자 했고, 군청과 면사무소를 혼자 출입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도 지지 않을만큼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젊은 사람으로 일을 부지런히 해 돈도 많이 벌고, 저축을 하고, 마을의 진흥회니 조기회니 회장을 도맡아 하니 무식하고 착한 농부들은 길서를 잘난 위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서울서 모이는 농사 강습회에 군에서 보내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뽑혀 한 주일 전에 떠난 뒤로 길서를 칭찬하는 소리는 더 높아졌다. 평양 구경도 못한 마을 사람들이 서울까지 가서 별난 구경을 다 하고 돌아올 그에게 서울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그가 기다려지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동네에서는 점심 뒤 한번 쉬는 참에 새참을 먹었지만 이들은 몇 해 전부터 그런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밥은 못 먹어도 그저 몸이나 쉬자는 것이었다. 길서네만 빼고 전부 소작으로 사는 그들은 여름철에는 보리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형편이니 새참은 물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진도 아비는 드러누워 풍뎅이로 얼굴을 가리면서 서울 구경이나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성두는 평양이라도 구경해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응대했다. 여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갛고, 곡식의 싹이 돋은 들판은 물들인 것같이 파랗다. 성두는 길서네처럼 금비를 사다가 한번 논에 뿌려봤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다른 동네서 누가 빚을 내 그것을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빚만 남았다며, 빚 안 내고 농사를 지어도 굶을 지경인데 빚까지 내서 금비를 쓰라는 지주들의 강요를 원망했다.
보통학교를 나와 모범경작생이 돼 무이자로 보통학교에서 돈을 갖다 쓸 수 있는 길서를 모두들 부러워했다. 물론 제 땅이 얼마만큼은 있어야 모범경작생이라도 되겠지만,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한 형편에 그런 꿈을 꿀 수도 없고, 길서처럼 서울 구경을 공짜로 못하니 억울하기만 했다. 성두는 말없이 모를 꽂고 있었으나 모 이파리에서 곧 벼알이 열려 익어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1년에 벼를 두 번만이라도 거둘 수 있다면 돼지는 안 팔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나긴 해도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어느새 쑥 내려갔다.
성두 논에서 큰 갯둑을 넘어 김매러 갔던 그의 손아래 누이 의숙이는 국수집 딸 얌전이와 같이 모 꽂는 논두렁을 지나갔다. 성두의 남동생은 의숙이더러 빨리 가서 저녁을 지으라고 일렀다. 옆에 있던 기억이가 길서가 안와서 맥이 풀리겠다고 의숙이에게 말했다. 의숙이는 갯둑에 가려 자동차를 못 봤지만 그래도 동네에 들어가면 길에서라도 길서가 자기를 불러주겠거니 생각했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던 길서를 한 주일이나 보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만나겠구나 했다.
“부지런히 일하면 굶어죽는 법은 없지요.“
의숙이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한손으로 물을 쏟아 얼굴을 씻고, 머리털에 묻은 물방울을 손으로 튀긴 뒤에 흙에 빨개진 고무신과 발을 씻고 있었다. 마침 그때 동이를 옆에 끼고 오던 마을 여편네가 길서가 이제야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개 소리가 커지며 가까워올수록 의숙의 마음은 뛰었다. 고무신도 마저 씻지 못하고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혹시 길에서나 만나지 않을까 해 가슴을 졸였다. 집에 가서는 아무 정신없이 돼지죽을 바가지에 담아 돼지우리로 나가면서 길서가 자기 옆에 와 있으려니 했지만, 우글거리는 돼지에게 죽을 쏟아주고 돌아설 때까지 길서가 자기를 만나러 오지 않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대문으로 돌아 들어가려 할 때, 귀에 익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의숙은 발을 멈춰다. 역시 길서의 소리였다. 의숙이는 작년 여름, 설레는 가슴으로 길서를 대하게 된 뒤부터 동네에서도 거의 알게끔 친하게 지냈지만 아직까지 어른들에게는 숨기고 있는 사이라 마당 옆 낟가리 밑에 숨어 길서를 만났다. 보고 싶었다는 길서의 말에 의숙이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울렁거리는 가슴은 그저 널뛰듯 뛰었고, 고개는 들고 있을 수 없게 늘어지기만 했다. 매일같이 만날 때는 어느 틈에라도 웃어보였고, 말을 한 마디만 해도 기쁜 생각이 들었건만 며칠 떠났다가 만나서인지 공연히 가슴만 떨렸다.
다음날 길서는 서울 구경한 일을 이야기했다. 전차와 자동차가 수천 대라 귀가 아파 다닐 수 없었다는 말까지 했다. 사람들은 혀를 빼고 멍하니 길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길서는 신이나 더욱 강연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강습회에서 배운 것을 조금 말하겠습니다. 농사짓는 법이란, 제가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다 배운 것이며, 지금 내가 채소밭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으니까 말할 것도 없지요. 하나, 새로 배운 것이 있다면, 닭을 칠 때 서울서 레그혼이라는 흰 닭을 사다 기르면 그놈이 알을 굉장히 낳는다는 것입니다.”
기침을 한번하고 목청을 올리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가장 어렵고 무서운 시국이라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죽을 죄를 지기 쉽고, 일을 아니하고 놀라고만 생각을 하면 농사도 못 짓게 됩니다. 불경기, 불경기하지만 이것이 얼마 오래 갈 것이 아니며 한 고비만 넘기면 호경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들으니까 요사이에 감옥에 가장 많이 갇힌 죄수들은 일하기가 싫어서 남들까지 일을 못하게 한 놈들이래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라나요. 공연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놈들의 말을 들었다가는 부치던 땅까지 못 부치게 될 것이니 결국은 농군들의 손해가 아니겠소.”
듣고 있던 사람들은 길서의 얼굴만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또 무슨 전쟁이 일어날 것도 같습니다. 하라는 일을 아니하면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같은 값이면 마음놓고 하라는 일을 잘하며 살아야 하겠어요. 에, 우리는 일을 부지런히 합시다. 그러면 굶어죽는 법이 없으니깐요. 유명하게 된 사람들은 전부 부지런했던 덕택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이때 기억이 호경기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대답에 궁했던 길서는 한참 생각하다가 얼마 안있으면 온다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아무리 불경기라도 10리 밖 읍내에 있는 지주 서재당은 금년에도 맏아들을 분가시키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어줬다. 쌀값이 조금 오르면 고무신값이 오르고, 쌀값이 떨어지면 물건값도 떨어지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은 불경기니 호경기니 해도 자신들에게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으로 생각됐으며, 돈 있는 사람들도 불경기에 땅 팔았다는 말을 못 들었기 때문에 경기라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길서는 의숙을 만나 서울서 사온 파란 비누를 선물했다. 비누 세수라고 평생 못해본 의숙은 비누세수를 하면 금세 자기의 탄 얼굴이 희어지며 예뻐질 것 같아 춤을 추고 싶을 만큼 기뻤다. 한편 성두는 어머니에게 돼지를 너무 싼 값에 팔았다고 하자, 어머니는 그것이라도 팔아서 용돈도 쓰고 지세도 갚고 보리 벨 때까지 양식도 사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장가들 밑천으로 장만한 돼지를 파니 어머니와 의숙은 너무 안타까웠고 성두 또한 화가 났다.
면장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길서의 이기심
길서는 읍내로 들어갔다. 먼저 보통학교 교장에게로 가서 제 손으로 만든 빗자루를 다섯 개를 쓰라고 주고, 모를 다 냈으니 비료를 사야겠다고 이십오원을 취해가지고는 뽕나무 묘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길서가 들어서자마자 세금을 못 낸 사람을 잘 때리기로 유명한 뚱뚱한 서기가 한턱 내라고 말했다. 묘목도 잘 팔아주고, 일본시찰단을 뽑을 때 면장을 시켜 잘 말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길서는 정말 한턱 내고 싶었다. 묘목만 잘 팔아주면 예산 외의 돈이 수십 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때 면장이 들어와 길서는 서울 갔던 일을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후 면장이 보통학교를 증축하기 위해 길서네 마을에서 호세를 좀더 부담해야겠다고 말하는데, 길서가 대수롭잖게 반응했다. 그러자 면장은 길서에게는 해로운 것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길서는 면장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그의 비위를 거슬리면 자기도 끼니를 굶고 지내는 동네 소작인들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가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묘목도 못 팔아먹을 것이고, 그런 말이 보통학교 교장 귀에 들어가면 돈도 빌려다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묘목 심었던 밭에 조를 심어야 하고, 면사무소 직원과 학교 선생들에게 팔던 감자와 파도 썩는다.
300평 밖에 안 되는 논에 비료를 많이 내지 못하면 미곡품평회에 출품도 못해볼 것이며, 그러면 상금도 못 탈 뿐 아니라 벼의 소출이 겨우 넉 섬 밖에 안될 것이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처럼 1년 양식도 부족할 게 아닌가. 길서는 결국 면장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소작농민들의 분노와 소작료 인하 운동
벼는 누릇누릇해서 이삭들이 뭉친 것이 황금덩이 같았다. 그러나 얼굴의 주름살을 편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강충이가 먹어 예년에 비해서 절반도 곡식을 거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서만이 평양 가서 북어 기름을 통으로 사다가 쳤기 때문에 그의 논만은 작년보다 잘됐으나 다른 논은 털 빠진 황소 가죽같이 민숭민숭했다. 사람들은 여름내 땀을 빼고도 제 입으로 돌아올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솟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길서를 시켜 읍내 지주 서재당에게 가서 금년만 도지(소작료)를 조금 감해달라고 하려 하지만, 길서는 자신과 상관없을 뿐 아니라 정해놓은 도지를 농사가 안됐다고 감해달라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소작쟁의와 같은 당치 않은 짓이라고 거절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길서는 일본 시찰단으로 뽑혀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한편 마을 소작농들은 할 수 없이 큰 마음을 먹고 떼지어 읍내로 들어가 서재당에게 사정을 말했으나 물론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분가시킨 관계로 돈이 몰린다는 근심까지 들어야 했다. 정해진 도지를 내지 않으려면 논을 내놓으라는 서재당의 협박에 그들은 기운 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길서의 논 앞에 서서 ‘모범경작’이라고 쓴 말뚝을 부럽게 내려다보았다. 소작농들은 자신들의 부탁을 못 들은 체 하는 길서가 미웠다.
마을 사람들의 배신감과 길서의 도망
며칠 뒤 그들이 다시 놀란 것은 값도 모르는 뽕나무 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것과, 십삼등 하던 호세가 십일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것보다도 십등이던 길서네만은 그대로 십등에 있는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길서네는 그래도 작년에 돈을 모아 빚을 줬으나, 다른 사람들은 흉년까지 만나 먹고 살 수도 없는데 호세만 올랐다는 것이 우스우면서도 기막혔다. 무엇을 보고 호세를 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흉년인데도 도지를 그대로 바쳐야 하는데다 호세까지 오르자 앞이 캄캄했다. 성두는 북간도나 만주로 남부여대하고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대한 애정도 잊었고, 제 고장이라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만 못살 놈의 땅 같다고만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장난으로 호세까지 올랐다는 것을 알고 난 뒤 그를 나쁘게 보게 됐고, 길서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성두의 말에 의숙은 눈물을 흘리며 길서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한편 길서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길서는 자기 논두렁 앞에서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논에 박은, ‘김길서’라는 푯말은 간 곳도 없고, ‘모범경작생’이라고 쓴 말뚝은 쪼개진 채 흩어져 있었다. 심술궂은 애들이 장난이려니 생각했으나 그 한 짓으로 봐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동네에 들어섰을 때 동네에는 어른이라고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읍내 서재당 집엘 가서 저녁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서울 갔다 돌아왔을 때보다도 더 의기양양해 온 길서의 마음은 조각조각 깨지고 말았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던 바나나를 갖고 밤이 이슥해질 무렵 의숙을 찾았건만 길서를 본 의숙은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길서의 마음은 터지는 듯했다.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따라오던 사람의 숨소리를 듣는 듯 가슴이 떨렸다. 불길한 징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충혈된 눈의 성두가 아랫문으로 뛰어들었을 때 길서는 들고 왔던 바나나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모범경작생」은 궁핍한 평안도 어느 마을을 무대로 식민지시대 우리 농촌의 참담한 실정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형상화했다. 길서네를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소작농으로, 농사를 지어도 지주에게 도지(소작료)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는 절망적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은 식민지시대 우리 농촌의 일반적 모습이다. 일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를 지어도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든 원인은 무엇일까?
일제의 농촌 수탈 정책과 1930년대 농촌 현실
그 주된 원인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있다. 일제는 식민지 침략을 완료하자마자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자국의 자본축적을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한다. 그 결과 조선의 모든 토지는 총독부의 동양척식회사, 일본인 지주, 소수 매판적 조선인 지주의 소유로 바뀌고, 자작 및 자영농민은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기존의 소작농들은 부랑민, 이주민 등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시대 농촌의 반봉건적 토지소유관계(지주-소작관계)를 고착시켰다.
곧이어 일제는 1920년부터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충하기 위해 쌀 중심의 단작형 농업경영에 착수하는데, 바로 이것이 1933년까지 계속된 ‘산미증식계획’이다. 산미증식계획의 진행과 함께 쌀값이 폭락하고, 생산력 증대를 위해 시행된 수리조합사업은 과중한 조합비 부담으로 농민들의 몰락을 부추겨 결국 대지주에개로 토지가 집중되고 자작농의 소작농화가 광범하게 이뤄졌다. 실제 1921-1932년 사이에 소작농은 41.6%나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