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숙
채만식 지음 | -
치숙
채만식 지음
▣
저 자 채만식(1902~1950)
식민지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 풍자소설가.
남달리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
채만식은 작고하기 두어 달 전에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 장영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장군,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한 2십 권만 보내 주소.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는 않소.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떤 예감을 느낀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맡에다 원고용지를 많이 놓아 보고 싶은 걸세.”
채만식은 성장기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경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그의 작품엔 늘 빈곤에 허덕이는 인텔리상, 미두로 몰락하는 지주의 모습, 그리고 도시 및 농촌 빈민상의 모습이 나온다. 이는 모두 그의 체험의 소산이다. 또 채만식은 결벽증적인 까다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성격 탓으로 친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무영, 장영창, 신석정 정도가 그와 친분을 지니고 있었다.
이무영의 회고에 따르면, 채만식은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될 때는 식탁에 놓인 수저를 가지고 다녔던 휴지로 닦을 정도였으며, 불의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그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런 일에 눈을 감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은 것이 낫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구두점’ 하나를 찍는 데도 신경을 쓴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은 후배에게 참고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문학을 하되 나처럼 해서는 못쓴다.”고 후배들에게 이르기도 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고
백릉 채만식은 1902년 6월 17일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동상 마을에서 아버지 채규섭과 어머니 조우섭 사이의 6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었던 지주였으며 막내아들인 그를 특히 사랑했다.
채만식은 임피 보통국민학교를 거쳐, 1918년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1922년 졸업한 그는 곧바로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여 문학수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부친과 형이 성급히 토지를 매각하거나 미두(일종의 투기 거래)에서 크게 실패하여 가세는 급속히 기울어지고, 그 바람에 채만식은 학업을 중도에서 그만두어야 했다. 상심한 채로 귀국한 그는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좌절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채만식은 1920년(중앙고보 재학 시)에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은선흥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마침 집안은 집달리와 경매꾼들이 차압했던 세가들을 실어가는 참담한 지경을 당한 데다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됐다. 훗날 그는 결국 은선흥과 이혼하고 신여성인 김씨영과 동거했다. 조혼한 지식인이 구여성인 아내를 멀리하고 신여성을 새로 맞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은 이후 그의 몇몇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세 명의 동경 유학생이 결혼 문제로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그의 처녀작으로 알려진 중편소설 「과도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1923년에 창작되었다. 이어 채만식은 「세 길로」,「불효자식」,「산적」과 같은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고, 1925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그러나 1년여만에 「동아일보」를 사직한 그는 약 3년간 실직 상태에 들어간다. 지식인 실업자를 소재로 삼고 있는 「레디메이드 인생」, 「명일」등은 모두 이때의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씌어졌다. 집안의 몰락이나 첫 결혼의 실패, 그리고 실직 생활과 같은 뼈저린 경험은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성격을 지닌 채만식으로 하여금 냉소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했다.
실직 기간 중에 그는 희곡 작품을 발표했는데 최초의 희곡인「가죽버선」은 1927년에 탈고했으며, 이후에도 30편이 넘는 희곡과 시나리오 및 방송극 등을 발표했다. 채만식은 희곡 창작과 소설 창작을 병행한 드문 예에 속하는 작가이다.
1930년에 다시「개벽」잡지사에 입사하게 되지만, 일제 강점시대 대부분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여러 신문 잡지사의 기자로 전전하다가 1936년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창작 생활에 전념했다. 해방 직전 낙향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가 다시 낙향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6월 11일에 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야유와 조롱이 압권인 풍자문학의 대가
채만식 문학의 핵심이며 일관되게 추구되어 온 제재는 민족과 사회, 역사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자기 시대의 충실한 증인으로서, 당대의 중대한 문제들을 통찰함으로써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본 현실은 부정적인 현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작품에 나타난 부정의 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채만식 문학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부정의 양상이라 하면, 곧 부정하는 대상과 그 대상을 어떻게 부정하느냐의 기법의 문제다. 채만식은 바로 ‘풍자’를 통해 대상을 부정하고 있다.
채만식은 흔히 ‘풍자의 대가’로 불린다. 그는 일제의 검열이 날로 가혹해지는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풍자 기법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풍자’란 인간과 사회의 악덕, 부조리를 고발 폭로하는, 그리고 이들을 과장하거나 희화화함으로써 야유, 조롱, 비난, 공격하는 기법을 말한다. 채만식 소설에 있어서 풍자의 대상은 명백한 ‘사회 모순’과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긍․부정의 인물에 대해 작가의 감정을 명확하게 채색하는데, 부정적인 현실과 인물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난과 조롱을 가하고 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채만식의 풍자는 직접적이고 공격적이다.
풍자와 반어(irony)를 주조로 삼는 그의 문학에서, 또 하나 독특한 것은 바로 문체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근대 소설은 묘사를 주축으로 형성되어 왔다. 근대 소설의 기반은 다름 아닌 묘사(보여주기, showing)이다. ‘염상섭’에서 ‘박태원’에 이르는 한국의 사실주의 문학이 이러하다. 그런데 채만식의 문학세계는 묘사보다는 오히려 서술(이야기하기telling)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는 스스로 개입하고 설화자(narrator)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이야기하기’의 힘과 효과를 한껏 살리고자 했다. 즉 설화자의 이야기 행위가 강력하게 표출되어 이야기하는 내용의 전달력을 높이고 풍자를 강화, 심화시켰다.
이 외에도 전통적 장르와 패러디의 사용, 가령 ‘고대소설의 설화체’라든가, ‘판소리의 구연 방식’을 채용하고 ‘구어나 방언’, 또 ‘인물간 빈번한 대화’의 활용 등 여러 문체 요인과 기법들이 풍자․반어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
Short Summary아저씨는 일본에 가서 대학에도 다녔고 나이가 서른 셋이나 되지만, ‘나’가 보기에는 도무지 철이 들지 않아서 딱하기만 하다. 착한 아주머니를 친가로 쫓아 보내고 대학입네 하고 다니다가 신교육을 받았다는 여자와 살림을 차린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잡혀 가 5년만에 풀려난 아저씨는 감옥에서 악화된 폐병 때문에 목숨이 아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다.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식모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번 돈 100원을 아저씨의 치료비에 아낌없이 쓰고 무려 3년 동안이나 아저씨의 병 간호에 지극한 정성을 쏟는다. 이러한 아주머니의 정성 때문에 아저씨의 병은 조금씩 차도를 보이지만, 정작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면 또 사회주의 운동을 하겠다고 말하는데…….치숙
채만식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 보통 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인 밑에서 사환으로 있는 소년. 일제에 의한 식민지 상황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기꺼이 일제에 동화되어 가겠다는 인물이다.
아저씨: 대학을 나온 뒤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고 이제는 병이 들어서 폐인이 되다시피한 지식인이다.
‘사회주의’ 하다가 폐병으로 앓아 누운 오촌고모부 아저씨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키,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머, 말두 마시요.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내 원! 신세 간데없지요. 자, 십 년 적공, 대학교까지 공부한 것 풀어먹지도 못했지요. 좋은 청춘 어영부영 다 보냈지요. 신분에는 전과자라는 붉은 도장 찍혔지요. 몸에는 몹쓸 병까지 들었지요. 이 신세를 해가지골랑은 굴속 같은 오두막집 단간 셋방 구석에서 사시장철 밤이나 낮이나 눈 따악 감고 드러누웠군요. 재산이 어디 집터전인들 있을 턱이 있나요. 서발막대 내저어야 짚검불 하나 걸리는 것 없는 철빈인데.
우리 아주머니가, 그래도 그 아주머니가, 어질고 얌전해서 그 알량한 남편 양반 받드느라 삯바느질이야 남의 집 품빨래야 화장품 장사야 그 칙살스런 벌이를 해다가 겨우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지요. 어디루 대나 그 양반은 죽는 게 두루 좋은 일인데 죽지도 아니해요.
아주머니와 나의 고생담과 아저씨가 하는 몹쓸 사회주의
우리 아주머니가 불쌍해요. 아, 진작 한 나이라도 젊어서 팔자를 고치는 게 아니라, 무슨 놈의 우난 후분을 바라고 있다가 끝끝내 고생을 하는지. 근 이십 년 소박을 당했지요. 이십 년을 설운 청춘 한숨으로 보내고서 다 늦게야 송장 여대치게 생긴 그 양반을 그래도 남편이라고 모셔다가는 병수발 들랴 먹고 살랴, 애자진하고 다니는 걸 보면 참말 가엾어요.
그게 무슨 죄다짐이람? 팔자, 팔자 하지만 왜 팔자를 고치지를 못하고서 그래요. 우리 죄선(朝鮮) 구식 부인네들은 다 문명을 못하고 깨지를 못해서 그러지. 그 양반이 한시 바삐 죽기나 했으면 우리 아주머니는 차라리 신세 편하리다.심덕 좋겠다 솜씨 얌전하겠다 하니, 어디 가선들 제가 일신 몸 가누고 편안히 못 지내요?
가만있자, 열여섯 살에 아저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으니깐, 그게 내가 세 살 적이니 꼬박 열여덟 해로군. 열여덟 해면 이십 년 아니요. 그때 우리 아저씨 양반은 나이 어리기도 했지만, 공부를 한답시고 서울로 동경으로 십여 년이나 돌아다녔고, 조금 자라서 색시 재미를 알만하니까는 누가 이쁘달까 봐 이혼하자고 아주머니를 친정으로 쫓고는 통히 불고를 하고…….
공부를 다 마치고 오더니만, 그 담에는 그놈의 짓에 들입다 발광해 다니면서 명색 학생 출신이라는 딴 여편네를 얻어 살았지요. 그 여편네는 나도 몇 번 보았지만 쌍판대기라고 별반 출 수도 없이 생겼습디다. 그 인물로 남의 첩이야? 일색소박은 있어도 박색소박은 없다더니, 사실 소박맞은 우리 아주머니가 그 여편네게다 대면 월등 이뻤다우.
그래 그 뒤에, 그 양반은 필경 붙들려 가서 오 년이나 전중이를 살았지요. 그 동안에 아주머니는 시집이고 친정이고 모두 폭 망해서 의지가지 없이 됐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자칫하면 굶어죽을 판인데. 할 수 없이 얻어먹고 살기도 해야 하려니와 또 아저씨 나오는 것도 기다려야 한다고 나를 반연삼아 서울로 올라왔더군요. 그게 그러니까 아저씨가 나오던 그 전해로군. 그때 내가 나이는 어려도 두루 납뛴 보람이 있어서 이내 구라다상네 식모로 들어갔지요.
그 무렵에 참 내가 아주머니더러 여러 번 권면을 했지요. 그러지 말고 개가(改嫁)를 가라고. 글쎄 어린 소견에도 보기에 퍽 딱하고 민망합디다. 계제에 마침 또 좋은 자리가 있었고요. 미네상이라고 미쓰꼬시 앞에서 바나나 다다끼우리(투매:投賣)를 하는 인데 사람이 퍽 좋아요. 우리집 다이쇼(主人)도 잘 알고 하는데, 그이가 늘 나더러 죄선 오깜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중매 서달라고 그래쌌어요. 돈은 모아둔 게 없어도 다 벌어먹고 살 만하니까 그런 사람 만나서 살면 아주머니도 신세 편할 게 아니라구요.
그런 걸 글쎄 몇 번 말해도 흉한 소리 말라고 듣질 않는 걸 어떡하나요. 아무튼 그런 것 말고라도 참, 흰말이 아니라 이날 이때까지 내가 그 아주머니 뒤도 많이 보아 주었다우. 또 나도 그럴 만한 은공이 없잖아 있구요.
내가 일곱 살에 부모를 잃었지요. 그러고 나서 의탁할 곳이 없게 됐는데 그때 마침 소박을 맞고 친정살이를 하는 그 아주머니가 나를 데려다가 길러 주었지요. 그때만 해도 그 집이 그다지 군색하게 지내진 않았으니깐요. 아주머니도 아주머니지만 증조할머니며 할아버지도 슬하에 자손이 없어서 나를 퍽 귀애하겠지요.
열두 살까지 그 집에서 자랐군요. 사 년이나마 보통학교도 다녔고. 아마 모르면 몰라도 그 집안이 그렇게 치패하지만 않았으면 나도 그냥 붙어 있어서 시방쯤은 전문학교까지는 다녔으리다. 이런 은공이 있으니까 나도 그걸 저버리지 않고 그래서 내 깜냥에는 갚을 만큼 갚노라고 갚은 셈이지요. 하기야 요새도 간혹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양식 없다는 사정을 더러 하곤 하는데 실토정 말이지 좀 성가시기는 해요.
그러는 족족 그 수응을 하자면 내 일을 못하겠는걸. 그래 대개 잘라 떼기는 하지요. 그렇지만 그 밖에, 가령 양명절 때면 고깃근이라도 사보낸다든지, 또 오며가며 들러서 이야기낱이라도 한다든지, 그런 건 결단코 범연히 하진 않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아주머니는 꼬박 일년 동안 구라다상네 집 오마니로 있으면서 월급 오 원씩 받는 걸 그대로 고스란히 저금을 하고, 또 틈틈이 삯바느질을 맡아다가 조금씩 벌어 보태고, 또 나올 무렵에 구라다상네 양주가 퍽 기특하다고 돈 칠 원을 상급(賞給)으로 주고, 그런게 이럭저럭 돈 백원이나 존존히 됐지요.
그 돈으로 방 한 칸 얻고 살림 나부랭이도 조금 장만하고 그래 놓고서 마침 그 알량꼴량한 서방님이 놓여나오니까 그리로 모셔들였지요. 놓여 나오는 날 나도 가서 보았지만, 가막소 문 앞에 막 나서자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눈물이 핑 - 돌던데요. 전에 그렇게도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좋아하던 첩년은 꼴도 안 뵈구요. 남의 첩년이란 건 다 그런 거지요 뭐.
우리 아저씨 양반은 혹시 그 여편네가 오지 않았나 하고 사방을 휘휘 둘러보던데요. 속이 그렇게 없다니까. 여편네는커녕 아주머니하구 나하구 그 외는 어리친 개새끼 한 마리 없더라. 그래 막 자동차에 올라타려다가 피를 토했지요. 나중에 들었지만 가막소 안에서 달포 전부터 토혈을 했다나 봐요. 그래 다 죽어 가는 반송장을 업어 오다시피 해다가 늬어 놓고, 그날부터 아주머니는 불철주야로, 할 짓 못할 짓 다 해가면서 부스대고 납 뛴 덕에 병도 차차로 차도가 있고, 그러더니 이제는 완구히 살아는 났지요. 뭐 참 시방은 용 꼴인걸요, 용 꼴.
부인네 정성이 무서운 겝디다. 꼬박 삼 년이군. 나 같으면 돌아가신 부모가 살아오신대도 그 짓 못해요. 자, 그러니 말이지요, 우리 아저씨라는 양반이 작히나 양심이 있고 다 그럴 양이면, 어허, 내가 어서 바삐 몸이 충실해져서, 어서 바삐 돈을 벌어다가 저 안내를 편안히 거느리고 이 은공과 전날의 죄를 갚아야 하겠구나…… 이런 맘을 먹어야 할 게 아니냐구요?
아주머니의 은공을 갚자면 발에 흙이 묻을세라 업고 다녀도 참 못다 갚지요. 그러고 저러고 간에 자기도 이제는 속차려야지요. 하기야 속을 차려서 무얼 하재도 전과자니까 관리나 또 회사 같은 데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그야 자기가 저지른 일인 걸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고, 그러니 막 벗어붙치고 노동이라도 해야지요. 대학교 출신이 막벌이 노동이란 게 꼴 가관이지만 그래도 할 수 없지, 뭐.그런 걸 보고 가만히 나를 생각하면, 만약 우리 종조할아버지네 집안이 그렇게 치패를 안 해서 나도 전문학교를 졸업을 했으면, 혹시 우리 아저씨 모양이 됐을지도 모를 테니 차라리 공부 많이 않고서 이 길로 들어선 게 다행이다 ……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 아저씨 양반은 대학교까지 졸업하고도 이제는 기껏 해먹을 거란 막벌이 노동밖에 없는데, 보통학교 사 년 겨우 다니고서도 시방 앞길이 환히 트인 내게다 대면 고쓰카이(小使 :소사)만도 못하지요. 아, 그런데 글쎄 막벌이 노동을 하고 어쩌고 하기는커녕 조금 바시시 살아날 만하니까 이 주책꾸러기 양반이 무슨 맘보를 먹는고 하니, 내 참 기가 막혀! 아니, 그놈의 것하구는 무슨 대천지 원수가 졌단 말인지, 어쨌다고 그걸 끝끝내 하지 못해서 그 발광인고? 그러나마 그게 밥이 생기는 노릇이란 말인지? 명예를 얻는 노릇이란 말인지. 필경은 붙잡혀 가서 징역 사는 노름?