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회
안국선 지음 | -
공진회(共進會)
안국선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향운개(香雲介): 진주 땅의 이름난 기생. 어린 시절 소꿉친구 유만을 마음에 두고 평생 정절을지키겠다 결심한다. 김부자의 소실이 될 위기에 처하나 기지로 극복하고 탈출한다.
유만: 가난한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열심히 공부해서 입신(立身)한 청년. 자신을 도와주던 일본 군인 이등 대좌가 전선(戰線)으로 가자 이등 대좌의 통역으로 따라갔다가 부상당한다. 향운개의 어린 시절 친구이다.
김서방: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노동자. 하루살이로 겨우 연명하다가 아내의 충고로 술을 끊고 인력거를 끌기로 한다. 인력거를 끌고 나선 첫날 거금(巨金)을 줍고는 다시 술에 손을 댔다가, 아내의 기지 덕분에 술을 끊고 착실한 사람이 되고 주운 돈도 떳떳하게 차지하게 된다.
명희: 강원도 철원에 사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 어렸을 때 정혼한 용필과의 의리를 지켜, 억지로 다른 데 결혼시키려는 아버지의 강요나 주변의 압력을 기지로 물리치고 용필과 인연을 이룬다.
용필: 명희의 정혼자. 명희를 다른 데 결혼시키려는 모략 때문에 피신하여 고향을 떠난 후, 영리한 품성과 뛰어난 문필로 참위 자리까지 오른다. 명희를 탐내는 상관 김참령 때문에 일시 좌천당하지만, 결국 명희와 맺어지고 입신출세한다.
“이 책 보는 사람에게 주는 글”
사람들은 울지 말지어다. 슬픈 후에도 기꺼움이 있느니라. 사람들은 웃지 말지어다. 기꺼운 후에는 슬픔이 생기느니라. 기꺼운 일을 보고 웃으며 슬픈 일을 보고 우는 것은 인정의 상태(常態)라 하지마는 사람의 국량(局量)은 좁으니라. 넓은 체하지 말지어다. 사람의 지식은 적으니라. 많은 체하지 말지어다. 하늘은 크고 큰 공중이라. 누가 그 넓음을 측량하리오. 지구에서 태양을 가려면 몇 백만 리가 되는데 태양에서 또 저편 별까지 가려면 몇억백만리가 되고 그 별에서 또 저편 별까지 가려면 몇 억천만 리가 되어 이렇게 한량 없이 갈수록 마치는 곳이 없으니 그 넓음이 얼마나 되느뇨. 세상은 가늘고 가는 이치 속이라. 누가 능히 그 아득함을 발명(發明)하리오.
사람마다 생각하라.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으며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으니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혼인이 되었으므로 아버지를 낳으셨으나, 그 때에 만일 할머니와 혼인이 아니되고 다른 부인과 혼인이 되었으면 그래도 우리 아버지를 낳으시고 또 내가 생겨났을는지. 또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인이 되었으므로 나를 낳으셨으나, 그때 만일 다른 부인과 혼인이 되었다면 그래도 내가 이 모양으로 이 세상에 생겨났을지. 이것으로 말미암아 증조부 고조부 오대조 육대조 시조까지 올라가며 여러 십대 여러 백대 중에서 어느 대에서든지 한 번만 혼인이 빗되었으면 오늘 이 모양의 나는 이 세상에 생기게 되었을는지 알지 못할지니 세상 사람이 생겨난 것부터 이렇게 요행이요 우연한 인연이라. 그 아득함이 어떠한가.
하늘은 큰 공중이라. 넓고 넓어 한량이 없고 세상은 가늘고 가는 이치 속이라. 아득하고 아득하여 알지 못할지니 사람의 국량이 아무리 넓을지라도 공중에 비할 수 없고 사람의 지식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조화주(造化主)는 따르지 못할지라. 그러나 사람은 일정한 국량이 있고 보통의 지식이 있는 고로 기뻐하며 노여워하며 슬퍼하며 즐거워하며 사랑하며 미워하면 욕심내고 겁내는 인정(人情)이 있으니, 사람은 이 여덟 가지 정이 있는 고로 사람은 아무리 하여도 사람에 벗어나지 못하고 국량은 아무리 하여도 그 국량이요, 지식은 아무리 하여도 그 지식이라. 술 취하여 미인의 무릎을 베개하고 술 깨어 천하의 권세를 주무르며 한번 호령하면 천지가 진동하고 한번 나서면 만민이 경외하는 고금의 영웅들이 장하고 크다마는 역시 한때 장난에 지나지 못하고, 물리를 연구하여 화륜선 화륜차 전보 비행기 등속을 발명하여 예전에 없던 일을 지금 있게 하는 이학박사여, 용하고 가상하다마는 세상 이치의 일부분을 깨달음에 지나지 아니하도다. 영웅의 끼친 역사는 슬픔과 기꺼움의 종자요 박사의 발명한 물건은 욕심과 희망의 자취라.
그러한즉 사람은 욕심과 희망으로 살고 슬픔과 기꺼움으로 소견(消遣)하는 것인가. 사람이 아들 낳기를 바라다가 아들을 낳으면 기꺼워하고 그 아들이 죽으면 슬퍼하리니, 아들 낳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며 희망이요 낳을 때에 기꺼워하고 죽을 때에 슬퍼함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역사(歷史)를 지음이요, 사람이 부자 되기를 원하다가 재물을 얻으면 기꺼워하고 그 재물을 잃으면 슬퍼하리니 부자 되기를 원함은 욕심이며 희망이요 얻을 때에 기꺼워하고 잃을 때에 슬퍼함은 또한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역사를 만듬이라. 크고 넓은 천지에서 내가 지금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고 이 곳에 있으며 가늘고 아득한 이치 속에서 내가 이왕에 나지도 아니하고 장래에 나지도 아니하고 불선불후(不先不後) 꼭 지금 요 때에 나서 입을 열어 기껍게 대소(大笑)할 때도 있고 주먹을 두드려 슬프게 통곡할 때도 있고, 지금은 먹을 갈고 붓을 들어 눈으로 보이는 세상 사람의 슬퍼하고 기꺼워하는 여러 가지 형편을 재료로 삼아 이 책을 기록하니 이것은 슬픈 중에 기꺼움을 얻고 기꺼운 중에 슬픔을 알아 한때를 소견하려는 나의 욕심이며 희망이니 이 책 보는 여러 군자는 나와 인연이 있도다. 여러 군자가 이 책을 볼 때에 기꺼워할는지 슬퍼할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여러 군자의 슬포함이 있고 기꺼워함이 있으면 또한 여러 군자가 세상에 지나가는 역사를 지음인즉 크고 넓은 천지와 가늘고 아득한 이치 속에서 여러 군자와 나의 사이에 한 가지 심령(心靈)이 교통함을 깨달으리로다.
‘기생’ - 절개 높은 기생 향운개
춘향은 남원 기생으로 일부종사하기 위하여 정절을 지키던 춘향전의 주인이요 춘운은… 구운몽이라 하는 책에 있는… 신선도 되었다가 귀신도 되었다가 만판 재주를 부려 양소유를 농락하던 계집이요 논개는 진주 기생으로 예전에 어느 나라 장수가 조선을 치러 왔을 때에 촉석루에서 놀음을 놀다가 그 장수를 껴안고 강물에 떨어져서 그 적장과 함께 죽은 충심 있는 계집이라 그러면 이 기생은 내력을 듣지 아니하면 알 수 없으나 절개와 재주와 충심을 겸전한 계집인가.
이번 공진회를 구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5~6년 전에 비해 조선이 크게 진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문명이 들어올 때 아름다운 풍속만이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치하는 풍속이 먼저 들어오느니, 하이칼라를 부러워하고 고운 의복에 맵시 내고 다니길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치의 풍속은 자기 위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눈에 아리땁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 풍속과 특히 관계 깊은 존재가 기생이라, 예로부터 기생의 화용월태(花容月態)에 말려들어 패가망신한 이들이 많았다.
경상도 진주는 기생으로 유명한 땅이다. 그 중에서도 기생 하나가 유독 유명하니, 얼굴이 절묘하고 행동이 얌전할 뿐 아니라 남자의 소원을 한번도 들어준 적이 없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기생은 산월이니 매월이니 도홍이니 하는 다른 기생들의 이름과 달리 이름부터 특이하다. 향운개(香雲介)라는 이름인데, 옛부터 유명했던 기생들, 춘향(春香)의 절개와 춘운(春雲)의 재주와 논개(論介)의 충성을 본받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 한다.
향운개의 이웃집에는 성이 강씨인 부인이 살았다. 스물 전에 과부가 되어 다만 유복자 아들 하나를 바라보고 사는 처지인데, 그 아들은 이름이 유만으로 향운개보다 두 살 위였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친해 장난도 같이하고 음식도 서로 나눠 먹으며 지냈는데, 향운개가 열한 살, 유만이가 열세 살 때 함께 드러누워 있다가 아이들 장난으로 남녀 교합(交合)하는 흉내를 낸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두 아이의 정은 더욱 깊어졌으나, 곧 더불어 있지 못할 까닭이 생기고야 말았다. 강씨 부인이 유만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방물장사를 하면서 유만을 공부시키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씨 부인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요, 향운개의 어머니인 퇴기(退妓) 추월이 포악을 부린 탓이었다.
추월은 향운개의 용모가 유달리 어여쁜 것을 보고 4~5년 후에는 큰 밑천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향운개와 유만 사이에 심상찮은 일이 있어 자기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을 염려가 되었다. 강씨 부인은 살림이 어려워 추월의 집 빨래며 침선 등을 맡아하면서 생계를 잇던 처지였는데, 당장 생활할 방책이 끊어진데다 모진 수모까지 당하고 나서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유만이는 착실하게 공부에 힘써 주었다.
세월이 흘러 향운개는 열다섯살이 됐다. 세상에는 사치하는 풍속이 날로 늘어 사람마다 비단옷이 아니면 입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그 와중에 진주에 김부자라는 독특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수백 만원 재산을 갖고도 극히 검소하여 비단옷이라고는 걸쳐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부자 집은 여러 대 내려오는 부자지만 자손이 귀해 일가친척 하나 없고, 김부자 자신에게도 두 살 먹은 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 어머니와 부인은 항상 첩이라도 얻어 자손을 두라고 권고했지만, 김부자는 첩 두고 사치하는 것은 패가(敗家)의 근본이라 하여 들은 척도 않고 지내는 처지였다. 그러나 우연히 논개 제삿날 향운개를 본 이후, 김부자는 온통 마음을 빼앗겨 향운개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게 됐다. 비단옷을 입고 보석반지를 끼고 금시계를 사 들이고는, 매일 향운개 집에 드나들며 술자리로 밤을 지냈다. 그래도 향운개의 마음은 조금도 동하지 않지만, 어머니 추월은 어느새 향운개를 기생 명단에서 빼 내고 김부자에게 첩으로 보낼 언약을 했다. 향운개가 서울로 간 유만을 생각하느라 냉정한 태도를 고집한다 하여, 김부자와 짜고 유만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처지가 된 향운개는 김부자 집으로 갔다. 그리고 김부자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유만을 남편으로 여기던 터이니 석 달만 그를 위해 상(喪)을 치르고 몸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김부자가 승낙하자 향운개는 조용히 지내면서 김부자 집 형편을 살폈다.
김부자 집에는 일찍이 과부가 된 스물 다섯 살 먹은 부인이 침모로 일하고 있었다. 성은 김씨이고, 얼굴이 어여쁘지는 않으나 사람이 단정하고 침선과 각종 범절이 능란한 이였다. 향운개는 김씨 부인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씨 부인이 본래 첩으로 들어왔다가 김부자가 첩은 두지 않겠다는 통에 침모로 머물러 있는 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향운개는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며칠 후, 김부자 아버지의 제삿날, 제사를 마치고 상을 치우려는데 대문 밖에 어떤 노인이 와서 급히 김부자를 찾았다. 노인은 조금 전에 김부자 아버지의 혼령을 만났다면서, 제상 위에 놓여 있었다는 밤과 대추를 증거물로 내놓았다. 김부자가 살펴보니 분명 제상의 밤 접시, 대추 접시에서 빼낸 것이다. 그리고 접시 아래에는 흰 종이가 한 장씩 놓여 있는데, 읽어 보니 “김가 성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면 대대 영광이 문호를 빛내리라”는 말과 “향운개는 전생에 너와 동복(同腹)이니 취하면 앙화 있으리라”는 말이 쓰여 있다.
먹으로 쓴 것도 붓으로 쓴 것도 아닌 글씨가, 아무리 보아도 세상 사람 솜씨 같지는 않다.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김부자는 아버지 혼령이 했다는 명령에 그대로 따랐다. 향운개에게는 잘못을 사과한 후 경찰서에 가서 신고서를 빼고, 향운개가 권고하는 대로 침모 김씨 부인을 첩으로 맞았다. 향운개는 당장 급한 위기를 벗어났으나,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염려하여 멀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 고생 끝에 적십자사 병원 간호부가 됐다.
이 때는 마침 유럽에 큰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상대로 싸우던 때라,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 역시 전쟁에 참여했다. 적십자사 병원 역시 전쟁터 청도(靑島)에 설치되어 향운개는 청도로 향하게 됐다. 향운개가 못 잊어하는 유만 역시 우여곡절 끝에 청도로 왔다. 유만은 학교 졸업하기 얼마 전, 어머니 강씨 부인이 병이 나 학비를 대지 못할 처지가 되자 교장의 호의로 학비를 면제받는 한편 식사․의복 등은 교장의 친구인 이등 대좌에게서 지원을 받기로 했었다.
이등 대좌는 유만을 자기 집에 두고 본즉 대단히 성실한 청년이라, 학교 졸업 후에도 유만을 곁에 두고 심복(心服)으로 삼았다. 이 이등 대좌가 동경 참모본부로 갔다가 청도 사령관으로 온 까닭에 유만 역시 그를 따라 통역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청도 적십자사 병원에서 향운개의 칭송은 대단했다. 이미 5년을 일본에 있었으니 일본어와 사무에는 극히 능숙한데다 부상병을 간호하는 데 제일 친절했기 때문이었다. 향운개 손길만 닿으면 다친 데가 낳는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전쟁 막바지의 어느 날, 사령부 근처에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병원으로 실려 온 부상자 중에는 최유만이라는 조선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향운개와 유만은 다시 만나게 됐다. 이번 공진회에서, 구경 차 올라온 진주 기생들이 떠들썩하게 반가와하던 사람이 바로 향운개요, 최유만이며 강씨 부인이라 했다.
‘인력거군’ - 근면과 정직으로 쌓은 부
“여보시오 술집이 무슨 원수요. 당신이 오늘 나와 약조를 합시다. 우리가 일생을 이대로 지낸단 말이오… 아까 집주인이 방 내놓고 어디로 나가라고 사설하던 일과 일수 놓는 오생원이 돈 내라고 구박하던 일과 쌀가게에서 외상쌀값 스무 냥 내라고 욕설하던 일을 생각하면 저녁거리가 있은들 밥이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간단 말이오. 당신이 내 말을 들으시지 못할 것 같으면 나는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에 자결하여 죽겠소.”
해 지는 겨울날, 어느 집 행랑채에서 노동자의 아내가 수심에 잠겨 있다. 그 남편은 김서방이라고 지게꾼 노릇도 하고 심부름도 하여 겨우겨우 연명해 가는 처지인데,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수십 잔을 먹어야 겨우 갈증을 축인다는 위인이다. 김서방 아내는 여러 차례 도망갈 생각까지 먹었지만, 김서방이 본래 바탕은 상스럽지 않은 것을 믿는 까닭에 지금도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집에는 양식도 없고 땔감도 없다. 이윽고 김서방이 들어오지만, 염려하던 대로 술에 듬뿍 취한 채이고, 양식과 땔감을 걱정하는 아내는 아랑곳없이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 아내가 저녁도 굶고 있었던 것을 깨닫자, 김서방은 “아―내가 잘못하였지. 그 놈의 술집이 원수야.” 라며 한탄했다.
아내는 말을 그치고 엄숙한 모습으로 김서방을 바라봤다. 김서방은 잠시 망설이다가, 술을 끊고 근면하게 일해 볼 것을 약속했다. 날이 밝자 김서방 아내는 머리에 꽂은 귀이개를 뽑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조금 얻어서 쌀을 사 밥을 짓고, 김서방은 인력거를 세 얻으러 나갔다. 술집 앞을 지나가면 억지로 고개를 돌리며, 술 냄새가 풍기자 “아이고 비상 냄새야”라며 도망치기도 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인력거 한 채를 세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부터 영업을 시작할 생각으로, 전날 밤 눈을 붙이지 못한 김서방 내외가 둘 다 잠에 빠져 들었는데, 이윽고 종현 성당에서 종 치는 소리가 났다. 김서방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일하러 나가라고 김서방을 깨웠다.
밖은 바람 불고 추운데다 지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김서방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손님을 기다리다가, 잠을 깨기 위해 옆 언덕으로 올라가 차가운 눈을 주워서 얼굴을 비볐다. 집에서는 아내가 새벽이 아니라 초저녁인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김서방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눈 속에서 돈 보자기를 주웠다는 것이다. 함께 세어보니 모두 4천 32원 50전이다.
김서방은 그 돈이면 아내도 호강하고 자기는 술을 즐기며 넉넉히 살 수 있으리라 하고, 돈 잃은 사람을 걱정하는 아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술에 취해 돌아왔다. 실컷 자고 일어나서 아내에게 돈 이야기를 물으니, 아내는 어이없어하면서 꿈을 꾼 모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