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하
김남천 지음 | -
대하(大河)
김남천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박성권: 중인출신으로 타고난 이재의 수완을 발휘하여 동학란의 혼란을 틈타서 부자가 된 인물. 고리대금업과 토지 경영을 통해 재산을 늘린 그는 개화기에 부상하고 있는 신흥 부르주아의 일면을 그대로 가진 속물의 전형이다.
박형걸: 박성권의 서자. 기골이 장대하고 외모가 출중하여 뛰어난 용기를 지닌 인물로서 출신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을 이복형에게 빼앗기는 고통을 체험한다.
박형준: 박성권의 첫째아들. 부유한 집안의 맏아들들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을 때까지 하는 일없이 무위도식하다 노름과 외입으로 무력함을 달래는 인물.
박형선: 박성권의 둘째아들. 정보부를 아내로 얻은 행운아. 보부의 영향으로 예수교도로 변신
박이균: 자칭 이 고을 토착 양반. 박성권을 근본없는 돌박가라고 비꼬지만 결국 박성권의 재력 앞에 굴복한다.
정보부: 형선의 아내. 형걸을 잠시 흠모했으나 곧 체념. 현실에 순응한다.
쌍네: 몰락 농민의 딸로 박성권에게 종으로 팔려감. 막서리 두칠의 아내. 형걸과 관계를 맺어 미래를 꿈꾸나 결국 그것이 헛된 꿈임을 알게 된다.
윤씨: 박형걸의 어머니. 박성권의 첩. 박성권이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장본인임을 모르고 도리어 그를 은인으로 여기면서 첩살이를 한다.
문우성: 선각자로서 형걸의 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성장시켜주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손대봉, 이태석, 김길손 등 개화꾼들
박성권의 집안내력과 형선의 혼인
이 고을엔 밀양 박씨가 두 집이 있었다. 방선문(訪仙門) 안 향약전 옆, 바로 길서방네 대장간 윗집에서 국수장사를 해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집이, 이 고을서 벌써 5대째나 산다는 박리균(朴利均)네 집이다.
박이균 형제는 지금 쓰고 있는 초가집 나부랭이밖에 재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만 저는 양반이노라고 재면서 산다. 조상 중에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고을에 와서 2대째 되는 이가 아전으로 젊어서 죽자 그의 처 성씨가 남편을 따라 죽어 열녀가 되었다는 기록이 집안의 큰 자랑거리다. 방선문을 나서면 기울어져 가는 성씨의 열녀비가 있는데 돈이 없어 고치지 못한다. 비각 기우는 모양이 마치 양반이라고 으스대는 박씨 형제의 환상이 운명을 다한 것처럼 적막하게 보인다.
이 마을에 또 다른 밀양 박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제일 지대가 높은 곳에 큰집을 잡고 살고 있는 금년 갓 마흔인 박성권(朴性權)이다. 박이균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붙잡고 박성권을 근본없는 돌박가니 하면서 푸념을 한다.
박성권은 은산 고을에서 20년 전에 이 고장으로 왔다. 그의 조부가 아전을 다니며 창미(倉米)를 농간해서 적지 않게 돈을 모았지만 박성권의 아버지는 도박과 주색으로 그 돈을 모두 날려 버리고 죽었다고 한다. 박성권은 갑오년의 난을 맞게 되자, 가족들을 모두 피난시키고 그 틈에서 홀로 남아 순천, 평양, 황해도까지 왕래하며 의병대를 상대로 장사를 하여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들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고향을 떠나 이 마을로 와서 터를 잡은 것이다. 큰집과 첩을 둔 두 집 살림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밀양 박가인 박이균 형제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박성권은 집 뒤에다가 커다란 독을 3개를 묻어 은전을 숨겨두었는데, 그것을 조금씩 내어서 토지를 사고 돈놀이를 하여 재산을 계속 늘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박성권이라고 부르지 않고 박참봉이라고 존대해서 불러주었다. 박성권은 서른 일곱 살에 벌써 다섯 남매fmf 두었는데 그 때까지 아이들을 큰놈이니, 은산놈이니, 셋째니 뭐니 불렀던 것을 이젠 집안의 격을 갖추기 위해 항렬을 넣어 ‘형준’ ‘형선’ ‘형걸’ ‘형식’과 딸을 ‘보패’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제 박성권도 갓 마흔이 된다. 마흔이 되어도 박성권의 포학하고 아구통 센 성격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정력은 더욱 왕성하여 갔다. 박참봉은 형걸을 낳은 작은댁 윤씨 이외는 달리 첩을 두지는 않으나 대신 술을 몹시 좋아했다. 또한 무엇을 한번 결정하면 해 내고야 마는 괴팍한 성질이 있다. 그는 아직은 문벌이나 가문이 행세를 하는 시대이지만 이런 것이 자기의 돈 앞에 엎드려 절할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박성권은 맏아들인 형준에게는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킨 후엔 신식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그는 집을 물려 줄 장남이니, 돈놀이하는 것과 추수하는 것, 집안 일 전체를 감독하고 사람을 부리는 재주만 배워두면 그만이었다. 형준 자신도 새 학문을 배우려 들지 않았다.
박성권은 집안의 격을 위해 아들의 혼인에 신중을 기했다. 맏아들 형준은 경주 김씨와 혼인했고, 둘째 아들 형선 또한 한 고을에 있는 벼슬도 높고 재산도 상당한 연일 정씨와 혼사를 정하여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염려가 된다면 형걸이다. 형걸은 서자이기 때문에 좀체 혼처가 생길 것 같지 않다. 형걸의 성질이 왈패스럽고, 키고 크고 심술궂은 면이 있긴 하나 박성권은 그러한 성질이 자기랑 닮았다고 은근히 좋아한다. 박성권은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어쨌건 박성권네 가운은 활짝 뻗쳐 있다.
오늘은 참봉의 둘째 아들 형선이가, 강선루 뒤 정씨 집으로 장가를 드는 날이다. 박성권은 처남인 최관술을 불러 형선이가 장가가는데 따라가게 한다. 최관술은 주둥이 위에 자개 수염을 기르고, 또 머리를 반반히 깎은 개화주의자다. 박성권은 사돈 될 정봉석이 요즘 예수를 믿고 개화사상에 흥미를 갖고 있으므로, 이 고장에서 서울출입이 잦은 처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자식을 잘 기른 훈장을 불러 형선이의 머리를 올려 틀고, 성복을 하게 했다. 이때 형선의 나이 열 아홉으로 대단히 늦은 장가여서 주위의 놀림을 받긴 하지만 형선의 기분은 마냥 좋기만 하다.
형선이 말에 올라타고 나가니 부잣집 집안간의 혼례행사라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모여 구경을 한다. 박참봉이 국자보시를 벗고 갓을 쓰라는 것을 개화주의자 최관술은 듣지 않고 국자보시를 쓰고, 금테로 된 개화경을 코허리에 걸고, 검정두루마기에 발목덜미까지 높이 엮어 올린 구두를 신고, 개화장을 짚고 나간다. 이런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우습기만 하다.
새색시인 보부는 사촌 오라비 정연근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단장을 하였다. 보부는 신랑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자기도 모르게 꿈결같이 한 사나이의 얼굴이 빙그레 웃으며 지나간다. 그 젊은 총각이 누구인지 물어볼 길도 없다.
언젠가 저녁에 구정물을 내버리다가, 영근 오빠와 또 한 총각이 나팔들을 끼고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 총각은 검정두루마기에 머리채는 땋아 늘인 채 삽포를 썼는데, 콧날이 세고 눈이 이글이글하고 웃을 때 옥 같이 흰 이가 가지런히 나타났다. 활개를 치며 영근에게 무슨 말을 하면서. 언뜻 보부가 있는 쪽을 정면으로 보고 지나간 듯하다. 물론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처녀의 마음은 무슨 죄를 저지른 것처럼 가슴이 뛰고 부끄러워 방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 보부는 그가 박참봉의 작은아들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박참봉의 둘째 아들과 혼담이 오갈 때 은근히 만족을 한다. 보부는 박참봉에게 나이가 같은 아들이 둘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오가 가까오면서 신랑의 일행이 권마성 소리와 말방울 소리를 울리면서 영근의 집 앞을 지나갈 때도 보부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신랑을 보고 온 늙은이의 말을 듣고 나서 신랑이 자기가 사모하는 형걸이 아닌 이복형인 형선임을 알았다. 부끄러움과 실망감이 함께 솟구치면서 보부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보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형선과 신방에 들어간다. 잠을 청하려 할 때 누군가 던진 큰 돌로 깜짝 놀라, 그것이 형걸이 한 것으로 의심해 보기도 하지만 이젠 남편이 된 형선을 섬길 것을 눈물을 머금으면서 다짐한다.
서출 형걸의 분노와 방황
다른 날 따라 없이 형걸이는 늦잠을 잤다. 여느 날 같으면 학교 뒤 솔밭이든가, 강가에 나가서 나팔을 불든가, 그렇잖으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철봉을 하는 것이 아침 먹기 전에 형걸이가 하는 버릇처럼 된 일과이었는데 오늘 따라 그는 늦잠을 자고 있다.
형걸이 왜 늦잠을 자는지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오늘은 불과 한달 차이로 어엿한 형이고, 뿐만 아니라 큰어머니의 소생이기 때문에 자기보다도 소중한 대우를 받는 형선이 정좌수 집으로 장가를 드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형걸은 큰댁에서 사람을 보내 아침 식사하러 오라는 전갈을 받고도 가지 않았다. 곧바로 드러누워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이놈의 머리채를 잘라버리겠다고 결심하고 학교로 갔다. 이 머리를 몽땅 잘라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고, 그렇게 해야 누구에게 오래 묵은 원수를 갚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명학교’ 현판이 붙은 대문을 지나는데 손대봉이가 대운동회 때 할 이인삼각(二人三脚)을 연습하고 있다. 형걸은 대봉에게 함께 머리를 자르자고 한다. 둘은 우리의 젊은 학도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결의를 행한다. 선뜩한 쇠가 형걸의 머리 위를 한바퀴 오르내린다. 머리에 부는 바람이 갑자기 차서 등골이 선뜩하다. 머리채가 털썩 소리를 내며 귀 옆을 스쳐서 그의 눈 앞 까만 흙 마당 위에 떨어져 뒹군다.
형걸은 점심시간에도 집에 가지 않고 길손네 집에 가서 점심밥을 먹고는 언덕에 가서 드러누웠다. 어머니는 분명히 형선이 장가드는 것에 불만하여 삭발해 버린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형선이 장가든 정좌수의 딸 보부를 형걸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어머니 윤씨가 형걸의 색시감으로 보부를 정하여 놓고 있는 것을 은근히 들었던 것이다. 박성권은 사돈 될 정좌수가 서자인 형걸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윤씨가 형걸의 혼사를 이야기하자마자 바로 형선과 이미 혼삿말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버린다. 결국 혼사는 형선 쪽으로 정해지고 말았으니, 형걸이나 윤씨의 마음이 좋을 리 없다.
형걸은 언덕에 누워 얼마간 자는데 꿈에 두칠이 아내인 쌍네가 아름답고 탐스러운 색시로 보이면서 황홀한 순간을 만끽한다. 쌍네는 올해 스물 두 살로 형걸보다 세 살이나 위로 형걸의 집에서 잔뼈가 굵은 종이다. 꿈속에서 형걸의 눈에 쌍네는 종도 두칠의 아내도 아닌 원숙한 한 여인으로 보였다.
대봉이가 깨워 일어난 형걸은 해가 저물어 집에 갔지만, 어머니가 삭발한 것을 알고도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더욱 언짢다. 죽도록 분풀이를 해야만 할 곳이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 같다. 답답하여 바람을 쏘이러 나왔다가 신랑방에 들어가려고 단장을 하고 오는 정보부를 보고 형걸의 가슴은 더욱 복받쳐 올랐다.
형걸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렸다. 가다가 나무를 심으러 삼밭에 가는 두칠이를 만나고는 낮에 꿈에서 보았던 쌍네가 다시 생각났다. 형걸은 말을 매어 두고 나오는 길에 쌍네를 기다린다. 그는 자신이 쌍네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계면쩍어 하기도 했다. 한편 저의 마음이 보부를 취한 형선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오기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형걸은 자기마음이 보부에 대한 그리움인지, 쌍네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형걸은 이런 저런 생각없이 쌍네의 몸자태를 머리에 떠올리며 기다렸다.
쌍네는 형걸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짐짓 놀랐으나, 자신이 비복임을 생각하고 잠자코 있었다. 형걸은 쌍네의 입술을 빼앗은 후 놓아준다. 쌍네는 흐르는 눈물을 씻지도 않고 그것이 자기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종종걸음을 쳐서 달려간다.
쌍네가 박참봉 댁에 종으로 팔려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전, 그가 아홉 살 났을 때였다. 그녀는 서창이라는 작은 부락에서, 가난한 농가의 딸이다.
쌍네의 아버지는 역병으로 아내를 잃자 짐을 꾸려 원산으로 가던 길에 여비를 장만하기 위해 쌍네를 종으로 팔아 넘긴다. 박성권은 쌍네를 헐값으로 사서 거두었다. 쌍네 아버지는 쌍네 동생 둘만 데리고 내키지 않는 길을 떠났고, 쌍네는 그날부터 박참봉네 집에 매인 재산이 되었다. 이 때부터 쌍네는 종으로서의 길을 몸에 익혀나갔다. 그 뒤 남편인 두칠이가 이곳에 절게(돈 받고 일하는 머슴)로 오게 되었는데 그 때 두칠은 스물 한 살의 나이 찬 총각이었다. 형제가 많고 집이 가난하여 나이 차도록 장가도 들지 못하고 거듭되는 흉작과 살림에 쪼들려 드디어 두칠이가 절게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박성권은 득실을 따져 두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칠은 3년을 살아도 별 수가 없자 고향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으나, 이제 한참 피어나는 쌍네를 탐내고 있었으므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박참봉의 아내는 두칠이가 고된 일에 불평도 않고 열심히 일해 온 것이 쌍네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한편 쌍네가 큰아들 형준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같아 서둘러 쌍네를 두칠의 아내가 되게 한다. 막서리(주종관계에서의 머슴)가 된 두칠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쌍네는 도련님 중에서 제일 깨끗한 형걸과 길 위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며 감격에 가슴을 떤다. 그는 바로 일어나 울타리문 빗장을 뽑아 놓고 혹시 형걸이 오지 않을까 기다리기까지 한다. 이제 형걸도 한 달 전에 부임해 온 무우성 선생에게서 산술을 배우고 나면, 고등과 일학년의 학과는 그것으로 마지막이 된다.
형걸은 대봉과 만나 이칠성이 산 자전거를 구경하러 갔다. 칠성의 아내를 보자 형걸은 그녀에게서 잠깐 쌍네를 연상했다. 대봉은 박이균의 동생 박성균의 맏딸 금네와 혼사를 정해 놓은 상태지만 달갑지가 않아서인지 탐스러운 색시를 보면 수작을 해보고 싶어진다. 칠성의 아내에게 수작을 하고 있는 대방을 두고 형걸은 그곳을 나와 쌍네에게 간다.
큰 아들 형준은 스물 둘의 한창의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할 일이 없다. 무엇이든 제가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할 터인데, 박성권은 장남인 형준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직 박성권 자신이 나이가 젊어 아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형준은 유복한 집안의 장남이나 돈도 마음놓고 자유로이 쓰지도 못할 뿐더러 별다른 취미도 없이 무료하고 적적한 생활을 하던 중 쌍네에게 마음이 동하여 아내가 잠자는 소리가 나자 쌍네의 방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안에서 도란도란 사람의 소리가 난다. 두칠이가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에 형준은 처음 이 방에 올 때와는 목표를 달리 하여 빗장을 뽑고 쌍네에게 호령을 하려 하는데, 캄캄한 방안에서 젊은 사내가 불쑥 나온다.
박성권의 탐욕으로 무너진 사람들
박참봉은 오늘, 유난히 유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가 이 고을에 이사와 근 20년 동안 큰일 작은일에 훼방을 놓고, 앞으로 뒤로 방망이를 들던 박이균네 형제가, 인제 드디어 박참봉한테 완전히 굴복할 날이 왔기 때문이다.
작은댁 두뭇골집 사랑에 이른 아침 박이균이 와서 집문서를 꺼내 놓는다. 박성권은 이 집문서에 400냥을 마련해 주면서 은근히 자신을 얏본 박이균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그 돈으로 박이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방선문 비각부터 고치라고 말한다. 이 말에 박이균은 비각보다 식구가 살 방도를 취해야겠다고 대답하자 박성권은 재빨리 “비각이 밥 먹여 주냐”면서 잘 생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 박이균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박이균은 단오에 열리는 대운동회를 기회 삼아 한몫을 잡으려고, 집을 헐어 신식여관을 차리고 동생 집은 낡은 곳만 고쳐 마방과 국수집을 차려보자고 계획했지만, 이 집 저 집 다녀 보아도 돈을 빌릴 수가 없어 박참봉에게로 온 것이다. 박참봉은 박참봉대로 배짱이 있어 두 집문서를 잡고 400냥을 빌려준다. 여관이 잘 되면 잘되는 만큼 변리를 물 것이고, 생각대로 안되면 1,2년 안에 집을 뺏을 수 있으니 손해날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박참봉으로서는 박이균 형제를 꿇어 엎으려고 별러오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